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이 외로움에게 - 지구 위를 혼자 여행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 개정증보판
김남희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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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 믿을 수 없이 짧은 가을이, 믿을 수 없이 빠르게 지나가버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가을이 오려나싶어 들고나간 가을 자켓들은 중년의 아저씨가 하루 왼종일 서서 다림질을 하고 기계를 돌려도 하루에 몇 벌 작업하지 못하는 좁은 세탁소에서 3주 동안이나 무한대기하다가, 칼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즈음에야 내 옷장으로 걸어들어왔다. 그 사이, 겨울이 왔다.  

자전거는 꼼짝없이 방 안에 갇혔고 집집마다 보일러 연통에서 뽀얀 연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날이 선선해지면 꼭 바다를 보러 가자던 애인과의 약속도 가을 자켓이 세탁소에 감금된 3주 동안 사라져버렸다. 깜빡 자고 일어난 것처럼 짧은 가을이었지만, 몰아치는 일 속에 허우적거리던 우리에게 그건 또 지루한 여름만큼이나 길었다. 바람이 차게 불기 시작하니 몸은 자꾸 더 움츠러든다. 순간순간 움찔거리며 겉옷을 꼭꼭 겹쳐입고 둔한 움직임으로 반복적인 출퇴근을 반복하다보니 이러다 영영 집과 회사에만 갇혀버릴 것 같다.  

 고백하건대, 나는 여권이 없다. 그러니까, 지난 30년 동안 단 한번도 대한민국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 제주도도 아직 못가봤다. 마음은 이미 세계 일주를 하고도 남았겠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은 내게 '불안'을 의미했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이자, 고난이자, 공포이기도 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항상 뜨거웠지만 낯선 공간에 대한 두려움은 늘 그것을 압도했다.  

 

그래서 여행서들을 읽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대신 경험한 사람들의 입을 빌어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계를 만난다는 안도감. 그런 것. 여행기가 공간에 대한 감상이나 상념으로만 채워져있는 건 매력이 없다. 사람들이 길을 떠나는 것은 낯선 '공간'에 대한 탐닉이 아니라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지 않을까. 그 '세계'에는 당연하게도 언제나 '사람'이 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 사는 이야기는 의외성과 드라마를 동시에 안겨준다.  

'지구 위를 혼자 여행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라는 온화한 부제가 인상적이었던 <외로움이 외로움에게>는 그런 의미에서 책의 주인공은 여행이 아니라 사람과 삶이었다. 사람이기에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외로움과 여행자의 고독한 여정을 찬찬히 쓰다듬는 저자의 문장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다 가슴이 먹먹해져 혼자 가슴을 꽝꽝 두드렸다.  

 당신이 존재만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곳이 사막이다. 사막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감사하는 법이다. 끝없는 모래언덕이 이어질 뿐인, 황량해서 더 아름다운 이 땅에서는 초라한 풀 한 포기에도 눈이 가고, 유목민들이 건네는 물 한 잔에도 망극해진다.  

직장인 사춘기를 격렬하게 겪고 있는 내게 이런 식의 간접경험은 굴러가는 낙엽에도 눈물을 또르륵 흘리는 17세 소녀의 마음으로 돌려 놓아 종종 당혹스럽다. 나의 고민이 얼마나 하찮고 사소한 것인지, 내가 얼마나 어리광을 피우며 발만 동동 구르며 살고 있는지 새삼 부끄러워져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여행자가 길에서 만난 인연은 때로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이 책은 그보다 더 많은, 따뜻한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마음을 다잡고 한국인 여자와 결혼해 부지런히 생을 이어가던 잠양이 티베트 노인을 위한 공동체를 만드는 건강한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 열의와 진정성이 너무나 순수해서 눈을 의심했다.  


"잠양, 한국에서 돈 벌어서 시작하는 게 쉽지 않아? 여기서 밥 팔아서 버는 돈보다 훨씬 많이 벌잖아?"

"그러기 싫었어요. 누나, 만약 제가 한국에서 돈을 벌어 와서 공동체를 꾸린다면 여기 젊은 애들이 그럴 거예요. 쟨 외국여자랑 결혼했으니까 저런 일을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 인상을 주기 싫어요. 누구나 꿈이 있다면, 이곳에서도 열심히 일을 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거든요."

-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순수하고 뜨거운 꿈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는 30대에 사춘기를 앓는 대한민국의 어느 찔찔한 직딩에게도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야겠다'는 의지를 은근하게 자극한다.  


"이제 공부를 하러 떠나는데 다시 또 사람들이 물어. 내가 원하는 게 학자의 길인지 관료의 길인지를. 난 아직 모르겠거든. 학자일 수도 있고 관료일 수도 있고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지. 난 아직 내 삶을 그런 식으로 규정짓고 싶지는 않은데,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찾아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다 그렇게 물으니까 내가 살아온 방식에 자꾸 질문을 던지게 돼."

- 경계인을 꿈꾸는 친구이자 스승인 P

 

"어느 날 이 남자 선생들이 이렇게 말하는 거야. 스카프를 쓰는 건 우리 문화를 지키는 거라고. 난 소리를 지르고 말았어. '그럼 너희 남자들이나 스카프 뒤집어쓰고 살아! 그렇게 지킬 문화가 없어? 여자의 옷차람이 대해서밖에 지켜야 할 문화가 없는 거야? 그럼 우리의 위대한 종교 지도자 프린스 아가 칸은 어때? 그 아내와 아이들은 스카프를 쓰기는커녕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다니잖아? 다시는 내 앞에서 스카프 얘기같은 건 꺼내지도 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세요

지구별 어딘가에서는 열정적으로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고, 또한 어딘가에서 격하게 상처받는 영혼들이 있다. 세계 곳곳을 걸으며 세상을 찬찬히 살피면서 느린 여행을 하는 저자는 때론 꿈을 꾸고, 상처받고, 기뻐하고, 절망하는 지구인들과 만나 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품기도 한다.   


"언니도 사랑해봤어요?"

"그럼요. 몇 번을 했는걸요."

"무섭지 않아요?"

"당연히 무섭죠. 상처받을까 봐 늘 무섭죠. 그래도 사랑이 다시 올 때면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요. 상처받는다 해도 사랑 때문에 웃는 날들이 있으니까, 그 웃었던 기억만으로도 결국은 감사하게 되니까, 누군가를 만나면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껏 사랑해봐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 사랑하는 일이니까."

-뜨거운 삶, 생생한 언어

 

열여섯 혹은 열일곱. 그 나이에 품는 세상에 대한 궁금함과 두려움은 어디나 다 비슷한지, 질문의 결이 닮아 있었다. (-) 친구들은 데팔에게 이런 당부의 말을 남겼다.

"인생은 아름답지만 너무 짧아. 그러니 즐기고,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렴."
"늘 웃지는 마. 가끔씩은 울기도 해야 건강에 좋은 거야."

"천 번을 실패했다면 한 번 더 시도하자."

- 가끔은 울어도 괜찮아

  

건조하게 바싹바싹 말라 쪼글쪼글해진 심장에 다시 온기가 느껴진다. 마음을 열고 닫는 귀한 사람들. 귀한 위로들. 때론 12월의 오후에 낮게 뜬 햇볕이 훨씬 뜨겁고 맹렬하다. 어쩌면 나도 한낮의 졸음처럼 짧고 아늑한 가을 바다를 포기하고 칼바람 속에 맹렬하게 살아 움직이는 겨울 바다의 생명력을 닮기 위해 길을 나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발짝 물러나 타인의 시선으로 나의 생에 깃든 여백을 찾아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꽃을 사모했으나 이제는 잎들이 더 가슴에 사무친다"는 구절처럼, 외로운 실패와 소외된 좌절, 고된 인내에도 귀를 기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멀고 긴 여행의 여정이 불안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을 만나는 조금 다른 길이라는 설렘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용기가 난다.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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