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항의 인문학 -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 ㅣ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김정하 옮김 / 마티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11.3.3
-
"그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유럽적인 (그리고 유럽중심적인) 사명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는 그 사명 속에서 인간 역사의 단일성을 믿었고, 근대 문화와 민족/국가주의의 호전성 속에서도 해롭고 또는 적대적일지 모르는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으며, 자신의 관점이 지닌 한계와 지식의 불충분함을 건강하게 인식하고서 멀리 떨어진 저자의, 그리고 먼 역사적 시대의 내적 삶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낙관주의를 가슴 깊이 믿었습니다."(p.138)
이 글에서 칭송한 아우어바흐의 미덕은 사이드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리라.
E.사이드의 책은 늘 내 마음을 흔든다. 역자가 "난해하고도 장황한, 그렇지만 아름답고 절절"하다고 표현한 그의 문장은 독자를 적당히 긴장시키면서도 사려깊은 온기가 묻어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그의 '낙관주의', 스스로 인식의 지평이 지닌 한계를 겸허하고 '건강하게' 인정한다면, '해롭고 적대적일지 모르는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진솔하고도 낙관적인 믿음이다. 자기가 그어놓은 테두리에서 한발짝도 나가길 두려워하고, 남이 그 경계선에 살짝 닿는 것조차 '폭력'이라 나무라는, 한없이 여리고 까다로운 정신의 자폐성이 마치 반짝이는 장신구처럼 과시되는 오늘날에 말이다. (그리고 이 장신구에서는 나도 자유롭지 않다.)
사이드는 묻는다. 우리는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학교나 대학에, 일하는 장소에, 특정한 국가에 특정한 시간, 상황 아래 놓여 있다. 이 주어진 지평과 제한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님, 그것들에 도전해야 하는가? 사이드가 주장하는 인문주의적 '저항'은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에 도전하는 대담하고 비판적인 정신을 뜻한다.
"인문학자의 임무는 어떠한 위치나 장소를 점하는 것도, 어느 곳에 그저 속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문학자는 우리의 사회, 누군가의 사회, 타인의 사회에서 문제시되며 유통되는 사상과 가치에 내부인이면서 외부인이어야 합니다." (p.113)
사이드의 인문주의(humanism)가 '인간'을 폐기한 현대 사상가들의 냉소와 조소 속에서 빛나는 이유는, 인간 본연의 한계인 '비극적 결함'-어느 누구도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지평에서 자유롭지 않다-을 인정하고 이에 저항하는 치열함과,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우호적이고 정중한 지성으로서 서로의 관점에서 서로를 이해하려 애쓴다면" 타자와의 "공감어린 대화"가 가능하리라는 절실한 낙관 덕분이다. (알튀세르식으로 : '나는 이데올로기 속에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진정으로 이데올로기의 악순환 속에서 벗어난다.) 이는 오늘날 수많은 포스트모던의 담지자들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든 '낯선 이에 대한 환대', '친절함'의 미덕이다.
하지만 인간만이 인간이 이뤄놓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그의 비코적, '인문주의'적 믿음이 진정한 광채를 얻는 순간은 그가 '추방의 장소'에 머물기를 자처할 때이다.
"지식인이 임시로 거하는 집은 유감스럽게도 그 안에서 누구도 후퇴하거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긴급하고 저항적이며 비타협적인 '예술의 영역' ... 오직 이 불안정한 추방의 장소 속에서 포착될 수 없는 것의 어려움을 포착할 수 있으며 어찌 되었든 애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p.198)
그가 '예술'이라 부르는 비타협의 공간, 해명되거나 해소될 수 없는 외상의 공간에 서있기를 고집할 때,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만 불가능한 것이 일말의 가능성으로 움튼다는 사실을 단언할 때, 그는 비로소 단순한 낙관을 넘어선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필연적인 결함'을 숨김없이 껴안을 때야 가능하다는, 그 불치의 결함이 인간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는 '인간적인' 깨달음으로의 도약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