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 따는 사람들 서사원 영미 소설
아만다 피터스 지음, 신혜연 옮김 / 서사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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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메리카 원주민 가족의 상실과 화합의 이야기.

처음에 본 책의 제목이 그 어떤 느낌도 주지 않았다. 그저 베리 따는 노동자들을 다룬 이야기일 것이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배경지식이 없는 탓이 컸다. 책을 읽어가면서 아메리카 원주민, 그 중에서도 캐나다 노바스코샤 지역의 '미크마크' 원주민을 다룬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캐나다 동부, 그리고 미국 메인주의 원주민이며 주로 블루베리를 따는 노동을 하며 살았다. 자신들만의 고유의 언어가 있고 현재는 소실되었지만 문자체계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인디언(책에도 나오지만 요즘은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으로 통칭되었던 원주민들의 갈래와 종류가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긴 아메리카 땅덩어리가 좀 큰가.

소설은 두 인물의 시점으로 번갈아 전개된다. 한 가족의 가장 나이 어린 조와 루시의 시점이다. 이들 가족은 메인 주에 와서 블루베리를 따는 노동을 하던 중에 네 살난 딸 루시를 잃어버린다. 이후 수십년간 동생을 잃은 오빠 조와 새로운 가정에서 '노마'로 살게 된 루시의 인생이 교차하며 소개된다.

자연스럽게 원주민으로 사는 조와 백인 가정에서 자라는 루시의 삶이 비교되었다. 빈곤, 차별, 알콜 중독, 저학력 등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든 원주민의 삶과 풍요와 고등 교육의 기회를 가지는 백인의 삶이 순차적으로 보여진다. 원래 땅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이 몰락하는 모습이 씁쓸했다.

소설은 이러한 내용을 사실적이거나 심각하게 묘사하기보다 덤덤하게 표현했다. 쉽게 읽히는 문장으로 쓰여진 것도 특징이다. 결말은 예상 가능하고 전체적으로 감상적이며 구조가 단순한 점은 아쉽다.

찾아보니 미국에서 꽤 많이 읽힌 작품으로 2023년 '뉴요커'가 뽑은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미국적 감동, 인간 승리, 가족중심, 기독교적 가치 등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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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여신 - 사납고 거칠고 길들여지지 않은 여자들의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외 지음, 이수영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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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표현을 전복시키는 15편의 작품 모음집.

<복수의 여신>은 영국의 페미니스트 출판사 '비라고Virago'의 창립 5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책이다. 비라고가 가진 윈래의 의미는 여장부, 여전사와 같이 '남자 같은 여자'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문제를 일으키는 여자'로 쓰인다고 한다. 우리말의 '화냥x' 처럼 원래의 의미와 달리 여성을 대상화하는 멸칭들이 어느 문화권에나 차고 넘친다.

<시녀 이야기>의 마거릿 애트우드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권의 여성 작가들이 이런 여성을 향한 멸칭들을 하나씩 채택해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 중 두번째 작품인 '비라고(출판사 이름과 같다.)'를 주제로 한 '진짜 사나이'가 인상적이었다. 시엔 레스터의 작품인데 19세기를 배경으로 트랜스젠더를 편견 가득히 바라보는 상황이 그려진다. 화자는 정신병동의 견습 의사인데 평생 남장을 하고 살아온 '미스터W'를 만난다. 남자의 정체성을 가진 그가 동성애를 한 여성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치료가 가능한지 보고해야 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오해를 엿볼 수 있는데 실제 역사적 기록을 모티브로 쓰였다고 한다.

소설 <룸>과 <더 원더>의 작가인 엠마 도노휴가 쓴 '가사 고용인 노동조합'도 기억에 남는다. 실제 20세기 초 영국에서 가사 고용인 노동조합을 설립한 인물의 기록에 상상력을 더한 작품이다. 서구의 문학이나 영화에서 봐온 하녀라는 직업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수록된 작품들은 서문에 나온 것처럼 사납고 거칠다. 하지만 읽다보면 포용하고 연대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임을 발견하게 된다.

열 다섯 가지 재미와 전복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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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 -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
클레어 데더러 지음, 노지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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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걸작을 만들었지만 괴물인 예술가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한 번 쯤은 생각해 봤을 딜레마다. 저자인 클레어 데더러는 미국의 영화 평론가이자 에세이스트, 기자, 도서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에게 이 딜레마의 시작은 '로만 폴란스키'였다.

영화 <차이나타운>, <피아니스트>, <악마의 씨(원제: 로즈마리의 아기)> 등의 감독인 그는 1977년 3월 10일, 열 세살 서맨사 게일리에게 약을 먹이고 성폭행했다. (폴란스키는 유럽으로 도주했고 그 뒤로 나이 90이 넘은 지금까지 미국으로 입국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내용이 이 책의 프롤로그 첫 페이지에 나온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텍스트로 읽으니 정말 역겨웠다.하지만 폴란스키가 이런 괴물일지언정 그의 작품은 걸작이다.

폴란스키 뿐만 아니다. 의붓 입양딸 순이 프레빈과 불륜을 저지르고 결혼한 우디 앨런도 같은 딜레마를 던진다. 그가 남긴 수많은 영화들이 다 매도되야 할까? 과연 괴물인 예술가에게서 탄생한 걸작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저자는 이 질문이 주는 복잡하고 답답한 점들을 찬찬히 짚는다. 미성년자 성폭력 범죄부터 시작해서 성차별, 폭력, 약물 중독, 반유대주의 등 다양한 범죄를 저지른 괴물들을 살펴본다. 그러면서 이 답을 찾는 과정 자체가 인간 사회의 다양한 편견과 권력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조앤 롤링의 트랜스젠더 혐오 발언, 피카소의 여성 학대, 헤밍웨이의 폭력, 바그너의 친 나치이력, 나보코프의 소아성애 등 다양한 사례들이 나온다.

그 중 버지니아 울프가 유대인인 자신의 남편을 "나의 유대인"으로 불렀다는 부분이 나온다. 이쯤되니 과연 온전히 올바른 예술가가 몇이나 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곧이어 울프가 바그너와 달리 반유대주의자로 기억되지 않는지 설명된다.

책은 딜레마에 대한 정답을 내려주거나 괴물들을 옹호, 또는 매도하는 식의 치우친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관점에서 예술가의 생애와 그 작품들을 바라보고 이 딜레마를 대할 것인지 풀어냈다. 매 챕터마다 생각할 거리를 던저주었다.

몇 년전 제작된 다큐멘터리 <성덕>. 감독은 가수 정준영의 광팬이었는데, 어느날 성범죄자가 되면서 혼란을 겪고 이를 영화로 만든다. 책의 내용 중 다음 부분에서 이 작품이 생각났다. '예술 작품을 소비한다는 건 두 사람의 인생이 만나는 일이다. 예술가의 인생이 예술의 소비를 방해할 수도 있고 한 관객의 인생이 예술 감상의 경험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309 페이지)'

이 책은 표지의 제목을 잘 읽을 수 없다. 한참을 들여다 봐야 숨어있는 '괴물들'이 보인다. 마치 걸작이라는 작품 속에 숨겨진 괴물들처럼. 책의 내용에 걸맞게 아이디어 넘치는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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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정치적인 시골살이 - 망해가는 세계에서 더 나은 삶을 지어내기 위하여
양미 지음 / 동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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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웰빙을 향한 치열한 저항의 시골살이.

오래 전에 잠시 몸 담았던 광고영상 제작 회사에서 들은 얘기다. 회사 프로덕션 팀이 굴가공 공장을 촬영하러 해안지역 시골에 갔다. 그 공장은 대개 그 지역의 할머니들이 일을 했단다. 굴을 까는 양만큼 일당이 주어지는데 소위 경력이 높은 할머니들은 엄청난 금액의 보수를 받는다는 것이다. 액수를 들어보니 당시 중소기업에서 내가 받은 돈보다 많았다. 그때의 충격으로 이런 생각까지 했다. '이도 저도 안되면 다 접고 시골로 가야겠다.'

이 생각이 얼마나 철없고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이 책이 말해준다.

저자는 도시의 착취 구조에 한계를 느끼고 '누구도 착취하지 않는 노동, 나를 직접 부양하는 노동'으로 살기 위해 시골살이를 택한다. 저자가 직접 부딪혀 경험한 시골은 또다른 연대와 투쟁의 장이었다.

여성 비혼 1인 가구로 시골살이를 하는 저자는 다양한 곳에서 불평등을 겪는다. 이동권, 주거권, 경제권, 행정, 정치의 파트로 나누어 서술했다.

시골에서 살려면 자차 운전을 해야하는 문제부터 나온다. 적지않은 목돈과 유지비가 들고 환경적인 문제도 생긴다. 버스체계는 엉망이고 개선의 여지가 안보인다. 결국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은 약자들은 고립되기 십상이다. 이 문제 하나만 봐도 시골이 도시보다 나을 수 없다. (저자는 시골에서 여전히 차를 소유하지 않고 산다고 한다.)

읽으면서 지방소멸 문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실제로 행해지는 정책들이 얼마나 허술한지도 구체적 예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개인적인 에세이라기 보다는 실질적인 사례와 대안을 제시하려는 질문들을 던지는 책이다.

결국 시골살이도 정치적인 문제와 뗄 수 없다. 시골의 '이장'이라는 직이 선출직이 아니라 행정이 임명하는 임명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시골에서 문제가 생기면 바꾸려는 노력보다 현상을 유지하고자 한다. 저자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이들이 실제 행정에 참여하면 좋겠다.

이 책을 읽고 굴까는 할머니들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도시의 사무직보다 더 높은 일당을 받기까지 얼마나 고된 노동이 있었을까. 공장까지는 어떻게 이동을 했고, 노동에 대한 복지 등도 제공되고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녹록치 않을 것이다. 시골살이는 낭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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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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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면서 암울했던 여름, 사랑과 죽음을 겪은 소년의 이야기.

영국의 해안 마을 사우스엔드에서 한 무덤이 훼손된 사건이 발생한다. 용의자는 16세 소년 '핼'. 그는 얼마 전에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두 살 많은 '배리'의 무덤을 밤새 파헤쳤다. 핼은 대체 왜 그랬을까?

프랑스와 오종 감독이 <썸머 85>라는 영화로도 만든 작품이다. 작가 에이든 체임버스는 영미권에서는 꽤 알려진 작가라고 한다. 난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소설은 용의자 핼이 진술을 거부하자, 법원은 사회복지사를 담당자로 정해 진상 파악을 하게 한다. 글쓰기에 재능이 있던 핼은 재판에 제출할 진술을 글로 쓰게 된다.

도입부의 '무덤 훼손 사건' 기소장과 중간 중간 등장하는 사회복지사의 보고서 외에는 대부분 핼의 시점으로 쓰여졌다. 가족과 사이도 좋지 않고 무엇에도 흥미나 친구도 없는 핼의 삶에 배리가 등장한다. 십대 소년이 써내려가는 문체라 장난기 있으면서 경쾌하다. 오래 전에 읽은 영국 소설 <비밀 일기>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몇몇 군데는 읽으면서 크게 웃었다.

배리를 만나며 핼이 느끼는 사랑과 상처의 감정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분명 퀴어물이긴 한데 그에 대한 심오한 고뇌는 별로 없이 그저 순수하고 슬픈 사랑 이야기로 읽혔다. 핼의 성장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국 핼이 왜 무덤을 훼손했는지 조금씩 밝혀지는데. 거기까지 가는 감정이 섬세하고 공감되어서 몰입하며 읽었다. 구성적으로도 좋은 작품이다.

십대 소년이 겪는 방황과 설렘. 비정한 세상으로부터의 상처가 잘 나타난 소설이다. 해안 마을과 여름이라는 계절이 주는 느낌도 강렬하다.

소설 속에서 커트 보니것의 작품이 자주 등장한다. 보니것을 잘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조만간 읽어봐야겠다.



우리가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몇 분 만에 알게 되는 걸까? 이 사람과는 순식간에 일어나는 그런 일이 해마다 마주치는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과는 왜 일어나지 않는 걸까? - P75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곱 주가 걸렸다.
내가 해초 틈에 빠진 날부터 그가 죽은 날까지 49일이었다. 그가 ‘그것‘이 되기까지.
천백칠십육 시간.
칠만 오백육십 분.
사백이십삼만 삼천육백 초.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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