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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제목처럼,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소설이다. 행렬에 대한 거부감과 역사의 덧없음, 이것은 '가벼움'으로 표상된다. 그리고 이 가벼움은 우연, 개인, 자유, 일회성, 직선적, 떠남, 떠돎과 같은 것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는다.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필연, 집단, 안정과 구속, 반복성, 순환적, 돌아옴, 머묾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무거움'이다. 가벼움과 무거움은 그 말 자체로는 사물의 무게에 대한 인간의 감각을 표현하는 말이면서, 여기서는 세계를 이루고 있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이항대립적 범주다.
'나'를 둘러싼 '우리'가 부과하는 무게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다른 사람을 배신하며 스스로를 외톨이로 만드는 행위, 자유로운 상상력. 한편, 집에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정착하고픈 욕망, 힘의 결집과 그것에 대한 동경. 다소 범박하게 대립시킨 것들이지만, 사람이란 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고, 90년대 초쯤에 우리나라에서 개봉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영화의 제목이 '프라하의 봄'으로 바뀌어서 개봉되었다. 아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말이 자아내는 어떤 심오함이 흥행의 실패를 가져올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좀 더 평이한 제목으로 바꾼 것 같지만, 쿤데라의 입장에서 보면 제목을 그런 식으로 바꾸는 것은 실수임에 틀림없다. 쿤데라의 소설 제목은 언제나 그 소설의 핵심을 찌르는 다소 추상적인 어구들이다.
그럼, '프라하의 봄'은 어떤가? 다시 말해, 프라하의 봄이라는 역사적 상황은 이 소설에서 무슨 의미인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지난 십 수년간 통치를 했던 노보트니가 정계에서 물러나고, 국민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는 두브체크가 권좌에 올랐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천명하며 개혁을 단행하고, 소련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한다.
그러자 소련 탱크를 앞세운 바르샤바 조약군이 체코를 공격했다. 국민들은 그들에 저항했으나 소련군은 개혁적인 정치가들을 끌고가서 위협하고 굴복시켰다. 소설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이라는 정치적 사건 자체를 소설의 직접적인 주제로 다루었거나, 혹은 이 시기를 다루면서도 이를 고의적으로 무대 장치나 소품 따위의 위치로 밀쳐냈다면, 이 소설은 범용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상상력을 동원해서 프라하의 봄을 떠올려 보자. 스메타나가 노래했던 보헤미아의 아름다운 블타바 강변의 가도를 질주하는 소련군의 탱크, 그것은 에펠탑을 배경으로 하고 승리를 기념하는 촬영을 하는 히틀러의 모습 못지 않게 가공할 모습이다. 그러나 약간 다른 뉘앙스: 아무 무기도 들지 않은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이 소련 탱크를 저지한다. 탱크가 포를 쏜다. 동맹국 국민의 가슴에서 피가 흐른다. 아무도 그 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프라하를 손쉽게 점령한 소련 군인들에게 젊고 날씬한 체코 여성들이 키스를 퍼붓는다! 섹스에 굶주린, 그러나 규율에 묶인 군인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모욕이며 테러이다.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이라는 책의 프라하의 봄 부분에는 비극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만화가 하나 있다. 1945년 한 소녀가 군인에게 꽃을 건네준다. 1968년 그 군인은 꽃을 건네준 소녀를 총으로 쏜다. 꽃을 건네 준 소녀를 살인하고, 동맹국의 국민을 살해하는 것, 이것은 근친상간의 메타포를 간직한 역사의 현란한 소용돌이다.
작품 속에서 쿤데라는 이를 두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증오감에 도취된 축제'라고 갈파했다. 이렇게 현란한 시대, 저마다 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은 시대는 가장 뛰어난 희극과 비극을 낳게 마련이다. 즉,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인간의 존재조건과 실존적 선택들이 날카로운 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난다. 작가에게 있어 역사적 상황이란 그런 온갖 이항대립들을 미학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기막힌 함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