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문과 수업의 기말 시험에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흐름에 관한 기법에 대하여 논하라”는 문제가 나온다. 그러나 학생들은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흐름은 제쳐놓고,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의 ‘악’의 개념에 대해 논한다면…”하고, 제시된 문제를 무시하고 자기가 준비해 온 답안을 작성한다. 수업에 참석하지 않아도 시험은 볼 수 있고, 자기가 자기 나름의 문제를 정하고 거기에 대한 답을 써도 성적이 나왔다. 게다가 시간이 중복되는 수업을 여러 개 수강신청해도 무방했다. 어느 누구는 한 학기에 그런 식으로 50개, 100학점의 수업을 들었다. 1960년대 도쿄대의 모습이 이랬었다. 강단에 선 교수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나라의 대학도 60년대, 70년대, 혹은 80년대까지는 별반 다를바 없었던 것 같다. 한 학기에 수업을 고작 한 번 하는 수업이 드물지 않았다. 어느 유명한 시인 교수는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나 지나서 처음 강의실에 들어와서는, 물끄러미 창밖을 보더니, “오늘은 날씨가 좋군요. 오늘 수업은 이만 마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유유히 강의실을 나섰다 한다.
도대체 이런 분위기에서 대학을 다닌 선배들을 무엇을 배웠을까? 공부라는 게 가능하긴 했을까? 그러나 다치바나 타카시를 비롯, ‘그 시절’에 대학을 다니던 사람들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가 아니라 홀로 책을 찾아 읽고 떠오르는 문제에 골몰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독서회와 토론회를 만들어서 공부했다고 자신들의 대학시대를 회상한다. 오늘날의 대학에서는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는, 비록 그것이 적극적인 자유의 쟁취 혹은 부여로써 달성된 것이라기보다는 부족한 규율과 미비한 제도의 부산물로 주어진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그 시절의 대학을 진정한 지혜를 갈구하는 리케이온이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에서 어떤 교수가 수업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는 학생에게 학점을 주겠으며, 어떤 학생이 학점에 목을 매지 않을 수 있겠는가.
1960년대에서 도쿄대 불문과를 다녔던 다치바나 타카시의 글에서 아쉽게 느껴지고, 또 일견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다. 그는 한편으로는 대학의 학생들을 가두어 두기보다는 방목했고, 그러한 자유가 풍부한 교양을 배양했고 또 그것이 예찬되었던 60-70년대라는 시기를 동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일본 대학생들의 교양 없음을 질책하며 그들에게 교양을 길러줘야 한다면서, 그의 대학 시절과는 대조되는 너무나도 세세한 처방들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가 모든 대학 신입생에게 필수 강의로서 수강시켜야 한다고 하는, 현실 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해설하는 ‘세계 개론’ 같은 수업은 과연 제대로 구성될 수 있을까? 그런 필수 교양의 범위와 항목에 대한 합의가 가능할 것이며, 그것을 수업을 통해서 가르침으로써 대학 신입생들의 일반적 교양 수준이 높아질 것인가에 대해서, 나는 그다지 긍정적인 기대를 갖기 어렵다. 그는 세계를 완벽히 재현한 지도, 지식의 빈틈없는 목록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요약하는 자들은 지식과 사랑을 모두 망쳐놓는 자들이라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말처럼, 목록화되고 압축된 지식은 어떤 영감도 전해주지 못하는 그야말로 메마른 나열에 불과하기 십상이다.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백과전서처럼, 그것이 기존에 통용되던 지식의 지도를 송두리째 뒤엎는 다른 지도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가 말하는 교양의 부족, 학력의 저하가 초래된 배경에 대해 보다 거시적인 조망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일본이나 한국의 교육당국이 최근 십수년 사이에 교과과목을 줄이고 교육 수준을 낮춘 것은 그저 너그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조치만은 아닐 것이다. 너희 부모 세대들이 견뎌냈던 것을 너희들은 왜 견뎌내지 못하느냐고 아이들을 탓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부모 세대와는 성장한 시기가 다르고, 학교 공부라는 것이 스스로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 또한 다를 것이다. 이제 많은 이들에게 학교 공부라는 것은 효용이 의심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런 아이들에게 강요되는 학교 공부는 부모 세대들이 느꼈던 것보다 더욱 의뭉스럽고 또 가혹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런 청소년들 사이에서 불거지는 문제들을 방치할 수 없었기에, 그리고 그들을 일단은 제도권 안으로 붙잡아 두어야 할 필요성에서 학습 수준 완화와 같은 조치는 불가피했다. 대학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도 마찬가지로 사회변동의 맥락을 따져봐야 한다. 60년대 대학의 자유와 90년대 이래 대학의 규율은 거시적으로 보면 대학의 의지에 의한 변화가 아닐 수도 있다. 그 시절, 적어도 ‘상실의 시대’ 이전까지는, 삶을 송두리째 가져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어떤 집단적 대의가 있었고, 또 그 경계 바로 바깥에는 고도성장이 산출해 내는 평생직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당시의 명문대학생들이 누리던 특권적 자유는 그런 조건에서 비로소 가능하지 않았을까?
* 追記
다치바나의 이 책에서는 그가 갖고 있는 도쿄대에 대한 애증, 법학부에 대한 우월감과 열등의식(그는 비록 인정하지 않을진 몰라도)과 같은 양가적 감정이 묘하게 배어나온다. 그렇지 않다면 제목을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로 정한 것이나, '도쿄대학 법학부 졸업생은 교양이 없다' 같은 장은 다소 센세이셔널한 것인데, 특히 이미 1995년에 도쿄대학 교양학부의 교수들이 거의 총동원되어 '기초연습' 과목의 부교재로 만든 지(知)시리즈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은 점이 그렇다. 이 지시리즈가 자신이 구상하는 세계개론에 가장 가까운, 혹은 그 이상의 훌륭한 성과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