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도 중순이 지난 무렵에 드디어 직구로 산 홀베인 수채물감이 왔다. 그전에 온 쭝궈산 팔레트는 빈팬이 들어가지 않아서 고생고생하다가 카페 동생의 힘과 지혜로 어찌어찌 틀이 잡혔다. 힘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면 팔레트 안 레일 배치가 삐뚤어져서였다.
더위에 지쳐 힘들게 영접한 물감을 잠시 내팽개쳐두다가 약간 선선해질 무렵에 고체 케익 만들기를 시작했다. 빈팬에 물감을 균일하게 짜고, 붓으로 끝을 마무리해서 종이에 칠하고. 이렇게 단순 노동의 연속. 인간은 지극히 기계적인 상황에서 이토록 고요해질 수 있겠구나 싶다.
이놈의 강박증은 물감을 담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넘치지 않을 것, 테두리에 묻지 않을 것, 평평할 것. 이렇게 담기까지 빈팬을 좌우사방 마구 흔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물감도 고달플 것 같다. 알고보면 그다지 많은 색이 필요치는 않을 것 같은데, 욕심이 나는 건 정말 솔직한 본능 때문. 파스텔과 색연필만 해도 스무 색이 넘어가버리면 쓰는 색 위주로만 쓰더라.
그럼에도 나는 48색을 갖춰놓고 싶었지만. 미묘한 색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많은 색도 무의미하다. 덧붙여, 나도 그렇다. 많은 걸 움켜쥐고 싶었으나 현재 곁에 남은 건 즐겨 쓰는 몇 가지뿐. 이로써 텅 빈 나를 자꾸 다독인다. 다 채워넣지 않아도 괜찮다고. 빈 건 빈 상태로 그냥 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