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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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상류층 귀족의 야회에 참여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야회 공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따라 서로의 관계가 암시되기도 하고, 사교적 기술을 알고 얼마나 잘 처신하는가에 따라 각 인물들의 사회적 배경과 성격이 드러나기도 한다. 안나 파블로브나의 야회에서 우아한 옐렌과 피예르, 안드레이 공작은 파도가 치며 수면 위로 밀려오듯이 거대한 서사적 흐름 속에서 각각의 인물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톨스토이의 위대한 점은 웅장하고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각 인물들이 힘을 잃지 않고 끝까지 개인들의 이야기의 주인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는 작가 후기에서 '역사가에게는 어떤 인물이 어떤 목적을 위해 얼마나 기여했는가라는 의미에서 영웅이 존재하지만, 예술가에게는 그 인물이 생활의 모든 측면과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영웅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해서도 안 되며 오직 인간만이 존재해야 한다.'(『전쟁과 평화 4권』, 539p)라고 밝혔다. 역사적 배경을 다루되 소설적 구조를 형성하기 위해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뒤섞어 마치 잘 짜여진 또 하나의 세계를 축조해낸 그는 예술가로서의 목표를 한 번 더 되새기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톨스토이가 그 목표를 이루었음에 동의하고 이 작품을 감동적으로 받아들였듯이 나또한 이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역사적 사실과 개별적인 인물상 모두가 너무나 인상적으로 다가와서 무척 감명깊게 읽어낼 수 있었다.

 사교계를 드나드는 부인과 그 밖의 자신을 옭아매는 여러 일상적이고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해 안드레이 공작은 환멸을 느낀다. 그래서 전쟁으로 떠나 오직 명예만을 추구하며 자신이 또 한 명의 나폴레옹이 되기를 갈망했지만, 전쟁을 겪어내는 과정에서 전쟁의 폭력성과 무의미성을 확인하고 개인적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안드레이 공작이 생각하는 궤적을 따라가면서 남들보다 뽐낼 수 있는 무엇이 되고 싶은 그 영웅적 심리를 자아도취적인 유아적 사고로만 여겨 비난할 수는 없었다. 안드레이 공작이 속한 계층적 배경에 의해 그는 마땅히 명예를 무척이나 중시하는 인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누구나 한 번쯤 평범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특별한 나를 꿈꾸게 된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업무적으로 뛰어나거나 또는 좋은 학벌 등으로 타인들 앞에 서는 것은 화려하게 차려입고 꾸미는 것 이상의 만족감을 부여해준다. 일상적인 평범함 속에서 잠재되어 있었던 나의 탁월한 비범함이 순간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짜릿한 즐거움을 주고 그 순간을 공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몰입과 집중을 이끌어낸다. 나폴레옹이 첫 승전한 장소처럼 안드레이 공작도 자신이 참전한 전쟁에서 영웅이 되기를 바랐지만 일순 적의 공격으로 신체적 한계에 매몰된 채 쓰러진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과 움직일 수 없는 신체에 갇힌 그는 죽음의 순간을 생각한다. 그때 안드레이 공작에게 비쳐진 하늘의 모습을 읽으면서 잔뜩 부풀었던 명예욕, 성취욕이 사그라들며 무의미한 것에 소중한 생애를 모두 바치는 듯한 허무함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꼈다. 그는 결국 살았지만 전쟁에 참여하기 이전과는 다른 삶의 방향을 따라가게 된다.

 안드레이 공작이 전쟁에 참전하고, 전쟁의 아픔을 겪어내면서 깨닫고 새롭게 추구하게 된 일상적 가치들은 안드레이 공작의 개별적인 성격 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전쟁을 치러내는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대왕 같은 지도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만약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대왕의 결정도 거대한 사회적 흐름의 일부로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지도자들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도록 형성된 것이라면? 그 모두를 가능하게 한 거대한 사회적 흐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개인, 그리고 더 큰 개인, 그리고 그 개인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 흐름이나 권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작가는 또 묻고 되새기며 자신의 작품 속에서 답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뒤늦게 안드레이 공작은 가정적이고 일상적인 즐거움을 찾았지만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몸집이 작은 공작부인이 죽는다. 그녀를 죽게 만들었던 '임신'과 '출산', 그 죄책감으로 안드레이 공작은 일상을 흘려보내며 여동생 마리야와 아버지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 나타샤 로스토프, 생기발랄하고 아름다운 그녀에게서 진실한 사랑을 느낀 안드레이 공작은 나타샤와의 약혼을 약속하지만 1년의 기약을 두며 언제든지 나타샤가 파혼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나타샤와 안드레이 공작의 관계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던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묘사하며 그 둘 사이 관계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나타샤 본인에게도 생생한 젊음의 시기를 그저 흘려보내는 것 같아 초조하고 안달한다. 특히 나타샤의 마음은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어서 마치 오늘날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여대생의 내면을 그대로 훑어내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1년의 시기를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보내야 하다니, 나타샤는 그(안드레이 공작)를 사랑함으로써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신을 느끼고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좌절한다.

 안드레이 공작은 물리적으로도 먼 거리에 있었고 물리적인 거리는 마치 심리적인 거리처럼 멀어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타샤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말라간다. 그러던 중 그녀에게 나타난 잘생기고 치명적인 아나톨 쿠라긴이 접근한다. 아나톨에게 나타샤는 속절없이 매혹된다. 막장 드라마처럼, 끊어낼 수 없는 중독처럼 주변인들의 갈등과 치열한 나타샤의 내적 갈등은 너무나 잘 짜여 있고 읽는 이를 빠져들게 했다. 잠시 책을 덮고 이 철없는 아가씨에 대한 애도하는 마음을 품어보기도 하며 나는 계속해서 다음 장으로 페이지를 넘길 수 밖에 없었다.

 4권에 걸쳐 다양한 인물들의 삶의 총체와 그들의 삶 속에서 묻고 있는 질문들, 그리고 그 질문에 얽혀 있는 사회적인 배경 등의 모든 것들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그 밖에 피예르의 삶, 마리야, 니콜라이 로스토프와 소냐, 바실리 공작과 베주호프 백작, 보리스와 드루베츠카야 부인 등 여러 가문의 이야기가 드러나고 펼쳐졌다. 그들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전쟁 중이던 프랑스의 사령관 나폴레옹, 프랑스 군인들, 그리고 전쟁을 치르는 평민들의 생각과 입장까지 반영되었다. 만만치 않은 분량이었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들이 그 이야기 속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와 살아가는 시대가 다르고 공간적인 위치마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유사한 상황 속에서 비슷하게 느끼는 감정들이 보편적인 인류 공통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필로그 1부에서는 지난한 갈등 속에서 그들이 내린 결정 이후의 소소하고 일상적인 삶을 보여주었다. 강렬하고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했던 것들이 잔잔하게 가라앉아 분명한 삶의 형태로 안정적으로 자리잡혀 있었다. 드라마가 끝나고 10년 후의 일상을 보는 것처럼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감정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 다시 에필로그 2부가 되니 이 이야기를 통해 톨스토이가 실험하고자 했던 명제에 대해 사고할 수 있도록 이끄는 물음들이 이어졌다. 다른 소설들과는 다른 이 작품의 차별적인 완전함과 톨스토이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톨스토이가 묻고자 했던 물음에 대한 나만의 결론은 아직 형성되지 못했음을 느꼈다. 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고 각각의 인물들의 생각을 따라가며 행간 속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찾아보아야겠고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다른 문학 작품을 읽어보면서 다른 작가들은 톨스토이의 물음에 대해 어떤 답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확인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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