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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성당 1
일데폰소 팔꼬네스 지음, 정창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천명하거늘, 이 순간까지 소작농들이 지켜야 했던, 정당하고 적법한 것이 아닌 그 밖의 의무사항 역시 폐기한다. 아울러 내 영지의 주민들에게 천명하거늘, 누구나 자신의 빵을 구울 수 있는, 누구나 자신의 가축에 낙인을 찍을 수 있는, 누구나 자신의 연장을 준비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한다. 모든 여자와 어머니들, 그대들에게 천명하거늘, 영주의 자식들에게 젖을 먹이는 행위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한다."
베르나뜨 에스따뇰의 결혼식 날이다. 아름다운 아내를 얻은 그는 큰 잔치를 마련했다. 이웃과 친지의 축하 속에서 흥겨운 잔치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영주가 나타났고 그는 말했다. "에스따뇰, 난 영주로서, 영주의 권리로 네놈의 아내와 초야를 치르기로 결정했느니라."
이 날부터 그의 삶은 그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당연하게도 아내와는 돌이킬 수 없는 어색하고 안타까운 사이가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자 그는 다시 희망을 가졌지만 영주는 그의 희망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아내는 창녀로서 세상을 떠돌게 되고 그는 자식을 안고 도망자가 된다. 자식에게만은 자신과 같은 인생을 살게 할 수 없었던 그는 도시로 가서 도시의 자유시민이 되기로 결심한다. 바르셀로나에서 살고 있는 여동생을 찾아 몸을 의탁한 베르나뜨는 아들 아르나우의 자유만을 바라며 아무런 욕심없이 살았지만 운명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억울한 오해와 비뚤어진 욕심, 귀족들의 잔혹함이 더해져 그는 사형당하고 아르나우는 복수의 칼을 간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는 베르나뜨의 아들 아르나우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흐름을 탄다. 아르나우는 아버지를 빼앗고 자존심을 짓밟고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은 귀족과 사제들에게 복수한다. 그리고 자유와 행복을 쟁취한다. 당연히 그 안에는 귀족과 종교인들의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욕망과 악의로 가득한 편견이 만들어내는 암흑이 그려진다. 14세기 스페인의 농노들은 살고 있는 땅의 영주에게 속한 노예로서 그 어떤 권리도 가질 수 없는 위태로운 존재였다. 영주들은 하인의 재산 일부분을 승계했고, 간통한 여자의 재산 일부분 혹은 전체를 차지했고, 자식 없이 죽은 소작농의 재산 일부를 위임받았으며, 마음대로 소작농을 학대하거나 그들의 물건을 차지할 수 있었다. 영주들의 땅에서 화재가 일어나면 소작농들이 배상해야 했고, 베르나뜨의 일에서 알 수 있듯 영주는 소작농의 아내를 함부로 차지할 수 있었던 초야의 권리 또한 지니고 있었다. 힘없고 가난한 민중들이 의지할 유일한 안식처인 종교도 그들을 외면했다. 사제들은 귀족들과 함께 특권을 지키고 더 큰 힘을 가지기 위해 무지한 사람들을 선동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공포정치에 한몫을 담당했다.
스페인에서 공전의 히트를 이루어낸 이 역사소설을 통해 학교에서 개략적으로 배우는 유럽 역사에서 알 수 없었던 민중들 삶의 비참함이나 따뜻함을 알 수 있었다. 소설이긴 하나 작가노트에서 알 수 있듯이 뻬드로 3세의 연대기를 바탕으로 당시의 관습법 등을 참고하여 만들어진 이야기라 작품 안에서 그려지는 민중들의 삶이 당시에 실재했던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다의 성당』은 분량이 상당한 장편 역사소설이다. 이런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강력한 서사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그것을 지니고 있다. 번역문이라는 걸 감안해도 묘사는 한결같고 문장은 투박하다. 그렇지만 탄탄하고 감정을 모두 이입할 수 있는 서사가 그런 단점을 압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