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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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 자리에서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한 권의 책을 완독한지가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최근 몇 달간 가장 밀도있는 몇 시간을 선물해준, 올 겨울 최강 기대작이었던 프랑수아즈 사강의 <패배의 신호>. 사강의 여섯번째 소설로, 문장마다 눈을 뗄 수 없는 압도적인 수작이다. 최근 사강의 첫번째, 두번째 소설인 <슬픔이여, 안녕>과 <어떤 미소>를 다시 읽고 연이어 이 소설을 읽게 되어서인지, <패배의 신호> 속 감정 묘사의 깊이와 서사의 유려함, 매혹적인 분위기가 초반 작품들에 비해 무척 압도적이라고 느껴졌다. 아마 지금껏 읽은 사강 소설들 중 가장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이미 각자의 연인을 둔 루실과 앙투안이 별안간 서로를 발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만큼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무튼 줄거리보다 중요한 건 소설 속 인물들을 휘감는 감정의 변화다. 매 순간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간의 감정을,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려운 사랑이라는 감정을 사강만큼 황홀하게 풀어내는 작가가 있을까.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도 제대로 모른다. 내 마음도 상대의 마음도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함 속에서 소설 속 인물들은 최선의 추측으로 선택을 해나간다. 이 기가막힌 과정을 때로는 소설 속 인물이 되어, 때로는 관찰자가 되어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아무것도 소유하고 싶어하지 않고, 존재 자체로 행복하며, 순간만을 사는 주인공 루실을 본다. ‘행복만이 그녀의 도덕‘이라는, ‘그녀의 유일한 도덕은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라는 표현 앞에서 잠시 멈춘다. 과연 나는. 내가 나의 행복을 유일한 도덕으로 삼는다면 수천 수만번 패배하더라도 상처받지 않으리라. 밑줄과 메모로 가득한 나만의 <패배의 신호>를 안고 카페를 나서는 나는, 몇 시간 전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크리스마스 연휴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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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2-26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비안북스 님 아주 멋진 크리스마스 휴가가 되었군요. 책 색상도 넘 이쁘게 나와서 찜해 두고 있었는데 리뷰 읽어 보니 더는 미룰 수가 없네요. 당장 구매합니다.
 
맺힌 말들 - 각자의 역사를 거쳐 가슴에 콕 박힌 서툴지만 마땅한 마음의 낱말들
박혜연 지음 / 아몬드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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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흔히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잘 안다고 착각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간절히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손에 넣었을 때 사실 원했던 건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던지, 괜찮은 줄 알았는데 지나고보니 전혀 괜찮은게 아니었다던지. 이럴 때 평소 자주 곱씹거나 내뱉는 말을 살펴보면 그때그때의 마음 상태를 가늠할 수 있다. 임상심리학자 박혜연의 <맺힌 낱말>은 ‘누군가의 마음에 맺혀있던 낱말을 단서로 그 사람의 마음을 따라가보는 여정‘을 담았다.



정말 괜찮은 사람은 괜찮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진짜 변화는 주어진 현재에 충실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자주 되뇌이는 단어를 파헤쳐보는 것이 진짜 나를 아는 것의 시작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단어의 본질적인 의미를 아는 것만으로도 막연하고 어렴풋했던 것들이 명료해질 수 있다. 과연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며 사용하고 있는지 개개인의 고유한 역사를 되살펴볼 수도 있을테다. 예를 들어, 저자는 ‘질문‘의 고유한 뜻이 ‘본연의 가치를 묻는 것‘임을 설명하며,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정말 ‘질문‘을 하고 있는지 묻는다. 더 나아가 세상을, 타인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있는지.



담백하게 쓰여진 책 속 글들을 한 편씩 읽는 것만으로도 나를 옭아매고 있었던 감정적 걸림들에서 조금씩 풀려나는 듯했다. 오랜시간 직접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온 임상심리학 전문가가 들려주는 마음을 살피는 이야기. 단정하고 단단한 문장 너머로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저자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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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까짓, 생존 - 쫄지 말고 일단 GO! 이까짓 6
삼각커피 지음 / 봄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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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시대는 지났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되잖아! N잡러의 시대다. 그런데 균형잡힌 N잡이라는 게 정말 가능한걸까? 그동안 우리는 소수의 성공 사례만 접해온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중 바로 내 옆에 있을 것만 같은 우당탕탕 N잡러를 만났다.



<이까짓, 생존>의 저자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카페 사장이다. 좋아하는 일인 일러스트 작업을 지속하면서 규칙적인 생활습관과 수익을 얻기 위해 카페 사장이 되기를 선택한 것! 말만 들으면 자신의 카페를 작업실삼아 여유롭게 일러스트 작업을 하는 저자의 모습이 그려지지만, 실상은 다사다난하다. 셀프 인테리어부터 코로나로 인한 매출 영향, 재고 처리까지 보여지는 것 이면의 고난이 상당하다. 저자는 이 모든 이야기를 솔직하고 시원시원하게 풀어놓는다. 페이지마다 함께하는 귀여운 일러스트는 덤.



결국 저자가 ‘이까짓 생존!‘이라고 외칠 수 있는 건, 카페 공간을 계속 지켜나가겠다 다짐할 수 있는 건,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그림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을만큼 그림을 좋아한다는 고백 앞에선 덩달아 뭉클했다. 인생을 걸어볼 만큼 좋아하는 게 있다면 고난도 고난이 아닐테다. 아무리 현실이 각박하다한들 꿈에 기대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역시, 꿈을 가진 사람은 강하다.



한번에 후루룩 읽을 수 있는 작고 귀여운 책. 중간중간 들어가는 일러스트 만화도 사랑스럽다. 나도 꿈으로 가득찬 듯 기분이 좋아지는 책.





(*출판사로부터 도서와 원고료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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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양장)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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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이런 소설을 읽으면 주변의 온도가 2도쯤 더 올라간 것만 같다. 천선란 작가의 새 장편소설 <나인>. 식물들의 목소리를 듣게된 주인공 나인이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알게된 뒤, 친구들과 함께 실종사건을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재미있고 다정하고 정의로운 소설.

남들과 다른 존재. 우리 모두는 남과 조금씩 다른데, 유독 다름이 눈에 띄는 경우가 있다. 각자의 다름을 틀림이 아니라 고유함으로 인정하고 함께 걸어갈 수 있다면. 바람결에 흔들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잎새들처럼 서로를 해치지 않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식물이 주가 되는 이야기여서 더 좋았다. 덕분에 파란 빛의 생명력이 소설 곳곳에 숨겨져있는 듯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따뜻하다. 돌아오지 못할만큼 멀리 가지만 않는다면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으나 어서 되돌아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천개의 파랑>도 무척 재미있었는데, <나인>은 더 좋다. 다정하라. 함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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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지음 / 아침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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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꼽는 올해 최고의 책.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독자로 하여금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책인데, 이 책은 그 이상이었다. 몇 주 동안 이 책을 아껴 읽으면서 글을 쓰고 싶어졌고, 공연을 보고 싶어졌고, 급기야는 공연을 하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첫 번째 조건을 만족하는 책은 여럿 만나보았으나 두 번째, 세 번째 조건을 만족하는 책으로는 이 책이 유일하다. 차오르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오래오래 가방 속에 지니고 다녔던, 공연예술이론가 목정원의 산문집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이 책은 저자가 프랑스와 한국에서 만난 예술과 사람,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공연은 무대에 올려진 바로 그 순간에만 실재하는 것. 꼭 같은 공연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 이 유일무이함이, 순간성이 공연예술의 매력이다. 독자로서는 영영 볼 수 없는 공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도 왜 나는 속수무책으로 이 책에 빠져들게 된 것일까. 결국 책 속에 담긴 것들은 공연을 매개로 저자가 엿본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당신에게 닿기를 바라 유예되고 간직되었던‘ 이야기이기에.

예술에 대한 곡진한 사랑이 드러나는 책 속 문장들은 오랜 시간 공들여 쓰여졌을 것만 같다. 나는 이런 문장들을 만나길 바라며 그동안 수많은 책들을 읽어온 것이 아닐까. 고요히 아름다웠다. 오래도록 듣고 싶은 백색소음처럼. ‘관객으로서 나는 언제나, 걸려 넘어지고 틈으로 추락해버릴 아름다움을 좇아 극장에 간다.‘(55p), ‘만일 당신이 춤을 춘다면 나는 가만히 앉은 몸으로도 그 춤을 따라 추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155p).

이 책에 대해서 더 잘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러려고 할수록 미끄러지는 듯하다. 몇 주 동안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책을 꺼내 보이며 이런 책은 당신도 읽어야 한다고 추천의 말을 쏟아냈는데, 들은 이들은 전부 감탄하며 책 제목을 소중히 적어갔다.

책 자체의 만듦새도 정말 아름답다. 가름끈도 내지 디자인도 사진도(작가님이 직접 찍으셨다니!) 감탄 그 자체. 다만 너무 열심히 읽었는지 뽀얀 커버에 손때가 묻어버렸는데 이 또한 멋이겠으나 소장용으로 한 권 더 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은. 그나저나 작가님 북토크 놓치신 분들, 아침달 계정에서 볼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한때 공연을 보러다니는 것이 삶의 이유였던 시기가 있었고, 고등학생 때 연극을 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거의 매일 저녁 극장 객석에 앉아있었던 때의 기억이 자주 떠올랐다. 아비뇽 연극제에서 아무 연극이나 끌리는대로 보러다녔던 기억, 고등학생때 대본 분석하고 무대에 올랐던 기억들도. 그때는 어떤 식으로든 공연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었는데. 삶은 참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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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4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