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어도 괜찮아 책읽는 가족 49
명창순 지음, 최정인 그림 / 푸른책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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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조용한 집안에 관리실에서 하는 안내방송이 쨍쨍 울린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거실로 나오니 제차 확인 방송이 나온다.
5월 1일 월요일로 예정되었던 아이들의 학교 운동회가 황사로 5월 3일로 연기되었다는 방송이었다.
아이들과 남편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고 시계를 보니 아직 여덟시가 안 됐다.
일요일만은 느긋하게 늦잠도 자고,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다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는 데 다시 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침대로 들어가기도 뭐하고 해서 TV를 볼까하다가 집어든 책이다.
불안에 떠는 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엔 힘이 잔뜩 들어가 난간을 꼭 잡고 있는 소년의 그림이 왠지 가슴에 휘잉 바람을 일으킨다.

잘 있어라, 나무야.
잘 있어라, 그네야.
잘 있어라,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아.
나는 이제 울지 않아.
나는 이제 울고 싶지 않아.
이제 그만, 모두들, 안녕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있는 소년, 그것도 아직은 어리기만 한 5학년 소년에게 얼마나 힘들 일이 있기에 세상의 나무, 그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게 쓸쓸한 안녕을 고할까 싶었다.

평범하던 준서 네는 아버지가 허리를 다쳐 힘든 일을 할 수 없게 되면서 부모는 자주 싸우게 되고 어느 날 엄마는 가출을 한다.
엄마의 가출 뒤 아버지는 준서에게도 폭력을 휘두르고 며칠씩 집을 비우기도 한다.
그럴 때면 준서는 학교 급식과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학교 준비물 같은 것은 챙겨갈 엄두를 못 낸다.
아버지를 기다리며 동네의 떠돌이 개 도돌이와 친구가 되기도 하고, 중국집에서 배달 일을 하는 번개 형에게 도움을 받기도 한다.

등장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어디에서고 흔히 만날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고 나와 닮은 모습이라 더 미워졌다.
준서의 엄마는 아빠의 무능과 폭력을 피해 집을 나간다.
자신들이 선택해 결혼을 했고, 준서를 낳아 기르며 행복해 하기도 했을 엄마는 아무 대책도 없이 아이만 남겨두고 현실을 피해 사라져 버린다.
집에 남겨진 아이가 당한 일들을 뻔히 짐작할 수 있었는데도 무책임하게도 자신만 그 구렁텅이에게 빠져 나가 버린다.
그리고 술만 마시면 “우리 부모는 나를 버렸지만 나는 너를 끝까지 키우는데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냐.”며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준서 아빠에게서는 연민이 생겼다.
가난과 함께 대물림되는 폭행들로 인해 일어나는 가족간의 무시무시한 사건 뉴스를 보며 손가락질하기에 바빴는데 어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치료를 해야 하는 사람은 아빠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라는 게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게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니 무작정 아빠를 혼자 두는 것보다는 누구에게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과 귀한 아들을 소중히 여기는 방법을 가르쳐 진정으로 좋은 아빠이자 가장이 되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하지 않을 까하는 한다.

가장 나를 낯 뜨겁게 했던 혜지 엄마는 나와 너무도 닮아 있기에 애써 태연스럽게 읽어 나갔다.
번개 형과 준서와 보낸 비 오는 날 혜지의 일탈로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린 듯 착각하는 엄마가 바로 나이기에 도서실안에 선생님과 마주 앉아 있는 부끄러운 얼굴이 내가 된 듯 했다.
하지만 꽃씨를 훔치는 아이들에게 선뜻 동조할 수 없었고, 으뜸 슈퍼의 물건을 훔치는 아이들 틈에 얼떨결에 끼어 있었지만 그 앞을 지날 때면 가슴 졸이며 달음박질을 하고 다친 도돌이를 안고 동물병원으로 향하는 준서를 보며 아직은 작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이렇게 준서가 마음에 끈을 놓치지 않은 건 커다란 힘의 큰 도움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도 가난하고 아직 어린 고아지만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먼저 살필 줄 아는 번개 형과 으뜸 슈퍼의 깜깜 할머니의 작은 관심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다행히 엄마가 준서를 찾아와 쉼터로 떠날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 수많은 준서와 무관심 속에 방치된 지호 같은 아이들이 있기에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자꾸 귓가에 준서의 말이 맴돈다.
‘엄마가 언제까지 나를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킬지, 아버지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뉘우치고 반성을 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다.나 때문에 한쪽 눈을 잃은 도돌이도 어쩔 수 없이 내 품에 안긴 것처럼, 나는 도돌이를 잘 돌보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어쩌면 내가 도돌이를 돌보는 게 아니라 도돌이가 내게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주는 걸지도 모른다,’

올 봄 운동회는 “다 함께 참여하는 놀이 한마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학부모와 함께하는 코너들로 채워졌다.
엄마나 아빠가 아이를 업고 달리기도 해야 하고 쪽지에 적힌 대로 부모님과 함께 달려야하는 코너도 있다.
떠들썩한 축제날 분명 운동장 한쪽에 코가 쑥 빠진 채로 다른 이름의 준서가 앉아 있을 것이다.
아직도 내 아이만을 꼭 품에 안으려는 어미닭 같은 내 마음은 며칠 새 쉬 열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이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 깜깜 할머니도 번개 형도 내 맘속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에 책장을 덮는 순간 우울하지 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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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5-04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이런 책들은 읽기가 겁이 납니다.
좋은 글이ㅣ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