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알베르 카뮈 전집 2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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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뫼르소는 북아프리카의 알제에 사는 평범한 하급 샐러리맨인데, 양로원에서 죽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이튿날, 해수욕장에 가서 여자 친구인 마리와 노닥거리다가 정사(情事)를 가진다. 며칠 지난 일요일에 우연히 불량배의 싸움에 휘말려, 동료 레이몽을 다치게 한 아라비아인을 별다른 이유도 없이 권총으로 사살한다. 재판에 회부된 그는 바닷가의 여름 태양이 너무 눈부시기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주장하고 속죄의 기도도 거부하며, 자기는 과거에나 현재에도 행복하다고 공언한다. 처형되는 날 그는 많은 군중이 밀려들 것을 기대할 뿐이다.

뫼르소의 행동은 부조리(absurdite)의 표상이다. 까뮈에게 있어 '부조리'라는 것은 이 시대의 모든 인간들 앞에 놓인 것이며, 불편한 느낌이며, 모순된 감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과 그 의미와 결과를 지각하는 일의 시작일 뿐이다. 까뮈에게 많은 영향을 준 니체와는 달리, 그는 '신은 죽었다'는 것을 선언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신, 혹은 인간의 삶에 도움을 주는 어떤 종류의 주재자도 생각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까뮈는 신성성과 관련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방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신을 그리워하거나 열망하지 않는다. No Thanks ― 나는 이 미로 속에서 나 스스로의 길을 찾을 것이다.

신이 없다면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예정된 규범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의 의미에 대한 설명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이 세계에 던져진 것이며 그 종국은 순수하고 간단한 '죽음'이다. 그 이전에는 삶이 있을 뿐, 그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설명의 부재'라는 것 자체가 부조리의 사상은 아니다. '부조리하다는 것은 불합리한 감각과 인간의 저 깊은 곳에서 울리는 - 주체할 수 없는 명쾌함에 대한 희구가 대치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부조리라는 것은 목적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찾는 무의미한 탐색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결점이며 실존을 묻는 질문의 시작이다. 부조리와 화해하는 일이 까뮈가 본질적으로 관심을 가진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겪는 지독한 '무거움과 낯섦'을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부조리의 감각은 '인간과 그의 삶의 분리'이며, 무대장치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해야 할 대사도 모른 채 무대를 걸어나오는 연극 배우이며, 영원한 이탈과 무소속의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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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한시선
서정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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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만해의 시도 좋아하고 미당의 시도 좋아한다. 한편 '삶'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만해의 삶은 존경스럽지만 미당의 삶은 그렇지 않다. 미당과 만해의 상이한 삶의 만남이 어떤 것일지 궁금해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다소 실망이었다. 만해는 한시도 짓고 소설도 썼는데, 역시 만해 문학의 백미는 산문시이다. 여기서 서정주가 번역하고 주석을 달은 것은 만해의 한시 뿐이다. 그래서 일단 '진정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만해의 산문시에 미당이 시로 답하는 형식의 글을 시도해 봤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그렇고, 미당은 이 시들을 번역함에 있어 종종 장난스럽고 진지하지 못한 태도를 보인 것 같다. 그래서 한시를 성실하게 해석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 어렵다. 또 역문을 번역자 나름의 미감을 살린 시적 언어로 제시했다면, 주석은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명쾌한 해설을 할 필요가 있는데, 서정주의 주석문은 어휘의 선택이라든가 어미의 쓰임에서 마치 시를 쓰듯, 어설픈 언어를 늘어놓고 있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역자 후기에서, 서정주는 '이 주석은 그의 한시의 보급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했는데, 과연 이런 식의 문장이 최선이었던가는 의문이다.

번역에 있어서도 만해의 삶의 궤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시가 있는데,

獄中吟

朧山鸚鵡能言語
愧我不及彼鳥多 
雄辯銀兮沈默金
此金買盡自由花

서정주는 이 시를 이렇게 번역했다.

감옥에서

농산 앵무새는 말 잘하지만
내 제만큼 못하는 걸 부끄러하지.
雄辯은 銀이지만 침묵은 金
이 金이라야 自由의 꽃 모조리 사네.

이 '獄中吟'이라는 시의 번역과 해석이 문제되는 것은, 바로 한시의 尾聯인 '此金買盡自由花' 때문이다. 서정주는 이 부분을 '이 금이라야 자유의 꽃 모조리 사네'라고 번역하고, 한용운이 3 1운동 이후 옥중에서 '말 잘하는 앵무새와는 달리 영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지'냈다고 풀어낸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다.

우선 역문 자체에 구성적 모순이 있다. '鸚鵡能言語' - 말 잘하는 앵무새'는 분명 '웅변'의 화신이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내 제만큼 못하는 걸 부끄러하지'라는 구절에서, 시적 화자에게 있어 더욱 절실한 것은 침묵이 아닌 웅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정주의 해석은 '금'으로 은유되는 '침묵'을 시적 화자에게 더욱 가치있는 것으로 설정하고, 어조사 兮를 '-이지만'으로 해석하여 무리한 반전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서정주의 해석은 한시의 首  聯과 頸 尾聯사이에 까닭 없는 뒤틀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기서 웅변을 가리키는 '은'은 시적 화자가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고, 침묵을 가리키는 '금'은 자유라는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무엇이다. 즉, 침묵이라는 수단으로 자유를 얻겠다는 말이 아니라, 침묵이 비록 가치있다고는 하나 그것을 포기하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시의 뜻이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다.

이 정도면 제대로 된 번역이 되지 않을까 한다.

농산의 앵무새는 말도 곧잘 한다는데
그 새보다 훨씬 못한 이 몸이 부끄럽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이 금이라면
그 금으로 자유의 꽃 모두 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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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류학 - 제 2 판
류웰린 지음 / 일조각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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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류학(political anthropology)이라는, 인류학 내의 한 하위분야를 개설적으로 살펴본 교과서적인 책이다. 내용을 대폭 보완한 제2판이 나와있다. 인류학에서 '정치'라는 영역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정치현상을 전통적으로 어떤 식으로 설명해 왔는가가 다루어진다. 현대로 오면서 정치인류학이라는 하나의 분야 안에서도 여러가지 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전세계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인류학자가 있는가 하면, 민중의 저항을 이야기하는 학자도 있고, 성적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각각의 분야들은 그 방향의, 인류학자 아닌 또 다른 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 하다. 이제는 정말 '정치인류학자'라는 아이덴티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화인류학의 기본적인 교과서들을 번역해 온 한경구 선생님의 친절한 번역이 돋보인다. 그러나 약간 윤문을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 유명한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가 쓴 서문은 그 자신이 귀찮아서 그렇게 쓴 것인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딱딱하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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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과 기계문명
양동휴 외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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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 괜찮은 책이 잘 알려지지 않고 묻혀있다는 것이 아쉽다. 한 명의 경제학자와 두 명의 영문학자가 쓴 이 책은, 산업혁명을 영국에 초점을 맞추어 그 경제사적 의의는 무엇인지, 산업혁명이 야기한 변화들이 당대 사람들의 오감을 통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러한 변화들이 문학과 예술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그리고 산업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변화과정에 대한 사상적 대응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산업혁명은 유럽에서 영국의 선도로 이루어졌고, 그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는 당연히 유럽인들에 의해 행해졌다. 그래서 물론 이 책도 외국에서 이루어진 기존 연구들에 기반해서 쓰여진 것이기는 하다. 그래도 상당히 폭넓은 문제의식을 갖고 쓰여진 책이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양동휴 선생의 글에는 산업혁명을 두고 일어났던 경제사에서의 논쟁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윤혜준 선생과 송승철 선생의 글에서는 산업혁명이 야기한 전사회적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서 마르크스주의, 공리주의 등이 다루어지고,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말하는 '문화와 사회' 전통이 소략하지만 핵심적인 인용문과 간명한 해설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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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와 자본주의
베르너 좀바르트 / 문예출판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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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바르트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단순한 명제의 형태로 환언하여 생각해 보면, 그것이 동시대의 또 다른 학자의 견해와는 명백하게 모순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또 다른 학자는 좀바르트와 거의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 태어나서 비록 그보다 훨씬 단명했지만 현대 사회과학에 더욱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막스 베버이다. 좀바르트가 제시하는 명제와 베버가 제시하는 명제는 명백히 상충된다. 한쪽은 사치가 자본주의의 원인이라 하고, 다른 한쪽은 노동윤리와 검약이 자본주의 초기의 특성임을 주장한다.

물론 이 두 사람의 주장이 전적으로 모순되고 양립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베버가 훨씬 섬세한 논의를 이끌어가고 새로운 용어를 도입해 가며 독단적이지 않은 다원주의적 설명의 수준에서 자신의 견해를 표출하고 있기는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둘은 근대 초 자본주의의 형성인(形成因)으로서 서로 다른 영역, 서로 상이한 집단―좀바르트는 궁정·귀족·졸부, 베버는 종교개혁 이후의 종교적 소수집단―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둘은 동일한 대상에 대해 상충되는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바르트는 1912년에 『사치와 자본주의』를 발표함으로써 베버와 논쟁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여기서 하나 질문해 볼만한 것은, 왜 이들이 동시대에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개념을 다룰 수밖에 없었는가, 그들의 학문에 있어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는가에 관한 것이다. 어찌 보면 베버와 좀바르트는 공통점이 더 많다. 두 사람 다 프로이센의 유력한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그래서 김나지움 교육을 통해 어렸을 때부터 탄탄한 문헌학(philology)적 수련을 받을 수 있었고, 경제적인 곤란에 무감한 채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잡지』를 간행하기도 했고, 연구에 충분한 시간을 쏟을 수 있는 독일의 대학 교수였으며, 경제·사회학자였고,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독일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다른 어떤 공통점보다 두 사람을 하나로 묶고 있었던 것은, 이들이 칼 마르크스의 시대 이후에 태어났다는 것, 그래서 그의 압도적인 영향 하에서 학문을 해야 했으며, 더군다나 경제사회학을 한다고 할 경우 마르크스에 대한 답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베버의 학문은 여러 측면에서 '마르크스의 유령과 나누는 대화'라는 말로 비유된다.

특히,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마르크시즘의 사적 유물론에 대한 반증으로서, 즉 '상부구조'에 해당하는 것이 '토대'의 발전을 촉진시킨 반례로서 제시되었고 또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다. 이러한 틀에서 보면, 좀바르트도 마르크스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표출한다는 점에서 베버와 같은 입장에 서 있다. 그는 책 속에서 '조악하게 이해된 '유물사관'으로 사치현상과 같은 미묘한 문제에 간섭하려고 하는 얼간이들에 대해서는 아예 아무말도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이 마르크스에 대해 만들어낸 자신들의 자리는, 이렇게 '미묘한' 문제들, '상부구조'에 해당하는 것들에 천착하는 자리였으며, 이들의 고민은 마르크시즘 내에서의 사적유물론·경제결정론에 대한 반성과는 별개로, '문화'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에게 지속적인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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