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두들 등반기
W. E. 보우먼 지음, 김훈 옮김 / 마운틴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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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코믹산악소설을 표방한 <럼두들 등반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제목에 게다가 코믹산악소설이라니... 그다지 웃음이 많지 않은 관계로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소개글을 보다보니 빌 브라이슨이 그리도 사랑해마지 않는 책이라는 부분이 눈에 띄어 구입. 그래, 빌 브라이슨이라면 믿을 만 하잖아? 갖은 위로와 확신을 뻔한 3류소설이 아닐까하는 불안위에 화려하게 덧입히며 불안을 잠재웠다. 책이 오고도, 당장 읽을까말까를 망설이다 마침 짜증나는 일이 있던차에 저 '코믹'이라는 두 글자에 꽂혀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 나 완전 쓰러진다.. 책읽으며 울고, 감동받아 가슴이 뻐근한 적은 많았어도 내 생전에 책을 읽으며 깔깔 거리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런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뭐 호어이스트의 책이나 닉혼비의 책에서 잠깐씩 피식, 웃음을 흘리긴 했지만 깔깔~ 은 난생처음. 말 했듯이 난 웃음이 그리 많은 사람이 못 된다. 마음 맞는 사람과 있으면 장난치고 웃고 떠들고 거기에 알콜을 더하면 혼자 업되서 잘 놀지만, 책을 읽으며 혹은 혼자 무엇을 하다가 미친듯이 웃어제끼는 성정은 아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헌데 거짓말 하나 안보테고 <럼두들 등반기>를 읽으면서는 정말 내내 '아~ 나 죽겠네~'를 연발하며 웃어댔다. 근래 들어 보기드물게 유쾌하고 즐거운 소설이 아닐 수 없다.

어쩐지 정말 억울하다는 생각뿐이다. 1956년에 첫 출간된 책이 어째서 우리나라에는 이제야 들어왔단 말인가!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모두들 알고 있었다든데! 산악문학 최고의 코믹소설이라는데! 저기 멀리선, 벌써 전설적인 소설로 자리잡았다는데! (하나 틀리지 않고 저 수식어들이 정말 맞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음... 쓰다보니 어째 나 출판사 직원같은 분위기...--;) 이제야 출간을 했느냐 말이다! 억울하다. 오랜 세월 우울한 기분을 깨끗하게 가셔줄 노하우도 없이 살아왔던 내 청춘이 분하고 원통하다!

 괜한 이야기로 재미를 반감시킬 우려가 있어 자세한 말은 하고 싶지않지만, 잠깐 소개하자면 이러하다. 럼두들이라는 (가상의) 지상 최고 높이의 산을 오르고자 모인 일곱사내들! 이름하여 힘이 장사인 보급담당 벌리, 과학담당 위시, 촬영담당 , 등반길 안내자 정글, 언어학자 콘스턴트, 주치의 프로운, 그리고 화자인 등반대장 바인더. 전문적인 등반대원들의 사투를 생각했다면 오산. 어리버리한 일곱대원들의 사랑스럽고 눈물나게 웃기는 럼두들 분투기다. 처음부터 마지막 장까지 재미있고 어이없는 사고들의 연속이라 책을 잡으면 좀처럼 손을 떼기 어렵다. 각각의 대원들은 또 얼마나 화려하신지. 말 그대로 화려한 경력들을 지니고도 좌충우돌 웃음을 선사한다. 완벽한 전문가들의 어딘가 하나씩 비어보임이 어쩌면 더 정이가는 비결은 아닐까?

하나씩만 말하자면 육군소령의 건장한 벌리는 바다를 건너면 바다피로증, 런던에 가면 런던피로증, 얼음피로증, 급기야 침낭피로증까지--;  촬영담당 셧은 툭하면 카메라를 햇빛에 노출시켜 찍은걸 다 날리고, 안내자 정글은 가는 족족 엉뚱한 길로 안내한다. 위시의 쓸데없는 실험은 계속되고 언어학자 콘스턴트는 언어를 잘못 발음해 칼든 자에게 쫒기며, 대원들의 주치의인 프로운은 남들은 걸리지도 않는 온갖 질병을 혼자 걸려 자신을 치료하느라 정신이 없다. 등반대장인 화자는 너무도 낙천적이셔서 이 모든 해괴한 일들을 아름답게 해석하고 바라보는 능력의 소유자라 웃음을 더한다. 그리고 그들을 돕는 포터들 또한 지대한 한몫을 하시는 분들이다. 목숨 다해 오른 산은 그 산이 아니옵고, 얼레벌레 오른 산이 그 산이더라는 황당한 이야기까지~

아, 어찌 읽지 않고  그 모든 내막을 알 수 있으랴. 그냥 일단 한번 읽어보시라. 나를 믿고, 내가 못미더우면  편집자를 믿고, 편집자도 못미더우면 빌브라이슨을 믿고, 빌브라이슨도 믿을 수 없다라고 한다면 이 소설이 전설이 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독자들의 선택을 믿어보시라는 말밖에 달리 할말이 없다. 그저 나는 우울하고 각박한 세상에 기분이 별로인  많은 독자들에게 즐거운 한때를 보내시라 작지만 큰 책을 한권 소개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상 끝! (어째 떨이로 파는 책장사 분위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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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1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1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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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보(情報)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사정이나 상황에 관한 소식. 또는 그 자료나 내용’을 말하며, 지식(知識)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해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를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책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대상을 대하는 원초적인 기쁨을 제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란, 체계화된 ‘정보’를 바탕으로 알곡 같은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내 것’이 된 지식은 결국 나를 대신하고 내 주위의 것들을 대변하는 하나의 사회적인 이미지로 구축된다. 그렇다면 독립적이며 이기적인 개개인의 우리가 어떻게 책을 통하여 타인을 이해하고 화해하며 내가 아닌 그들과 소통하고 공존해 나갈 것인가. <지식e>는 그것들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는 특별한 책임에 틀림없다. 수많은 타인들을 만나고 직접적으로 섞이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이 세상의 십 억 분의 일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세상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우리가 세상을 통해 듣고자 하는 모든 것들의 대답은 결국 책 속에 있다. 그 속에는 너를 알고자 하는 ‘화해’와 너를 사랑하고자 하는 ‘이해’, 그리고 너와 내가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공존’의 ‘평화’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1. 정보를 넘어선 지식

앞에서 말했듯이 정보와 지식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물론 정보가 고스란히 지식이 될 수 도 있으며 지식은 고스란히 정보가 될 수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과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정보이며 지식과 다름 아니다. 수많은 매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와 그로인한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단순한 정보를 넘어서 좀더 발전된 지식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 이면의 것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하우스에서 펴낸 EBS 지식채널의 <지식e>는 기존의 책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독서경험을 제공한다. 가령, 여기 우리가 아무런 의식 없이 하루에도 몇 잔씩 마시고 있는 커피를 예로 들어보자. 커피를 다루는 일반적인 책들에는 단순한 정보전달(커피의 종류, 맛, 유통과정, 맛있게 만드는 법 등) 차원의 내용들이 서술되어 있는데 반해, <지식e>는 뜨거운 태양아래서 고사리같이 작은 손과 열무같이 여린 팔뚝을 도구로 삼아 수확하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여 주는 격이다. 1차원적인 정보가 아닌 그 이상의 지식. 바로 커피콩 그 뒷면의 이야기들을, 하등 보잘 것 없어 뒤돌아서면 금세 잊혀지고 마는 이야기들을, 커피의 씁쓸함을 음미하는 행복이 아닌, 진정한 씁쓸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나지막이 들려주고 있다.

2. 한국의 여기에서 세계의 저기까지

<지식e>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온갖 이야기들을 소재로 삼아 우리에게 또 다른 지식을 선사한다. 거시적으로 모든 문제와 정보들을 나열하는 것을 반대하며, 미시적으로 대상을 파악한다 하더라도 놓칠 수 있는 맹점들을 발견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우리 주위에 존재하고 있는 일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저 쪽 어느 작은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 포함하고 있어 더욱 그 의미가 크다. 우리가 살아가며 대수롭지 않게 하고 있는 일들, 예컨대, 곽씨의 하루는 이러하다. 아침에 쌀로 밥을 해먹고, 회사에서 일을 하고, 축구를 관람하고, 때론 미술관에서 고흐의 그림을 감상하고, 영화를 보며, 간식으로 햄버거를 먹으며,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는 혼혈아와 마주치고, 쇼핑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와 비타민을 챙겨먹고 음식을 먹으며 부인과 언제쯤 우리 집을 장만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하고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늘 혼자 다니는 아들에 대한 고민을 나누며 하루를 정리한다. 생각해보면 서울에 거주하는 곽씨뿐 아니라 미국에 있는 브라운씨도, 독일에 있는 미르야씨의 일상생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은 이러한 일상의 소소한 일들 속에 한번쯤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할 문제들이 셀 수 없이 쌓여 있다면 어떠한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위에 나열된 곽씨 일상의 모든 일들은 우리가 알아 둬야 할 정보 이외에 보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정규직의 설움부터, 햄버거 하나를 만들기 위해 파괴되어가는 열대림. 비타민의 폐해와 한 개의 축구공을 위해 하루 종일 바느질을 하는 아이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것은 그만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조국을 위해 달리던 아프리카의 자긍심 아베베와, 서울의 한 철거촌에서 마지막 저녁을 맞이하는 세입자들의 이야기. 맹인들의 길을 인도하는 여섯 개의 점 브라유, 폭력으로 죽음을 맞이한 이름 없는 여인과 아직도 수요일이면 열리고 있는 정신대할머니들의 집회, 그리고 멕시코 인민들의 역사와 피로 얼룩진 우리의 역사까지! EBS의 <지식e>가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었던 이곳 이 자리의 이야기부터 저 먼 나라들의 사라져가는 이야기들....

3. 화해와 공존과 평화

우리 인류는 화해와 공존과 평화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왔을까?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재난이나 국가적 비상사태에 형식적인 도움의 손길을 던지며 공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거창한 국가의 차원을 벗어나 좀더 자세하게 삶의 단면들을 들여다본다면, 지금 당신과 나는 어떠한 일들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혹시 내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느라 우리 주위의, 바로 내 옆에서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잔혹하고 슬픈 일들을 관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남의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함부로 말을 내 뱉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가령, 우리가 무슬림의 세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것은 그들을 위하는 일이 아닌, 바로 자신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2004년 프랑스에서는 공공장소에서 ‘히잡’ 착용을 금지 했으며 나 역시 가끔 히잡을 착용하고 뉴스를 진행하는 이슬람국가의 여성앵커들을 보며 꼭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저것은 여성을 억압하는 상징적인 행위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네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로 당당히 이야기한다. “히잡 착용은 늘 귀찮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종교적 신념의 표현일 뿐이다.”, “어째서 우리의 삶을 당신들이 결정하는가!” 라고..... 이렇듯 우리는 우리만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우리가 화해하고 평화로운 삶으로 함께 공존할 수 있으려면 서로간의 문화와 삶의 방식들이 모두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은 마치 1914년 12월 24일에 일어났던 기적처럼 두고두고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일명, ‘크리스마스 휴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그 날. 어느 한쪽도 양보 없는 대량 학살전으로 독일군과 연합군은 각각의 참호 속에 대치하던 중 12월 24일을 맞는다. 그리고 어느 독일군 병사가 부른 성탄노래를 시작으로 연합군과 독일군은 악수를 나누고 참호주변에 촛불을 켜 양측 전사자의 장례를 치러 준 뒤 함께 어울려 사냥을 하고 축구를 하고, 고기와 음식을 나눠먹으며 가족사진을 돌려보았다고 한다. “그래, 크리스마스잖아!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왜 우리가 서로 총을 쏴야 한단 말인가!” 처음 1000여명의 병사들이 동참한 ‘크리스마스 휴전’은 이어 야전 전화를 통해 다른 전장의 병사들도 참여하여 길게는 며칠동안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 물론 양측 사령관들의 저지로 그 기나긴 전쟁의 역사 속에서 위대한 ‘크리스마스 휴전’은 단 며칠 이었으나 화해와 공존, 평화를 위한 인류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 드러난 그 며칠은 분명히 기억할만한 일이다.

4. 내 것과 네 것
누구라도 확실히 ‘기억하’거나 ‘돌아보기’보다 네 것과 내 것을 ‘구분하’거나 ‘밀어내’는 일이 많고 또 쉽다. EBS 지식채널 팀 또한 그렇게 생각했기에 <지식e>각 챕터들의 소제목을 ‘구분하기’‘밀어내기’, ‘기억하기’‘돌아보기’로 정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내 것과 네 것을 너무도 명백하게 규정하는 사회와 그 일원들의 이야기를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먼 곳의 이야기가 다만, 먼 곳의 이야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이곳까지 함께 한다는 것. 나비효과처럼 이 곳의 출렁임 하나가 전 세계의 어느 곳 어떤 이름 없는 이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와 나를 잇는 매개체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 아무것도 없이 내가 너일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미국인들에게 땅과 가족들을 짓밟힌 인디언들의 이야기가 있다. 백인들과 맞선 수우족의 지도자 ‘성난 말’은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과 같았으나 조각가 지올코브스키가 1948년, 러시모어 산에 그의 얼굴을 새겨 넣음으로써 모두의 기억 속에 자리 하였다. 러시모어산은 미국의 위대한 얼굴들만 모여 있는 곳. 그 곳에서 27km떨어진 자리에 ‘성난 말’이 미국을 바라보고 있는 꼴이라 한다. 미연방정부의 지원금을 거부하고 오로지 후원금과 관광수익만으로 존엄한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상에 매달린 조각가가 아니었다면 용감하고 존엄한 인디언의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로써 후원금을 낸 수많은 사람들은 '성난 말'을 자신들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었다. 나와 관계없는 것들을 나의 일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바로 ‘책’이며 그 중에서도 <지식e> 속에 나열된 이야기들은 너와 나를 하나로 묶는 믿음직스러운 밧줄처럼 느껴진다. 나와 당신의 온기가 서로의 가슴속에 고스란히 전달 될 때, 그것은 딱딱하고 차가운 정보와 지식의 이름이 아닌, 그야말로 ‘가슴으로 읽는 우리시대의’ 진정한 지식(智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5. 그리고, 다시 우리의 것

 물론, 가슴을 더욱 찡하게 만드는 음악이 들어간 다큐영상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충만한 감성으로 이끌긴 하나, 북하우스에서 출판한 <지식e>또한 나름의 장점을 지닌다. 책의 내용은 직접 동영상으로 보고 있는 듯 세련된 기법을 사용하고 있어 간략하고 강하게 주제를 보여주는 것이 TV 영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책은 TV와 다르게 각 이야기의 끝에는 주제별로 상세한 설명이 들어가 있다. 때문에 영상으로는 자칫 긴 여운만으로 끝나버릴 수 있다는 문제점을 한 층 더 보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개개의 이야기 별로 마지막에 실린 참고도서와 설명이 자세하고 확실한 주제와 배경지식을 선사함으로써 이야기의 본질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단순한 정보의 의미를 넘어선 책, <지식e>! 이 책은 우리 스스로가 저자가 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EBS의 지식채널팀은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사상과, 우리의 감성을 두루두루 섭렵하여 마치 하나의 거대한 인류학적 도서관을 휴대하기 편하도록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놓은 듯 하다. 저자들은 밤잠을 설쳐가며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일들을 기억하도록 돕고 있다. 읽는 책으로서의 정보전달 수준뿐만이 아니라 읽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다차원의 독서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한권의 책을 다 읽은 후에는 가슴 속으로부터 어떤 자잘한 용기와 신념 같은 것들이 솟아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그로서 우리는 조금씩 일상생활에서 실천해 나가는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책을 읽고 난 후, 매일 아무 생각도 없이 미국과 프랑스에서 들어온 커피 전문점에서 마시던 커피를 ‘아름다운가게’나 기타 다른 공정무역커피들로 찾아 마시게 되었고, 한입 베어 물고 맛이 없으면 쉽게 던져 버리던 햄버거는 현저하게 줄일 수 있게 되었으며, 별 도움이 될 수는 없겠지만, 비정규직들의 설움과 울분을 함께 아파하게 되었다. 또한 TV에서 울먹이며 부모를 찾는 해외입양아들의 얼굴도 자세하게 관찰하는 습관까지 가지게 되었다. 타인과 ‘구분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으며 우리와 그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다시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고마운 책이 바로 북하우스에서 출간한 EBS 지식채널의 <지식e>이다. 지금도 여전히 오늘 저녁에도 EBS에서는 가슴을 뛰게 하는 5분짜리의 짧지만 결코 짧지 않은 다큐멘터리를 보여주고 있다. <지식e>의 두번째 이야기가 빨리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나는 그리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들이 나의 것으로, 우리의 것으로 거듭나길 바라고 있다. 어쩌면, 화해와 공존, 그리고 평화를 위한 노력은 이렇듯 너와 나의 작은 마음 속 울림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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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빠 2008-06-09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e>에 관한 설문조사로 도움을 받고 싶은데요
http://blog.naver.com/image2two 에 오셔서
내용을 확인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첫사랑 온천
요시다 슈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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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이라는 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무중력 상태로 둥둥. 물속에 떠 있는 듯 둥둥 떠다닐 뿐이다. 세상의 어떤 사랑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으며 어느 하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어떤 것은 폭력적이며, 어떤 것은 관능적이고, 어떤 것은 순정적이다. 그리고 또 그 안에서조차 수도 없는 갈래로 갈리고 나뉘며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다. 어떤 시인도, 어떤 소설가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첫사랑 온천>은 각기 다른 5개의 사랑을 말한다. 따뜻한 온천물이 찰랑대는 것처럼 넘실넘실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다가온다. 각기 다른 온천지를 둘러싸고 각기 다른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지닌 사람들이 각기 다른 사랑의 얼굴을 가슴에 품고서. 첫사랑을 만나 결혼을 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조금씩 바뀌’어 이제는 담담히 이별을 이야기 하고 있는 <첫사랑 온천>, 사랑의 방법은 몇 가지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흰 눈 온천>, 다른 사랑을 꿈꾸며 그 사랑이 또다시 흔들리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망설임의 온천>, 사랑을 위해 달려왔지만 결국 누구를 위한 사랑인지 무의미해져 버린 <바람이 불어오는 온천>, 그리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 맹세하고 맹세하는 <순정 온천>까지. 요시다 슈이치는 사랑의 모든 면모들을 조물조물 보여주고 있다.


사랑을 하고 행복했으며, 조금씩 불안을 느끼고 깊어가는 골을 지나, 어느새 점점 무뎌가는 감정들. 마치 사랑의 수순처럼 그 모든 것은 우리 앞에 소리 없이 펼쳐진다. 요시다 슈이치는 거부할 수없는, 사랑이라는 가미가제식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듯하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이라면 이 모든 상황들 속에서 어떻게 거부하고 소리치겠는가? 라고... 우리가 그 질문에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사이 또 요시다 슈이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 한다. 그저 온천욕을 하듯 사랑을 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눈밭에 헐벗고 서 있다가 찰랑 대는 따뜻한 온천 속에 들어가듯 살아지는 것.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지치고 추위에 떨다 발을 담그는 순간 신경 곳곳으로 퍼져 나가는 그 따스한 온기에 소리 없이 위로 받는 것이 바로 인생이고 사랑이 아닐까?


차가운 몸에 더운 물을 끼얹듯 때때로 누군가에게 위로 받으며 살고 싶은 마음.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또 다른 모습 중 하나일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요시다 슈이치는 작품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큰 북소리(첫사랑 온천), 텅 빈 욕조(망설임의 온천), 눈앞에서 사라진 소리(흰 눈 온천), 흐르지 않는 것 같은 물과 보이지 않는 잔(바람이 불어오는 온천), 그리고 겐지가 느낀 이상한 감정(순정 온천)까지. 작가는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것들을 작품 곳곳에 상징적으로 심어 놓았다. 그것은 마치 순간순간 느껴지는 감정의 균열들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없는 아릿한 무언가로 고스란히 잡아 놓은 듯 생생하게 다가온다.


사랑도 아이스크림처럼 골라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원하는 맛을 골라 마지막 한 입까지 싹싹 행복한 마음으로 먹어 치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끝까지 내가 원하는 맛으로만 골라 먹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더욱 애절하고 애틋한 것.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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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슈 장 1 - 서른이 된다는 것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필립 뒤피 외 지음, 황혜영 옮김 / 세미콜론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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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다리던 책을 받았다. 오랜 기다린 만큼 기대가 커져 솔직히 좀 걱정이 됐지만 결과는 만족!

무슈장이라는 프랑스 만화에 빠져 버렸다. 책보다 빠르게 흡수되고 이입되는 것이

만화의 장점이라면 장점. 서른 살이 된 무슈장의 얼굴이 어쩐지 낯설지가 않으니...


프랑스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무슈장. 이 먼 곳의 작은 동양 여자가 보기에도 마음에 쏙쏙

와 닿는 걸 보면 진정한 재미는 세상 공용어인 듯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무슈장의 일과를

반복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싶다. 꿈으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점점 자랄수록

고독의 맛을 알아가고 일상의 무료함이나 그 무료함을 위해 노력하는 무슈장의 모습.

과거를 곰씹으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 등.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만화의 그림도 좋고. 표정이며 그 디테일 들이라니....

게다가 대책없는 친구 펠릭스의 캐릭터도 좋다.


나이가 들면,

실은,

모든 것의 핵심은 깔끔하고 완벽하게 정의되지 않은 왁자한 혼동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신없고 대책 없는 펠릭스의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말이다.

물론 그는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알고 있기나 한지 모르겠지만.. 흐흐..


“‘어떻게 먹고살라고’라니! 이 겁쟁이 애송이야.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거지

어떻게는 중요한 게 아니라구.”

 

 

그래, 어떻게 사는 것이 무에그리 중요하냐! 산다는 것 그자체카 중요한거지... 암... 

너는 50평에 살고, 나는 15평에 살고, 그게 중요해? 어쨌건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너나나나 우주에서 별볼일 없는 존재인 것은 마찬가지라구!

오래된 친구 펠릭스의 말이 머릿속에 둥둥~  책을 덮고 나서도 야릇한 진중함과,

흘리는 듯한 유머가 잘 어우러진 매우매우 사랑스러운 만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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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영혼
필립 클로델 지음, 이세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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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누구나 그런 날들이 있다. 열망하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생은 모든 정열을 소진하여도 원하는 곳으로 흘러가지 않아, 우리는 때로 좌절하고, 때로 쓸쓸하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아름답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면서도 문득 ‘삶이, 얼굴에 정면으로 뱉은 침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달리 어쩔 방도가 없다. 그저 손으로 스윽 닦아내고 다시 살아내야 할뿐.


인생은 이 사람과의 관계로 시작해 저 사람의 관계로 다시 넘어간다. 마치 박지성의 응응캔버스 광고처럼, 삶은 사람과의 관계를 다시 돌려보고돌려보고 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고 보니 그것은 입에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신화 속의 뱀, 우로보로스를 닮지 않았나! 실상, 이렇듯 눈만 뜨면 만나고 만나는 무수한 사람들의 영혼이라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아, 흰 놈도 검은 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필리핀 애들과 인도네시아 애들을 구별 못하듯 영혼도 그저 이놈이 그놈이고 그놈이 저놈일 뿐이라고. 이 기막힌 생의 아이러니, 영의 아이러니를 발견해 낸 자가 바로 아무도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는 더러운 한 여인이라니, 이 또한 재미있는 파라독스.


데스티나 검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쓸쓸한 무채색의 얼굴로 어느 오래된 벽화의 흐릿한 그림처럼 하루하루를 보냈을 사람. ‘사랑과 범죄가 그에게서 하나가 되는’ 고결한 모습이라니... 그의 아내와 여교사와 벨드주르의 흑백사진이 눈앞에 현현하다. 그 여인들과 데스티나 검사의 뒷모습에 가슴이 벅차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혈액의 양이 돌연 증가한다. 전쟁을 간신히 비껴간 한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어린 벨드주르의 싸늘한 시체의 입술만이 푸른빛일 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형상은 흐릿한 회색이다. 토악질 나오는 판사와 그의 동종, 그들을 떠받드는 시종들, 경악하는 사람들, 도덕적 관념으로 자신을 합리화 하는 주민들, 알코올중독자 여인, 탈영병, 그리고 충격적인 마지막의 화자 자신조차... 누구하나 벨드주르의 보랏빛 입술보다 선명한 영혼을 지닌 자가 없다. 심지어 신을 섬기는 신부조차 벌거벗고 아귀처럼 음식을 씹어 육체를 살찌운다. 벨드주르를 죽인 자는 정말 남들보다 더러운 영혼을 가졌을까? 이곳의 살인은 마을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살인보다 지독한 것인가? 필립클로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관념상의 살인에 비해 진짜 살인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의 병든 욕망과 절대적 현실 사이의 평형이 이루어지는 때는 사실 전쟁 때 뿐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지르며 표현할 수 없는 악행을 행하고 사는가. 누군가의 머리가 부숴지기를, 누군가의 인생이 초토화되기를 빌고 또 비는 것이 당신과 나의 마음이다. 그래서 작가는 ‘타인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아도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생의 이면을 날카롭게 포착해낸 작가가 놀랍다. 무릇, 우리는 헤헤호호 웃는 낮으로 생활의 모든 이들을 대하고 존경하고 우러르나 돌아서면 어떠한가! 자신뿐 아니라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관념의 살인과 실재의 살인, 너머의 살인과 지척의 살인, 이 모든 것의 경중을 따질 수 있을까? 죽음의 이미지 또한 다르지 않아. 너와 나를 포함한 모든 죽음의 모습도 그러하다. ‘범죄자와 희생자가 모두 순교자가 된 살인. 그건 흔치않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검사가 범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작품에서의 범인은 작품의 특성상, 작품의 구조상, 인물의 설정상, 주제상 순교자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연민을 부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짜맞춘 말 그대로 소설이고 픽션이라고는 하나, 책을 읽는 내내 순교자의 뒷모습에 쓸쓸해하고 가슴이 아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작가의 의도대로 모든 것을 흐릿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끊이지 않는 하나의 원으로 이루어진 피의 형제! 당신의 영혼이 그러하듯 나의 영혼도 그러하다. 색도 명암도 없는 흐린 회색의 빛깔... ‘개새끼들이 개새끼들이라서가 아니다. 아마도 우연이란 없으리라,. 나는 곧잘 그런 생각을 했다. 모두들 각자의 드라마 안에서 지독한 자기중심주의자들이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시작하여 끝도 없이 만들어 내는 완전하고 완벽한 구(毬).


필립클로델은 ‘짜샤, 글은 이렇게 써야 하는 거야!’ 라고 말하며 둔기로 내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정신이 아득하고 눈앞은 온통 회색빛... 마지막까지 떨리는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작가의 필력이 내내 놀랍기도 하고 그 치밀한 구성과 인간과 인간의 미세한 감정까지 이리저리 마음대로 부릴 줄 아는 능력이 부러울 뿐.........................

헌데, 너와 내가 같다면, 너와 내가 어찌 생을 살아내든, 영혼의 색은 같은 것이라면 우린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 내야 하는 걸까? 우습지 않은가! 하늘 꼭대기에서 날고 뛰는 인생일 지라도, 진흙을 뒹구는 더러운 인생일 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모두가 같다는 것. 마지막엔 결국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나저나, 그것을 좋아해야하나.. 싫어해야 하나... 때론 참, 얼굴에 정면으로 뱉은 침처럼 생이 느껴져 몹시 쓸쓸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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