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 전경린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6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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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랍지 않다. 스물 한 살에 만난 효경과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만이 일생의 행복이라 여겼던 미흔. 그녀는 효경의 외도를 알게 되고 무너져내린다. 끝없는 우울과 두통. 특단의 조치로 그들 가족은 시골로 내려가게되고, 그곳에서 미흔은 한 남자, 규를 만나 그와 ‘구름 모자 벗기 게임‘을 시작한다. 네 달동안 관계를 지속하되 먼저 사랑을 고백하는 쪽이 지는 게임. 미흔은 지기 위해 그 게임에 뛰어든다. 그리고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을 지나, 그녀 자신이 된다. ​

사랑, 결혼, 인생 그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무수한 나와 타인의 가면들. 가면들을 전부 집어던졌을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란 생이란 진정 무엇일까? 오랜만에 읽는 전경린의 소설이었다. ‘욕망과 불온함을 다루는 귀기의 작가‘라는 설명은 차치하고, 소설을 읽는 내내 굽이굽이 흐르는 표현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댔다. 이런 기쁨은 2010년대의 작품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상당부분 필사를 했는데, 공교롭게도 필사한 부분의 거의 대부분이 미흔의 게임 상대였던 규의 말이었다. 사랑을 하지 않는다던 그의 말. 외로움과 상처를 가진, 그래서 미흔과 서로를 단번에 알아본 그 남자의 말. ​

상당히 에로틱한 장면들도 많아서 불륜소설인가 싶겠지만 이 소설을 꼭 그렇게 볼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규의 존재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지워지고 미흔만이 남기 때문이다. 소설의 첫 도입부에서처럼, 미흔과 효경만이. 이 소설은 그들 둘이, 특히 미흔이 질척거리는 생을 지나오며 자기 자신을 탐구해나가는 이야기다. 흔들림 없는 사랑, 평온한 가정이라는 환상, 은밀하게 들끓는 욕망, 관능적인 제스쳐들…. 변영주 감독의 <밀애(2003)>로 영화화되었다고 하는데 영화 속의 미흔은 어떻게 그려졌을지 궁금하다. ​

왜인지 생이 참 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어떤 결과가 도래하든 책임질 수만 있다면. 혹은 잘 도망갈 수 있다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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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혼자에게
이병률 지음 / 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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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시인의 산문집 하면 웃긴 일화가 있다. 그의 첫 산문집 <끌림>이 한창 인기였던 10여년 전. 그 때의 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유명한 책은 별로 읽고 싶지 않았고(...) 남들 다 <끌림>을 읽길래 고집스럽게 그 책을 피해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도서관에서 검은 표지를 한 정체불명의 책을 발견했고, 집어들었고,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책 제목도 확인 안하고 본문을 읽었나 싶은데, 그 책이 바로 겉표지를 벗긴 <끌림>이었다. 그 도서관에서는 책의 겉표지를 벗기고 정리해두는터라 흰색 표지의 <끌림>만을 염두에 두었던 나는 미처 피하지 못했던 것. 기억이 다소 낭만적으로 왜곡된 것 같기는 하지만, 여하튼 그게 저자의 책과의 첫 만남이었다. <끌림> 이후에는 저자의 책이 출간되면 그냥 공손히 읽고 있다.



<혼자가 혼자에게>는 5년만에 출간된 저자의 네번째 산문집이다. 시인의 글, 사진, 여행. 그동안 저자의 산문집을 읽어온 이들이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이 책은 그 기대를 충실히 이행하는 책일것이다. 요즘 갖은 이유로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 책을 읽을 때 만큼은 걱정 없이 편안했다.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모든 이들은 각자의 외로움과 고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무엇으로도 해갈될 수 없는. 순간 잊을 수는 있겠지만 결국 스스로 다스릴 수밖에 없는 그런 외로움과 고독 말이다.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이기도 해서 ‘혼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번 산문집이 특히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아, 그리고 저자가 생일때마다 혼자 여행간다는 대목에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는데 왜냐하면 내가 딱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생일날 축하를 기대하는 것도 싫고 특별한 날이 되는 것도 싫어서 그냥 혼자 떠난다. (이승우의 <생의 이면>과 함께…) 성인이 된 이후 매년 그래왔다. 그런데 이게 하나의 의식처럼 되어서 참 곤란해졌다. 생일을 아무것도 아닌 날로 여기려 한 것인데 오히려 더 특별하게 챙기는 셈이 되어버렸으니. 문득 저자의 생일들이 궁금하다. 어떤 생일들을 보내왔을지.



아무튼. 결국 모두가 혼자일수밖에 없으니 혼자여도, 혼자여서 괜찮은 날들이 계속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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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유령일 뿐 민음사 모던 클래식 71
유디트 헤르만 지음, 박양규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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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디트 헤르만은 내가 꽁꽁 숨겨뒀다가 읽을 때가 왔을 때 한 권씩 꺼내어 야금야금 읽는 작가다. (줌파 라히리,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경우가 비슷하다.) 문장 문장을 음미하면서 책을 읽고 싶었고, 고전보다는 현대 문학쪽에서 찾고 싶었고, 외국 문학을 읽고 싶었다. 서가를 배회하다보니 고른 것은 결국 유디트 헤르만의 <단지 유령일 뿐>.



원래 나는 단편을 즐겨 읽지 않는다. 최근 몇 년 한국문학을 읽느라 단편집을 자주 읽기는 했지만 원래 나는 무조건 장편소설파다.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미친듯이 몰입해 읽는 것을 좋아한다. 시리즈물이라면 더 좋다. (그렇지만 시리즈간의 번역이 더디거나 순서가 다르게 번역 출간되는 것을 참기 힘들어하는 스타일이다.) 어쨌든 내 말은 <단지 유령일 뿐>이 단편소설이라는 것이다.



사실 쑥쓰럽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졌다. 혹은 뒤에 실린 작품들이 나와 맞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앞에 실린 두세작품은 마음에 드는 구절을 손 필사까지 해가며 꽤 꼼곰히 읽었다. 뭔가 남는 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루스(여자 친구들)‘,‘아쿠아 알타‘,‘뚜쟁이‘ 정도다.



유디트 헤르만의 문장은 섬세하다. 일상적인 사건들 속에서 행불행을 세밀하게 포착하는 작가다. 그래서 문장을 건너뛰는 식으로는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꼼꼼히 주의를 기울여 읽어야 주인공의 상황과 심리에 제대로 젖어들 수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주말 천천히 읽어서인지 이 책을 떠올리면 조금 감상적인 기분이다. 책을 읽으며 순간의 인연, 이어지고 끊어지는 인연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쩌면 돈도 명예도 자존심도 크게 중요치 않고 그냥 그 순간이, 당신(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아무도 아니든간에, 타인.)과 함께 지나는 그 순간만이 소중하고 값진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순간이 우리의 마음 속에 남기는 궤적들은 평생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비오는 가을이라 그런가.



어쨌거나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기억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신들과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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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난임으로 6년째 엄마가 될 준비를 하고있는 저자의 에세이 <네가 오는 그날까지>.



사실 나는 나와 관련이 있거나 관심이 있는 주제의 책이 아니면 잘 들춰보지 않는 편이다. 이 책은 출판사에서 보내주셔서 읽기 시작했는데, 지금 당장 나눈 아이는 커녕 결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있는 터라 큰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육아에 대한 책은 많아도 난임에 대한 책은 없었다’는 저자의 고백과, 6년이라는 짧으면 짧지만 길다면 긴 시간동안 쉽게 드러내지 못한 채 고통을 겪어왔다는 이야기를 읽자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이 책이 저자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는 물론, 그냥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아 스스로를 들들볶고 있는 이들에게도 꽤 도움이 될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저자는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스스로의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에게는 글과 명상을 통해 어지러운 감정들을 비우고 진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과 새로운 배움에 도전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적는다. 개개인이 종류는 다르겠으나 살면서 누구나 어려움을 겪는다. 비록 저자는 난임이라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지만, 삶의 막막함에 가로막힌 이들이라면 누구나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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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진화하는 페미니즘
권김현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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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출간된 권김현영의 단독 저서! 페미니즘을 알게되고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빼놓지 않고 읽었던 것이 여성학자 정희진과 권김현영의 글들이다. 정확하고 명료한 그들의 글은 나를 더 예민하게, 더 깨어있게 만드는 원동력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는 저자 권김현영이 2003년부터 2019년까지 기고했던 글들을 모으고 다듬어 묶은 것이다. 여성혐오와 페미니스트에 대한 명료한 정리, 예민한 시각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2000년 이후 수면위로 떠오른 일련의 사건들(<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이슈들, 안희정 성폭력 사건, 버닝썬 사건 등)에 대해서까지 단 한 편도 허투루 읽을 수 없는 글들이 실려있다. 저자의 언어는 아주 명료하다. 내가 정확한 언어로 설명하지 못했던 것들을 아주 시원하게 짚어준다. 책을 읽으면서 또 한 번 많이 배웠다.



오늘날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이 책, 꼭 읽어봐야 한다. 이 책에 실려있는 것은 여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차별과 혐오가 무엇인지 더 예민하게 감각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바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개인이 바뀔 때 사회가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페미니즘은 진화한다. 발전한다. 함께한다면 당연히 가능하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므로 더 많은 이들이 나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완벽할 수 없고, 완벽하지도 않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발전하기를 바란다. 그 출발점으로 자신있게 권한다. 나는, 우리는,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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