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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정옥자 / 일지사 / 1993년 12월
평점 :
품절
고려후기에 유학자들이 주자성리학을 도입한후, 조선은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개창한 왕조인데, 조선 초기에는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지 않았으며 건국 초기의 사정으로 인해 성리학을 주전공으로 한 계층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였다. 이 단계의 사상을 주자성리학이라 할 것이다. 성리학을 주전공으로 하는 계층인 사림이 정계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범국가적으로 성리학적 규범이 관철되기에 이른 시기는 바로 인조반정(1623) 이후이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어 가는 가운데, 명나라는 청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이에 조선지식인들은 명나라가 없는 그 상황에서 스스로를 주나라를 존숭하는 중화문화의 담지자로 인식하여 청에 대한 복수를 서두름과 동시에 자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찬란한 진경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이 단계의 사상이 곧 조선성리학이다.
이책에서는 조선성리학 이후에 '실학'이라는 단계를 설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영조와 정조의 시대에 이르면 강남문사들을 두루 등용해 문화적 역량을 과시했던 청나라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북벌론과 존주론을 구시대의 과제로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을 지적한다. 조선사회가 농경사회에서 근대산업사회로의 변모를 감지한 지식인들은 새로운 사회에 맞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함을 자각하고 청을 통해 서양의 발전된 기술문명을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다. 이들을 북학파라 하는데, 집권층인 노론의 신진 재사들과 정조대 규장각 각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외에 주변적이었던 남인 일파들에 의해 가학(家學)으로서 양명학이 연구되고 기독교가 수용되고, 이들에 의해 원시유학에 기반한 사회 개혁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사상의 흐름을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저자의 입장에 공감한다. 그래야만이 우리 사상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고 서구나 일본의 역사발전단계 도식을 우리나라 역사에 기계적으로 도입하는 데서 생겨나는 오류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해 몇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일단 조선 후기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 너무 상층부에 편향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저자의 전공이 조선시대의 지성사이므로 스스로 자신있는 분야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책을 보면 과히 중앙정치를 축으로, 또 정치사상의 변화를 축으로 조선의 역사가 결판난 것 같은 인상을 받기 십상이다. 물론 사상사가 정치사를 특징짓는 것이 조선 사회의 특수한 성격 중의 하나라는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후기조선의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라든가 지배층의 규범을 전유하는 민의 동향을 살펴본다면, 역사에 대한 좀 더 너른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자가 조선 후기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충분히' 발전적인 입장을 취하는가에 대해서도 약간의 의문이 생겼다. 이 책은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까지 아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전반의 60년 역사를 공백으로 처리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다. 영,정조가 왕조의 찬란한 르네상스의 시대였다면, 정조가 서거한 후 60여 년 동안 우리나라는 그저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쇠퇴일로에 있었다고 할 것인가? 이렇게 간단히 처리하기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이 시기가 과연 조선에 있어서 사상적 변혁의 시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이때는 청나라의 융성함을 충분히 경험하였고, 역시 청나라의 경험을 통해 서구 열강의 힘 또한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때까지는 청나라나 서구의 신문물을 배우는 것이 아직 외적으로 강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시대 사상가들이 감행했던 지적 모험들을 구체적으로 살펴야 할 것이다. 영·정조 시대가 전성기라면 그 이후 쇠퇴해 간 과정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 쇠퇴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개창하려 했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왜 그 시기에 『기학』이 성립하고 『東經大典』이 성립하였는지 충분히 밝혀져야만 역사의 연구가 역사 그 자체를 넘어서서 미래를 모색하는 초석이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