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거리 헤매기 - 버지니아 울프 산문집 쏜살 문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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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쏜살문고 시리즈의 버지니아 울프 산문집 <런던 거리 헤매기>. 버지니아 울프가 쓴 열 여섯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짧은 호흡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저자의 세밀하고도 긴 문장이 어려웠던 이들이라면 이 책으로 그녀를 먼저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가장 인상깊게 읽은 글은 단연 독서가에 대한 글인 ‘서재에서의 시간‘과 마지막에 실린 ‘여성의 직업‘이다. 먼저 ‘서재에서의 시간‘. 이 글에서 저자는 ‘참된 독서가는 본질적으로 젊은 사람‘이라고 칭하며, ‘젊음 상실의 징후‘로서 고전 독서에서 동시대 작품 독서로의 이행을 다루고 있다. 동시대의 글을 읽을 때는 고전을 읽으며 갈고 닦은 예리한 판단력이 필요하다고. 고전이 오랜시간 살아남은 수작이라는 점에서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고전이 고전으로 살아남기까지는 당대의 시대 문화적 요소가 개입되었으리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럼에도 ‘위대한 예술가들에게서 얻는 기쁨이 가장 최고의 것‘이라는 그녀의 주장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여성의 직업‘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자는 소설가로서 자신의 경험을 풀어놓으며 여성으로서 글을쓰기까지 ‘집안의 천사‘을 죽이고 ‘인습과 관습이라는 유령‘과 싸워야 했음을 고백한다. 전자는 무조건적으로 수용적인 여성상이고 후자는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자아발견의 어려움을 뜻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자기분열적일 수밖에 없고 진짜 자기 자신이 되기까지는 험난한 굴곡을 넘어야 한다. 더디지만 조금이나마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나에게 있어서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읽는 가장 큰 기쁨은 문장들의 유려하고 섬세한 표현에 있다. (번역된 문장으로도 느껴질 정도이니 원문으로 읽으면 더 좋겠지. 귀찮음을 극복한다면 언젠가는!) 이번 책을 읽으면서는 새삼 그녀의 날카롭고 예리한 통찰에 감탄했다. 자신이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사람. 그것들을 빌미로 자기 자신을 치켜세우거나 낮추지 않는 사람. 과연 훌륭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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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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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나는 태어났다.˝



<출신>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태어났지만 내전을 피해 독일로 이주한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간 소설이다. 자필 이력서를 쓰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한 저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 비셰그라드에서부터, 처음부터 독일어를 배워야했던 14살, 그리고 추방당한 부모님을 뒤로하고 혼자 살아내야했던 시간들까지.



자전적 소설이라기에 책 소개에 적힌 작가 이력을 충분히 숙지하고 읽기 시작했음에도 따라가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현재 시점의 작가와 어린 시절의 작가가 교차되며 진행되는 이야기인데다가, 그가 겪었던 두 나라에서의 삶 자체가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끌어당기는 힘과 밀어내는 힘이 팽팽하게 교차하듯 저자의 문장에서도 긴장감이 느껴졌다. 과거를 헤집어 풀어놓기란, 분절된 역사를 기억해내기란, 현실 속에서 죽어가는 할머니와 마주하기란 그리고 그것을 글로써 풀어내는 것이란 역시 쉽지 않은 일.



출신, 이라는 말이 목구멍을 틀어막는다. 출신이라는 말은 어쩐지 낙인같다. 그러나 누군가로부터 ‘당신은 어디 출신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대한민국‘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에 대한 내 심경은 복잡하다. 그러나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안정감을 준다. 무엇이든 대답할 거리가 있다는 사실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출신을 묻지 않는 날이 올까? 인종과 계급과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그냥 한 개인을 한 개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올까? 모르겠다. 요즘같은 시대엔 더더욱 모든 것이 모호하기만 하다.







(* 서포터즈 활동으로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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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멈출 수 없다 - 여성의 삶이 달라져야 세상이 바뀐다
멜린다 게이츠 지음, 강혜정 옮김 / 부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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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성의 삶이 달라져야 세상이 바뀐다.˝



‘빌 앤 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멀린다 게이츠가 쓴 첫번째 에세이. ‘이 책에는 어떻게 하면 세상이 더 나은 쪽으로 바뀔 수 있는가‘에 대한 멀린다의 치열한 고민과 해결책, 이를 위해 고군분투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기득권층일수록 스스로가 가진 특권을 인지하란 쉽지 않은 일인데, 멀린다는 이를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이 가진 자원을 활용하여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녀는 세계 반대편에서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공감‘한다. 아, 나도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



멀린다가 주목한 것은 ‘여성에게 힘을 실어주면 국가를 가난과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이다. 여성의 지위를 높이면 교육 수준, 고용률, 경제 성장률을 비롯한 건강한 사회의 지표들이 올라간다. ‘배제되어 있던 집단을 포함시킬 때, 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그래서 멀린다는 가족 계획(피임약), 조혼 금지, 여성 교육 등 여성을 위한 지원을 하기 시작했고, 이는 유의미한 결과로 나타났다. 실제로 현장에서 그녀가 직접 부딪히고 겪은 내용들이 각 챕터마다 생생하게 수록되어 있다. 멀린다와 재단이 이에 그치지 않고 현장의 상황들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더 나은 대안책을 찾아가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여성을 도와야한다. 여성의 지위를 높여야한다. 가부장제는 그 누구에게도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와 당신과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 시킬 수 있다는데, 세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 수 있다는데, 이래도 모른척하겠는가! 필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한다.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함께 읽는다면 금상첨화겠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게이츠‘를 보면서 빌과 멀린다의 재단 사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빌 게이츠만을 조명하고 있어 재단 사업에서 멀린다가 맡은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되고 있지 않은 점이 아쉬웠는데, <누구도 멈출 수 없다>를 통해 멀린다의 목소리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정말 좋았다. 이 책을 이 시기에 만나게 된 것 또한 내게는 큰 행운이다.



책의 초반에 멀린다는 자신을 ‘열렬한 페미니스트‘라 인정하기까지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취약함과 실수를 드러내는데도 주저함이 없는 용감한 모습!) 아, 과연 우리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만 한다. 이 기회를 빌어 적는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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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와 크레이크 미친 아담 3부작 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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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을 읽고 이 기세를 몰아 마거릿 애트우드 전작 읽기에 도전해보겠다며 야심차게 구매한 미친 아담 시리즈 3부작.(민음사에서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예쁘장한 만듦새에 반해 세 권 모두 제법 두께가 있어 독서를 미루고 있다가 이제서야 첫번째 권인 <오릭스와 크레이크>를 읽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디스토피아 소설은 철저히 현재에 기반한다. <오릭스와 크레이크>또한 현재 진행중인 환경 파괴, 인구 증가, 생명 공학의 발전과 윤리, 자본주의의 횡포를 밀고 나갈 수 있는 데까지 밀고나간 소설이다. 유전자 조작이 무궁무진하게 가능해진 시대에서 모든 산업의 목적은 이윤창출이다. 소설에는 신장이 여러개이거나 머리가 없는 동물이 등장하며 영상물을 통한 쾌락 소비는 일상이다. 이런 설정들은 너무나 경악스럽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경고다. 가장 나쁜 쪽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소설에서는 현재 ‘눈사람‘과 과거 ‘지미‘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지미는 인류가 거의 멸종한 뒤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눈사람이라는 이름을 택했다. 그리고 눈사람이 된 그에게는 신인류 ‘크레이커들‘이 있다. 크레이커들은 친구이자 유능한 유전학도인 크레이크가 만든 이들이다. 크레이커들에게는 교묘함도 눈속임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기능적으로 우수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들에게서 인간성이 결여되어있다고 느꼈다. 인간성이란 무엇이냐 하면 수많은 말을 덧붙일 수 있겠지만, 글쎄,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기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 2권과 3권을 마저 읽어봐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저자의 다른 저작들이 그렇듯 <오릭스와 크레이크> 또한 어마어마하게 치밀하다. 실제로 꼼꼼한 고증이 바탕이 되었다고 하니 그 노력이 얼마나 컸을지! 원작이 2003년에 출간되었는데 그때보다 지금 세상은 더 나아졌는가 생각해보면 바로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지금 2020년의 세상은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폭주기관차같다. (나의 세계만 지옥인가!) 그러나,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은, ‘더 나아져야만‘ 한다. (정혜윤PD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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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S - ARCHITECT (잡스 - 건축가) - 건축가 : 빛과 선으로 삶을 그리는 사람 잡스 시리즈 3
매거진 B 편집부 지음 / REFERENCE BY B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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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B의 세번째 단행본 <잡스-건축가>. 에디터, 셰프에 이어 이번에는 건축가다. 일곱 편의 인터뷰와 한 편의 에세이가 실려있는데, 건축이라는 분야가 나에게는 다소 생경하여 읽고 소화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인터뷰를 읽으며 인터뷰이의 작업물들도 함께 찾아보았는데, 직접 눈으로 건축물을 확인하며 인터뷰를 읽으니 이해도 빠르고 재미있었다. (이 책을 읽으려는 분들에게 추천드리고 싶은 방법.)



잡스 시리즈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출간 소식이 들리면 득달같이 구매해 읽는 것은 결국 이 시리즈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 권당 한 가지 직업을 테마로 두고 있지만, 인터뷰집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그 직업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인터뷰이가 가진 일에 대한 태도와 신념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여러 직업을 넘나들며 나 자신과 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묘미가 있는 시리즈다.



특히 이번 <잡스-건축가>에서는 인터뷰이들 모두 사람 간의 관계와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건축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이 거주하거나 사용하는 공간을 짓는 일이므로 사람을 중심에 놓지 않을 수 없고, 제대로 된 작업을 위해서는 건축가와 의뢰인간의 소통이 필수적이다. 인터뷰들을 다 읽고 나니 건축이라는 일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결국 이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건축을 심미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편이었는데(˝예쁘군! 대단하다!˝), 각각 특색있는 건축가들의 인터뷰들을 읽을수록 자연과 어우러질 수 있는 건축, 지속가능한 건축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생각할 거리가 정말 많군.) 공간은 때로 사람의 행동을 지배한다. 특히 네임리스 건축의 삼각학교를 찾아보면서 공용 공간과 틈새를 활용해 자유롭게 놀고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상생과 지속가능성. 앞으로 집중해서 찾아보고 싶은 키워드들이다.



한 번 읽고 덮는 책이 아니라 계속해서 들춰보며 건축에 대해서든 사람에 대해서든 더 배우고 싶어지게 하는 그런 책. 다음 잡스 시리즈가 기대되는 이유다.



덧. 오늘 들른 카페에서 우연히 다른 손님 테이블에 놓인 <잡스-건축가>를 발견했는데, ‘이 책 너무 좋지 않나요?‘ 하고 주접떨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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