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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ㅣ 대담 시리즈 3
임지현.사카이 나오키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5월
평점 :
신생 출판사가 작년에 내놓은 책 한 권에 몇 가지 '혹평'을 해 두고자 한다. 그러나 책 자체에는 별 네 개를 준다. 읽어야 하는 책이기 때문에.
일단 이미 국내 학술지에 많은 논문이 발표되었고 단행본도 꽤나 나와있는 임지현 보다는, 사카이 나오키의 사유를 알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게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은 수확이었다. 사카이 나오키는 그간의 일본의 지식인들이 보여줬던 이론의 소화와 비판적 해석, 그리고 당위적인 입장의 제시를 넘어 일본의 전후 문제, 혹은 그와 밀접히 연결된 아시아 공동체라는 논점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인 실천의 방식을 구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결국 '민족' 혹은 '국민'이라는 동일체 내부에 끊임없이 균열을 내며 단일성의 환상을 깨뜨리는 것이다. 일본 전후 책임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 또한 그러한 연장에서, 즉 국민을 단위로 한 집단적 유죄와 집단적 무죄를 넘어서, 그 내부의 가해자들을 가려내고 처벌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이라는 문제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미국의 헤게모니와 그것의 '효과'로서, 적대적 입장에서 상호의 존재를 지지하는 일본, 한국의 국민주의에 대한 분석도 계발적이다. 자연발생적인 것처럼 상정되는 국민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 외부로부터 그것을 바라보는 구조주의적 입장을 사카이는 확고히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출판 기획자의 애초 구상이 얼마나 심도있고 체계적인 것이었던가에 대해서 다소 회의적이다. 적어도 이 정도의 대담과 대담집을 기획하려면 이미 사카이 나오키와 임지현을 비판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수준 정도는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반 위에서라야 서로 깊이있게 논쟁할 수 있는 화두를 제시하고 대담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담 사이사이에 있는 출판 기획 측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들이 사카이와 임을 '학습'하고 '독해'하는 선을 넘어가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아쉽다. (자기들이 잘 모르는데, 꼭 배우고 싶은 욕구가 있다면, 출판 기획보다는 강연회를 여는 편이 낫다.)
출판 기획상의 불비가 한편으로 출판사 측에서 대담에 가한 주석에서, 또 한편에서는 대담 자체의 흐름에서 문제로 불거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책의 주석은 두 사람의 대담에서 나온 다소 어려운 학술용어라든가 인물들에 대해서 보충적인 설명을 덧붙인 것인데, 묘하게도 대담과 마찬가지로, 'ㅂ니다'의 경어체로 쓰여있다. 경어체 자체가 묘한 것이 아니라, 왠지 그 맥락에서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주석을 작성한 사람들은 대담자들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학습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반면에, 주석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그 주석 자체의 충실성(사실적 내용보다는 세간의 평가가 주가 되어있는)과는 관계없이 무언지 모르게 가르치려 하는, 여러운 것을 자상하게 설명해 주려는 듯한 자못 계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담에 대해서 말하자면, '전적으로 동감입니다'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대담은 처음인 것 같다. 대담자 사이에 긴장이라든가 어떤 사유의 변증법적 전개가 잘 보이지 않으며, 두 사람이 계속 비슷한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뭔가 답답한 오해의 선이 대담 내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애초 대담자를 선정한 방식 또한 나의 감각으로는 다소 서툴렀다. 임지현을 선정한 다음, 그가 대화하고 싶은 상대를 물어, 임지현이 선택한 상대가 사카이 나오키였다는 것인데, 그런 방식, 즉 임지현을 통해 사카이 나오키로 다가가는 방식은 그야말로 출판 기획 측 자체의 청사진의 결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임-사카이의 듀엣을 유지하더라도 누군가가 질문을 던지고 다른 누군가는 답변하는 방식을 기본적인 대담 포맷으로 잡으면 좋지 않았을까.
이 책을 같이 출판하기로 출판하기로 한 일본의 이와나미 쇼텐에서는 아직 이 책이 나오지 않았다. 동일한 대담을 가지고 편집은 각 출판사의 구상에 따라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고 했는데, 이와나미 판에서는 휴머니스트 판과 어떤 식으로 다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