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악어 노트 ㅣ 움직씨 퀴어 문학선 1
구묘진 지음, 방철환 옮김 / 움직씨 / 2019년 5월
평점 :
일시품절
대만 작가 구묘진의 <악어노트>. 1994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언더그라운드 퀴어 문학의 정전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라즈‘라고 불리는 주인공은 레즈비언을 부르는 중국어 은어의 기원이 되었으며, 부화할 때 물의 온도에 따라 성별이 바뀌는 악어에 성소수자를 빗대어 표현한 것은 이 작품이 논바이너리 문학의 시초로 꼽히는 이유다. 성소수자인 주인공이 작가 구묘진의 페르소나라는 점과 이 작품이 아시아 최초 동성결혼 합법화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악어노트>를 주목할만하다.
위에 열거한 사실들도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래서 나에게는 어떻게 읽혔는가‘겠다. 눈치없게 햇볕이 쨍쨍했던 오늘, 빛이 잘 들어오는 카페에 앉아 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내가 느낀 것은 혼란스러움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동정, 자조섞인 생각과 행동들, 정체성과 고독, 고립에 대한 사투, 종내는 사랑과 죽음까지 주인공 라즈가 적어내려간 이 일기가 혹시 내 일기는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가장 구체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또한 보편적)이라고, 이 소설은, 이 노트는, 라즈의 이야기이자 구묘진의 이야기이며 또한 나의 이야기였다.
가장 소란한 시기였노라고 20대를 회고한 박연준 시인의 글이 떠오른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노르웨이의 숲>과 <위대한 개츠비>도. ‘나 자신이 되기 싫다‘고 생각했던, 생각하는, 나와 당신이 생각난다. 책을 덮은지 여섯시간이 넘게 지났는데, 도무지 감정적인 타격을 피할 길이 없어서 낮잠을 자고 일어난 참인데, 왜 나는 이토록 불안한가. 구묘진의 다른 작품들도 어서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글쓰기는 죽음을 배우는 것,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가장 높은 곳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욕망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욕망이 아니다. 이는 자살과는 다르다. 구묘진 작가의 학교 친구가 그의 자살을 알려 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무척 인상 깊게 기억한다. 이 또한 그의 미학임을 당신도 알게 될 것이다. 죽음을 선택한 것 또한 창작이다. 구묘진은 죽음 속의 삶, 죽음 후의 삶을 창작해 냈다.‘ - 엘렌 식수
www.instagram.com/vivian_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