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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략 1999년 상반기동안 진이 '한겨레21'에 '엑스리브리스'라는 이름의 고정 코너를 열어 연재한 장편(掌編)들이 주종이고, 몇몇 글들은 다른 곳에 기고한 글들인 것 같다. 책으로 묶으면서 새로 12개로 장을 나누어 각 글을 주제별로 묶었다. 글의 형식은 대개 철학적 저서나 자신이 논박할 저자의 문구에서 한 구절을 문두에 인용해 놓고 풀어내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내용은 굉장히 구체적이고, 당대 한국사회의 현실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이 인용되는 책의 첫 부분에서, 철학적 사유로 시작해서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를 두고 전투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은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지는데, 뒤로 갈수록 그 신선함이 자꾸 떨어져 간다. 뒷부분으로 가면 각 장을 통할한답시고 붙여놓은 주제가 걸맞지 않은 경우도 있고, 그가 특정 인물에 논쟁을 걸고 비아냥거리는 데에는 다소 지겹기도 하다.
사실 그의 입장에는 딱히 왈가왈부할 것이 없다. 대부분에 수긍한다. 나는 1999년 전후의 사건과 이슈들, 논쟁들을 다시 살펴본다는 느낌으로, 그리고 진중권이 제시하는 입장에 대부분 수긍하며 읽었다. 안티조선 운동, 여기에 대해 이문열의 '홍위병' 운운한 일, 여기에 극우언론들이 가세한 것 하며, 운동권 열사문화의 변태성, 복거일의 대책없는 자유주의, 최장집 임동원 등에 대한 언론의 공세, 당대비평의 일상적 파시즘론을 조선일보에서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 등등, 당시에 자못 심각했던 일들, 또 그때 주목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던 일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경험이었다.
그의 입장은 요약적으로 말하면 우리 사회에서 최소한의 합리성이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자유지상주의와 극우보수주의가 자유주의인 양 오인되는 상황과 얼치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판치는 우리 사회의 상황은 타개되어야 한다듣 것일 게다. 그러나, 글쎄, 시종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읽기는 했지만, 그의 글쓰기 '행태'는 뭔가 걸리적거린다. 이런 뭔가 켕기는 느낌은 내가 지적엄숙주의에 빠져있다는 징후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가 정작 제일-다소 강박적으로-좋아하는 것은 논쟁, 다시 말하면 말싸움 같다. 웃음을 자아내는 레토릭을, 또 어떤 때는 욕지거리를 굉장히 빈번하게 구사하긴 하지만 그건 매번 비웃음이다. 웃기기는 한데,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깔끔(?)하지가 않다.
서문에서 발터 벤야민을 인용해 말한다. 인식적 전환이 있을 때마다 서술의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 철학적 글쓰기의 본질을 이룬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특정한 문제의식, 특정한 시대정신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글을 어떤 스타일로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스스로의 글쓰기를 광대적 글쓰기, '조커'식의 글쓰기라 명명하는 진중권은 자신만의 스타일의 존재 근거를 여기에서 찾는다. 모든 것이 고상하고 근엄해서 역겨운 시대에 자신은 광대가 되는 것이라고. 그러나 이런 설명 자체가 멋있기는 하지만 너무 거창하지는 않은가.
나는 그의 글쓰기가 '광대'같은 글쓰기라고, 별로 인정해 주고 싶지 않다. 사람들은 더러 그를 재기발랄하다고 하지만, 난 거기에 조금 뜨악하다. 그가 매번 강조하는 유물론에 의거해 설명하자면, 그가 <폭력과 상스러움>에서 구사하는 스타일은, 인터넷이라는 기술적 매체가 만들어낸 매우 물질적인 것이다. 굳이 이름붙이러면 시정잡배적 글쓰기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인터넷 상의 논쟁에서 이용되는 어법과 욕설이 구사되는 바로 그 문체에 지나지 않는다.
난 차라리 광대적 글쓰기나 욕의 미학에 대해서라면 70년대 김지하가 譚詩에서 쓴 것이나 김용옥이 80년대와 90년대 초에 분에 겨워 썼던 글들을 높이 사겠다. 스타일에 대한 고민의 깊이에서, 진중권이 따라잡을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진중권 같이 저력있고 전투적 글쓰기를 하는 논객의 존재가치를 어찌 부정하랴만은,나는 이따금 그의 행간에서 세상에 대한 진정성이 안개에 싸인 것을 본다. 고독으로부터 나오는 도저함에서 배울 것도 있을진대, 그는 그것을 너무 간단히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