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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전주곡 C#단조 op.45

쇼팽 전주곡 op.28

쇼팽 2개의 녹턴 op.27

쇼팽 스케르초 1번 B단조 op.25

쇼팽 연습곡 op.25 中 8곡

 

앵콜) 쇼팽 연습곡 op.10 no.12 '혁명'

       쇼팽 발라드 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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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콜로프,아바도,무티에 이은 네번째 발구르기+전석 스탠딩 오베이션(쉬프와 볼로도스도 기립박수가 있었으나 전석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 잘츠부르크에서 인기좋은 노인이었다. 그리고 그럴 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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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폴론의 사도애써 조탁하지 않아도 마냥 빛이 나는 음색. 고도로 응축된 단단함 같은 게 느껴졌다. 흔히 말하는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폴리니의 피아노가 아닐까 싶었다. 유별난 명료함과 조금의 과장도, 부풀림도 없는 매끈한 흐름. 그러나 건반 찍는 기계에 가까웠던 젊은 시절에 비하면 기교적으로 노쇠한 게 분명했다. 예전의 무결점 기교마인이 아니었다. 엇나간 음표들이 꽤 있었고 종종은 페달링이 눈에 띄게 남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인 고집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표현을 흐릴지언정 템포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스트레이트한 흐름에 악상을 구조적으로 배치하되, 프레이징은 유창하게 처리하고, 호흡은 간결하게 가져갔다. 흡사 아폴론적인 정연함, 건강함. 호수에 비친 빛이 반사되어 산란될 때의 찬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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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여행을 통해 여러차례 느낀 것이지만, 피아노 대가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터치에서 건반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몸이 완전하게 릴렉스된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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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곡 전주곡 C샵 마이너. 이런 짧은 소품에서도 쇼팽의 예민한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시적인 반복과 날카로운 우수, 말미에 터지는 수사적인 탄성. 피아노의 음유시인이라 할 만 하다. 전주곡 op.28. 폴리니는 이 대곡을 단번에 꿰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 무자비한 연주에 비하면 많이 누그러진 모습이었다.(그도 이제 등굽은 60대 노인..) 연주하기에 힘에 겨운 패시지도 종종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차 언급하지만) 폴리니에게 음악적인 양보는 없었다누군가의 말대로 미스터치란 건반을 잘못 누르는게 아니라 음악을 잘못 연주하는 것이다. 2개의 녹턴. 이 곡을 이렇게 고상하게 연주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일체의 센티 없이, 두터운 화장 없이 그냥 그 자체로 빛나는 맨얼굴 같았다. 스케르초 1. 명쾌한 연주였다. 마지막의 명인기에선 탄식이 절로 나왔다. 덕분에 옆의 할아버지는 막판에 호흡곤란이 왔다. 마지막으로 에튀드 op.25 8무엇보다 '겨울바람'은 더이상 바랄 게 없는 최상의 연주였다강단있는 음색에 고음에서 빛을 내는 아르페지오섬뜩한 기운을 품은 코랄. 동시에 템포는 고집스레 지켜졌다. 정확히 날아간 화살같이 거침없는 쾌연이었다. 다만 그 이후의 '대양'은 지쳐서 그런지 페달이 남용돼 표현이 지저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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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콜은 혁명 에튀드와 발라드 1. 둘다 폴리니에게 기대할 수 있는 연주 그대로였다. 특히 발라드 1번은 폴리니의 기하학적 음악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수학문제 푸는 게 취미라는 그답게, 악상의 조리있는 배치에 힘을 쓴 논리정연한 연주였다. 눈부시게 빛나는 음색은 과분한 덤이었고.. 역시나 퍽 감동적인 연주. 이토록 아이덴티티가 분명한 대가라니! 취향의 호불호는 대가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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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짓도 이제 끝이구나..소콜로프로 시작해서 폴리니로 끝났다. 하나같이 개성 넘치는 명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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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건반 파르티타 2

브람스 환상곡 op.116

슈만 피아노 소나타 3관현악 없는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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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흐 파르티타 2번은 엄격한 템포에 반복을 모두 지켰다. (물론 반복을 할 때는 장식음을 넣거나 셈여림을 다르게 하는 등의 미묘한 변화를 주었다.) 탄탄한 아티큘레이션으로 모든 성부가 제 목소릴 내는 가운데 곡의 담론구조가 명징하게 드러났고, 이로 인해 성부 간의 대위법적 대화, 수평적 위계가 온전히 지켜졌다. 그가 젊을 때 녹음한 동곡 연주에 비하면 과격함이 줄고, 명상적인 분위기와 섬세한 표정이 더해졌다. 레코딩에서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들렸던 그의 음색이 실황에서는 동그랗게 빛을 내며 고전적인 격조로 반짝였다. 사라방드의 숨죽인 걸음과 그윽한 깊이, 론도의 기습적인 질주, 카프리치오의 장려한 결론, 모두 더없이 조화로웠다. 그저 유유한 흐름에 몸을 맡기면 그만이었다. 거듭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 데 어느새 연주가 끝났네.. 다른 이들도 내 감상과 같았는지 다음 곡인 브람스 환상곡이 시작될 때 까지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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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흐의 음악이 수차원의 성부를 아우르는 합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대화라면, 브람스의 음악은 세계와 갈등하는 인간의 실존적인 대결이다. 충만한 조화와 완전한 평온, 합법칙적인 질서에 대한 신앙적인 믿음이 바흐가 딛고 선 대지라면, 견딜 수 없는 부조화와 끊임없는 의심, 사납게 덤비는 회의는 브람스가 딛고 선 대지이다. 이렇듯 거대한 균열과 분열로 맥없이 요동치는 땅 위에서 브람스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치열하게 대결한다. 그러나 베토벤과 같은 계몽적인 확신에서 오는 완전한 극복을 노래하기에는 브람스가 산 시대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바그너의 출현으로 이전 질서의 단단한 토대에 금이 가기 시작한 때에,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바그너의 대항마를 자처했던 브람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더욱 집요하게 되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종종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위압적인 대위법으로 제 자신을 단단하게 무장하곤 한다. 이것이 옳은가, 내가 하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이 옳은가 하는 질문, 거의 강박적으로 되풀이되고 되풀이되는 질문에 그는 근사한 대답을 얻길 기대하지만-마치 그의 교향곡 1번의 휘황찬란한, 어떻게 보면 절실하기까지 한 피날레와 같이- 결국 종국에 그가 마주한 것은 그의 교향곡 4번에서 볼 수 있는 파사칼리아의 장렬한 산화 즉, 허공에 지르는 비명과 같이 대답 없는 소멸이다. op.116에서부터 이어지는 말년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들은 이렇듯 쇠락해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비관에 찬 시선으로 쓰여졌다. 말년에 이르러 온전한 낙관에 이르지 못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문에 둘러싸여 있는 노인의-그는 고작 60대의 나이에 이미 그 누구보다 늙어버렸다- 음울한 뒷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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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손 성부와 왼손 성부의 마치 주먹질을 주고받는 듯한 충돌은 브람스의 대결이 더없이 필사적이고 치열한 것임을 보여준다. 두터운 화음이 만들어내는 혼탁한 색감은 브람스가 짓고 있었을 모호한 동시에 심오한 표정-그러나 베이스의 짙고 어두운 숨결에서 알 수 있듯 낙관보다는 비관에 가까운 표정-을 드러낸다. 소콜로프가 과격하게 옥타브를 오르내릴 때 늙은 브람스가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쓸쓸한 은빛 음색으로 느린 악구 속에서 신음할 때 브람스가 힘겹게 고통을 반추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론적으로 마지막 카프리치오에서 내가-혹은 브람스가 목격한 것은, 결국 일말의 파국이다. 브람스 환상곡 op.116에 가슴을 시리게 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황혼과 같은 아련함에서 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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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슈만은 세계를 집어삼킨 인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병적인 착각 혹은 착란에 가깝다. ‘관현악 없는 협주곡으로 명명된 슈만의 세 번째 소나타는 괴기스럽게 화려하고 악마적으로 산만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 곡에 대해 슈만의 광기를 언급하며 "실체적 상징적 질서인 큰 타자속에서 지탱물을 점차로 빼앗기는 정신증적 격리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에 대한 가장 정확한 공식"이라고 설명했다. 독주자가 협주곡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상태는 마치 세계에 제 자신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인간, ‘큰 타자를 부정하는 정신병에 걸린 인간과 같다는 의미일 게다. 그러므로 브람스와 그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슈만은 실은 서로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해 있다. 지젝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해 바이올린에 대항한 협주곡이라며 오케스트라의 장중한 교향악적 무게는 바이올린의 솔로 목소리를 삼켜버리는 바, 그것의 표현적 박진력과 겨루면서 그것을 짓누르며, 그것을 교향악적 직물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로 축소시킨다.”고 말한 바에서 알 수 있다. 브람스가 세계와 갈등하는 왜소한 인간이라면 슈만은 세계를 집어삼킨 과잉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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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난해한 곡을 해부하는 소콜로프의 연주는 더없이 정확하고 예리했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해석은 폴리니와 호로비츠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호로비츠가 슈만의 신경증적 다채로움을 극단적으로 과장해 단편적인 주제를 장식적으로 치장하고 나열하는데 그친다면, 또한 폴리니가 정신없이 놓인 조각들을 애써 정리하고 결합해서 엉성한 구조물이라도 만들어내려고 분투한다면(그래서 그는 곡을 산만하게 하는 두 개의 스케르초를 뺀 초판을 연주했다.), 소콜로프는 특유의 탁월한 조감능력으로 분열과 열정 가운데서 전 악장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을 명민하게 포착해냈다. (그가 만들어내는 내밀하고 일관된 흐름은 정말 경이롭다. 그가 연주하면 음표와 음표 사이의 자리 잡은 쉼표조차 분명한 소리를 낸다. 마치 음표와 쉼표 사이에서 레가토가 이뤄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1악장에서 스케르초 악장으로 넘어갈 때는 그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자칫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불레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음악의 궤도를 이해하고 있는 연주자다.) 더불어 그는 슈마네스크한 화려함을 널찍한 팔레트로 현란하게 색칠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물론 이는 그가 그의 손 끝에서 만들어내는 수백 가지의 음색과 뉘앙스 덕분이다.) 그의 성취는 마치 혼돈에 가까운 불길 속에서 단단한 보석을 움켜진 것과 같다. 소콜로프의 구조적 직관은 늘상 감탄스러운 것이었지만 특히 슈만 연주의 경우 가히 절묘한 경지라고 느꼈다. 이렇듯 엉켜있는 실타래처럼 불가해한 곡일수록 연주자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척도가 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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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을 완전히 집어삼켜 그 흐름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는 대가의 신묘함에 거듭 감탄했다. 여느 연주가들처럼 곡을 탐닉하다 그 흥에 겨워 본래 의도했던 흐름에서 이탈하는 음표가 그에게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음표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음량과 음색, 뉘앙스로 철저히 통제되어 연주되는 느낌이었다. 결벽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예민하고 또 냉정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듯 얼음같이 차가운 그의 손길에서 만들어진 음악이 기이하게 뜨거운 기운을 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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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대단히 음악적인-그의 몸짓을 표현할 다른 수사를 찾지 못 하겠다- 제스처를 취하며 연주한다. 그가 건반을 다룰 때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은 그의 무뚝뚝한 외모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그가 연주하는 음악이 그의 제스처에 고스란히 반응한다는 점이다. , 그의 제스처는 우미한 동시에 기능적이다. 그가 건반을 애무한 듯 매만지면, 더없이 아름답고 아늑한 음향이 따스하게 노래한다. 반면 그가 건반을 학대하듯 내리치면, 거대한 음향이 날카롭게 공명한다. 그의 제스처는 과시적인 쇼맨쉽과는 다르게 철저히 음악적 목적에 종속되어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이렇듯 고상한 몸짓이 오롯이 음악이 되는 광경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경우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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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늘 처음으로 연주회장에서 브라보를 외쳤다. 열렬한 환호성과 함께 커튼콜이 15번 정도 이어졌고, 앵콜이 6곡 정도 연주되었다.(쇼팽, 슈베르트, 라벨이었던 것 같다.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겠다.) 기나긴 커튼콜 끝에 객석에 불이 켜진 뒤에도 박수는 끊이지 않았다. 소콜로프가 다시 나와 이제 됐다며 작별인사를 했고 그제야 -나를 포함한-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자비함을 뒤늦게 깨닫고는 공연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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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콜로프의 슈만 피아노 소나타 3번. 2010년 로테르담 실황. 이런 건 공유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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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no 2012-05-19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콜로프를 듣고 지젝을 읽는 몇 안되는 한국 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저도 브리콜라주님이 가셨던 공연과 동일 프로그램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들었었습니다. 바로 전 슈베르트-슈만 프로그램은 파리와 오스트리아 빈에서 들었었고요. 정말 소콜로프는 언어가 아닌 음악 그자체로 예술 아니 더 나아가 삶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관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어버리는 진정한 예술가입니다.

저와 제 주변의 친구 몇몇은 헤비 지젝리더이자 소콜로프 매니아들입니다. 사실 이런 관심사를 가지고 한국에서 대화 가능한 사람들의 장을 넓히는 것은 쉽지 않은데! 정말 반갑습니다!

브리콜라주 2012-06-17 07:48   좋아요 0 | URL
소콜로프가 지젝이 책 써내듯 음반을 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ㅎㅎ 저 역시 반갑습니다!
 
저항의 인문학 -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김정하 옮김 / 마티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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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유럽적인 (그리고 유럽중심적인) 사명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는 그 사명 속에서 인간 역사의 단일성을 믿었고, 근대 문화와 민족/국가주의의 호전성 속에서도 해롭고 또는 적대적일지 모르는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으며, 자신의 관점이 지닌 한계와 지식의 불충분함을 건강하게 인식하고서 멀리 떨어진 저자의, 그리고 먼 역사적 시대의 내적 삶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낙관주의를 가슴 깊이 믿었습니다."(p.138)

 

 이 글에서 칭송한 아우어바흐의 미덕은 사이드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리라.

 

 E.사이드의 책은 늘 내 마음을 흔든다. 역자가 "난해하고도 장황한, 그렇지만 아름답고 절절"하다고 표현한 그의 문장은 독자를 적당히 긴장시키면서도 사려깊은 온기가 묻어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그의 '낙관주의', 스스로 인식의 지평이 지닌 한계를 겸허하고 '건강하게' 인정한다면, '해롭고 적대적일지 모르는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진솔하고도 낙관적인 믿음이다. 자기가 그어놓은 테두리에서 한발짝도 나가길 두려워하고, 남이 그 경계선에 살짝 닿는 것조차 '폭력'이라 나무라는, 한없이 여리고 까다로운 정신의 자폐성이 마치 반짝이는 장신구처럼 과시되는 오늘날에 말이다. (그리고 이 장신구에서는 나도 자유롭지 않다.)

 

사이드는 묻는다. 우리는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학교나 대학에, 일하는 장소에, 특정한 국가에 특정한 시간, 상황 아래 놓여 있다. 이 주어진 지평과 제한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님, 그것들에 도전해야 하는가? 사이드가 주장하는 인문주의적 '저항'은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에 도전하는 대담하고 비판적인 정신을 뜻한다.

 

"인문학자의 임무는 어떠한 위치나 장소를 점하는 것도, 어느 곳에 그저 속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문학자는 우리의 사회, 누군가의 사회, 타인의 사회에서 문제시되며 유통되는 사상과 가치에 내부인이면서 외부인이어야 합니다." (p.113)

 

사이드의 인문주의(humanism)가 '인간'을 폐기한 현대 사상가들의 냉소와 조소 속에서 빛나는 이유는, 인간 본연의 한계인 '비극적 결함'-어느 누구도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지평에서 자유롭지 않다-을 인정하고 이에 저항하는 치열함과,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우호적이고 정중한 지성으로서 서로의 관점에서 서로를 이해하려 애쓴다면" 타자와의 "공감어린 대화"가 가능하리라는 절실한 낙관 덕분이다. (알튀세르식으로 : '나는 이데올로기 속에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진정으로 이데올로기의 악순환 속에서 벗어난다.) 이는 오늘날 수많은 포스트모던의 담지자들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든 '낯선 이에 대한 환대', '친절함'의 미덕이다.

 

 하지만 인간만이 인간이 이뤄놓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그의 비코적, '인문주의'적 믿음이 진정한 광채를 얻는 순간은 그가 '추방의 장소'에 머물기를 자처할 때이다.

 

"지식인이 임시로 거하는 집은 유감스럽게도 그 안에서 누구도 후퇴하거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긴급하고 저항적이며 비타협적인 '예술의 영역' ... 오직 이 불안정한 추방의 장소 속에서 포착될 수 없는 것의 어려움을 포착할 수 있으며 어찌 되었든 애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p.198)

 

그가 '예술'이라 부르는 비타협의 공간, 해명되거나 해소될 수 없는 외상의 공간에 서있기를 고집할 때,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만 불가능한 것이 일말의 가능성으로 움튼다는 사실을 단언할 때, 그는 비로소 단순한 낙관을 넘어선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필연적인 결함'을 숨김없이 껴안을 때야 가능하다는, 그 불치의 결함이 인간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는 '인간적인' 깨달음으로의 도약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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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과 역설 - 장벽을 넘어 흐르는 음악과 정치, 개정판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3
에드워드 W. 사이드·다니엘 바렌보임 지음, 노승림 옮김 / 마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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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5


여러가지 매력적인 쟁점을 다루고 있는 대담집이지만,

그 중 딱딱한 주제 하나만 골랐다.


'원전연주'와 '정격성' 그리고 '작곡가의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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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길,

 "정격성이 과거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에 관한 것이며, 현재가 과거를 바라보고 구성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며, 또한 현재가 어떤 과거를 원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 지난 30년간 18세기 음악을 연주하며 드러난 '정격성'을 향한 욕망을 보십시오. 그것은 대형 오케스트라의 미끈하고 풍성한 사운드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뿐입니다. ... 정격성이란, 과거를 구성하는 방법을 두고 일어난 현재의 다툼과 연관이 되어있을 뿐입니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바로 이겁니다. 과거는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 이처럼 정격성과 과거에 대한 문제를 더 깊게 파고든다면, 우리는 '타자'에 대한 문제에 다시 도달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오늘날의 이슈 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해 누가 특권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도 포함됩니다. 이는 음악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격운동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는 일종의 우월의식입니다."(p.186~189)

 

 "누가 베토벤을 그렇게 연주하는가?"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일부 원전주의 애호가들의 분노에는 진리로 고양된 과거의 한 순간을 향한 퇴행적인 동경이 엿보인다. 그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 -보통 고전음악이 작곡된 바로 그 '순수한' 순간-을 손아귀에 쥐고는, 자신의 방식만이 옳다며 떼를 부린다. 사이드 말대로 이는 마치 '순결한 역사의 우리를 오염시키는 이방인은 누구인가?'라며 으르렁대는 광신적 근본주의자의 완고함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원전연주 역시 단지 과거를 재구성하는 현재적 방식 중 하나일 따름이며, 결코 '유일하게 올바른' 길이 아니다. (이는 물론 상식적인 해답이다.) 그들이 맹신하는 '역사주의적' 진리들, 작곡된 바로 그 순간의 악기와 편성을 고스란히 '재현'함으로써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의 연주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고약한 믿음은,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의 환상일 뿐이다.

 

 우리는 이런 원전연주의 완고함에서 서구 고전음악의 케케묵은 (동시에 절대적인) 지침 중 하나인 '작곡가의 의도'를 마주하게 된다. 원전연주의 맹신자든, 표현주의의 화신이든 간에, 고전음악 연주가들은 유독 '작곡가의 의도'에 목을 맨다. 그리고 이 '작곡가의 의도'에 대한 집착은 악보의 해석(혹은 연주자의 해석적 자유)의 문제와 직결된다. 스코어를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한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텍스트의 독해에 어느 정도까지의 자유가 허락되는가" 즉, "연주자는 어느 정도까지 '자의적'으로 스코어를 해석낼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작곡가의 의도'에 어떻게 근접할 수 있으며 (혹은 주제넘은 믿음으로 어떻게 '완전한 실현'에 이를 수 있으며), 동시에 어느 정도까지 거리를 확보하고, 자유를 얻어낼 수 있는가? 물론 가장 엉터리는 "모든 것이 악보에 다 있으니, 내가 할 일은 그것을 단순하고 충실하게 다시 재현하는 것"이라는 궤변일 것이다. 바렌보임을 인용하자면,

 

 "그런 의미에서 (악보에의) 충실함을 논할 때 그 충실함은 대체 무엇에 대한 것일까요? 여기서 언급되는 충실함의 대상이 되는 악보는 그저 아주 근사치에 가까운 빈약한 체계일 뿐입니다. ... 만약 눈 앞의 인쇄물을 단지 적혀있는 그대로만 재생하고자 시도할 뿐 그 이상 아무런 의미도 담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따라서 이것은 충실하다고 말할 수 없죠- 완전히 비겁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상호관계와 음의 정량을 이해하기 위한 수고를 거부하고,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겠다는 소리니까요." (p.168~169)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교조주의적 믿음은, 성경이나 코란을 문자 그대로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그리고 그렇게 해야한다고 강박하는) 종교적 원리주의자와 다시 한 번 엄밀한 근친성을 보인다.(이를 텍스트 페티시즘이라 부르고 싶다.) 그들이 요상한 강박 속에 놓치고 있는 것은 텍스트가 독자들에게(그리고 연주가들에게) 자명하고 투명한 지시나 명령이 아닌 히스테리컬한 수수께끼로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오래된 구조주의적 교훈에 따라 기표에 달라붙는 기의가 근본적으로 '자의적'이듯이, 악보가 가리키는 저 '작곡가의 의도' 역시 근본적으로 '모호'하다. '작곡가의 의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연주자는 절대적으로 막막한 장벽 앞에 서 있으며, 텍스트는 (즉, 스코어는) 자신의 진실을 캐내어 보라며 연주자를 침묵의 위압으로 다그친다. 연주자들의 공들인 해석과 치밀한 연주(바렌보임의 표현으로는 '소리의 물리적 구현')는 이 모호한 동시에 준엄한 심문관에게 바치는 나름의 대답이다. 요점은 텍스트가, 악보가 완벽한 형태로 (즉, 모든 의미가 훼손되지 않고, 어떤  '매개'도 거치지 않은 채) 고스란히 재현되고 구현될 수 없다는 것, 텍스트와 그것의 구현 사이에는 구성적이고 본질적인 방식으로 어떤 간극이, 어떤 불가능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장벽일 수도, 기교적인 장벽일 수도, 무엇보다 시대적인 장벽일 수도 있다. 그토록 치밀한 고증을 거쳤다는 원전주의 음악가들 조차 '우리 시대'의 산물이며, 그런 의미에서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는 작곡가가  '창조의 순간' 꿈꾸었던 그 원대하고 풍요로운 계획에 비하면 연주가의 해석과 연주는 늘 무언가 불완전하고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악보나 보면서 상상 속에서나 음악을 들어야 하는가?) 핵심은 정확히 그 반대다. 악보와 연주자의 연주 사이에 자리잡은 이러한 불가능성은 연주자로 하여금 그가 나름의 대답으로 해석과 연주를 멈추지 않게 하는 긍정적이고 실정적인 조건으로 기능한다. 상황이 근본적으로 모호하다는 것, 자신의 대답이 작곡가가 의도했던 바로 그것이었는지 확신할 어떠한 근거도 부재하다는 것이야말로 연주자가 극도의 성의로 해석과 연주를 계속하게 하는 원천이 된다. (모든 것이 완전히 실현되어 있다면 무엇하러 그것을 헛되이 반복하겠는가?) 또한 우리는 "늘 무언가 불완전하고 결핍되어" 있는 쪽은 오히려 텍스트와 스코어라는 것, 물리적으로 실현된 소리의 풍요로움과 이 풍요로움이 가져오는 격렬한 감정에 비하면 텍스트는 '그저 아주 근사치에 가까운 빈약한 체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악보는 언제나 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어떠한 스코어도 그것의 실현에 선행하여 군림하는 즉자적 실체로 행세할 수 없다. 저명한 작곡가인 동시에 도저한 연주자이기도 한 불레즈가 말하기를,

 

 "악보나 작곡가의 의도를 하나의 보이지 않는 원천으로 간주한다면, 이에 대한 지각은 청자의 관점을 반영함으로써 이루어 집니다. 결코 원천을 그대로 직지각할 수 없습니다. 주변이 밝아지면 불이나 빛이 있다는 건 알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지휘자가 악보를, 연주자가 지휘자를, 그리고 청중이 연주자의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의 모습을 반영하는 과정은 마치 한 줄로 서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또한 청중의 입장에서 근원이라고 생각하며 바라보는 대상은 사실은 환상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실 거울에 비친 모습일 뿐이죠."(p.171~172 약간 변형해 인용)

 

 급진적인 결론으로 나아가자. 모든 개개의 연주를 관장하는 즉자적 실체, 연주자들의 절대적 지침, '작곡가의 의도'는 다만 하나의 환상이다. 그것은 결코 '직지각'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단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곡가의 의도'는 지휘자와 악보, 연주자와 청중의 상호주관적 네트워크 속에서 유추되는 유령적 참조점이며, 우리가 결코 악보의 완전한 실현에 이를 수 없다는 외상적 진실, 필연적 무능력을 감추기 위해 등장한 구성적인 오인,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작곡가의 의도'에 근접했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우리가 꿈꾸던 바로 그곳에 도달했노라고 단언할 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다름 아닌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왜곡된 형상'일 뿐이다.

 

 이제 다시 '정격성'으로 돌아가자. '원전연주'(authentic play)의 고고학적 집착은 어쩌면 (이미 시체가 된 작곡가의 '진정한' 의도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끔찍한 곤경을 피하기 위한 증상적 해결책이 아닌가 싶다. 작곡가가 의도했던 "진정한" 연주에 대한 강박이 그들을 작곡된 그 순간의 역사적 상황마저 그대로 재현하고 연출해야 한다는 원전주의적 강령으로 이끌었을 지도 모른다. (전혀 딴 얘기지만, 어쩌면 이는 오늘날의 이슬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종류의 지역적 독특성이나, 전근대적인 전통들이 허물어지는 '세계화', '자본주의'의 오늘날, 그들은 땅이 꺼진 듯한 궁극적 허망함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전통적인-종교적인 지침에 더욱더 매달리는 것이다. '좋았던 옛날'로 도망치는 어느 수구주의자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마주한 악보라는 종이조각-말없는 심연-에 대한 그들 나름의 대답이었을 것이다. 다소 거칠게 말해서, 고전음악을 여전히 살아 있게 하는 것은 과거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잃어버린 과거의 향유와 순수한 완벽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불가능한 욕망이다. '정격성'에 대한 갈구는 모든 여타의 해석들이 어딘가 다소 탈구되어 있고, '정격적'이지 못한 한에서 지탱된다.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지금도 위대한 작곡가들의 음악이 여전히 새로운 영혼을 얻어 연주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원전연주 역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스코어의 전례없는 지평을 열어젖혔다는 의미에서 혁신적인 결실이다. 즉,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 해석적 경향이 아닌 그와 함께 수반되곤 하는 '태도'의 문제다.)

 

 별볼일 없어 보이는 음표, 사소한 악상기호 조차 우리에게 무거운 침묵으로 제 자신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가능한 수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 자신을 어떤 밸런스로, 템포로, 프레이징으로, 하나의 이야기로서, 총체로서 구원해낼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시대마다, 연주자마다 다를 것이고, 또한 그러므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작곡가의 의도'가 '텅 빈' 지침으로 제공되는 한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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