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시집에서 굳이 한 계절을 표방하는 시들만 모여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어느 시인의 특정 시집을 보면 연상되는 계절이 있기도 한다. 


안도현의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에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내가 특히나 좋아하는 '가을의 소원'이라는 시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시집이 본격적인 먹방 시집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음식에 대한 묘사를 기가 막히게 하던 백석의 계보를 이어받은. 실제로 이 시집에서도 굳이 '백석 생각'이라는 시를 넣어서 시인 스스로도 백석의 적자임을 은연중에 표방하고 있기도 한다.


아무튼 먹방이랑 가을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답하겠다.

가을, 하면 천고마비(天高馬肥) 아니고 천고묘비(天高猫肥)의 계절이니까. 암.

그리고 저 뻔뻔한 고양씨 리쓰양에게는 찍으려고 꺼낸 시집따위는 단지 약간 불편한 베개일 뿐이다.




 

 

 

가을의 소원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 풀처럼 더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ㅡ시집『간절하게 참 철없이』, 창작과 비평사(2008)

 

 



코로나로 인해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멍 때리는, 소위 적막의 포로가 되는 일은 요원해졌다만. 게을러졌고(어쩌면 일상인), 도도록 쏟아지는 밤의 빗방울을 잠깐 맞았고, 어제는 밤에 책을 읽다가 혼자 울었고, 아직 초록이 만연해서 실감은 안 나지만 초록빛과 햇빛이 바래져가는 걸 느끼고 있고. 이쯤 되면 시인이 말한 가을의 소원을 얼추 충족하고 있는 중이려나. 가을로 접어드는 진행도 약 37%쯤?





 

건진국수

안도현

 

 

 

 

 

  건진국수에는 건진국수,라는 삼베 올 같은 안동 말이 있고 안동 말을 하는 시어머니가 여름날 안마루에서 밀가루반죽을 치대며 고시랑거리는 소리가 있고 반죽을 누르는 홍두깨와 뻣센 손목이 있고 옆에서 콩가루를 싸락눈처럼 술술 뿌리는 시누이의 손가락이 있고 칼국수를 써는 도마질 소리가 있고 멸치국물을 우리는 칠십년대 녹슨 석유곤로가 있고 애호박을 자작하게 볶는 양은냄비가 있고 며느리가 우물가에서 펌프질하는 소리가 있고 뜨거운 국물을 식히는 동안 삽짝을 힐끔거리는 살뜰한 기다림이 있고 도통 소식없는 서방이 있고 때가 되어 사발에 담기는 서늘한 눈발 같은 국수가 있고 찰방거리는 국물이 있고 건진국수 옆에 첩처럼 따라붙는 조밥이 있고 열무며 풋고추며 당파를 담은 채반이 있고 건진국수에는 누대의 숨막히는 여름을 건진국수가 안동 사람들을 건졌다는 설이 있다

 

 

 

 

 

ㅡ시집『간절하게 참 철없이』, 창작과 비평사(2008)

 

 

 

 

 소면, 잔치국수, 멸치국수 등등. 칼국수 말고 멸치육수를 베이스로 해서 만드는 국수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말은 내게는 낯설다. 부모님이 청송분이셔서 어릴 적부터 건진국수라고만 불렀기 때문이다. 안동은 워낙에 유명해서 다들 잘 알지만 안동과 청송은 언어적으로 거의 같은 권역이라고 보면 된다. 대구와 영천 정도의 지역적 차이가 있을 똥 말 똥. 그래서 이 시가 더욱 반가웠다.


잔치국수라고 말할 때보다 건진 국수라고 말할 때 국수면발이 더 탱글탱글하고 육수맛도 더 시원한 느낌인데 이 시를 읽으면 공감이 되어서. 잔치국수가 아니라 건진 국수를 못 먹어본 사람은 안동에 여행갈 때 '굳이' 건진국수 한 그릇을 시켜서 먹어보기를 바란다. 때로 언어는 이제껏 몰랐던 음식의 새로운 맛을 알게끔 하기도 하니까.






 

무밥

안도현

 

 

 

 

 

무밥 한 그릇이

소반 위에 놓여 있다

소반이 적막하여서

무밥도 적막하여서

송송 채를 썬

흰 무의 무른 살에 스민

뜨거움도 적막하여서

무밥 옆에 댕그라니 놓인

양념간장 한 종지도

옛적에 젊은 외삼촌이

여자를 만난 것처럼

가난하게 적막하여서

들척지근하고 삼삼한

이 한 저녁을

나는 달그락달그락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ㅡ시집『간절하게 참 철없이』, 창작과 비평사(2008)

 

 

 



우리집에서 겨울에 수시로 하는 메뉴가 바로 콩나물 갱죽과 무밥이다. 어마마마께서 반찬 여러 개 하기 귀찮으실 때나 입맛이 없으실 때, 왠지 추워서 뭔가 뜨끈뜨끈한 걸로 간단하게 몸을 데우고 싶을 때 유용한 메뉴가 무밥이다. 


무를 체 썰어서 쌀 밑에 깔고 물을 넉넉하게 부으면 끝인 것 같지만. 무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양념장! 진간장, 굵고 가는 고춧가루 두 종류, 설탕, 간 마늘, 참기름, 통깨, 가늘게 쫑쫑 썬 부추와 대파 넣고 쉐킷쉐킷. 밥이 다 되면 물기 많은 밥 반, 무 반 골고루 섞어퍼서 뜨끈할 때 양념장을 투하한 다음에 취향대로 비벼먹으면 꿀맛이다. 이거 비유 아니고 진짜 무와 밥의 단맛이 어우러져서 달다구리한 맛이 난다. 양념장에 청양고추를 조금 썰어넣으면 중간중간 매콤한 맛이 입 안에서 탁탁 터지면서 더 감칠맛나게 만든다.


춥고 허기진 겨울밤, 갓 퍼낸 무밥을 후후 불어가면서 한 그릇 먹고나면 이해할 수 있을 법도 하다. 이 가난하고 적막한, 마치 젊은 시절 외로웠던 외삼촌이 잠시 만났던 소박한 시골처녀의 자그만 온기를, 딱 둘이 슬며시 잡아봤던 손의 온기만큼만 따뜻해서 더 잊히지 않을 70년대의 겨울을, 내 마음이 잠시 수런거리고 달그락거리던 그 저녁을.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역시 좋아하는 메뉴가 나오는 시를 정했다.

이 시를 읽고나면 섬세한 감성을 가진 사람은 아마도 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울먹일지도 모른다.

가슴으로는 울먹거리면서도 입으로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줄줄 흘리는 나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어스름은 이미 예전에 내려앉았고 지금은 밤.

불 끄고 잘 시간이다.

아직까지 깨어있는 불면의 당신,

지금쯤은 고요히 꿈없는 잠에 스며들 수 있기를.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ㅡ시집『간절하게 참 철없이』, 창작과 비평사(20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진(女眞)

박정대






문득 치어다본 하늘은

여진의 가을이다

구름들은 많아서 어디로들 흘러간다

하늘엔 가끔 말발굽 같은 것들도 보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여진의 살내음새 불어온다

가을처럼 수염이 삐죽 돋아난 사내들

가랑잎처럼 거리를 떠돌다

호롱불,

꽃잎처럼 피어나는 밤이 오면

속수무책

구름의 방향으로 흩어질 것이다

어느 여진의 창가에

밤새 쌓일 것이다

여진여진 쌓일 것이다





ㅡ시집『그녀에서 영원까지』, 문학동네(2017)








입추 지나고 처서 지나고 백로 지나고나면 신기하리만큼 하늘이 저 멀리 달아나 있는 걸 문득 느낀다.

이 시기의 하늘은, 먹구름이 비오기 직전의 새떼들처럼 낮게 드리우던 여름의 하늘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구름은 드넓은 푸른 초원을 뛰어다니는 양떼 같고

그 많은 양떼들이 발자국을 내어도 표가 안 날 만큼 광활한 푸르름이 펼쳐져 있다.

거기서 시인은 문득 여진을 떠올렸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언젠가 살았던 땅, 거칠 것 없는 만주벌판.

지금은 조금만 둘러봐도 시선을 막아서는 산맥과 빌딩숲 안에 갇혀 있지만

우리의 근원은 사실 한반도 안쪽이라기보다는 저 멀고 먼 만주벌판에서 자유로이 뛰어다니는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구름이 말발굽 아래 이는 먼지처럼 뭉게뭉게 피어나는 곳.

여진여진, 하고 핏줄에 새겨진 그리움이 우는,

왠지 야만의 살냄새가 맡아질 것만 같은 가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두워진다는 것 창비시선 205
나희덕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만(小滿)

나희덕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은 빈 것도 같게

조금은 넘을 것도 같게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

소만(小滿))지나

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

이제 무성해지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

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소만(小滿) 지나면 들리는 소리

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

이 부끄러운 발등을 좀 덮어다오

ㅡ시집『어두워진다는 것』, 창작과 비평사(2001)




버스를 타고 차창을 내다보면 온통 초록이 시야를 뒤덮는다.

음력 날짜와 절기가 기록되어 있는 농협 하나로마트 달력을 쓰시는 어머니 덕분에 나는 절기마다 네이버를 검색해본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세시풍속사전에는 이런 설명이 들어있다.





소만

滿 ]


정의

24절기 중 여덟 번째 절기. 양력으로는 5월 21일 무렵이고 음력으로는 4월에 들었으며, 태양이 황경 60도를 통과할 때를 말한다. 소만(滿)은 입하()와 망종() 사이에 들어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滿]는 의미가 있다.

내용

이때는 씀바귀 잎을 뜯어 나물을 해먹고, 냉이나물은 없어지고 보리이삭은 익어서 누런색을 띠니 여름의 문턱이 시작되는 계절이다. ‘농가월령가()’에 “4월이라 맹하(, 초여름)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라고 했다. 이때부터 여름 기분이 나기 시작하며 식물이 성장한다. 그래서 맹하는 초여름이라는 뜻인 이칭도 있다.
소만 무렵에는 모내기 준비에 바빠진다. 이른 모내기, 가을보리 먼저 베기, 여러 가지 밭작물 김매기가 줄을 잇는다. 보리 싹이 성장하고, 산야의 식물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모내기 준비를 서두르고, 빨간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다. 모판을 만들면 모내기까지 모의 성장기간이 예전에는 40~50일 걸렸으나, 지금의 비닐 모판에서는 40일 이내에 충분히 자라기 때문에 소만에 모내기가 시작되어 일년 중 제일 바쁜 계절로 접어든다. 또한 소만이 되면 보리가 익어가며 산에서는 부엉이가 울어댄다. 이 무렵은 ‘보릿고개’란 말이 있을 정도로 양식이 떨어져 힘겹게 연명하던 시기이다. 산과 들판은 신록이 우거져 푸르게 변하고 추맥()과 죽맥()이 나타난다.
중국에서는 소만 입기일()에서 망종까지의 시기를 다시 5일씩 삼후()로 나누어, 초후()에는 씀바귀가 뻗어오르고, 중후()에는 냉이가 누렇게 죽어가며, 말후()에는 보리가 익는다고 했다. 씀바귀는 꽃상추과에 속하는 다년초로서 뿌리와 줄기, 잎은 식용으로 널리 쓰인다.
초후를 전후하여 죽순을 따다 고추장이나 양념에 살짝 묻혀먹는 것도 별미이다. 또한 냉잇국도 늦봄이나 초여름에 많이 먹는다. 보리는 말후가 되면 익기 시작하므로 밀과 함께 여름철 주식을 대표한다.
모든 산야가 푸른데 대나무는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한다. 이는 새롭게 탄생하는 죽순에 영양분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을 정성들여 키우는 어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봄철의 누런 대나무를 가리켜 죽추()라고 한다.

관련속담

이 무렵에 부는 바람이 몹시 차고 쌀쌀하다는 뜻으로 “소만 바람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만 [小滿] (한국세시풍속사전)

 



5월말에 강원도 산간 설악산 일대에 눈이 왔다는 뉴스를 봤는데

과연 소만(小滿)에 대한 속담이 이토록이나 맞구나 싶다.

그리고 강원도 산골에서 농사짓는 친구가 비 오는 날 찍은 모내기 사진을 보내왔다.

아, 아직까지 우리는 농사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니구나.

그러니까 이 농번기를 감안해서 지은 절기들도 낯설기만 하지는 않은 느낌이었다.



봄과 겨울과 초여름이 한꺼번에 혼재된 5월이다.

빛과 어둠이 적절하게 뒤섞여있는 나희덕의 초기 시집을 읽는다.

가장 대표적인 시는 표제작인 '어두워진다는 것'이다만.

마침 오늘과 들어맞는 절기에 관한 시가 보여서 올려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이 시려서 시월인가, 아니면 
詩가 찾아들어서 시월인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2-08 0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학과 지성사 500권 기념시집의 발문에서 언급한 

시의 기능과 무능에 대한 정의는 옳지 않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시의 기능이라는 말 자체는 성립할 수 없다.

시는 무능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하는 장르다. 

나는 시의 효용은 바로 그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것이 효용가치로 재단되는 현대사회에서, 무능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태생적으로 시가 가진 한계이자 곧 가능성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