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글쓰기의 전략 - Reading & Writing
정희모.이재성 지음 / 들녘 / 200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미의 어느 작가는 ‘꿈은 그 사람의 정신을 일깨워주고 삶의 모든 비밀을 말해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꿈’을 ‘글’로 바꾸면 어떠한가. ‘글은 그 사람의 정신을 일깨워주고 삶의 모든 비밀을 말해준다.’ 어쩐지 나는 이 말이 더 어울리는 듯 하다. 이렇듯 글은 일련의 정신과 그만의 생각을 기술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이디어와 소재를 가지고 알맞게 구성하여 원하는 주제의 글을 뽑아내는 것이 바로 글쓰기의 전략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하고 도식적인 형태의 글쓰기라 하는 것이 사실은 만만하지 않으니 글쓰기를 일상으로 하는 이들도 때로는 머리를 벽에 들이 박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아이디어와 소재를 가지고 원하는 대로 글을 완성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 글쓰기의 또 다른 어려움이라 하겠다.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다시 고치고 하여도 본인이 원하는 글을 얻기란 쉽지 않다. 조선시대를 비롯하여 많은 시대의 학자들이 글을 읽고 써왔다. 그러한 박학다식한 학자들도 글을 한번에 쓰고 끝이라 하는 자는 없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나라에서 유명한 학자의 집으로 한 선비하나가 놀러를 왔다. 그의 방에 들어가 보니 자신이 쓴 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 글을 읽어보니 가히 명문이라 하겠다. 선비가 무릎을 치며 어찌 이리 아름다운 글을 쓰시었소. 나 같은 자는 고치고 또 고쳐도 이리 좋은 글이 나오지 않을 터인데, 감탄하다 혹시 얼마 만에 쓰시었는가 물었더니 그 학자 왈, 일필휘지, 단 한번에 썼다 한다. 선비는 감탄하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뒷간이 급했던 학자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그가 앉았던 방석 밑으로 삐죽 보인 것이 있으니. 그가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 쓰고 버린 종이가 족히 백장은 넘었다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렇듯 글을 잘 쓰기로 소문난 자들도 고치고 또 고쳐서 글을 써왔다. 그만큼 글이란 쉽지가 않다는 얘기일 터이며, 고치면 고칠수록 빛을 발하는 글이 완성된다는 이야기이다.


시중에는 <유혹하는 글쓰기>,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등의 훌륭한 글쓰기 책들이 무궁무진하다. 어떻게 글을 써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들이다. 그러나 <글쓰기의 전략>은 기존의 글쓰기 책들과 그 맥을 달리하고 있다. 전자의 책들이 글쓰기를 위한 이론서의 형태를 하고 있다면 <글쓰기의 전략>은 제목 그대로 책을 보며 지금당장이라도 써볼 수 있는 실용서라 하겠다. 바로 내일까지 글을 써야 하는 이들이 책을 넘겨보며 좋은 한편의 글을 완성할 수 있는 전문 실용서에 맞게 이 책은 챕터챕터마다 유익한 이론과 실용 정보들로 가득하다. 장영희나 진중권 등 명문장가들의 인용 글들도 풍부한 읽을거리이며, 챕터 마지막마다 달려있는 ‘띄어쓰기’나 ‘헷갈리는 우리글’ 등은 마치 작고 유용한 사전을 옆에 끼고 있는 듯하다. 또한 독서의 과정이나, 소재와 아이디어 찾기, 글의 구성방법이나 바른 문장을 쓰는 방법 등의 글쓰기 전략을 소개하는 본문의 내용은 실용서로서 충실하다 하겠다. 게다가 필요한 곳에는 ‘점검’이라는 섹터를 따로 마련하여 지금 방금 읽은 부분을 직접 자신이 써 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글쓰기 책이 나온다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얼마나 진실하게 잘 표현 했는가이다. 아무리 책을 읽고 그대로 써나간다 한들 진실성이 결여됐다면 그 글은 이미 살아있는 글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한다? 책에서 말하듯, 모쪼록 많이 읽고 많이 쓰는 방법 외엔 달리 좋은 방법이 없을 듯. 오랜만에 만난 글쓰기 전문 실용서를 접하니 새록새록 읽는 맛이 난다. 쓰는 맛이 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개성도 없고 딱히 특이할 것도 없는 ‘아파트’라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 그러니까 오래전의 낡고 허름했던 내 집에는 벽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벽속에 마련된, 그러나 벽과 일체가 되어 손잡이만 아니라면 결코 벽 속에 무엇이 존재하리라고 믿어지지 않는 그런 공간. 손잡이를 잡고 양손으로 밀어내면 그 어둠속에서 풍겨오던 습하고 매캐한 책의 곰팡내.


부모님이 늦어지시던 날에는 나는 늘 그곳으로 기어들곤 했다. 그 안에 쌓여 있던 수 많은 책들. 보이는 문과는 달리 그 안은 넓고도 깊었다. 때때로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어둠의 끝에는 무엇이 존재 할까 궁금했다. 내게 그 벽장 안은 책들의 도시였다. 친척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시고도 연약한 품성에 돈을 받아 오지 못한 아버지는 대신 몇 십 권의 책을 들고 돌아오셨다. 집 앞에서 흙을 만지면 놀고 있던 나는, 얼굴엔 그늘이 가득한 채 양손에 붉은 노끈으로 동여 맺던 주황빛 하드커버의 책들을 잊지 못한다. 아버지는 그날 책 더미들을 안방 벽장 속에 던져 넣으시곤 마루에 앉아 소주를 드셨다. 어렸던 나는 아버지가 벽장 속에 던져 넣은 것이 궁금해 그날부터 몰래 벽장 속을 드나들었다. 그 벽장 속에서 나는 점점 책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며 난생처음 이야기라는 것을 만났고 나의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것을 믿게 되었으며 벽장은 이제 내가 만든 책들의 도시가 되었다. <톰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 <소공녀>, <십오소년표류기><안데르센 동화집>등등을 여행하며 다녔다. 어린 계집아이의 호기심을 지독히도 자극했던 주황색 바탕에 검은 점박이 하드커버의 낡은 계몽사 책들. 그때 그 도시 속을 파고들며 만났던 내 보물들. 그래, 발터 뫼르스의 말대로 호기심은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에게나 자신만의 도시는 존재한다. 그것이 스스로 만들어낸 환타지이든 존재하고 있는 현재의 순간이든 생각해보면 자신만의 도시는 있다. 누군가는 음악의 도시를 만들고, 누군가는 음식의 도시를 만들며, 춤의 도시, 금전의 도시도 존재한다. 그리고 당신과 나의 경우는 책들의 도시이다. 발터 뫼르스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는 자신의 도시를 가장 완벽하고 기발하며 독창적으로 발굴해 냈다는 것이 우리와 다를 뿐이다. 만약 당신이 그가 만들어낸 도시가 궁금하다면, 저자의 상상력에 몸을 맡기면 그뿐이다. 필요한 것은 ‘호기심’이라는 추진력이면 족하다.


뫼르스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서 온갖 은유와 상징을 바탕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얼핏 보면 신나고 흥미진진한 판타지소설에 불과하나 한 번 더 생각하면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에 때때로 정신이 번쩍 들거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퍼지곤 한다. 그 상징과 은유들은 단지 소구가 된 책뿐이 아니라 온갖 문화들, 책과 음악. 영화와 모든 매체를 아우르고 있다. 가령, 책에 독을 묻혀 살해하는 모습은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키며, 음악으로 영혼을 뺏는 장면은 17세기의 그 치명적인 ‘카스트라토’를, 그리고 부흐하임에서 일어나는 작가와 편집자 출판업자들의 관계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고, 주인공을 공격하고 물어뜯던 살아있는 책들은 끝도 없이 출판되는 악서(惡書)를, 스마이크가 어둠의 제왕을 만드는 장면은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또한 결정적으로 주인공을 인간이 아닌 공룡으로 삼은 것은 왜일까? 그리고 인간은 그저 라이덴 병속의 ‘소인간’으로 전락시켜버린 의미는? 이 꿈꾸는 책들의 도시 속에는 환상적인 이야기뿐 아니라  시선을 조금만 달리하면 나름대로 찾아 낼 수 있는 해석의 범위가 무궁무진하다. 생각해보라. 인간이 아닌 공룡이라니! 병속에서 죽음을 맞는 하찮은 인간이라니!  맞다. 당신들의 짐작대로 우리는 발터 뫼르스의 호기심의 덫에 걸리고 만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것 하나! 그 악랄한 권력자 ‘피스토메펠 스마이크’ 이름의 문자를 재 정렬하면? 바로 파우스트의 무시무시한 악마 ‘메피스토’가 된다! 재미있지 않은가! 물론 독일어의 순차로는 아니다 이러쿵저러쿵 하더라도 그냥 웃어넘기기에 어째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은 왜 일까? 이것은 단지 우연이었을까? 언어의 오류를 문체로 간주한다던 ‘가가이즘’, <기사 헴펠>이라는 위대한 책, 골고, 알리 아리아 에크미르너, 블로른, 아구 프로스트라는 책 속의 작가들과 그 외의 내가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수많은 작가들과 여러가지의 상징들, 이것들도 우연일까? 과연? 정말?

 

 

숨막히는 폭염의  여름, 그저 롤러코스터와 같은 신나고 시원한 책을 읽고

가볍게 돌아서려는 내 소매끝을 이 모든 것들이 자꾸만 끌어대니 이 어인 일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잭 웨더포드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이론과실천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 인간속의 야만은 결코 제대로 근절되지 않았다

언젠가 천장단의 사진을 본적이 있다.  황량한 티벳의 고원 위에 흩뿌려진 인골과 발길에 채이는 무수한 뼈들. 그리고 시체 주위로 새까맣게 몰려드는 거대한 독수리의 무리.
느릿느릿 조각난 시체사이를 걸어다니며 죽은 자의 살을 발라 먹고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
나는 그 때의 경험을 잊지 못한다.
죽은자를 받아 들인채 거대한 날개짓으로 멀리 사라지던 독수리들의 희미한 울음이,
그 서글픈 노래같던 울음이 내내 귓전에서 멈추지 않았다.

죽은 자의 영혼을 새를 통해 하늘로 올려보내 다른 생으로 살아나게 한다는 티벳인들의 윤회관을
보여주는 장례의식이 바로 천장(天葬)이다. 소위 문명의 옷을 입은 자들은 이들의 장례의식을 본다면
아마도 혐오스러워 하리라. 야만스러운 일로 치부해버릴 수 있는 상황이...  그러나 내가 본 그것은 차라리 거룩하기까지 했다. 
이 고귀한 의식을 두고 야만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을 혐오로 치부해 버리는 우리는 문명이고?
문명과 야만의 경계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이 작은 순간의 경험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전 세계의 오지와 도시들을 오가며 문명과 야만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다른 인류학 서적이나
오래된 고서처럼 딱딱하고 건조한 문체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아닌, 마치 옛날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주는 할머니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족하다. 저자가 답사한 곳의 이야기와 자신의 상황을 조금씩 들려주며
어색하지 않게 역사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다시 문명과 야만의 집합소로 우리를 초대한다.
각설탕이 흔적도 없이 물에 스며들듯 말이다. 그리고 이쯤에서 우리는 저자가 준비해 준 달콤한 설탕물을 마시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막의 애버리진을 이야기하고 방랑의 자유를 잃어버린 인간과 대초원을 누비는 유목민을 이야기하며
여러 부족문화와 다양성의 기원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악질적 무역인 노예제도 까지!
인간의 문명은 수 많은 부족들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노예주는 문명이고 노예는 야만인 것인가? 인간의 목에 쇠사슬을 걸어 종속시키고 향수와 만찬으로 사교계를 유지하는 인간들은 자신들을 문명이라 부른다. 그러나 종속된 자의 눈에도 과연 그들이 문명으로 보일 것인가?
어처구니 없지만 1990년대에 와서도 수단의 작은 마을에서는 아직도 시장에서 아이들을 사고파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 문화에는 저마다 문명이 있다

"문명은 영원한 진퇴유곡에 빠져있다. 도시인의 문명은 살아남기 위해 부족민의 가치관을 필요로한다.
그렇지만 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문명화한 도회 생활은 접축이 있을때마다 언제나 부족민을 파괴한다"

내 집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현대적인 황금의 길이고  다른 한쪽은 숲과 동물들로 가득한 길이 있다.
그러나 어느쪽이 가치있는 길인가를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될까?
단언컨데 저자의 말대로 문명은 영원한 진퇴유곡에 빠져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하지만 그 필요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약자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기 때문이다.  
문화적인 문제는 참으로 어렵고 답이 없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과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제국. 이 두 개의 정부가 얼마나  이질적인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알렉산드로의 제국을 제압한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제국이 전세계의 현대적인 국민주의 시대를 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화에는 저마다 문명이 있다. 하찮은 부족집단의 문화에도, 현대적인 도시의 문화에도, 침략을 당한 알렉산드로의 문화에도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문화에도 저마다의 문명을 지닌다.

또한 저자가 보여주고 있는 수 많은 문명과 문화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동양을 향해 태평양을 건너는 마젤란, 한때는 아름다운 자연으로 지상낙원이었으나 지금은 석유에 의존해 살아가는 이라크의 모습 등, 그러나 역시 소모와 파괴라는 낭비적인 습관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 문명이라는 놈임은 확실하다.

 


@ 우리는 우리문명이 자오선 가까이 다다랐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새벽별이 떠오르고 새벽닭이 우는 시각에 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야만이라 부르는 것들이 낭만으로 치부되고 있다.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이나 오페라 카프멘,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글들과 고갱의 삶 조차 그러하며 그외 수많은 곳에서 민족집단과 원주민은 이제 낭만으로 남아있다. 사람들은 원주민의 문화를 바라볼때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대로 본다.  그러나 "원주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관없이 그런 시선 속에서는 원주민 보다 우리 자신이 더 잘 드러나는 때가 많다"

식민시대와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대규모 학살과 숙청등은 원주민의 그것보다 나은 것일까? 수 많은 전염병과 폭력 그리고 과학기술로 인해 어두워진 현대의 그림자는 저 먼 원시시대의 모습보다 역겹기 그지없다. 하와이 오아후섬에 자리잡고 있는 <폴리네시아 문화센터>는 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야만적인가에 대한 그 극명함을 보여준다.
수많은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마오리 여자들이 춤을 추고 남자들은 원주민 특유의 행동을 보여준다.  관람객들은 웃음과 박수로 그들을 맞이하고 문명속 원시인의 모습은 문명의 이름을 쓴 야만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문명을 위한 연극들 중 압권인 것은 이것이다. 관람객은 질문을 하고 원주민의 모습을 한 자는 대답을 한다. 이것은 그들 고유의 업무가운데 극히 일부부이다.
"지금도 집에서 돼지를 구덩이에 놓고 요리하나요?"
"특별한 경우에만 그렇게 합니다"
"그럼 보통때에는 어떻게 요리하죠?"
"엄마는 스토브를 쓰고 저는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려버리죠"
일동 포복절도.

 슬프다.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 해도 쓴웃음이 나는 건 어쩔수 없다.

문명은 위기를 맞았다. 야만을 비웃고 약탈하여 문명으로 만들어 버리고자 온 힘을 쏟았던 문명조차도 위기에 봉착하고 만것이다. 폐허가된 마야, 약스칠란의 황량한 거리, 몰락한 그리스의 도시들! 그리고 우리의 문명이 얼마나 덧없이 사라져 버릴 것인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도시와 문명들! 역사를 통틀어 문명은 연이어 무너져 내렸다. 문명을 자신하고 자부심에 사로잡혔던 도시와 사람들은 문명의 승리감에 되취되어 자신들의 몰락을 잊고 있는 것이다.
어떤 한 문명이 영원히 지속될 순 없다. 무서운 일이지만 어느순간 우리의 문명은 스스로 이룬 성공에 의한 희생자가 되어 버릴 것이다.
야만과 문명, 과연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 그러다가 갑자기 도시가 죽어 버렸다, 그리고 문명 전체가 사라지고, 폐허가 된 몇몇 건물과 옛 무덤과 쓰레기 더미 속에 몇몇 유물만이 남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헨즈 2005-07-0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화문처자님! 저도 이 책을 있는데, 리뷰가 너무 좋아서...
감히 제 블로그(네이버,anhyein10) 에 담아갑니다. 출처는 꼭 밝히겠습니다^^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여기에 내가 있고 그곳에 네가 있다. 우리 둘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하는 것일까? 영화 [비포 선 라이즈]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신이 있다면 너와 내 안이 아니라 너와 내 사이에 존재할 것이다.” 라는... 그래, 저 고매한 신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아와 타아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그렇다면 나와 그 사이에는 어떤 장치와 어떤 의미, 어떠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것일까? 알랭 드 보통의 kiss & tell 은 이러한 궁금증을 기저에 깔고 이야기를 끌어간다. 연애담을 빌은 한 여인에 대한 전기(傳記) 형식으로.


보통은 이사벨의 전기를 11개의 챕터로 이어간다. 물론 한 시도 손을 뗄 수 없을 만큼 강한 흡입력을 자랑하는 보통의 글이지만, 그 중 흥미 있었던 챕터는 <기억>과 <다른 이의 눈을 통해 본 세상> 이다. <기억>에서는 기억이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듯 알연히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나란히 전개되는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두 측면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내 과거를 말씀드리자면 이러하다. 나는 코흘리개 적, 그 간절한 달콤함을 억누르지 못해 ‘자두맛사탕’ 한 봉지를 훔치다 걸려 하루 종일 주인아줌마 옆에서 무릎 꿇고 손을 든 채 X망신을 당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것이 벌써 20여년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마트나 가게에서 ‘자두맛사탕’의 붉은 봉지만 보면 식은땀이 나고 주춤주춤 꽁지를 빼는 것이다. 자 어떠한가! 이만하면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전개되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기억은 자신과 현재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간을 녹여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멋지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기억은 스스로 단계를 밟아나가며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불친절하게 불쑥 튀어나오고, 어떤 우연한 주제를 여는 서막일 뿐이다. 프라이팬에서 지글거리며 튀겨지는 요리가 아니라 다시 데운 음식이다.] 아... 미치겠다..... 죽갔다.... 보통이 기억을 정의하는 이 부분에선 보통의 징글맞은 필력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질투심을 억누를 길이 없어 총탄에 심장을 빗맞은 짐승처럼 흐느끼며 새벽 내내 온 손톱과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먹어야 했다. 보통.. 보통.. 정말 보통 놈이 아니다.. 각설하고... 


<다른 이의 눈을 통해 본 세상>에서는 자아와 타아의 입장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가령, 나와 타인은 어떤 투명한 하나의 물 컵을 놓고 보아도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보통은 ‘합리적’ 이라는 단어를 예로 들고 있다. ‘합리적’이라는 단어를 두고 화자는

1. 고상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칭찬의 일종,

2. 감정과 대립되기도 하고 더 풍부하게 해주기도 하는 '긍정적인 형용사'로 보는 반면,


이사벨은 ‘합리적’이라는 단어를

1. 아는 척하는 따분한 작자들을 가리키는 것,

2. 감정과 반대의 의미, 전통적인 가족이원론을 떠올리게 하는 '부정적인 형용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사전적인 정의가 엄연히 존재하는 단어마저 각자의 눈으로 본, 경험으로 체득한 의미를 따로 발견할 진대, 하물며 자아와 타아를 이루는 수많은 관계와 보이지 않는 의미들의 해석이 어떻게 일치 할 수 있단 말인가!  보통은 말한다. “이런 어긋난 결과를 가져온 작은 의미의 충돌은 하나의 개별 사건이 상이한 의미 영역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라고.


그런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 누군가 한아름의 꽃을 사가지고 집 앞에서 기다린다고 해서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보장은 없다. 나는 꽃을 든 그의 출현을 통해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가늠하며, 아마도 감동과 눈물의 환타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저 지나가다 꽃이 아름답길래 샀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다라고 말한다. 그저 꽃이 예뻐서 샀으며 마침 당신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기에 주는 것뿐, 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그저 우리는 그렇게 알면 그뿐인 것이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보통의 책은 다른 것도 그러하지만 상당히 재미있다.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그만의 위트와 통찰력에 읽는 내내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마지막 결론조차 보통답다. 재밌는 건, 화자의 치밀한 인간에 대한 분석과 관계에 대한 심리, 보고, 추론에도 불구하고 이사벨의 한마디에 모든 것은 갈 길을 잃고 만다. ‘왜 사람들의 삶을 그런 바보 같은 전기들처럼 요약해야 하는지 말야‘ 라는 통쾌한 외침! 아, 치밀한 파라독스! 이사벨도 모르는 것이다. 왜 내가 이곳에 살고 있는지, 왜 문은 그렇게 생겼는지, 왜 치즈는 사각으로 자르는지...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 아닌가!(누군들 그러하지 않은가! 당신은 왜 대한민국에 태어났는가! 저기 어디 도둑놈의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어쩔 뻔 했는가 말이다!) 텔레비전보다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하는 걸 알지만 티비가 더 좋은걸!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하지만 싫은 놈은 당최 재수없기만 한 걸!

왜! 왜! 사람들의 삶을 그런 바보 같은 전기들처럼 요약해야 하는지 이사벨은 정말 모르겠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