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렬지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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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옌렌커의 소설은 치열하다. 분량면에서도 어마어마하지만 가장 독보적인 것은 소설을 끝까지 밀고나가는 집요하고도 맹렬한 힘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을 때면 종종 압도당하는 기분이 든다. 압사까지는 아니어도 기절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이번에 번역 출간된 <작렬지>는 ‘자례‘라는 허구의 도시가 향촌에서 대도시로 승격되기까지의 일대기를 숨가쁘게 그려낸 소설이다.



이 소설은 ‘자례‘가 대도시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쿵씨 가문의 둘째 아들 쿵밍량의 인생을 함께 따라가며 보여준다. 쿵밍량이 어떻게 촌장 자리를 얻어내고 마을을 도시로 발전시켰는지가 600페이지동안 아주 숨가쁘게 진행된다. 그 중심에는 한 개인의 욕망이 있다. 물론 마을의 발전은 유흥업소와 기타 향락시설이 있기에 가능했고 온갖 로비와 뒷돈이 있기에 가능했다. 소설의 처음에는 ‘다 함께 우리 마을을 발전시켜서 자랑스러워하자‘던 쿵밍량은 점차 개인의 권력만을 탐하는 인물이 되어간다. 사실 쿵밍량과 그의 아내인 주잉, 형제인 쿵밍광, 쿵밍야오, 쿵밍후이를 비롯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다 기능적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이들이 개개인으로 다가오기보다는 거대한 서사에 등떠밀려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따로 애쓰지 않았지만 인물보다는 소설의 흐름에 집중하며 읽게 되었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혼란스러운 오늘날 중국에서 삶에서도 보이지 않고 대지에서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거친 뿌리‘를 포착하고자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규칙과 과정이 목적으로 대체된‘ 오늘날의 중국을 그려내고자 노력했다고 덧붙인다. 많은 독자들이 예상하겠지만, 옌렌커의 다른 몇몇 책들과 마찬가지로 <작렬지> 또한 중국의 현실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어 금서로 지정될 위기를 겪었다고. 현대 중국의 가파른 성장이, 휘황찬란한 대도시들과 황량한 볼모지의 공존이, 그 밖의 모든 기이함들이 궁금하다면 이 책이 조금은 답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서평단 활동으로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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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 박상영 에세이
박상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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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그리고 <대도시의 사랑법>의 박상영 작가의 첫 에세이,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제목부터 심금을 울리는 이 책에서 저자는 녹록치 않은 직장생활과 소설가로서의 이중생활을 폭로하며 야식과 다이어트간의 끊임없는 투쟁을 고백하고 있다. 직장인이라면, 다이어트를 결심한 적이 있다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책.



언젠가 인터뷰에서 새벽에 일어나 출근 전까지 카페에서 소설을 썼다던 저자의 일화를 읽고 경악했던 적이 있다. (아니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 에세이를 읽고 조금 안심했다. 저자가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결심하고 번번이 실패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그도 보통 사람(?)임을 확인했다. (다행이다. 나만 한심한게 아니어서.) 오히려 저자는 그 당시 자신은 매일 무너져있었노라고 고백한다.



그동안 저자의 소설에 매료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솔직함 때문이다. 어떤 때는 지나치게 자조적이고 그래서 유머러스한 문장들과 그 문장들이 그려내는 주인공들이 좋았다. 그런면에서 이번 에세이 또한 거침없다.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된단말이야?‘싶을 정도였다. 정신없이 끌려들어가 읽게 되는 마법.



이미 제목에서부터 눈치챘겠지만, 이 책은 다이어트를 키워드로 하고 있음에도 성공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실패담에 가깝다. 그리고 저자가 풀어나가는 직장생활의 애환, 남의 살에 가타부타 말을 얹는 사람들, 저자의 어린시절, 뉴욕 여행, 그리고 사주원정대 이야기! 정신을 차려보면 낄낄거리며 웃다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더 빠른 속도로 더 멀리‘가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 가당치도 않은 미용체중에 맞춰 스스로를 혹사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몸와 마음을 챙겨야 한다. 현실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루가 또 다른 하루를 살게 할 것이므로. 지금 이 순간 나는 ‘엄청 나태하면서 동시에 무섭게 성실한 이상한 사람‘인 저자의 또 다른 이야기를 기다리며,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와 오늘을 살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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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월모일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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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시인의 새 산문집 <모월모일>은 자꾸 쓰다듬고 싶어지는 책이다. 부들부들한 표지 때문에, 손에 착 감기는 판형과 분량 때문에, 표지에 실린 구본창 작가의 작품 ‘Soap 20‘ 때문에, 페이지마다 차곡차곡 담겨있는 시인의 ‘모월모일의 모과‘ 때문에.



책을 받아든지 나흘만에 두 번 읽고 밑줄그은 구절들을 모조리 필사했다. 몇달 전의 ‘평범‘이 절실하게 필요한 요즘이어서인지 시인이 들려주는 일상의 기록들이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지금의 일상을 살아야지 다짐하다가도 막상 적응하려니 쉽지 않다. 그렇기에 더욱 귀하게 읽었던 시인의 겨울, 봄, 가을, 여름의 이야기. 사실 이번 책은 아껴 읽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정말로) 두바퀴째 읽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을 때의 기분좋은 난감함이란!



<소란>과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에서도 그랬지만 <모월모일>에서도 유독 나를 따라다니는 글들이 있다.(내가 따라다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찌할 도리 없이 마음에 콕 박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그런 글들이. 마치 선물처럼. 나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옛다‘하고 주어지는 선물처럼 말이다. <모월모일>에서는 모과 한 알을 받았다고 표현하고 싶다. 글을 읽다가 나의 조각을(나와 닮은, 착각일 것이 분명하지만 모든 독서는 오독일 것이므로) 발견할 때야말로 독자로서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다. 기적과 같은 순간이고.



많은 분들이 <모월모일>에서 각자만의 모과 한 알을 발견하게 되기를! 그리고 그 힘으로 각자의 모월모일을 충실히 살아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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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스 라이크 어스
크리스티나 앨저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시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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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역시 추리소설. 여성 범죄를 수사하는 여성 FBI 요원의 이야기라는 설명만으로 읽고 싶어 벼르던 책이다. 크리스티나 앨저의 <걸스 라이크 어스>.



경찰이었던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러 10년만에 고향에 온 FBI 요원 넬 플린은 학교 동창이자 아버지의 파트너였던 리로부터 잔인하게 살해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넬은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맡았던 살인 사건과의 유사성을 듣고 비공식적으로 수사에 참여하게 된다. 흥미진진한 점은 10여년간 아버지와 전혀 왕래가 없었던 넬이 아버지의 수사행적을 쫓으며 자신이 몰랐던 비밀들을 하나씩 알게된다는 점이다. 이윽고 그녀는 ‘아버지가 살인사건의 범인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품기에 이른다. 국제 계좌, 임대 아파트, 목격자들의 증언.



실제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성 노동자 연쇄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범죄 이전의 구조적인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살해당한 피해자들이 어린 여성이고 성 노동자라는 점, 그들을 착취한 이들은 자본가와 부패한 경찰이었다는 점 말이다. 그렇기에 이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 넬이 내부자이자 외부자인 점이 인상적이다. 넬은 경찰 아버지를 둔 덕분에 마을의 경찰들과 어렸을 때부터 알고지낸 가족같은 사이지만 10년만에 돌아온 지금은 피해자의 편에서 범인을 찾아내려는 수사관이다. 묘한 위치에 선 인물이기 때문에 그녀는 사건의 중짐에 잠입할 수도, 바깥에서 냉철하게 판단할 수도 있다.



군더더기 없이 명쾌한 소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인 넬을 따라가는 서사는 일관되고 깔끔하다. 쓸데없는 곁가지들로 주의를 산만하게 하지 않는다. 넬의 유능함도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비록 넬의 아버지가 사건의 시작과 끝에 있지만, 넬이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지 않고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모습은 후련하기까지 하다. 오랜만에 만난 정교하고 현실적인데다 담백하기까지 한 추리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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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 - 토스카나의 새벽을 무대에 올린 오페라의 제왕 클래식 클라우드 5
유윤종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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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게 하나도 없는 내가 유일하게 공연 실황을 반복해서 듣곤 했던 오페라가 한 편 있다. 바로 푸치니의 <나비 부인>이다. 그 이유인즉, 연극 뮤지컬을 좋아하는 나는 한동안 2012, 2014, 2015년 공연되었던 김광보 연출/데이비드 헨리 황 대본의 연극 <M.butterfly>에 미쳐있었는데, 이 연극이 바로 푸치니의 <나비 부인>을 모티브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극 안에 오페라의 몇몇 장면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오페라 선율이 장면 전환에도 자주 쓰였기 때문에, 연극<M.butterfly>가 보고 싶을 때마다 대신 푸치니의 <나비 부인>을 들었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푸치니>에서는 오페라의 절정을 향유했던 작곡가 푸치니의 삶이 그가 내보인 대표작품들을 중심으로 그려져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푸치니가 베르디를 잇는 차세대 작곡가로 선정되어 꽤 오랜 시간 리코르디의 후원을 받았다는 점과 평상시에는 게으르다가 마감이 임박해서야 일하는 습관이 있었다는 점(인간적!)이다. 특히 <라 보엠>을 작곡할 때 같은 시기 경쟁자 레온카발로 또한 같은 소재를 작업중이었다는 일화도 흥미로웠다. 어둡고 애절한 분위기로 마무리되는 ‘푸치니 공식‘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책에 소개된 아리아들을 몇 곡 찾아 들었는데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토스카>의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Vissi d‘arte‘는 몇 번을 돌려들었는지 모른다. (개정판이 나올때 <베토벤>편처럼 이 책에도 QR코드가 들어가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마음이 움직이는걸 보면, 정말 푸치니가 대단한 작곡가는 맞구나 싶었다. 오페라의 시대는 저물었을지 몰라도 선율에 실린 감동은 영원하다. (물론 마리아 칼라스도 만세.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마스터 클래스>도 참 좋았었는데.)



그러나, <나비 부인>에서 그려진 초초상(일본인 여성)만 봐도 푸치니의 시선은 명백히 오리엔탈리즘적이며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다. (사실 내가 연극 <M.butterfly>를 좋아하는 이유도 <나비 부인>의 오리엔탈리즘을 꼬집어 되비추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 실린 대강의 줄거리들을 읽어보니 그의 다른 작품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게 내 생각이다.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희생하는 여성상하며! 아, 작품의 완성도나 서정성과는 별개로 내게는 소생 불가다. 책 속에 적혀있어 알게되었지만 화려한 여성 편력까지. 예술가와 예술은 동일시되어야하는가, 과거의 예술가들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둬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내게 있어서 현재진행형이지만, 어쨌든 불편한 건 불편한 것이다. 그의 오페라 속 아리아들이 애절하고 감미롭다고 느껴지는 것처럼, 아주 명확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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