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女眞)

박정대






문득 치어다본 하늘은

여진의 가을이다

구름들은 많아서 어디로들 흘러간다

하늘엔 가끔 말발굽 같은 것들도 보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여진의 살내음새 불어온다

가을처럼 수염이 삐죽 돋아난 사내들

가랑잎처럼 거리를 떠돌다

호롱불,

꽃잎처럼 피어나는 밤이 오면

속수무책

구름의 방향으로 흩어질 것이다

어느 여진의 창가에

밤새 쌓일 것이다

여진여진 쌓일 것이다





ㅡ시집『그녀에서 영원까지』, 문학동네(2017)








입추 지나고 처서 지나고 백로 지나고나면 신기하리만큼 하늘이 저 멀리 달아나 있는 걸 문득 느낀다.

이 시기의 하늘은, 먹구름이 비오기 직전의 새떼들처럼 낮게 드리우던 여름의 하늘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구름은 드넓은 푸른 초원을 뛰어다니는 양떼 같고

그 많은 양떼들이 발자국을 내어도 표가 안 날 만큼 광활한 푸르름이 펼쳐져 있다.

거기서 시인은 문득 여진을 떠올렸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언젠가 살았던 땅, 거칠 것 없는 만주벌판.

지금은 조금만 둘러봐도 시선을 막아서는 산맥과 빌딩숲 안에 갇혀 있지만

우리의 근원은 사실 한반도 안쪽이라기보다는 저 멀고 먼 만주벌판에서 자유로이 뛰어다니는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구름이 말발굽 아래 이는 먼지처럼 뭉게뭉게 피어나는 곳.

여진여진, 하고 핏줄에 새겨진 그리움이 우는,

왠지 야만의 살냄새가 맡아질 것만 같은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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