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평행과 역설 - 장벽을 넘어 흐르는 음악과 정치, 개정판 ㅣ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3
에드워드 W. 사이드·다니엘 바렌보임 지음, 노승림 옮김 / 마티 / 2011년 8월
평점 :
2011.10.15
여러가지 매력적인 쟁점을 다루고 있는 대담집이지만,
그 중 딱딱한 주제 하나만 골랐다.
'원전연주'와 '정격성' 그리고 '작곡가의 의도'
-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길,
"정격성이 과거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에 관한 것이며, 현재가 과거를 바라보고 구성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며, 또한 현재가 어떤 과거를 원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 지난 30년간 18세기 음악을 연주하며 드러난 '정격성'을 향한 욕망을 보십시오. 그것은 대형 오케스트라의 미끈하고 풍성한 사운드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뿐입니다. ... 정격성이란, 과거를 구성하는 방법을 두고 일어난 현재의 다툼과 연관이 되어있을 뿐입니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바로 이겁니다. 과거는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 이처럼 정격성과 과거에 대한 문제를 더 깊게 파고든다면, 우리는 '타자'에 대한 문제에 다시 도달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오늘날의 이슈 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해 누가 특권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도 포함됩니다. 이는 음악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격운동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는 일종의 우월의식입니다."(p.186~189)
"누가 베토벤을 그렇게 연주하는가?"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일부 원전주의 애호가들의 분노에는 진리로 고양된 과거의 한 순간을 향한 퇴행적인 동경이 엿보인다. 그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 -보통 고전음악이 작곡된 바로 그 '순수한' 순간-을 손아귀에 쥐고는, 자신의 방식만이 옳다며 떼를 부린다. 사이드 말대로 이는 마치 '순결한 역사의 우리를 오염시키는 이방인은 누구인가?'라며 으르렁대는 광신적 근본주의자의 완고함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원전연주 역시 단지 과거를 재구성하는 현재적 방식 중 하나일 따름이며, 결코 '유일하게 올바른' 길이 아니다. (이는 물론 상식적인 해답이다.) 그들이 맹신하는 '역사주의적' 진리들, 작곡된 바로 그 순간의 악기와 편성을 고스란히 '재현'함으로써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의 연주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고약한 믿음은,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의 환상일 뿐이다.
우리는 이런 원전연주의 완고함에서 서구 고전음악의 케케묵은 (동시에 절대적인) 지침 중 하나인 '작곡가의 의도'를 마주하게 된다. 원전연주의 맹신자든, 표현주의의 화신이든 간에, 고전음악 연주가들은 유독 '작곡가의 의도'에 목을 맨다. 그리고 이 '작곡가의 의도'에 대한 집착은 악보의 해석(혹은 연주자의 해석적 자유)의 문제와 직결된다. 스코어를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한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텍스트의 독해에 어느 정도까지의 자유가 허락되는가" 즉, "연주자는 어느 정도까지 '자의적'으로 스코어를 해석낼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작곡가의 의도'에 어떻게 근접할 수 있으며 (혹은 주제넘은 믿음으로 어떻게 '완전한 실현'에 이를 수 있으며), 동시에 어느 정도까지 거리를 확보하고, 자유를 얻어낼 수 있는가? 물론 가장 엉터리는 "모든 것이 악보에 다 있으니, 내가 할 일은 그것을 단순하고 충실하게 다시 재현하는 것"이라는 궤변일 것이다. 바렌보임을 인용하자면,
"그런 의미에서 (악보에의) 충실함을 논할 때 그 충실함은 대체 무엇에 대한 것일까요? 여기서 언급되는 충실함의 대상이 되는 악보는 그저 아주 근사치에 가까운 빈약한 체계일 뿐입니다. ... 만약 눈 앞의 인쇄물을 단지 적혀있는 그대로만 재생하고자 시도할 뿐 그 이상 아무런 의미도 담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따라서 이것은 충실하다고 말할 수 없죠- 완전히 비겁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상호관계와 음의 정량을 이해하기 위한 수고를 거부하고,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겠다는 소리니까요." (p.168~169)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교조주의적 믿음은, 성경이나 코란을 문자 그대로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그리고 그렇게 해야한다고 강박하는) 종교적 원리주의자와 다시 한 번 엄밀한 근친성을 보인다.(이를 텍스트 페티시즘이라 부르고 싶다.) 그들이 요상한 강박 속에 놓치고 있는 것은 텍스트가 독자들에게(그리고 연주가들에게) 자명하고 투명한 지시나 명령이 아닌 히스테리컬한 수수께끼로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오래된 구조주의적 교훈에 따라 기표에 달라붙는 기의가 근본적으로 '자의적'이듯이, 악보가 가리키는 저 '작곡가의 의도' 역시 근본적으로 '모호'하다. '작곡가의 의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연주자는 절대적으로 막막한 장벽 앞에 서 있으며, 텍스트는 (즉, 스코어는) 자신의 진실을 캐내어 보라며 연주자를 침묵의 위압으로 다그친다. 연주자들의 공들인 해석과 치밀한 연주(바렌보임의 표현으로는 '소리의 물리적 구현')는 이 모호한 동시에 준엄한 심문관에게 바치는 나름의 대답이다. 요점은 텍스트가, 악보가 완벽한 형태로 (즉, 모든 의미가 훼손되지 않고, 어떤 '매개'도 거치지 않은 채) 고스란히 재현되고 구현될 수 없다는 것, 텍스트와 그것의 구현 사이에는 구성적이고 본질적인 방식으로 어떤 간극이, 어떤 불가능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장벽일 수도, 기교적인 장벽일 수도, 무엇보다 시대적인 장벽일 수도 있다. 그토록 치밀한 고증을 거쳤다는 원전주의 음악가들 조차 '우리 시대'의 산물이며, 그런 의미에서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는 작곡가가 '창조의 순간' 꿈꾸었던 그 원대하고 풍요로운 계획에 비하면 연주가의 해석과 연주는 늘 무언가 불완전하고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악보나 보면서 상상 속에서나 음악을 들어야 하는가?) 핵심은 정확히 그 반대다. 악보와 연주자의 연주 사이에 자리잡은 이러한 불가능성은 연주자로 하여금 그가 나름의 대답으로 해석과 연주를 멈추지 않게 하는 긍정적이고 실정적인 조건으로 기능한다. 상황이 근본적으로 모호하다는 것, 자신의 대답이 작곡가가 의도했던 바로 그것이었는지 확신할 어떠한 근거도 부재하다는 것이야말로 연주자가 극도의 성의로 해석과 연주를 계속하게 하는 원천이 된다. (모든 것이 완전히 실현되어 있다면 무엇하러 그것을 헛되이 반복하겠는가?) 또한 우리는 "늘 무언가 불완전하고 결핍되어" 있는 쪽은 오히려 텍스트와 스코어라는 것, 물리적으로 실현된 소리의 풍요로움과 이 풍요로움이 가져오는 격렬한 감정에 비하면 텍스트는 '그저 아주 근사치에 가까운 빈약한 체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악보는 언제나 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어떠한 스코어도 그것의 실현에 선행하여 군림하는 즉자적 실체로 행세할 수 없다. 저명한 작곡가인 동시에 도저한 연주자이기도 한 불레즈가 말하기를,
"악보나 작곡가의 의도를 하나의 보이지 않는 원천으로 간주한다면, 이에 대한 지각은 청자의 관점을 반영함으로써 이루어 집니다. 결코 원천을 그대로 직지각할 수 없습니다. 주변이 밝아지면 불이나 빛이 있다는 건 알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지휘자가 악보를, 연주자가 지휘자를, 그리고 청중이 연주자의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의 모습을 반영하는 과정은 마치 한 줄로 서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또한 청중의 입장에서 근원이라고 생각하며 바라보는 대상은 사실은 환상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실 거울에 비친 모습일 뿐이죠."(p.171~172 약간 변형해 인용)
급진적인 결론으로 나아가자. 모든 개개의 연주를 관장하는 즉자적 실체, 연주자들의 절대적 지침, '작곡가의 의도'는 다만 하나의 환상이다. 그것은 결코 '직지각'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단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곡가의 의도'는 지휘자와 악보, 연주자와 청중의 상호주관적 네트워크 속에서 유추되는 유령적 참조점이며, 우리가 결코 악보의 완전한 실현에 이를 수 없다는 외상적 진실, 필연적 무능력을 감추기 위해 등장한 구성적인 오인,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작곡가의 의도'에 근접했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우리가 꿈꾸던 바로 그곳에 도달했노라고 단언할 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다름 아닌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왜곡된 형상'일 뿐이다.
이제 다시 '정격성'으로 돌아가자. '원전연주'(authentic play)의 고고학적 집착은 어쩌면 (이미 시체가 된 작곡가의 '진정한' 의도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끔찍한 곤경을 피하기 위한 증상적 해결책이 아닌가 싶다. 작곡가가 의도했던 "진정한" 연주에 대한 강박이 그들을 작곡된 그 순간의 역사적 상황마저 그대로 재현하고 연출해야 한다는 원전주의적 강령으로 이끌었을 지도 모른다. (전혀 딴 얘기지만, 어쩌면 이는 오늘날의 이슬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종류의 지역적 독특성이나, 전근대적인 전통들이 허물어지는 '세계화', '자본주의'의 오늘날, 그들은 땅이 꺼진 듯한 궁극적 허망함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전통적인-종교적인 지침에 더욱더 매달리는 것이다. '좋았던 옛날'로 도망치는 어느 수구주의자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마주한 악보라는 종이조각-말없는 심연-에 대한 그들 나름의 대답이었을 것이다. 다소 거칠게 말해서, 고전음악을 여전히 살아 있게 하는 것은 과거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잃어버린 과거의 향유와 순수한 완벽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불가능한 욕망이다. '정격성'에 대한 갈구는 모든 여타의 해석들이 어딘가 다소 탈구되어 있고, '정격적'이지 못한 한에서 지탱된다.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지금도 위대한 작곡가들의 음악이 여전히 새로운 영혼을 얻어 연주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원전연주 역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스코어의 전례없는 지평을 열어젖혔다는 의미에서 혁신적인 결실이다. 즉,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 해석적 경향이 아닌 그와 함께 수반되곤 하는 '태도'의 문제다.)
별볼일 없어 보이는 음표, 사소한 악상기호 조차 우리에게 무거운 침묵으로 제 자신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가능한 수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 자신을 어떤 밸런스로, 템포로, 프레이징으로, 하나의 이야기로서, 총체로서 구원해낼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시대마다, 연주자마다 다를 것이고, 또한 그러므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작곡가의 의도'가 '텅 빈' 지침으로 제공되는 한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