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휴식과 이완의 해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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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좋아하기 힘든 주인공을 끝끝내 독자의 마음이 기울도록 그려내는 오테사 모시페그의 저력이 다시 한 번 돋보이는 소설 <내 휴식과 이완의 해>. 주인공은 부모님의 유산으로 살아가는 특권층 미모의 늘씬한 금발 여성이다.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지독한 무기력증과 염세를 느끼는 주인공은 온갖 약물에 의지해 기수면상태를 이어가다가 인페르미테롤이라는 시판되지 않은 약을 접한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데, 이 약을 먹으면 사흘간 의식이 사라진다! 주인공은 남은 인페르미테롤이 허락하는 만큼 스스로를 집 안에 격리시키며 잠을 자기로 결정한다.



언젠가 나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못견디는 사람임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휴일임에도 온전히 쉬지 못하고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독서나 영화, 드라마 감상같은 것도 사실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라 온전히 쉰다고 보기는 어렵다.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깨달음 이후 의식적으로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휴식이란 긴 수면과 식사, 산책 정도로 꾸려진 간결한 시간이다. 그냥 존재하는 시간.



주인공의 선택은 극단적이지만 매혹적이기도 하다. 시간의 흐름도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잊고 잠시 의식의 스위치를 꺼두는 일. 봄을 준비하듯 오래 겨울잠을 자는 일. 어쩌면 주인공이 선택한 잠도 문제를 정면 돌파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혹자는 재정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휴식이었다고 말할 수도, 주인공의 행동은 회피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온전한 휴식을 바라지 않나. 그 상상을 주인공이 대신해서 실현해준다는 것만으로도 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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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 동서양을 호령한 예술의 칭기즈칸 클래식 클라우드 18
남정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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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내가 백남준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이게 전부다. 어렸을 때 국립현대박물관 과천관에서 ‘다다익선‘을 보고 참 괴상하다고 생각했던 기억도 있다. (실제로 백남준이 국내에 알려진 것도 뉴욕에서 성공을 거둔 이후라고.) 그러던차에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로 백남준을 만나게되었다. 한국, 일본, 독일, 미국에 걸친 백남준의 궤적을 따라가보는 숨가쁘도록 알찬 여정이 책 한 권에 담겨있다.



이 책은 백남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입문서로 제격이다. 저자는 백남준의 생애를 따라 한국, 일본, 독일, 미국 네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의 흔적을 살핀다. 특히 백남준이 케이지와 보이스를 만나 행위예술가로 거듭난 독일에서의 일들이 비교적 세세하게 적혀있다. 나처럼 백남준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가 흥미의 실마리를 얻기에 충분한 책이다.



백남준은 한 권의 책으로는 담기 벅찬 인물인 것 같다. 이 책에 소개된 일화들만 해도 범상치 않다. 열 네 살때 접한 쇤베르크의 음악에 매료되어 당시로서는 난해하기 그지없었던 음악세계를 탐구해나간 것, 이를 기반으로 파격적인 행위예술을 펼친 것, 플럭서스 운동, 비디오 아트 등등.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그가 선불교와 노장사상으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원래 예술품은 즐거워야 하는거지, 내일이면 시시해져.‘라던 그의 말. 불과 수십년 전 그가 과학과 예술의 결합을 혁신적으로 드러낸 설치 작품들이 하나 둘 고장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는 그때 당시에도 이미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 밖에 1990년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난 요제프 보이스를 기리기 위해 했던 진혼굿 퍼포먼스 이야기도 충격적이었고. 그가 광적인 독서가였다는 사실도 뇌리에 남는다.



2006년 세상을 떠난 백남준. 이 책을 읽고 나니 실마리가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그의 세계가 더 궁금해진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자 세계적인 예술가라는 사실은 자명하겠고, 이제 그의 작품을 만난다면 전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덧. 작년 서울경제에 연재된 칼럼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시리즈도 함께 읽으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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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아틀리에 -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
김상욱.유지원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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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김상욱과 타이포그래퍼 유지원의 과학&예술 에세이 <뉴턴의 아틀리에>. 이 책은 두 저자가 ‘이야기, 편지, 시, 죽음, 꿈, 스케일‘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과학자는 예술적으로, 예술가는 과학자적으로‘ 쓴 콜라보 에세이다. ​

일단, 다루고 있는 내용이 흥미롭다. 사실 과학과 예술을 동시에 다루고 있는 책이라길래 어렵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정말 즐겁게 읽었다. 두 저자가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각기 다른 지점에서 사유를 시작해 어느 지점에서는 교차하고 또 어느 지점에서는 갈라지는데, 이를 따라가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두 저자의 글이 교차하는 지면에서 각각의 글 속 핵심 문장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또한 타이포그래피, 회화, 설치미술, 음악을 비롯한 다양하고 폭넓은 예시들이 수록되어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

언젠가 인터뷰에서 많은 작가들이 논픽션을 읽으며 영감을 얻곤 한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뉴턴의 아틀리에>를 읽고 나니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분야들이 사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겠다. 사람들이 융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이전에, 애초에 각각의 학문들은 융합된 것이었음 또한 알겠다. 지나고보니 각 전문영역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문과 이과를 나누는 것이 터무니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어쨌든 배움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과학과 예술을 넘나드는 두 저자의 생각 속에서 영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책의 구성 및 편집 디자인의 특별함도 꼭 언급하고 싶다. 두 저자의 폰트를 다르게 한 것, ‘실‘을 그래픽 요소로 삼아 교차 직조되도록 디자인 한 것, 상단 여백이 좁은 본문 레이아웃 모두 책을 읽는 내내 특별한 즐거움을 주었다. 내지가 일반적인 책의 내지보다 얇아서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의 기분도 새로웠다. 아, 이 책의 물성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 꼭 띠지를 제거하고 손으로 책등을 감싸며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

덧. 민음사 블로그의 ‘출간 후기‘도 꼭 읽어보시기를!

덧2. <글자 풍경>을 정말 재미있게 읽어서 기대하고 있었던 책인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다만 휘리릭 읽고 끝낼 책은 아닌 것 같아 한 번 다 읽고 나서도 틈틈이 들춰보는 중이다. <떨림과 울림>도 읽어보기로 마음먹었다. ​

(*서평단 활동으로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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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기다리고 있어
하타노 도모미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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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일 같지 않아 홀린듯이 집중하며 읽었다. 가뜩이나 누구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금, 청년 빈곤은 코 앞에 닥친 현실이다. <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회사로부터 계약 해지 통보를 받고 하루 아침에 홈리스가 된 스물 여섯의 주인공 미즈코시 아이의 이야기다. 만화카페에서 잠을 자고 일용직 아르바이트로 근근히 하루를 사는 그녀. 의지할 곳도 사람도 없는 상황에 놓인 주인공의 눈에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무엇이 이들을 길바닥으로 내쫓은 것일까?



주인공이 정규직 전환에 실패하고 홈리스가 된 것은 그녀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녀는 도쿄 소재의 4년제 대학을 졸업했고 경력도 있다. 다만 작은 문구회사에 들어가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겠다는 구두 약속을 믿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일방적인 해고 통보였다. 실업수당은 진작에 끝났고, 재혼한 아버지와는 남남처럼 지낸지 오래이며,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조차 어렵다. 들어오는 돈은 없는데 통장 잔고는 바닥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자 본인이 10여년동안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지냈던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래서인지 담담한 어조와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소설 말미에 이르러 결국 저자가 꼬집어내는 것은 제도의 문제다. 생활 보호 제도가 존재하지만 대중에게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제도가 있는 이상 돈을 받는 건 정당한 권리(287p)‘임에도 말이다. 빈곤의 굴레에 떨어진 이들이 혼자만의 힘으로 일어서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일단 이들을 지원해줄 제대로 된 제도가 필요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해당 조건에 걸맞는 사람이라면 제도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야 한다.



길 위의 여성들은 ‘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 신은 그녀들이 선택하는 것이겠지만, 우리는 서로의 신이 되어줄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이 연대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빈곤은 의지할 사람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박힌다. 홀로 설 수 없는 상황인데도 주변 사람들에게 폐가 될까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좀먹는 길을 선택한 많은 이들이 떠오른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의지해야만 할 때는 의지해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결국 받은 사람은 받은 만큼 베푸는 사람이 될테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힘이 되어주는 것이니까.



청년 세대, 취직, 빈곤, 주거, 여성 문제를 비롯해 복지와 연대까지. 재미있게 읽히지만 이 시기에 반드시 필요한 고민을 던져주는 보물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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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기쁨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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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 튜더의 아름다운 수채화들과 그녀가 직접 꼽은 문장들을 만나볼 수 있는 책.



숲 속에서 동식물들과 뛰어노는 아이들(아마도 타샤의 손주들)의 모습이 평화롭다.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꽃들이 오밀조밀 다채로워서 한 송이 한 송이 살펴보는 재미도 있었다. 구성이나 색채의 사용도 놀랍고.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함이 아닌, 추억 속 기쁨의 말을 담고자 했다는 타샤의 말처럼 편안하게 음미할 수 있어 좋았다.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읽을 수 있는 따스한 책이다. 책의 뒷편에 문장들의 원문이 실려있는 것도 포인트.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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