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의 신
아가와 다이주 지음, 이영미 옮김 / 소소의책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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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가 주는 초조함에는 행복감이 기묘하게 따릅니다. 그리고, 이 책의 사람들 모두에게 일어난 일은 그처럼 그 "작은 사고" 일 수도 있지만 결코 누군가에겐 작지 않은 사고일 수 있습니다. 그 사고로 조금씩 지연되는 시간은 그래서, 원래 막차가 도착해야 하는 그 시간보다 더디게

도착하게 만들었지만, 사람들은 또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하는 그 순간에 찾아온 사건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그날 도착하자마자 기다리는 일부터 몇 년, 몇십 년의 긴 기다림의 일들이 그곳 플랫폼에 있었습니다






책은, 우리의 인생이 그렇듯 일곱 가지의 무지개색을 담고 있었습니다.라고 쓰고 보니,


모든 "인생"이란 말을 갖다 붙이면 진부해져 본문 14p


"인생은 10단 변속 자전거 같은 것. 거의 안 쓰는 기어투성이다."

"누가 한 말이야?"(....)

"라이너스. 스누피 친구."

(....) 말하자면 다 함께 인생의 고비를 넘어선 기분이었다. 본문 16p



정말이지, "인생"이란 말, 삶이란 말을 붙으면 묘하게 또,라는 느낌이 있지만

그만큼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책에서처럼 "다 함께" 말입니다. 설령, 그것이 또 진부한 일일지라도요. 일곱 개의 에피소드의 시작은 같습니다. 우리의 생의 처음이 그렇듯요. 늘 출발선상이 비슷한 사람들의 이야기면서 색깔이 다릅니다. "빨간 물감"은 어쩌면 그래서 아팠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비슷하게 출발하지만 중간에 탈락자가 생기는 느낌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미묘한 반전으로 웃을 수 있는가 하면(1화, 파우치), 제겐 이거 무슨 이야기지? 하는 느낌으로 다가온 것도 있는 반면, 4화인 <오므려지지 않는 가위>편은 저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서점대상, 미스터리 그리고 막차 이렇게 세 개의 코드가 저를 끌었지만 그에 비해서는 실망스러웠습니다. 기대감이 커서일 수도 있지만, 이야기 자체가 "미스터리 서스펜스"를 기대했던 제겐, 되려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담아낸 것이 컸습니다. 물론, 그 안에 있는 미스터리도 분명 있습니다만, 주가 아니라 살짝 거들 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되려, 조금 소소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께는 몰라도, 미스터리 부분에 기대를 거신다면 살짝, 고개를 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기대하지 않은 막차의 사건들이 끝난 후의 이야기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제겐 그냥 덮을 수 있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마지막 에피소드는 묘하게 어떤 에피소드와 이어져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것은, 1화의 파우치 일 수도 있지만 또 아닐 수도 있다면서요. 그 사람들은 "막차"라는 공간으로 연결돼 있는 것이고 그것은 이어져 있기도 하니까요.


그것은,

거의 모르는 사람을, 여기서라면 이 역에서라면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라며 줄곧 기다렸어요. 찾았어요.

그렇지만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중략) 늦지 않았네요.

본문 309p, 311p



막차가 마지막으로 끝난 사람도 있는가 하면, 또 그 막차가 지나다니는 플랫폼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싶단 생각으로 끝내 마지막인 날, 처음으로 만나 이제 "처음"이 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구나 그 차를 타면서 그런 결말을 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결말이라면 참 재미없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막차는 어쩌면 선택의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요. 저는, 그 선택을 후회하는 때가 많습니다. 왜냐면은 어쩌면 저만 알고 있는 것이겠죠.

사람들은, 그렇게 어두운 밤 기다립니다. 막차까지를요. 그 사람들이 기다린 것은 그 뒤에 올 그 무엇입니다. 그것이 주는 것은 편안함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또 다른 차를 타기 위함일 것입니다. 아마도, 요. 밝은 날의 그 정류장에서 또 아침의 첫차를 타기 위해서 혹은 그 밤의 안식을 위해서일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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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다
모리 에토 지음, 김난주 옮김 / 무소의뿔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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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전제는 헤어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다시", 인 것일지 모릅니다. 숱한 헤어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만남의 어딘가는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한 번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숱한 만남 가운데서도요. 만남의 색과 형태는 여러 가지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 연인들에게만 해당하는 특권은 절대 아니니까요.

만남은, 아주 평범하게 계속 이뤄지고 있으면서도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치지 못하는 것만 같습니다. 새로운 만남이 있는가 싶으면, 아주 오래된 기억 속의 그 궁금증 때문에 혹은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로만 듣던 사람들과의 만남, 이 가운데 그렇게까지 특별하다, 싶은 것은 없지만 또 그것들은 그 당사자들에겐 전혀 평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요.



여섯 빛깔, 각기 다른 형태의 만남에 대해서 처음 만나는 모리 에토는 아주 담백하게 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만남인 듯 혹은 아닌 듯하다가, 다시 만났을 때는 그 전관 또 다르게 다가오는 사람의 향기를 느낀 표제어인 <다시, 만나다>를 비롯해 저는 <순무와 샐러리와 다시마 샐러드>를 재미있게 읽다가 마지막에 살짝 쿵, 했던 건 어쩌면 일련의 사건들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그건 일상을 스쳐가는 일들이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다시, 만나다와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또 왠지 <매듭> 같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제목이 연상시키는 것이 또 이 "만남"이라는 것이기도 했고, 한 번쯤 정말 그 예전의 묻고 싶었던 말을 그제서야 하는 "나"가 이해가 돼서였을 겁니다. 마지막은 늘 그렇듯 그 이면의 무언가가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한 만남과 이어지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세상은 인간관계의 선상이니까요.


우리가 쭉 만나지 못하고,

헤어짐이란 그 시간을 가지는 것은 아마도 돌아가서 생각할 여유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딪힘 속에서는 더 이상의 진전은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굳이 서로를 이해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란 것을요. 또한, 그 사람이 내게 처음으로 그 무언가를 알게 해 준 사람이란 것이구나를 알게 되는 데에는 의외로 그 헤어짐이란 시간은 꼭 필요하기도 합니다



슬픔은 딱 잘라서 두 가지 유형이 있거든. 한 가지는 무겁게 마음에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유형,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모든 걸 몰아내서 텅 비게 하는 유형. (....) 골치 아픈 건 텅 비는 슬픔 쪽이야. 그 슬픔은 정말 인간을 갉아먹어.

본문 81-82, 마마 中


그런 슬픔을 이겨낼 시간은 어쩌면 헤어짐인지도요. 아니, 두 슬픔의 유형 다 모두 이겨낼 그런 시간이 말입니다.


비가 내릴 때도, 언제나 같지는 않습니다.

어느 날은 빗소리가 음악처럼 들리는 날이 있는 반면 소음처럼 들리는 날, 꼭 오늘 내려야 하냐고 투덜거리는 날도 있습니다.

어느 날은 서걱거리는 가슴으로 비를 보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날은 촉촉하게 해주는 그런 기분을 느끼는 날까지 있습니다.

그렇게 담아낸 여섯 가지의 만남과 이별의 교차의 이야기들이 여기,에서 내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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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를 타고 떠난 키다리 아저씨가 짱구를 만나서 해준 말이 나에게는 기쁨이었다
조헌주 지음 / 북오션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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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한 것 중 하나는 만화였습니다. 대신 텍스트로 빽빽한 것들이 자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들은 재미있고 만화나 애니메이션보다 더 흥미로운 것들도 있었지만, 재미가 없을 뿐 아니라 지겨워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말입니다.

그렇게, 잊혀져 가고 사라져가나 싶으면 연휴 혹은 연말의 끝자락에 찾게 되는 것들 중, 많은 "어른"들이 찾는 것은 바로 이 만화, 이기도요.

그저 웃을 수 있는 책들이기만 하고 재미만 있는 애니메이션들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처음일지도 혹은 처음은 아닐지 몰라도 명언을, 그리고 꿈이란 것을 심어주고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하게 해 준 것이 바로 이 수많은 애니메이션들이었으니까요. 다만 그때는, 잘은 몰랐습니다. 이 재미가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요.





슬픔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건 너뿐만이 아니야. 강해져야 돼 캔디

들장미 소녀 캔디, 알버트가 캔디에게

모양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돼.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있는 것처럼 유난히 선한 척하는 사람일수록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명탐정 코난, 하이바라


인디언 말로, 친구의 뜻이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고는 들어봤는데, 캔디에 저런 말이 나왔던가, 싶은 순간이었습니다.그 말을 어려서부터 들어왔는데 몰랐었구나, 와 하이바라의 그 그늘진 얼굴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말들은 어딘가 철학적이긴 했습니다.슬램덩크의 명대사는, 제겐 "영감님, 영감님에게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나는 "지금"이에요" 하던 백호의 말에 가슴 철렁했던 때도요

그런가 하면 통키에서는 쓰러진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프로가 아니라고 하는데 전 달랐습니다. 프로란, 어떠한 순간이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것이었으니까요. 쓰러진 사람이 프로답지 못한 것 아니냐고, 지금 정글의 세계를 살면서 묻습니다. 또한, 늘 코난이 말하는 "언제나 진실은 하나"라고 외치지만 전 묻습니다 하나의 진실만 본다면, 세상은 단조로울 것이라고요. 진실, 사실, 그리고 또 그 가운데에 있는 것들도 봐야 한다고요. 그 주옥같은 말들 속에서도 어느새 자신의 주관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때보다 한 뼘씩 커왔단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곰돌이 푸우와 스머프는 각기 "타이밍"에 대한 말을 하는데도 또 다릅니다.

푸우가, "매일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라고 말하면서 "까르페 디엠"에 가까운 이야길 한다면, 스머파파는 "무슨 일이든 다 적당한 때가 있고, 시간이 있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타이밍"의 문제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은 없지만 두 애니메이션의 색깔을 보여주는 것 같아선 살포시 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 "명화로 보는 오디세이아"에서 멘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인 "달려라 하니"에서 하니에겐 홍두깨 선생이 그런 존재였습니다. 볼 땐 참 허술한 체육 선생님이란 생각을 했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럼으로 하니가 마음을 열 수 있는 틈을 보여주고 계속 달리게 해 준 존재가 그렇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니가 만난 홍두깨 선생은 참 든든한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또 그냥 재미가 아니라 알고 보니 또 다른 그림 안에 그림, 숨은 그림 찾기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왜 몰랐을까요?




어떻게 보면 너무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 단순한 진리다. 본문 180p


네, 저자의 말처럼, 아주 단순한 진리일 수도 있지만 의외로 진짜는 아주 단순하지만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무엇인가를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니까요. 그것이 일치가 된다면 세상은 훨씬 행복할 테니까요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된다면 조금은 재미는 없어질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 그 재미, 그 한가운데 있는 만화, 애니메이션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명언들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더 이상의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을지도,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익숙한 애니메이션, 그리고,

그 애니메이션이 줬던 그때 몰랐지만 또다시 읽으면서 아, 그랬던가 하는 그 기묘한 추억과의 조우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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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생각뿔 세계문학 미니북 클라우드 18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안영준 옮김, 엄인정 / 생각뿔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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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기일식, 같은 날이 있습니다. 그 밤에만 빛나는 그 달이 한낮의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그런 날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날만이라도 빛과 어둠이 그리고 달과 태양이 공존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럴까 싶습니다.
결국에는, 그저 아주 그 순간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왜냐면, 그때의 신비스러움이 그것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지킬 박사, 그리고 하이드. 
그들이 그랬습니다. 아니, 헨리 지킬은 말했습니다. 선과 악의 완전한 분리를 말입니다. 그리하여, 악이 선 때문에  또 그 반대로,
선이 악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기를 원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진짜였을까요?


인간은 본래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두 개의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나는 인간이 두 개의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89p, 헨리 지킬의 노트.






그는, 그의 내재돼 있던 욕망을 부른 것이었습니다. 헨리 지킬, 그는 선한 학자였습니다. 기부도 많이 하며 존경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억제돼 있던 것들이 폭발한 것입니다. 바로 "하이드"란 우리의 숨겨진 선한 얼굴 뒤의 악함을 폭로하고 싶었는지도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그렇게, 지킬 박사는 하이드의 심연을 오랫동안 본 것일까요? 아니면, 그 악함에 어쩌면 스스로가 먹히고 싶었던 것일까요?
하이드는, 헨리 지킬에 비해서 "그것은 기분 나쁜 혐오감"(40p)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무시당하면서 어째서였던 것일까요?
- 그것은, 헨리 지킬은 누릴 수 없는 쾌락이었을 겁니다. 남들이 혐오하는 것조차, 그리고 무자비한 일을 자행하는 그 과감성까지요.
그렇게, "악" 이란 숨겨진 것을 끄집어 내면서, 쾌락과 동시에 가져온 것은 바로 "피폐함"이었습니다.






멈추고 싶었다고, 그리고 어느새 이미 그를 지배하고 있었고 더이상은 컨트롤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랬을까요?
멈추고 싶던 그 의지는 아마도 지배당하고 싶은 의지가 삼겨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더한 쾌락을 선택했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정직한 글로 쓰고 있습니다. "우리 둘"이라고 말입니다. 더이상, 혼자가 아닌 '우리"가요.
결국에는 헨리 지킬은 하이드를 인정할 수 밖엔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빛이 가지는 속성이기도 합니다. 그림자가 긴 그 빛의 말입니다.



이 소설을 여러 콘텐츠, 연극으로부터 시작한 뮤지컬, 연극 공연과 영화로는 접했으나, 정작 문학작품으로는 처음 접했습니다.
어딘가 생소한 듯 아주 낯선 느낌이었습니다.
선과 악, 이 경계가 언젠가부터 무너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빛과 그림자 그 공존의 어딘가에 생기는 현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분명 그 경계의 선상은 있습니다. 
내 안의 그림자를 들여다 볼 때가 말입니다. 긴 그림자일수록 밝다곤 하지만, 실은 아니란 것도 압니다. 그저, 위안일 뿐일지도요.

- 가끔 저는 누군가가 말해주길 바랍니다. 그 선악의 경계선상에 있을 땐 빛과 그림자, 혹은 빛과 어둠의 명확함을요.
하지만, 그럼에도 또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아주 낯익은 세계문학, 하지만 텍스트로는 낯선 작품을 읽었습니다. 짧지만, 긴 _ 선과 악처럼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어째서 "고딕 문학" 이라고 하는지도 알 것 같았습니다. 지킬 박사의 편지를 읽는 어턴스의 심정으로 그리고, 그의 모습을 직접 목도한 라니언 박사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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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보는 오디세이아 명화로 보는 시리즈
호메로스 지음, 강경수 외 옮김 / 미래타임즈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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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더라도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면 어찌 죽음에 이르기까지 투쟁해 보지 않겠는가
- 12p, 호메로스


이야기는, 그 유명한 트로이목마, 그리고 오이디푸스의 신화 등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오디세우스입니다.
트로이아 전쟁 후, 그는 실종되었습니다. 덕분에 페넬로페는 몰려드는 구혼자들의 청혼을 뿌리치는 중이었습니다.
그녀의 지혜는 꽤 오래 지속되었으나, 모든 일에는 "의심"이 뒤따라, 그것이 무색해지는 순간은 무례함으로 변하면서,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게도 속인 것보단 다른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중심엔 결국, 오디세우스의 부재가 있었으니까요.

그때, 
오디세우스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전사했다는 소식도, 살아있단 소식도 없으니, 그저 답답할밖에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모험을 겪습니다. 거의가 그의 목숨이 달린 것들이었습니다만, 그러나 그중 가장 큰 모험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칼립소와 키르케와 보내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마저도 그것이 신의 계시였다고 믿을 지도 모릅니다만.
특히 칼립소는 그를 떠내 보내기 싫었으나 어쩔 수 없는 신의 명령으로 풀어줘야만 했고, 키르케는 그의 아이를 가지고도 그가 가는 그 모험의 길에 조심해야 할 것들, 명심해야 할 것들을 가르쳐 줍니다. 잡지 못하는 것, 그것 또한 그들의 운명이며 그의 진짜 사랑은 오로지 페넬로페이기 때문에 공허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떠나 있는 그를 잡아봤자 일 수도, 이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모험 역시 이미 정해진 신의 계시이기 때문에 
그렇게, 전쟁 후 20여 년이나 방황하면서 곧바로 그의 페넬로페에게 가지 못하고, 이제 장성했을 아들조차 그리웠으나 그 모든 것은
"정확한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던 오디세우스의 계산이고 지혜였을까요?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토록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와 함께,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네, 이 이야기<오디세이아>는 그의 모험담과 함께 많은 명화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묻고 싶었습니다.
왜, 신의 핑계를 대고 있냐고 말입니다. 그는 그의 의지로 칼립소도 키르케에게서도 한 달 음까진 아니더라도 아내 페넬로페로에게 좀 더 빨리 올 수 있었음에도 어째서 였을까 싶었습니다. 또한, 페넬로페 역시 구혼자들에게 거절의 말이 아닌 "기다려달라"라는 우회적인 말로서 그들의 말대로 "속이고" 난 후에, 무례하다고만 하는가? 아들인 텔레마코스의 그 무례한 말에 저는 깜짝 놀랐는데, 그녀는 어째서 그렇게 그녀의 의지는 없이 "장성한 아들의 듬직한 말"로만 여기면서 기뻐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인간들은 우리 신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단 말인가. 재앙 이린 재앙은 모두 우리에게서 비롯된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분수를 벗어난 자신들의 행동 때문에 타고난 운명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게 마련이거든.
-29p, 제우스

그렇게 초반, 제우스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녕 우리의 잘못이냐고 말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욕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거기에 어쩌면, 오디세우스는 이렇게 답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모, 속으로만 좋아하게나. 죽은 사람들 앞에서 의기양양 뽐내는 건 좋지 못한 일이니까. 이 사나이들은 신들께서 정해주신 운명과 무참한 소행 때문에 신세를 망쳐버린 걸세
425p, 에우리클레이아에게 오디세우스가.

네, 모든 것이 신들만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선사한 것들 중 하나,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한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왜 처음부터 "타고난 운명" 이란 걸 주었는지를요. 아니, 그래서 좀 욕심내면 안되냐고 말입니다 그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 아니냐고요.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을 담은 <오디세이아>는 하나의 모험에서, 또 하나의 사건들마다 툭툭, 하면서 던져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나 조금은 지금 맞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만, 분명 또 변치 않는 것들이 있기에 지금까지 오디세이아를 읽고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타고난 운명, 어쩌면 그것에 반(反) 했던 인물이었던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의 여정에 매료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의 사랑의 의지는 페넬로페와 그리고 늦게 온 그가 행했던 행동들이 조금은 가혹했다, 싶었던 일들도 있었습니다만,
그 역시 신의 제물이면서 한편으론 신의 총애를 받았으며, 또 그 자신이 인간의 의지를 피력하련 했던 그 모험담들 속으로 빠질 수 있으실 겁니다.





요약.
다만, 이 이야기 속으로 빠지기 전, 네, 오디세이아는 구성이 조금 산만해, 저도 애를 먹었습니다. 왜 호메로스의 작품이니 아니니, 혹은 실재니 아니니 여부가 왈가불가했는지 알 정도로요. 초반 아들인 텔레마코스의 여정은 딱히,인데 역시 주인공이구나, 싶고 어떤 면은 지루하고 반복되는 부분이 있기도 했으나, 저는 의외로 모험을 잘 다녀왔습니다. 책의 퀄리티가 전 좋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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