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황제들 - 모택동과 등소평 시대의 중국
해리슨 E. 솔즈베리 지음, 박월라.박병덕 옮김 / 다섯수레 / 199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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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즈의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했던 해리슨 솔즈베리(Harrison E. Salisbury)는 20년간의 자료 수집과 연구를 통해 8부 50장 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써냈다. 여기에는 자료 출처에 대한 세세한 주석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책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솔즈베리는 이 책에서 현대 중국 사회를 만들어 온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하나의 사건과 그 과정에 있어 그것을 경험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면서 그 사건을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며 반복 서술하고 있다. 사건에 대한 기술뿐만 아니라 마오쩌뚱, 덩샤오핑, 주언라이, 류사오치, 린뺘오 등 현대 중국을 이끌어 온 인물들에 대한 설명도 매우 풍부하게 나와 있다. 특히 그들의 유년기와 가족 관계 등에 대한 서술은 '역사'를 공부하는 데에 있어 더욱 현실감각을 갖게 해 준다.

이 책은 최근 약 100년 동안의 중국 역사를 마오쩌뚱과 덩샤오핑이라는 두 지도자를 중심으로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서 솔즈베리가 행한 자료 수집 과정은 자못 놀랍다. 수많은 문헌 자료의 섭렵이나 수차례에 걸친 중국 현지 방문은 차치하고, 가장 놀라웠던 것은 개인적인 인터뷰 자료들이었다. 영욕의 현대 중국을 살아온 사람들을 직접 인터뷰한 자료 하나하나는 굵직굵직한 문헌 자료들 못지 않게 귀중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뚱과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혁명가들에 대해 아주 생생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이 책은 그들의 전기적 연구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듯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중국 현대사를 이해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만용일 것이다. 이 책은 현대 중국을 만들어 온 커다란 사건들을 자세하게 서술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을 뿐이며, 그러한 사건들을 맥락화하고 심도있게 분석하는 작업은 하지 않고 있다. 저자에게 이런 책임을 물을 이유는 없지만, 여하튼 『새로운 황제들』은 저널리즘적인 색채를 띤 저작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현대 중국에 대한 지식의 양을 폭증하게 하긴 하지만, 깊이있는 이해에 도달하게 도와주지는 못한다. 이 책만 보고 솔즈베리는 광범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데에는 대가급이지만, 작품 전반을 보았을 때 너무 깊이있는 해석이 부족하고 '레퍼런스 위에서만 노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학자적인 기품이랄까 진지한 고민을 엿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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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G. 르페브르 지음, 민석홍 옮김 / 을유문화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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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저의 제목인 Quatre-vingt-neuf를 직역하면 그냥 '89(년)'이다. 실제로 이 책이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시기는 1788년에서 1789년까지이다. 즉, 앙시앵 레짐 말기의 사회전체적 위기, 정부에서 시도한 여러 개혁정책과 좌절, 삼부회의 소집 과정에서부터,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공포되고 일반 민중들이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며 루이 16세가 베르사이유에서 파리의 튈르리로 송환되는 그 시점까지의 역사적 사건들이 이 책에 담겨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일반인들에게 프랑스 혁명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를 갖고 쓰여졌지만 1789년 혁명 발발 이후의 사건 전개 과정을 서술하기보다는 1789년의 사건들로 귀착된 당대 프랑스의 여러 정치·경제적 조건들과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집단들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혁명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다. 그 의구심이란 르페브르의 혁명 해석에 대한 것이 아니라 르페브르, 마띠에, 소불 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혁명사 해석의 '정통'에 대항해 이들의 견해를 사회사적 관점에서 비판한다 하는 '수정주의'적 견해에 대한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은 영국 사학자 알프레드 코반이 1950년대에 '프랑스 혁명의 신화'라는 강연을 행하면서 대두되었고, 그 후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해석을 고수하는 진영과 논쟁을 거듭하였다

수정주의적 견해의 내용인 즉,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마르크스적 역사발전단계도식에 종속시켜 역사적 필연에 의한 부르주아 혁명이라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실제로 전통적 해석에 의해 '부르주아'라고 범주화되는 혁명 지도 세력들은 직종에 있어서나 이해관계에 있어서나 분열되어 있었고, 또한 혁명에 폭력을 제공한 농민과 민중들은 프랑스 혁명이 구현했다고 하는 이념과는 달리 반부르주아지적이고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갖고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혁명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대표하는 르페브르의 경우, 적어도 이 책에서만큼은 수정주의가 비판하는 그러한 도식적 해석을 프랑스 혁명에 가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수정주의가 제기하는 비판의 벼리가 이미 1939년에 나온 르페브르의 저작 속에 혁명의 요소로 충분히 다루어져 있거나 그 단초로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르페브르는 이 책에서 프랑스 혁명을 귀족혁명, 부르주아혁명, 민중혁명, 그리고 농민혁명의 순차적이며 중층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그 혁명의 필연적 조건들을 고찰하면서도 사건과 사건 사이를 매개하는 수많은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상황들의 중요성을 아울러 강조한다. 또한 국민의회 안에서의 여러 신분의 착종, 성직자와 부르주아지의 협력관계, 민중들의 앙시앵 레짐 말기 이전으로의 회귀를 원하는 반동적·반자유주의적 성격 등을 충분히 서술하였다. 이렇게되면 수정주의는 그 비판의 지점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수정주의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정통'적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혁명의 대가들의 해석에 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수정주의는 그저 사료에 충실할 뿐이었던 전통적 해석을 맥락없이 요약하여 비판하기 좋은 하나의 '신화'로 구성하고 그 신화를 신랄히 공격함으로써 성립하고 권위를 획득한 해석이 아닌지 나는 의심하는 것이다. 물론 수정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반(反)비판을 위해서는 퓌레(F. Furet)나 코반과 같은 수정주의자들의 저작과 두 해석 사이의 논쟁을 정리한 민석홍의 『프랑스혁명사론』과 같은 책들을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한편 『프랑스 혁명』이 다루는 사건은 1789년으로 종결되어 버리기 때문에, 이 책만 가지고서는 루이 16세의 처형과 외국과의 전쟁, 그리고 그에 따른 혁명의 급진화 과정을 살펴볼 수는 없다. 따라서 당통, 마라, 로베스삐에르와 같은 혁명기의 걸출하고 또 과격한 '영웅'들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빠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안타깝게도 이 책에서 혁명 이야기의 드라마틱한 요소들을 상당부분 빠뜨려 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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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의 혁명
손석춘 / 개마고원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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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기사는 어느 경우에도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다. 단지 사건만을 보도할 뿐이다.' 이것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김용옥이 한 말입니다. 『신문 읽기의 혁명』을 읽다보니 이 말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사실(事實)이란 '실제로 있거나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 사건(事件)이란 '문제가 되거나 관심을 끌만한 일'입니다. 결국 신문은 사실 -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사건화를 통해, 다시 말해 사실들에 가치판단을 내린 그 결과물을 보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판단의 과정이 기자가 취재할 사건을 선택하고 취재해서 기사를 쓰고, 편집기자가 표제를 달고, 편집국장이 신문 전체를 검토하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편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편집이라는 과정 속에는 그 나름대로 보편타당성을 지향하는 언론인들의 가치판단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정치 권력의 위협, 광고주의 압력, 언론자본(신문사 모기업)의 요구 등의 외적 요인들이 개재되고 서로 착종하여, 신문 편집 과정에 영향을 끼치고 때로는 있는 그대로의 사상(事象)을 왜곡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독자들에게 '기사'가 아닌 '편집'을 읽어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신문 읽기의 혁명이란 지면을 분석하여 신문 편집 과정을 읽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매일매일 읽는 신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내용'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비판적인 독해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도 다소 비판적인 견지에서 읽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손석춘씨는 특정한 당파적 입장에서 자유로운지. 저는 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저자가 독자에게 끊임없이 특정한 신문을 '다시', 또 '비판적으로' 읽으라고 강요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문 읽기에 대한 이러한 좋은 저작이 진보일간지라는 한겨레 신문 외부에서 나왔으면 했는데 아쉽습니다. 어쨌든 사서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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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 신화와 현실
박지향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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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우연히 그와 단둘이 있게 된 적이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나는 그냥, '도대체 어떻게 총을 그렇게 정확하게 쏘세요?' 라고 말을 건넸다. 그 작은 하사는 나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 나는 특별한 게 있지. 이건 양철 표적이 아니다, 이건 제국주의자다, 그렇게 속으로 말하는 거야. 그래서 분노로 부글부글 끓으며 과녁 복판을 직방으로 맞춘다니까.'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 나오는 슬로바키아 출신의 군인은 그렇게 총을 쐈다. 양철 표적이라는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무언가를 추상적인 '제국주의자'라고 생각함으로써, 표적에 총알을 맞추는 행위는 더욱 분명해 졌던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경험한 바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제국주의라는 단어는 도덕적인 단죄의식에서 나오는 자동적인 거부감을 자아내기 쉽다.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쳐지는 국사는 일제의 '간악하고 교활함'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일제하에서 겪어야 했던 민족적 시련과 거기에 분노와 양심으로 저항한 '독립운동'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그 자신은 무엇이었던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전지구적 현상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제국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으로만은 부족하다. 피지배자였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들 '제국'이 어떤 시각으로 자신들의 팽창을 인식하고, 또 도덕적으로 정당화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였던 여러 나라 사람들 또한 피지배자들이 제국주의 경험을 이해해야 하기는 마찬가지다. 『제국주의 - 신화와 현실』은 앞서 말한, 제국 자체가 끌어안은 제국의 의미―제국의 팽창동기와 경제적 수익성, 통치 수단이면서 현지의 엘리트인 협력자의 존재, 남성 혹은 여성으로서의 제국 경험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 대한 어느 정도 성실한 서평으로 『역사비평』2000년 가을호에 실린 유재건 교수의 「제국주의, 무엇이 신화이고 무엇이 현실인가」라는 글이 있다. 다소 '삐딱한' 문체의 글이지만 책을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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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정옥자 외 지음 / 효형출판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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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나는 이 책이 기초했다고 하는 동아일보 연재기사 '새로 쓰는 선비론'을 읽은 바 없다. 그러나 '새로 쓰는 선비론'이나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와 같은 제목에서 그 연재기사나 이 책이 무엇을 함의하고 무엇을 지향하는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시대의 선비 없음을 개탄하는 한편 이 시대를 이끌어 나갈 지식인의 모범을 조선의 선비들에게서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선비들의 삶 속을 들여다보면서 지금 여기 이 땅의 풍요로운 자양분으로 삼기 위함'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짐작은 빗나간 것이었다.

조선의 선비를 논하는 행위가 '퇴행'이 되지 아니하려면 응당 이 시대의 '선비다움'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스물 세 명의 '선비'들을 논하면서 그러한 고민을 하고 있는가. 이 책을 기획한 이광표는 작금 선비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는 사람들에게 감히 이 책 속에 선비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했는데, 과연 이 책 속에 선비는 있는가.

이 책 속에는 선비가 없다! 선비다움의 현재적 함의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선비론은 읽을 가치가 없다.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사상사적 견지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을 비평하고 현재 우리 사회가 봉착한 상황 우리의 시대에 대한 치열한 반성에서 그들을 우러르지 않는 선비론은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은 선비라는 어설프고 두루뭉실한 용어로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지 의뭉스러운 책이며, 호사가적 취미의 저널리스틱한 시도이다. 물론 이 책의 각 장을 집필한 사람들은 사계의 전문가들이며 문장가들임에 틀림없지만 그 탁월한 인물들이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조선의 지식인들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논의를 위한 한 마디의 대화도 한 치의 입장 조율도 없이 '선비론'을 썼다는 것, 아니 각각의 '선비'에 대해 각자가 쓴 글을 그저 뭉뚱그린 것은 이 책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지르한 편집덕분에 심심풀이 땅콩으로 제격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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