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 푸어 - 비싼 집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김재영 지음 / 더팩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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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애인, 우리는 비싼 집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되지 말자."
"응!"

결혼을 하기로 결심하면서 우리가 서로 합의한 인생관 중 하나는 '하우스 푸어'가 되지 말자는 것이었다. 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면 인생의 목표가 '조금 더 큰집으로 넓혀가는 것' 또는 '내 집을 갖는 것'이 되고 마는 걸까. 그것이 한 가정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겠지만 적어도 나와 애인은 '집을 소유한다는 것'이 우리들의 행복을 보장하는 전부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혹자는 2년에 한번씩 그 징글징글한 이사를 수없이 다녀봐야 집 없는 설움을 알 거라는 둥, 자식들한테 물려줄 것은 부동산밖에 없다는 둥, 월급만 모아서는 집값이 올라서 생기는 차익만큼의 돈은 꿈도 못 꾼다는 둥 '겁'을 주곤 했지만 애초에 나는 인생의 목표가 '부'나 '자식새끼에게 물려줄 재산 증식' 따위가 아니었으니 상관 없다.

2년에 한번씩 이사를 다닌다면 물론 불편하겠지만 그건 그저 '불편할 뿐'이다. 죽기 전에 자식에게 뭐 대단한 유산을 물려줄 생각은 없으므로 그것도 해당 사항 없다. 월급 착실히 모아서 집 살 돈이 생긴다면 살 수도 있겠지만, 무리해서 융자를 끼고 집을 사놓고 집값이 오르기를 고대하며 전전긍긍하다가 집값이 떨어져서 절망하거나 대출 이자에 짓눌리며 마이너스 인생을 살 생각도 없다. 인생의 목표가 '돈'이나 '부'가 되는 불행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그리하여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인생의 절반을 허비하고, 너무 많이 가져서 그것을 잃을까봐 조마조마하며 나머지 인생의 절반을 허비하는 생을 살고 싶지는 앖다.

딱, 그 생각만 버리면 될 텐데. 딱 그 생각만 버리면 수억의 빚을 지고 무리해서 집을 사고, 재개발에 따른 시세차익을 노리며 한 달에 수백 만원의 이자를 내면서 허송세월을 하다가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거래가 줄어들면서 집값이 떨어지고 손해를 보면서 그제서야 집을 팔고 싶어도 사겠다는 사람도 없고, 가격은 밑도 끝도 없이 떨어지고, 한달에 수백씩 이자는 줄줄이 빠져나가서 당장 먹고 살 돈도 없어지는, 그런 피폐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을 텐데.내가 어디에 사는 게 나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 허리가 휘어가면서 굳이 강남의 부촌에 집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좌절하지는 않을 텐데.

<하우스 푸어>를 읽으면서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인생의 명제를 바꾸면 미친듯이 증식하는 대한민국 하우스 푸어의 양산을 막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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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논증법 -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4가지 실전 논리
최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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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좀 해볼까? 하고 시계를 보면 5시다. 이쯤되면 야근은 당연지사. 야식은 뭘 시켜먹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중국집 전화번호를 누른다. 짜장면과 기타등등이 사무실로 도착하면 법인카드를 긁고 음식을 풀어놓고 짭짭 먹으면 된다. 문제는 내가 깜빡하고 카드로 계산한다는 얘길 빠트렸다는 거다. 배달원은 왜 미리 말하지 않았냐며 그야말로 "개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현금으로 결제했을 시 비용 처리 문제를 고민하며 쩔쩔매고 있는데 배달원은 니네가 말 안 해놓고 왜 나한테 지랄이냐며 또 "개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너한테 지랄하는 게 아니라 우리끼리 고민 중이니 릴렉스, 하고 진정을 시켜놓고 그릇을 찾으러 올 때 단말기를 가져와 결제를 하면 안 되냐고 했더니 배달원은 "왜 사람을 두 번 걸음 시키냐"며 또 "개짜증"을 냈다. 결국 암쏘쏘리x100을 외치며 이따 퇴근길에 들러 결제하고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배달원을 돌려보냈다. 

근데! 어째서 그릇 찾으러 올 때 결제하는 것이 두 번 걸음이지? 그릇은 어차피 찾으러 와야하잖아! 아니, 이 쟈식이!!! 하고 돌아봤으나 배달원은 이미 안녕안녕. 그때부터 급울분이 솟기 시작했다. 젠장! 아까 얘기했어야 했는데! 그릇 찾으러 올 때 결제하는 게 왜 두 번 걸음이냐고!!  

왜 돌아서고 나면 할 말이 생각나는 걸까. 이 사건은 물론 갑론을박의 논쟁은 아니었지만 왠지 멍청하게 당한 것만 같아서 급억울해졌다. 이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난다. 누군가와 싸우고 돌아서면 에잇 그 얘길 했으면 그놈 말문이 막혔을 텐데! 찍소리 못하고 누군가의 개짜증을 감수해내고 나면 에잇 이게 이렇게 된 거라고 얘기했어야 했는데!

<변호사 논증법>은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논쟁에서 이기라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실전 논리를 변호사들의 논리적 전략에서 찾아내는 책이다. 미쿡 법정 드라마를 보면 피터지는 말발로 서로의 논리를 반박하고 반박하고 반박하는 멋있는 변호사들이 잔뜩 등장하는데, 그걸 볼 때마다 입을 아- 아- 벌리고 어떻게 저런 틈새를 파고들지? 하고 감탄하곤 한다. (특히 <보스턴 리갈> 강추합니다 여러분 핫핫) 누군가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변호사들은 배심원 또는 재판관을 설득하기 위해 다양한 논리적 전략을 구사한다. 이런 변호사들의 기술을 나의 일상으로 가져온다면 어떨까?

'논리적인 언변' 또는 '논리적인 필력'은 여기저기 써먹을 데가 많다. 기업의 입사시험이나 그룹면접에도, 대학의 면접장에서도, 논술 시험을 치뤄야 할 때도, 마누라에게 용돈을 올려달라고 할 때도, 상사에게 자신의 기획을 결재받을 때도 탄탄하고 단단한 자기만의 논리를 갖추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변호사 논증법>은 현실 세계에서 활용 가능한 비법을 딱 4가지로 정리해서 알려준다는 게 매력적이다.

 
논리학이라는 게 수학 공식처럼 딱딱 떨어지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맥락 속에서 발휘되기 때문에 사실 어떤 비법을 전수받는다고 해도 그게 실전에서 제대로 작용된다는 것을 보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논증의 원칙을 모른다면 결국 또다시 돌아서고 나서야 이기는 방법이 생각나서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다. 저자는 "법을 모르는 어수룩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속거나 그 사람을 따라서 불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올바른 논증의 원칙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올바르지 않은 논증에도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논증의 원칙을 익히는 것은 본인이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하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상대의 논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논증의 기본은 상대의 주장과 논리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그 논리의 헛점을 꿰뚫는 데 있는 것이니 상대의 전술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기본 오브 기본.   


논증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대화의 스포츠'다. 분명한 룰이 있고, 페어플레이를 해야 하고,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그래서 논증은 아주 세련된 대화의 기술인 동시에 누구라도 참여하면 거기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절대 게임이다. 이것이 바로 논증의 힘이다. 


 대화의 스포츠라니, 뭐 이렇게 멋있는 말이 다 있나. 어려울 거 없다. 스포츠의 룰을 생각하고 페어플레이 하면 되는 거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우리가 진짜 변호사에게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자비심'이라고 주장하는 점이다. 싸움에서 헛발질을 하지 않으려면 상대를 합리적인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 사람의 주장을 가능한 한 가장 좋은 논증이 되도록 해석해야 한다는 것. 상대의 주장을 왜곡해 해석하면 엉뚱한 주장에 대한 반박을 하게 되므로 낸둥 헛발질만 할 수밖에. 

성경의 내용을 패러디해서 이 자비심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폭소가 터진다.  


너희가 만일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의 주장만 받아들인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비논리적인 사람들도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의 주장은 받아들인다. 그러나 너희는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 근거를 생각해보아라. 그러면 너희는 논리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논리복음 1장 1절| 


 상대방의 주장에 자비를 베풀어 최대한 합리적인 주장으로 해석하라. 이것이 변호사 논증법의 첫번째 원칙인 자비로운 해석의 원칙. 개인적으로 이게 제일 마음에 든다. 무엇이든 기본 자세가 가장 중요한 거니까. 나머지 3가지 원칙은 근거 제시, 입증의 책임, 논점 이탈 금지의 원칙인데 언뜻 보면 다 아는 내용이잖아! 할 수도 있지만 이걸 실전에서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를 조목조목 짚어주기 때문에 읽어갈수록 눈이 휘둥휘둥해진다. 

목차를 보면 이 책의 각이 대충 나온다. 솔직히 목차 보고 빵 터졌다. 아, 재치까지 있는 분이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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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위한 변론 - 우리가 잃어버린 종교의 참의미를 찾아서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준형 옮김, 오강남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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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는 밤거리 풍경 속에 붉은 네온사인 교회 십자가가 너무나 많이 보이는 나라다. 명동 한복판에서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로 외치고, 지하철에서 하루에 한 번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나 역시 기독교 신자이지만, 그런 풍경을 보며 선교가 아닌 '장사'를 떠올렸다. 게다가 최근의 '봉은사 땅밟기'라는 사태를 보며 저들이 믿고 있는 것이 기독교인지 어느 지방의 원시종교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든다. 살기가 힘든 만큼 마음을 둘 곳이 없어 그렇게 종교에 의지하는 게 아닌가 싶다. 단순히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고 믿는 단순한 사람이든, 그런 건 안 믿지만 '인맥을 만들기 위해' 교회에 나가는  돈 많고 야심 많은 사람이든 절대적인 존재에게 무언가를 빌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테니까.

이 책은 그렇듯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고, 마음을 가다듬고 싶은 사람들에게 본래 종교의 역할이 그런 것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다. 꾸준히 마음을 가꾸고 비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것. 불교든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가장 본질적인 종교의 기능은 '영성 수련'이었다는 것이다. 교회에 가 기도를 하거나 절에서 불공을 드리는 것도 현대인들이 관심을 가지는 명상이나 요가처럼 자기 수련을 하는 행위와 결국은 통한다는 이야기다.

요즘은 종교 간의 분쟁이 엄청나게 심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옛날보다 종교 간의 구분이 유연해지는 경향도 보이는 것 같다. 가령 사찰에서 진행되는 템플스테이에 기독교인들도 종종 참가하고, 기도할 때 오체투지를 활용하기도 한다는 것. 현대인들이 신앙이란 결국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점점 다가가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서구의 헬스클럽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달리 원래 요가는 유산소 운동이 아니라 본능적인 행동과 통상적인 사고방식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리는 훈련이었다. (...)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잠재우고 몇 시간 동안 어느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법도 익혔다. 이런 훈련을 꿋꿋이 해내다 보면 일상의 의식이 해체되면서 생각으로부터 ‘나’를 뽑아낼 수 있었다." 종교라는 것은 '행하는 것,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이런 구절에서 현대의 '말만 난무하는 신앙'과 대비되는 고대의 종교, 즉 '실천과 자기 수련'이라는 종교의 모습을 보여준다. 종교를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열린 마음과 사고를 위해 한 번 쯤 새겨들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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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 외로움에게 - 지구 위를 혼자 여행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 개정증보판
김남희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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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 믿을 수 없이 짧은 가을이, 믿을 수 없이 빠르게 지나가버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가을이 오려나싶어 들고나간 가을 자켓들은 중년의 아저씨가 하루 왼종일 서서 다림질을 하고 기계를 돌려도 하루에 몇 벌 작업하지 못하는 좁은 세탁소에서 3주 동안이나 무한대기하다가, 칼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즈음에야 내 옷장으로 걸어들어왔다. 그 사이, 겨울이 왔다.  

자전거는 꼼짝없이 방 안에 갇혔고 집집마다 보일러 연통에서 뽀얀 연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날이 선선해지면 꼭 바다를 보러 가자던 애인과의 약속도 가을 자켓이 세탁소에 감금된 3주 동안 사라져버렸다. 깜빡 자고 일어난 것처럼 짧은 가을이었지만, 몰아치는 일 속에 허우적거리던 우리에게 그건 또 지루한 여름만큼이나 길었다. 바람이 차게 불기 시작하니 몸은 자꾸 더 움츠러든다. 순간순간 움찔거리며 겉옷을 꼭꼭 겹쳐입고 둔한 움직임으로 반복적인 출퇴근을 반복하다보니 이러다 영영 집과 회사에만 갇혀버릴 것 같다.  

 고백하건대, 나는 여권이 없다. 그러니까, 지난 30년 동안 단 한번도 대한민국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 제주도도 아직 못가봤다. 마음은 이미 세계 일주를 하고도 남았겠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은 내게 '불안'을 의미했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이자, 고난이자, 공포이기도 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항상 뜨거웠지만 낯선 공간에 대한 두려움은 늘 그것을 압도했다.  

 

그래서 여행서들을 읽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대신 경험한 사람들의 입을 빌어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계를 만난다는 안도감. 그런 것. 여행기가 공간에 대한 감상이나 상념으로만 채워져있는 건 매력이 없다. 사람들이 길을 떠나는 것은 낯선 '공간'에 대한 탐닉이 아니라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지 않을까. 그 '세계'에는 당연하게도 언제나 '사람'이 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 사는 이야기는 의외성과 드라마를 동시에 안겨준다.  

'지구 위를 혼자 여행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라는 온화한 부제가 인상적이었던 <외로움이 외로움에게>는 그런 의미에서 책의 주인공은 여행이 아니라 사람과 삶이었다. 사람이기에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외로움과 여행자의 고독한 여정을 찬찬히 쓰다듬는 저자의 문장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다 가슴이 먹먹해져 혼자 가슴을 꽝꽝 두드렸다.  

 당신이 존재만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곳이 사막이다. 사막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감사하는 법이다. 끝없는 모래언덕이 이어질 뿐인, 황량해서 더 아름다운 이 땅에서는 초라한 풀 한 포기에도 눈이 가고, 유목민들이 건네는 물 한 잔에도 망극해진다.  

직장인 사춘기를 격렬하게 겪고 있는 내게 이런 식의 간접경험은 굴러가는 낙엽에도 눈물을 또르륵 흘리는 17세 소녀의 마음으로 돌려 놓아 종종 당혹스럽다. 나의 고민이 얼마나 하찮고 사소한 것인지, 내가 얼마나 어리광을 피우며 발만 동동 구르며 살고 있는지 새삼 부끄러워져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여행자가 길에서 만난 인연은 때로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이 책은 그보다 더 많은, 따뜻한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마음을 다잡고 한국인 여자와 결혼해 부지런히 생을 이어가던 잠양이 티베트 노인을 위한 공동체를 만드는 건강한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 열의와 진정성이 너무나 순수해서 눈을 의심했다.  


"잠양, 한국에서 돈 벌어서 시작하는 게 쉽지 않아? 여기서 밥 팔아서 버는 돈보다 훨씬 많이 벌잖아?"

"그러기 싫었어요. 누나, 만약 제가 한국에서 돈을 벌어 와서 공동체를 꾸린다면 여기 젊은 애들이 그럴 거예요. 쟨 외국여자랑 결혼했으니까 저런 일을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 인상을 주기 싫어요. 누구나 꿈이 있다면, 이곳에서도 열심히 일을 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거든요."

-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순수하고 뜨거운 꿈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는 30대에 사춘기를 앓는 대한민국의 어느 찔찔한 직딩에게도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야겠다'는 의지를 은근하게 자극한다.  


"이제 공부를 하러 떠나는데 다시 또 사람들이 물어. 내가 원하는 게 학자의 길인지 관료의 길인지를. 난 아직 모르겠거든. 학자일 수도 있고 관료일 수도 있고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지. 난 아직 내 삶을 그런 식으로 규정짓고 싶지는 않은데,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찾아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다 그렇게 물으니까 내가 살아온 방식에 자꾸 질문을 던지게 돼."

- 경계인을 꿈꾸는 친구이자 스승인 P

 

"어느 날 이 남자 선생들이 이렇게 말하는 거야. 스카프를 쓰는 건 우리 문화를 지키는 거라고. 난 소리를 지르고 말았어. '그럼 너희 남자들이나 스카프 뒤집어쓰고 살아! 그렇게 지킬 문화가 없어? 여자의 옷차람이 대해서밖에 지켜야 할 문화가 없는 거야? 그럼 우리의 위대한 종교 지도자 프린스 아가 칸은 어때? 그 아내와 아이들은 스카프를 쓰기는커녕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다니잖아? 다시는 내 앞에서 스카프 얘기같은 건 꺼내지도 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세요

지구별 어딘가에서는 열정적으로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고, 또한 어딘가에서 격하게 상처받는 영혼들이 있다. 세계 곳곳을 걸으며 세상을 찬찬히 살피면서 느린 여행을 하는 저자는 때론 꿈을 꾸고, 상처받고, 기뻐하고, 절망하는 지구인들과 만나 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품기도 한다.   


"언니도 사랑해봤어요?"

"그럼요. 몇 번을 했는걸요."

"무섭지 않아요?"

"당연히 무섭죠. 상처받을까 봐 늘 무섭죠. 그래도 사랑이 다시 올 때면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요. 상처받는다 해도 사랑 때문에 웃는 날들이 있으니까, 그 웃었던 기억만으로도 결국은 감사하게 되니까, 누군가를 만나면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껏 사랑해봐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 사랑하는 일이니까."

-뜨거운 삶, 생생한 언어

 

열여섯 혹은 열일곱. 그 나이에 품는 세상에 대한 궁금함과 두려움은 어디나 다 비슷한지, 질문의 결이 닮아 있었다. (-) 친구들은 데팔에게 이런 당부의 말을 남겼다.

"인생은 아름답지만 너무 짧아. 그러니 즐기고,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렴."
"늘 웃지는 마. 가끔씩은 울기도 해야 건강에 좋은 거야."

"천 번을 실패했다면 한 번 더 시도하자."

- 가끔은 울어도 괜찮아

  

건조하게 바싹바싹 말라 쪼글쪼글해진 심장에 다시 온기가 느껴진다. 마음을 열고 닫는 귀한 사람들. 귀한 위로들. 때론 12월의 오후에 낮게 뜬 햇볕이 훨씬 뜨겁고 맹렬하다. 어쩌면 나도 한낮의 졸음처럼 짧고 아늑한 가을 바다를 포기하고 칼바람 속에 맹렬하게 살아 움직이는 겨울 바다의 생명력을 닮기 위해 길을 나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발짝 물러나 타인의 시선으로 나의 생에 깃든 여백을 찾아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꽃을 사모했으나 이제는 잎들이 더 가슴에 사무친다"는 구절처럼, 외로운 실패와 소외된 좌절, 고된 인내에도 귀를 기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멀고 긴 여행의 여정이 불안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을 만나는 조금 다른 길이라는 설렘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용기가 난다.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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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구디의 역사인류학 강의 - 요리, 사랑, 문자로 플어낸 동서양 문명의 발달사
잭 구디 지음, 김지혜 옮김 / 산책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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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가볍게 읽히진 않지만 언제고 꺼내어 찾아볼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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