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별짓기>가 다시 나왔다는 말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서점에 가서 책을 찾아 상권 238쪽과 239쪽에 걸쳐 있는 도표를 펼쳐봤는데, 실망스럽게도 오른쪽 가운데 끝에 있는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의 거꾸로 된 '+'와 '-'가 수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책이 새물결에서 처음 번역되어 나온 것은 1995년이고, 한동안 품절되었다가 10년이 지난 작년 2005년 말에 같은 번역서의 2쇄가 나왔다. 학술서적이 재출간되는 것은 어지간한 책이 아니고서는 쉽게 오지 않는 기회이므로 이참에 기존의 번역본이 갖고 있었던 오류들을 수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사와 역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뀐 건 서체와 페이지 수 뿐.

최근에 어찌어찌 공짜 책이 생겨 찬찬히 읽어보는데, 마침 Richard Nice의 영역본도 있어 함께 읽어 보니 실제로 번역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영역본도 불어 원본이 아니므로 역자의 개입이 있었을 거란 점을 참작해도, 한국어 번역본은 너무 문장이 어색한 것이 많고 명백히 오역인 부분이 드물지 않게 눈에 들어온다. 사실 이 책의 부제부터 '사회적 판단력 비판(critique sociale de jugement)'으로 직역하지 않고,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이라고 번역한 것도 해명을 요구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지만.. 어쨌든, 시간이 되는 대로 문제있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적어둘까 한다.

 

 

 

 

 

 

89쪽 중간 부분: [...] 이 ‘미학’이 사소한 것의 이미지나 혹은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같은 이야기가 되지만, 이미지의 시시함만을 거부하는 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판단은 이미지의 대상과 관련하여 결코 대상의 자율성이라는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 이 ‘미학’이, 사소한 것의 이미지나―혹은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같은 이야기가 되지만― 이미지의 시시함을 거부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판단은 그 ‘대상의 이미지’에 ‘이미지의 대상’과 관련된 자율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109쪽 끝부분: 모든 순수한 미학적 반응과 함께

⇒ 모든 순수한 윤리적 반응과 함께 

[명백한 오역이다.]

 

116쪽 중간 부분: 미적 성향을 규정하고 있는 세계와 중성적 관계를 맺으려면 잠재적으로는 부르주아적 자기투입의 자세가 요구하는 진지함의 정신을 전복해야 한다.

⇒ 미적 성향을 규정하고 있는 세계와의 중성적 관계는 잠재적으로는 부르주아적 자기투입의 자세가 요구하는 진지함의 정신을 전복해야 한다.

["미적 성향을 규정하고 있는"이라는 어구가 "세계와의 중성적 관계"라는 어구 전체를 수식해야 한다.]

 

117쪽 첫문단: [...] 하지만 문화자본은 풍부하지만 경제자본은 빈약한 특정집단에 특유한 성향이나 이해관심과의 관계를 간파하지 못하는 한 예술가들이나 심미주의자들은 계속 정통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서로 상대화하는 여러 취미들이 끊임없이 유희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일종의 절대적인 참조사항을 제공하게 된다.

⇒ 하지만 문화자본은 풍부하지만 경제자본은 빈약한 특정집단에 특유한 성향이나 이해관심과의 관계가 인식되지 못하는 한, 예술가들이나 심미주의자들이 계속해서 요구하는 정통성때문에, 서로 상대화하는 여러 취미들이 끊임없이 유희를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예술가들이나 심미주의자] 자신들도 모르게 일종의 절대적인 참조사항을 제공하게 된다.


119쪽 표 이곳저곳: 적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

⇒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

[교열담당자의 부주의인 듯]


120쪽 중간 부분: [...] 이상화된 비전vision의 형태로 구분된 인접성

⇒ 이상화된 비전vision의 형태로 거리있는 인접성(distant proximity)


132쪽 3번째 줄: [...] 이 조기교육은 문화는 ‘포장술’에 불과하다는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듯이 동시적으로 주입되는 경향이 있는 언어나 문화와의 관계 양상에서만큼 그 효과가 그리 심원하거나 지속적이지는 않다.

⇒ 이 조기교육은 문화는 ‘포장술’에 불과하다는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듯이 그 결과의 깊이와 지속성에서라기보다, 동시에 그것이 주입하려는 경향이 있는 언어와 문화와의 관계양상의 측면에서 그러하다.


155쪽 4번째 줄: 획득양식의 효과는 가구, 의복, 요리처럼 일상생활에서 진행되는 통상적인 선택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것들이 옛날부터의 뿌리깊은 성향을 특히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이유는 교육체계가 개입할 수 있는 장의 바깥에 놓여 있는 이것들이 실제로 노골적인 취향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취향에서는 주간여성지나 ‘이상적인 가정’을 단골 주제로 다루는 잡지처럼 [...]

⇒ 획득양식의 효과는 가구, 의복, 요리처럼 일상생활에서 진행되는 통상적인 선택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것들이 옛날부터의 뿌리깊은 성향을 특히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이유는 교육체계가 개입할 수 있는 장의 바깥에 놓여 있는 이것들이 실제로 적나라한 취향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상적인 선택에서는 주간여성지나 ‘이상적인 가정’을 단골 주제로 다루는 잡지처럼 [...]


155쪽 하단 87번 각주 중간 부분: [...] 특히 부분적으로 약호화된 지식으로서 실제적으로 기능하는 분류 ‘감각’의 변형(시대, 장르, 양식을 구분하는 문학사 서술 방식을 생각해 보라)은 선택받지 못하고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상속화’ 감각에 몸을 맡기는 비율을 감소시켜 주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경제적-문화적 유산에 따른 차이도 감소시킨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차이가 다른 곳에서는 그대로 지속되며, 이러한 장소에서 차별화를 위한 투쟁이 전개되는 경우 이러한 차이가 아주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오히려 실제로는 항상 이러한 경향으로 나아간다.

⇒ 특히 부분적으로 약호화된 지식으로서 실제적으로 기능하는 분류 ‘감각’의 변형(시대, 장르, 양식을 구분하는 문학사 서술 방식을 생각해 보라)은, 적어도 과잉선별된 사람들[over-selected; sursélection, 127쪽 참조]에게는 ‘상속화’ 감각에 내맡겨진 것의 무게를 덜어주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경제적-문화적 유산에 따른 차이도 감소시킨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차이가 다른 곳에서는 그대로 지속되며, 이러한 장소에서 구별짓기를 위한 투쟁의 논리가 이러한 영역으로 스스로의 현실적 이해관계를 작동시키자마자, 이러한 차이가 그 온전한 힘을 회복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오히려 실제로는 항상 이러한 경향으로 나아간다.

[over-selected는 "선택받지 못하고 남겨진 사람들"이 아니라 127쪽에 나온 것처럼 고등사범학교나 그랑제꼴을 나온 최고학력 소지자들을 말한다. 겨우 30쪽 전에 같은 단어가 나왔는데 똑같은 단어를 정반대의 의미로 번역을 했다는 것은 무슨 곡절일까..]

 

157쪽 하단 88번 각주 중간 부분: [...] 신흥 쁘띠 부르주아지는 독창적이고 이국적인 요리나 즉석요리를 내놓는다.

⇒ “이국적인 요리나”를 삭제


168쪽 첫 번째 문단: 가족과 학교가 기능하는 장소의 특징은 특정한 시간에 필요한 능력이 스스로 사용됨으로써 비로소 그러한 능력이 형성되고 그리고 이와 동시에 가치가 결정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 가족과 학교는 특정한 시간에 필요한 능력이 그 자체의 관례에 따라 형성되고 이와 동시에 그 능력의 가치가 결정되는 장소로서 기능한다.


169쪽 중간 부분: 다시 말해 ‘투자’라는 개념은 경제적 투자(흔히 이 의미는 오인되지만 객관적으로는 이미 그렇게 사용되고 있다)와 심리, 더 정확하게는 일루시오, 신념, 휩쓸림involvement 또는 게임을 생산하는 게임에의 참여 속에서 진행되는 감정적 투자감각이라는 이중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 다시 말해 ‘투자’라는 개념은 경제적 투자(흔히 이 의미는 오인되지만 객관적으로는 이미 그렇게 사용되고 있다)와 정신분석학에서의 정서적 투자라는 이중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정서적 투자란 더 정확하게는 게임을 생산해 내는 게임에 대한 환상, 믿음, 몰입을 의미하는 것이다.


171쪽 마지막 부분: [...] 초등학교 교사나 중등학교 교사들처럼 학력자본의 대부분을 학교 교육체계에서 끌어오는 사람들의 경우

⇒ 초등학교 교사나 중등학교 교사들처럼 문화자본의 대부분을 학교 교육체계에서 끌어오는 사람들의 경우

[명백한 오역]

 

172쪽 6번째 줄: [...] ‘중간수준’의 예술은 문화자본을 학력자본으로 전환하는 데 완벽하게 성공했거나 정통적인 방식으로(즉 어릴 적부터 익숙해짐으로써) 정통 문화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두 면에서 모두 정통 문화와 불편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투자를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 ‘중간수준’의 예술은 문화자본을 학력자본으로 전환하는 데 완벽하게 성공한 사람들이나, 정통적인 방식으로(즉 어릴 적부터 익숙해짐으로써) 정통 문화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두 면에서 모두 정통 문화와 불편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투자를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172쪽 중간 부분: [...] 이러한 문화를 획득함으로써 문화자본의 측면에서는 최고의 보상을 보장받는 동시에 감히 정통성과 이윤의 위계가 이미 확립되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피난처와 복수의 수단을 제공하게 된다.

⇒ 이러한 문화를 획득함으로써, 정통성과 이윤의 기성의 위계에 도전하는 것으로 면목을 세우는 한편, 문화자본의 측면에서는 최고의 보상을 보장받는 사람들에게는 피난처와 복수의 수단을 제공하게 된다.


172쪽 중간 부분: [...] 학력자본보다는 학교에서 익히게 되는 교양과 학교 교육체계와의 전체적인 관계에 의해 결정되며, 역으로 이 교육체계가 소유하고 있는 문화자본이 오직 학교 교육체계 안에서 획득되고 공인되는 자본만으로 구성되는 비율에 따라 크게 달라지게 된다.

⇒ 학력자본보다는 학교에서 익히게 되는 교양과 학교 교육체계와의 전체적인 관계에 의해 결정되며, 그런 전체적 관계는 이 교육체계가 소유하고 있는 문화자본이 오직 학교 교육체계 안에서 획득되고 공인되는 자본만으로 구성되는 정도에 따라 크게 달라지게 된다.


173쪽 중간 부분: 즉 학교라는 장은 학교에서 공인된 문화자본과 학교교육을 전범으로 삼는 생활양식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는 반면, ‘사교’ 살롱과 만찬회 그리고 인격 전체가 시험되는 직업생활상의 여러 기회(채용면접, 중역회의, 토론회 등), 또는 학교생활(예를 들어 ENA나 씨앙스 뽀의 구술시험) 등 자유교양을 중시하는 시장들은 문화와의 친근한 관계에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학교에서 획득한 흔적이 있는 모든 성향과 능력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려 한다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 즉 학교라는 장은 학교에서 공인된 문화자본과 학교교육을 전범으로 삼는 생활양식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는 반면, ‘사교’ 살롱과 만찬회 그리고 인격 전체가 시험되는 직업적 생활(채용면접, 중역회의, 토론회 등)이나 학문적 생활(예를 들어 ENA나 씨앙스 뽀의 구술시험)에서의 여러 기회 등, 학교 바깥의 가치관에 지배되는 시장들은 문화와의 친근한 관계에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학교에서 획득한 흔적이 있는 모든 성향과 능력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려 한다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애매할 수 있지만, 사교 살롱과 만찬회 등에 드나드는 사람은 학교에서 공인된 문화자본을 무시하므로 "academic life"를 "학교생활"로 번역하면 안된다. "학문적 생활"도 그닥 만족스러운 번역어는 아니지만..]

 

176쪽 6번째 줄: 이를 통해 볼 때 엄밀한 의미의 능력의 소유여부를 ‘정확하게 답’하려는 감각보다 중시하는 분파들(중등학교 교사들과 고등교육기관의 교수들)이 있는가 하면,

⇒ 이를 통해 볼 때 엄밀한 의미의 능력이 ‘올바른 답’을 택할 수 있는 감각보다 나은 분파들(중등학교 교사들과 고등교육기관의 교수들)이 있는가 하면,


178쪽 맨 위 두 줄: 삭제. 바로 아래 두 줄과 중복.


178쪽 6번째 줄부터: 순수한 지식을 시험해 보면 파리의 초등학교 교사들(지방의 소규모 초등학교 교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경영자들, 지방의 의사 또는 파리의 골동품상들은, 언제나 학교를 통한 취득방식에 따라 다니는 신중함이나 조심스러운, 절도에 대한 의식과 같은 요소보다는 오히려 자신감과 후각, 더욱이 지식을 덮어서 감추기 위한 허세 등을 요구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함을 알 수 있다.

⇒ 순수한 지식을 시험해 보면 파리의 초등학교 교사들이나 지방의 소규모 초등학교 교사들은 소경영자들, 지방의 의사 또는 파리의 골동품상들을 앞지를 테지만, 언제나 학교를 통한 취득방식에 따라 다니는 신중함이나 조심스러운 절도에 대한 의식과 같은 요소보다는, 오히려 자신감과 후각, 더욱이 지식을 덮어서 감추기 위한 허세 등을 요구하는 모든 상황에서는 그들[소경영자들, 지방의 의사 또는 파리의 골동품상]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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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문과 수업의 기말 시험에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흐름에 관한 기법에 대하여 논하라”는 문제가 나온다. 그러나 학생들은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흐름은 제쳐놓고,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의 ‘악’의 개념에 대해 논한다면…”하고, 제시된 문제를 무시하고 자기가 준비해 온 답안을 작성한다. 수업에 참석하지 않아도 시험은 볼 수 있고, 자기가 자기 나름의 문제를 정하고 거기에 대한 답을 써도 성적이 나왔다. 게다가 시간이 중복되는 수업을 여러 개 수강신청해도 무방했다. 어느 누구는 한 학기에 그런 식으로 50개, 100학점의 수업을 들었다. 1960년대 도쿄대의 모습이 이랬었다. 강단에 선 교수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나라의 대학도 60년대, 70년대, 혹은 80년대까지는 별반 다를바 없었던 것 같다. 한 학기에 수업을 고작 한 번 하는 수업이 드물지 않았다. 어느 유명한 시인 교수는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나 지나서 처음 강의실에 들어와서는, 물끄러미 창밖을 보더니, “오늘은 날씨가 좋군요. 오늘 수업은 이만 마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유유히 강의실을 나섰다 한다.

    도대체 이런 분위기에서 대학을 다닌 선배들을 무엇을 배웠을까? 공부라는 게 가능하긴 했을까? 그러나 다치바나 타카시를 비롯, ‘그 시절’에 대학을 다니던 사람들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가 아니라 홀로 책을 찾아 읽고 떠오르는 문제에 골몰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독서회와 토론회를 만들어서 공부했다고 자신들의 대학시대를 회상한다. 오늘날의 대학에서는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는, 비록 그것이 적극적인 자유의 쟁취 혹은 부여로써 달성된 것이라기보다는 부족한 규율과 미비한 제도의 부산물로 주어진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그 시절의 대학을 진정한 지혜를 갈구하는 리케이온이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에서 어떤 교수가 수업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는 학생에게 학점을 주겠으며, 어떤 학생이 학점에 목을 매지 않을 수 있겠는가.

    1960년대에서 도쿄대 불문과를 다녔던 다치바나 타카시의 글에서 아쉽게 느껴지고, 또 일견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다. 그는 한편으로는 대학의 학생들을 가두어 두기보다는 방목했고, 그러한 자유가 풍부한 교양을 배양했고 또 그것이 예찬되었던 60-70년대라는 시기를 동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일본 대학생들의 교양 없음을 질책하며 그들에게 교양을 길러줘야 한다면서, 그의 대학 시절과는 대조되는 너무나도 세세한 처방들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가 모든 대학 신입생에게 필수 강의로서 수강시켜야 한다고 하는, 현실 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해설하는 ‘세계 개론’ 같은 수업은 과연 제대로 구성될 수 있을까? 그런 필수 교양의 범위와 항목에 대한 합의가 가능할 것이며, 그것을 수업을 통해서 가르침으로써 대학 신입생들의 일반적 교양 수준이 높아질 것인가에 대해서, 나는 그다지 긍정적인 기대를 갖기 어렵다. 그는 세계를 완벽히 재현한 지도, 지식의 빈틈없는 목록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요약하는 자들은 지식과 사랑을 모두 망쳐놓는 자들이라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말처럼, 목록화되고 압축된 지식은 어떤 영감도 전해주지 못하는 그야말로 메마른 나열에 불과하기 십상이다.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백과전서처럼, 그것이 기존에 통용되던 지식의 지도를 송두리째 뒤엎는 다른 지도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가 말하는 교양의 부족, 학력의 저하가 초래된 배경에 대해 보다 거시적인 조망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일본이나 한국의 교육당국이 최근 십수년 사이에 교과과목을 줄이고 교육 수준을 낮춘 것은 그저 너그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조치만은 아닐 것이다. 너희 부모 세대들이 견뎌냈던 것을 너희들은 왜 견뎌내지 못하느냐고 아이들을 탓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부모 세대와는 성장한 시기가 다르고, 학교 공부라는 것이 스스로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 또한 다를 것이다. 이제 많은 이들에게 학교 공부라는 것은 효용이 의심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런 아이들에게 강요되는 학교 공부는 부모 세대들이 느꼈던 것보다 더욱 의뭉스럽고 또 가혹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런 청소년들 사이에서 불거지는 문제들을 방치할 수 없었기에, 그리고 그들을 일단은 제도권 안으로 붙잡아 두어야 할 필요성에서 학습 수준 완화와 같은 조치는 불가피했다. 대학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도 마찬가지로 사회변동의 맥락을 따져봐야 한다. 60년대 대학의 자유와 90년대 이래 대학의 규율은 거시적으로 보면 대학의 의지에 의한 변화가 아닐 수도 있다. 그 시절, 적어도 ‘상실의 시대’ 이전까지는, 삶을 송두리째 가져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어떤 집단적 대의가 있었고, 또 그 경계 바로 바깥에는 고도성장이 산출해 내는 평생직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당시의 명문대학생들이 누리던 특권적 자유는 그런 조건에서 비로소 가능하지 않았을까?

 * 追記

다치바나의 이 책에서는 그가 갖고 있는 도쿄대에 대한 애증, 법학부에 대한 우월감과 열등의식(그는 비록 인정하지 않을진 몰라도)과 같은 양가적 감정이 묘하게 배어나온다. 그렇지 않다면 제목을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로 정한 것이나, '도쿄대학 법학부 졸업생은 교양이 없다' 같은 장은 다소 센세이셔널한 것인데, 특히 이미 1995년에 도쿄대학 교양학부의 교수들이 거의 총동원되어 '기초연습' 과목의 부교재로 만든 지(知)시리즈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은 점이 그렇다. 이 지시리즈가 자신이 구상하는 세계개론에 가장 가까운, 혹은 그 이상의 훌륭한 성과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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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
리처드 커니 지음, 전예완 외 옮김 / 한나래 / 1998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원제는 States of Mind: Dialogues with Contemporary Thinkers이다. 현대 철학의 뛰어난 주석가 중 하나로 꼽히는 리처드 커니가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유럽과 북미대륙을 오가며 철학자, 소설가, 정치가 등과 인터뷰한 것을 모은, 일종의 대담집이다. 1998년에 이 책이 번역되어 나왔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다소 생소하게 들렸거나, 아니면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 저서는 번역되지 않은 현대 사상가들에 입문하는 책으로 널리 읽혔다고 하는데, 최근에 이 책을 처음 읽은 나로서는 여전히 생소한 사람들 이름이 많다.

이 책은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정치사상가', 2부 '문학사상가', 3부 '철학사상가'이다. 1부와 2부는, 2부에 실제로 작가들이 많이 들어가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편의적인 구분인 것 같다. 1부와 2부에 실린 대담 전반에 중심적으로 다루어지는 문제는 유럽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유럽 통합의 움직임이 가속화되는 시기에, 유럽과 비유럽 세계와의 상호 이해와 공존이라는 과제와 지난 세기 유럽의 비극적 역사를 청산하는 한편 유럽 세계가 공유하는 긍정적인 유산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종합하는 방식에 대한 대화가 이루어졌고, 대담자 또한 그런 차원에서 중요한 주장을 한 사람들을 선별한 듯 하다.

3부는 사실 별개의 책이다. 3부가 책 분량의 절반인데, 1,2부와 비교했을 때 각각의 대담의 길이도 다르고 질문들도 다르다. 현실정세에 대한 진단과 비평이 많은 1부와 2부에 비해,  주로 현상학적 경향을 띤 사상가들을 포함시킨 3부에서는 각각의 인물들의 사상의 중요한 논점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어 3부 부분은 '입문서' 내지는 '개괄서'로 읽기에 족하다. 뒤로 갈수록 약간 소화불량이 걸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데리나, 레비나스, 마르쿠제와의 대담 내용은 배경 지식 유무에 상관 없이 명쾌하게 읽힌다.

그런데 보통 한국어로 대담을 할 때는 존대말을 쓸텐데, 이 책에서는 번역을 몽땅 반말로 해 놓았다(여기 실린 대담은 원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체코어로 이루어진 것이고, 이를 모두 영어로 번역해서 출간한 것이다).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 가끔 연극 대본 읽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나는 것이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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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118쪽에서 고미숙은 자신과 다른 종류의 담론들을 함정으로 몰아넣은 뒤, 그걸 바탕으로 자신의 진리성을 증명하는 방식을, 근대적 사유가 자신을 정립하는 아주 어처구니없고도 일반적인 방식이라 말한다. 그러나 "인문학 산책"이라는 분류를 무색케 하는 이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인내심을 갖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은 독자라면 바로 그 방식이 고미숙의 책 전체에 일반화된 방식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꼼꼼한 각주가 학술서 같은 인상을 줄지 모르나, 문장을 읽다보면 이 책이 근대라는 한심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몽매한 독서대중의 깊은 잠을 깨치고자 하는 계몽적 의도로 넘쳐난다는 것 또한 알아내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계몽적 의도, 고급지식담론에 대한 물타기의 의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다. 근대적 "배치"나 사유형태가 어떠한 토대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으며 역사적으로 어떠한 우연적 계기들의 연속으로 발생했는가, 근대성이라는 것이 우리의 현재 삶의 어떤 측면을 작동케 하는 원리인가에 대한 중요하다 싶은 질문은 좀처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저 몇 가지 발상의 전환만으로 탈근대라는 새로운 천년왕국이 도래할 수 있다는 순박한 기대와 오로지 담화적 차원에서만 세계의 변화를 다루는 지적 태만, 그리고 광범한 레퍼런스의 비유기적 결합, '차이를 포함하며' 발작적으로 반복되는 영탄구로 독자들을 오도하는 것이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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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 개정증보판
한국문화인류학회 엮음 / 일조각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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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문화인류학 맛보기'이다. 어떤 책의 부제가 '○○학 맛보기'라고 되어 있을 때, 대개 사람들은 그 책의 깊이라든가 내용이라든가가 해당하는 학문의 연구 영역과 성과를 피상적인 수준에서 일별한 정도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맛보기에 '그친다'.

그런데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또한 '맛보기'이지만, 이것은 감히 맛보기에 '그친다'고 말할 수 없는 책이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지금까지 인류학에 입문하려는 학생들이나 관심을 가진 일반 독자들에게 인류학이 친숙하고 매력적인 학문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하는 개론서가 부족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인류학의 연구 분야와 성과를 조리있게 정리해 놓은 책은 있을지 몰라도, 그런 책들은 대개 그 장점을 살리지 못한다 ― 독자들에게 인류학의 '맛'을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낯선 곳』을 읽고서야, 비로소 인류학의 그 끌어당기는 힘을 느낀다. 2001년 여름에 이 책은 언제나 인류학에 대한 새로운 의욕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이 책은 특징은, 인류학 전공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외국에서 발표된 인류학의 민족지관련 논문 20편 가량을 번역하고 편집해서 실은 것이다. 번역된 논문들은 거의가 에세이 형식으로 수월하게 읽을 수 있고, 각 논문은 한 사람의 필자가 쓴 완결된 글이기 때문에 읽는 이로 하여금 단편적인 정보에 집착하기보다는 글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해 깊이있게 생각하고 고민하게 한다.

문화인류학의 기본적 관점인 문화상대주의를 소개하고 있는「티브족, 셰익스피어를 만나다」는 특히 흥미로웠다. 나이지리아 티브족 사회로 현지조사를 떠난 인류학자 로라 보하난은 어느날 티브족 장로들에게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햄릿』에 나오는 많은 말들을 티브족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영미인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생소한 단어를 골라 써야 할 뿐더러, 티브족들은 그 이야기를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해석해서 영국이나 미국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비장한 미감을 불러일으키리라 생각했던 『햄릿』이 그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고 보하난은 문화의 '다름'을 실감하게 된다. 바로 다음에 나오는 「부시맨의 크리스마스」또한 인류학자의 현지조사 경험담으로서, 생계경제에 사는 부시맨들의 소박한 심성과 지혜를 볼 수 있는 글이다. 이렇게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을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는 전혀 다른 상식의 세계에 들어가 봄으로써, 비로소 내가 어떠한 것들을 자명하다 여기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문득 이런 의심에 휩싸인다. 문화상대주의라는 것은 '나'를 만나는 방편이라기보다 문화적 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약자의 '약함'에 슬퍼해야 한다면, 나는 상대방의 문화를 무시하고 짓밟는 강자의 잔혹함이 아니라 로라 보하난이 해주는 햄릿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티브족의 모습에 슬퍼해야 할 것이다. 강대국의 인류학자는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을 취할 수 있는 반면에, 왜 티브족은 로라 보하난처럼 관대하게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할 수 없는가?

문화상대주의의 관점을 택하는 이유는 그 문화를 이해해야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고 그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회를 관통하는 내적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내적 논리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논리를 타고 들어가 그 사회를 조작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명징함의 세계는 때로 위험하다. 『낯선 곳...』 덕분에 내가 하게 된 고민 중에 하나는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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