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질문하는 법 - 스스로 묻고 해결하는 사람으로 키우기 위하여 땅콩문고 시리즈
윌리엄 고드윈 지음, 박민정 옮김 / 유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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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에서 스물 살까지는 아주 정연하고 능동적이며 학습 준비를 위한 생각의 체계를 잡는 것이 배움의 진정한 목표라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아동교육에서 특정 교과나 지식을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 윌리엄 고드윈 지음, 박민정 옮김, 유유 출판사 <질문하는 법 : 스스로 묻고 해결하는 사람으로 키우기 위하여> 중에서, p.21.

다른 나라의 교육학자가 보더라도 한국은 교육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나라의 하나로 꼽힐 것 같다. 버락 오바마가 언급하기도 했고 특히 아시아 주변국가들이 종종 한국의 뛰어난 교육열을 배워야 한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더 자세히 한국을 들여다보면 더욱 놀랄지도 모른다. 교육을 향한 에너지는 하늘을 찌르는데 교육을 향한 가치의 방향은 아직까지도 20세기의 산업화 시대의 땅에 바짝 엎드린 채 공고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을 향한 에너지의 상한점과 가치와 방향의 하한점이라는 이러한 불균형성은 극과 극의 체험과도 같이 놀랍다. 언론의 자유지수가 최고점인데 반해 언론의 품질지수가 최저점이라는 것과 비견될지도 모르겠다. 이 불균형성을 해소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점을 먼저 돌아봐야 할까.

<프랑켄슈타인>을 저술한 메리 셸리의 아버지이기도 한 윌리엄 고드윈은 1797년에 교육에 관한 저술로 <질문하는 자 The Enquirer: Reflections on Education, Manners and Literature>을 저술했다. 이 책은 얼마전 유유 출판사에서 박민정 씨의 번역으로 <질문하는 법>으로 발간되었다. 이 책이 최초로 나왔던 19세기초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영국 산업혁명의 한 가운데 시절이라고 볼 수 있다. 증기기관을 기반으로 한 섬유산업 등의 기계화와 공장 등의 폭발적 증가는 당시의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것을 바꾸는 시기였다. 이로 인한 급격한 변화는 새로운 경제기회를 만들기도 했었을 것이나 대내적으로는 지주자본가와 노동자의 급격한 계급형성과 맞물려 여러 문제점들을 낳았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와 식민지개척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과학기술산업의 빛에 못지 않게 그늘도 컸다는 것은 정치경제적으로는 칼 맑스의 <자본론>에서 확인할 수도 있고 문학에서는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지금 봐도 심금을 울리는 내용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 윌리엄 고드윈의 <질문하는 법>이 주장하는 내용은 지금 봐도 주목할 만 하다. 더군다나 얼마전까지 산업화의 한 시기를 거쳐왔고 아직 그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문화가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한국의 환경에서 200년도 더 지난 그 시대와 다르다고 단정할 수 없는 공통점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고드윈은 이 책을 통해 어릴 때의 학습은 어떤 지식을 바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체계를 잡기 위한 것이 중요한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한 인간의 재능이 타고난다고 하더라도 다른 평범한 아이들이 주도적인 학습법을 익힐 수 있도록 장기간의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다양한 독서 취미와 고전을 통한 지식과 인격함양의 틀을 갖추고 이를 부모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내용도 빠트리지 않는다. 또한 고드윈이 보기에 이를 위해서는 어른 혹은 부모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교육비만 대주는 부모가 아니라 무엇을 하라고 강제하지 않고, 아이들은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교묘한 거짓말로 아이를 훈육하거나 달래지 않고 솔직함과 관심으로 지켜볼 것을 제시한다. 고드윈이 보기에 어린 시절의 자신을 포함해서 그 당시의 많은 아이들은 자기 주체권과 선택권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는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았을 아이들을 걱정하고 심려했다. 심지어 노예들은 자신들의 노동시간이 끝나면 자기만의 시간이라도 가지지만 아이들은 24시간 부모의 감시속에 산 것과 다르지 않다고 봤다. 이 점은 아침에 – 어쩌면 아버지보다 더 일찍 – 일어나서 학교에 등교하고 하교하자마자 여러 학원을 돌아다니고 귀가조차도 아버지보다 더 늦게 하는 강남교육특구(!)에 사는 현재 한국아이들의 현실과 비교했을 때 완전히 그때와 다르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200년전 영국의 그때와 지금의 한국의 공통점이라면 영국이 먼저 산업시대를 지나왔었고 한국은 그 이후를 빠르게 쫓아갔다는 점이고 차이점이라면 아직도 한국은 산업화시대의 관습을 놓치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에 대한 장기간의 고려없이,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자연과 함께 하며 생명과 사랑의 마음을 자연스레 배양할 시간없이, 가족의 유산을 공고히 하기 위해 혹은 부모의 선호직업을 강제하기 위해 주어진 대로 수동적으로 그야말로 잠자는 것 빼고는 집과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쳇바퀴같은 삶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고드윈이 21세기의 한국으로 내려왔다면 자신이 그 옛날에 주장했던 교육철학이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는 점에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한국의 지식암기 위주, 주입식 위주의 교육관습을 창의성과 주도적인 교육관습으로 바꾸기 위한 최선 중의 하나는 제일 위에 인용했던 고드윈의 글이 좋은 참조가 될 듯 하다. 아이가 스스로 선택권을 가질 수 있는 독립적인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생각의 체계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환경이 최선의 하나이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스스로 멀 좋아하는지 어디에 장점이 있는지도 제대로 모른채 많은 지식들을 강제적으로 기계적으로 배운 존재들은 일찍 천재소리는 들을지 모르나 일찍 시들어 버리는 범재의 운명에도 가까이 놓여 있다.

윌리엄 고드윈이 책의 제목을 <질문하는 법 The Enquirer:원제는 질문하는 자>로 잡은 것 자체도 훌륭한 것이지만 책의 첫 구절에서 ‘교육이 추구하는 진정한 목표가 행복’이라고 언급한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만한 이유가 된다. 또한 산업혁명 당시의 와중에 국가나 사회가 요구했던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을 설파했다는 점은 여전히 인상적인 점이다. 그가 토픽을 삼았던 생각하는 법, 미덕과 재능의 상관관계, 고전의 중요성, 어린 시절의 성격 형성등에 대한 언술은 지금 돌아보면 평이하거나 도덕교과서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분야도 그러하지만 교육은 특히 나무와 가지보다 숲을 바라보며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육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수많은 기술적이고 기능주의적인 면들의 유혹과 함정에 갇히지 말고 넓게 봐야 하는 지혜가 더 요구된다. 한국의 현재는 지식의 과잉과 지혜의 결여라는 불균형의 지점에 딱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고드윈이 두껍지 않은 분량의 책에서 제시한 토픽들이 교육의 개선을 위한 모든 것도 아니고 완전한 본질인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여전히 좋은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사실상 우리는 많은 지식을 담고 있어도 그 지식을 심신으로 체화시키거나 삶의 자세로 이전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고드윈이 제시한 토픽은 삶의 자세로 소화시켜도 좋을 덕목들에 해당하는 요소들에 들어간다.

고대시절부터 공부와 교육에 대해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은 여러 선각자들이 제시하곤 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부터 시작하여 몬테소리라든가 발도로프 교육법이라든가 존 듀이의 교육론 등과 함께 넓게는 칼 로저스의 인간중심 심리학을 포함한 가치들도 이 범주에 들 것이다. 문제는 이것들에 대해 적용을 했더라도 – 한국에서는 아직 본질적 적용조차도 드문 일이지만 - 근본철학에 대한 인식의 개선이 없이 피상적이거나 기능주의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는지 성찰해 볼 때이다. 아마도 가장 시급한 것, 중대한 것은 무엇인지 교육적 우선순위를 잡아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여러 깨어있는 시민들의 제안이 생겨나고 있고 좋은 제안들이 점점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산업화 세대의 잔영이 짙게 남은 기성세대들은 스스로가 이에 대해 먼저 성찰하고 배울 필요가 있다. 이런 의식들이 깨이고 깨어서 그 가치들이 더욱 모여 사회적 합의를 위한 공론의 장까지 펼쳐지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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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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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에 대한 독자 심포지엄]

2차세계대전 당시 시몬 비젠탈은 유대인 수용소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의 상황을 견디고 아내와 함께 극적으로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인척 89명은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뒤였습니다. 비젠탈은 종전이 되기 전 수용소 생활에서 근처의 병원으로 강제노역을 갔다가 다 죽어가는 젊은 나치장교를 만나게 됩니다. 그 나치장교는 병상에 누워 비젠탈에게 자신이 이전에 다른 독일군인들과 함께 저지른 유대인 학살에 대한 사건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비젠탈은 이 환자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이야기를 거의 들어주지만 조용히 그 병실을 나옵니다. 그리고 종전후 살아남은 뒤에 죽은 나치장교의 어머니를 찾아가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겪은 후 비젠탈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해바라기>를 내놓습니다. 해바라기는 죽은 독일군인들 무덤에 함께 심어놓은 꽃입니다. 아마 자신이 죽었더라면 웅덩이에 다른 시체들과 함께 이름도 없이 썩어없어질 것에 비해 독일군인들의 무덤은 죽은 후에조차 해바라기가 함께 한다는 처지를 비관해서 쓴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치장교는 죽었고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시몬 비젠탈은 종전후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졌으나 조용히(?) 살고 있는 많은 나치잔당(!)들을 추척해 체포해서 법정에 세웁니다.  그는 지상에서라도 정의가 끝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일을 한 것 같습니다. 

후일 그는 <해바라기>를 통해 나치장교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다시 현재의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의 용서를 나라면 받아줄 수 있을까? 나치장교는 용서받을 자격이 있고 비젠탈은 용서할 권리가 있을까? 내가 비젠탈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2부 심포지엄에서는 53명의 여러 인사들이 이에 대한 답변을 제시합니다. 이에 대한 글들은 너무나 각양각색이기도 하지만 비젠탈이 제시한 질문은 이 시대의 문명과 인간성에 대한 화두와도 같습니다. 

저는 이 책으로부터 여러 감흥이 일어나는 울림을 받았고 그 느낌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많은 분들도 여러 울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희가 진행하는 일다포럼 독서모임에서는 지난 주말 이책으로 독자 심포지엄을 진행했습니다. 그중의 몇분 글들을 함께 올림으로써 이 책에 대한 느낌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시몬 비젠탈이 제기한 질문은 정신적이면서도 근본적이고 우리의 삶과 문명과도 떼놓을 수 없는 화두일 겁니다. 그러나 그 답변조차도 지금에 남긴 것이 10년 후에 다시 남기는 것과도 똑같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을 기록함으로써 나중에 내가 어떻게 변하고 진화했는 지를 살펴보는 데에 좋은 참조가 되리라 믿습니다.

시몬 비젠탈이 짓고 박중서 씨가 번역한 뜨인돌출판의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의 구성은 1부는 비젠탈의 에피소드를 담은 해바라기이고 2부는 이에 답변하는 53명의 글이 담긴 심포지엄입니다. 이에 일다포럼 독서모임에서는 3부의 형식으로 독자 심포지엄을 아래에 추가합니다. 이 독자 심포지엄의 형식에 많은 이들이 더 참여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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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심포지엄 1.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용서 - 하늘나리]

본문 중에서....

나는 문득 거리 왼쪽에 있는 군인묘지를 쳐다보았다. 묘지 주위에는 철조망 울타리가 낮게 둘러쳐져 있었다. 듬성듬성한 덤불과 관목 사이로는 일렬로 나란히 늘어선 무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무덤가마다 해바라기가 한 그루씩 심겨 있었다. 마치 행진하는 군인의 모습처럼 꼿꼿하게 말이다.

나는 넋을 잃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꽃의 머리 부분은 마치 거울처럼 햇빛을 흠뻑 빨아들여 줄기를 통해 땅속 깊은 어둠으로 내려보내는 것 같았다. 내 눈길은 해바라기와 무덤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갔다. 지표면을 뚫고 올라온 듯한 해바라기의 모습은 잠망경을 연상시켰다. 꽃은 밝은색이었으며 나비들이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혹시 이 무덤에서 저 무덤으로 무슨 소식이라도 전해 주는 것일까?

그렇게 해서 꽃에게 뭔가를 속삭여주면 무덤에 누워있는 군인에게도 전달되는 것일까? 그래, 바로 그것이었다. 죽은 사람들은 이 꽃들을 통해 햇빛과 소식을 전달 받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나는 죽은 군인들이 부러워졌다. 그들 모두는 이 세상과 연결되는 해바라기를 한 그루씩 갖고 있었으며, 나비가 그들의 무덤을 찾아와 주었기 때문이다. 내겐 해바라기가 없었다. 내가 죽으면 그저 다른 시체들과 함께 커다란 구덩이에 던져질 뿐이었다. 내가 누운 어둠 속에 햇빛을 가져다줄  해바라기도 없을 뿐더러, 내가 파묻힌 무시무시한 무덤 위에는 나비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을 것이었다.

읽고나서.....

시몬 비젠탈 님. 당신의 질문을 들고 고민하던 이 한 달간 잠들어서도 당신의 질문을 놓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과연 제게 당신의 질문에 답할 자격이 있을까요?  

하지만 이제 대답할 시간이 되었고 어쨌든 이 잔을 들어야 합니다.

당신이 처했던 것 같은 기가 막힌 상황을 저는 한 번도 겪어보지도  곁에서 구경해보지도 못했습니다. 굳이 비견하자면  5.18민주항쟁이 있었네요. 하지만 저는 아직 전씨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뉘우치지도 않고 있으니까요. 

당신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깊은 망망대해를 긴 대나무다리 두 개에 의지해서 겨우 걸어 건너고 있는데, 수영복 멋지게 차려입고  뛰어들어 헤엄치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잡아제쳐 빠뜨려 죽이며 앞으로 나아가다가 힘이 빠지니까 살려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손을 내미는 모습이 상상이 되었습니다. 겨우 숨쉬고 눈 하나 깜박일 힘밖에 남지 않은 당신에게 말입니다. 그 때 당신에겐 그를 용서할  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살아남기에 절박했듯 그 SS대원 역시 자신의 영혼이 살아남기를 절박하게 원했던 듯 싶습니다. 다만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께가 아니라 신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거라고 믿습니다. 당신께는 참회를 하는 것 거기까지가 그가 했어야 하는 일이고요. 

여기까지 쓰고 나니 다른 사람의 죄를 어디까지,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사형제도는? 이런 저런 질문이 함께 떠오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사형시키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한을 가진 이는 이미 죽었을 것이므로 살아있는 사람 누구에게도 사형시킬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회에서 같이 살아갈 권리를 잃은 그를 격리시키는 것은 가능하겠지요. 용서가 아니라요.

다시 당신이 만났던 그 장면을 생각해 봅니다. 육체적 죽음과 영혼의 죽음에  그토록 가까이 가 본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 두 죽음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영혼을 다시 깨워 일으키는 과정이 당신의 일생을 건 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그 때 당신의 영혼의 죽음을 위협하는 요청을 받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당시엔 어떤  대답도 당신의 영혼에 심각한 상처를 입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에 걸쳐 그 답을 찾아 오셨지요. 제가 당신이었다면 당연히 그의 죄와 함께  그를 두고  떠났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가망없는 일에 내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아 " 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고백하자면 개인적인 일들의 경우  용서가 아니라 잊어버리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의 죄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를 일깨워 뉘우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회심시키고 개심시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가려는 게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잊어버리는 쪽을 선택합니다. 제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또 그 사람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절망감에 그를 포기하는 것이지요. 당신의 질문 앞에서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스무살 적에 누군가를 아주 많이 미워해보고 나서야 개인적인 증오나 복수심, 미움, 이런 것들을 가슴에 키우는 일은 내 마음이 황무지가 되어  다른 어떤 좋은 식물도 자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용서가 아니라 망각을 방어기제로 선택하며 살아왔던 저를 반성하게 되네요.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죄를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허비할 에너지는 없기에 그를 그의 죄와 함께 두고 돌아서서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제 생존 전략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회피하며 살아온 제게 누군가 한 개인이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용서를 빈다면,  반드시 용서냐 아니냐 하는 절박한 순간이 온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용서라면 그의 참회와 간청을 들어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질문은 개인을 넘어선 것입니다. 

개인적인 죄와 그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면,  집단과 사회에 대한 크나큰 죄라면, 참회와 속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은 그 다음이지요. 

사회의 통합과 발전을 위해서 인류의 정신의 발전을 위해서 우리는  화합을 이루어 가야 하니까요.  그것이 사회의 발전과 인류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나간 역사에서 우린 배우는 것이 있기는 있는 걸까요? 여전히 우리 인류는 다른 민족에 대해 크나큰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스니아에서, 킬링필드에서, 르완다에서, 심지어는 지금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저지르는 만행은 사람들을 서로 사냥하고 사냥당하는 야만의 초원으로 데려가고 맙니다.  아니 동물들도 동족을 집단으로 사냥하진 않습니다.  종족번식을 위해 다른 놈의 새끼를 죽이고 자신의 씨를 심기는 하지만요. 아니 정말 닮았군요.  동물과 인간의 사이엔 습자지 한장의 차이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쟁에 따른 살생은 사람은 영원히 변화시키므로 전쟁을 하지 않는 아서 클라크의 SF소설 "라마" 에 나오는 팔지거미 종족이 생각납니다. 어쩔 수 없이 지구종족과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 전쟁에 참여한 거미족 전사들은 전쟁이 종결 된 후 사망이 예정되어 있었지요. 살생은 사람의 심성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에 사회 생활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지요. 살생은 정말 사람의 심성의 무언가 야수의 부분에 채워졌던 자물쇠를 부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살생을 저지른 사람의 심성은 뭔가 심각하게 달라지는 것이라고, 회복불가능한 변화가 생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용서의 문제를 떠나서요. 그런데 직접적인 살생을 했다는 인식을 못하고도 그보다 더한 만행을 저지를 수도 있는 인간의 창의성이 있으니까요. 얼마나 많은 폭력들이 집단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폭력에 대한 인식이 없는 채로 저질러 지고 있는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집단폭력은 우리 안에 내재 되어 있고 우리들은  끊임없이 그에 맞서 싸워 나가야 하는 미개한 종족인가 하는 좌절감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사형시킬 권리가 없는 것처럼 용서할 권리도 없는 것이라고, 용서는 죽은 사람과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사회의 통합을 위해서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일으켜 세워가야하는 전후 복구의 상황에서 우리들은 봉합하는 길을 찾아 내야만 하지요. 그것이 참회와 속죄의 길이고 그건 끝이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시몬 비젠탈 씨.  당신에게는 용서할 권한은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평생 그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며 살아 온 당신은 어쩌면 그의 무덤에,  또 훗날 당신의 무덤에 해바라기를 심는 일을 해온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당신의 영혼을 불러 깨워 일으켜 신에게로 손을 뻗치는 일, 해를 바라며 피는 해바라기처럼  우리가 영혼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 평생 해야 하는 일. 

저는 오늘 당신이 심은 해바라기에 눈물 한방울을 떨어뜨렸을 뿐입니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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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심포지엄 2. 우리는 왜 용서를 하는가 - 김설미]

시몬 비젠탈의 용서에 관한 질문은 크게는 두 가지로 나뉠 것 같다. 먼저는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로 내 개인이 같은 상황에서 어찌 행동했을 지를 묻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용서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먼저 첫번째 질문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르투르의 말대로 이들이 겪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내가 어떻게 했을 지 전혀 모르겠다. 아마도 독일인 전체에 대한 분노와 미움에 휩싸여, 죽어가는 독일인이 참회하며 용서를 구한다 해도 전혀 들어주고 싶은 마음도 없고 용서라는 것은 떠오르지도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죽어가는 사람 (나치로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서)에 대한 연민으로 그냥 용서한다고 말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결국은 그저 말로만 용서한다고 했을 뿐 실제로는 용서는 하지 못한 것이겠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 상황에서 아마도 이 독일 병사를 용서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시몬 비젠탈은 용서를 하지 않은 채 (사실 이것도 용서를 하지 않은 것이 맞는 지 잘 모르겠다)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나라면? 그 죽어가는 독일인을 향해 어떻게 감히 용서를 구할 수 있느냐고 했을까? 아니면 시몬 비젠탈처럼 그냥 말없이 떠났을까? 솔직히 전혀 모르겠다. 

한편 “용서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라면 그 나치가 진정으로 참회를 했다면 용서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그 나치는 정말로 참회를 한 것일까? 그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똑같이 용서를 구했을까? 그가 한 참회는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자의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의 마음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그저 누구든 상관 없이 유대인 “아무”에게나 본인의 죄를 털어놓은 것뿐이 아닌가? 그래서 유대인 죄수를 한 명 불러달라 하고 그 유대인 죄수가 왔을 때 이름도 물어보지 않은 것 아닌가? 그에게는 유대인은 개별성이 상실된 그저 “유대인”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진정한 참회라 볼 수 있을까? 그저 본인의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저질렀던 일을 고백하는 것만을 참회라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 아닐까?

또 이 책에서 많은 이들이 “용서의 자격”을 얘기하는데, 유대인들은 용서란 피해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살인에 대해서는 용서를 해 줄 수 있는 피해자가 이미 이 세상에 없으니 용서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편 기독교에서는 종교적 의미로서 용서를 얘기한다. 시몬 비젠탈이 모든 유대인을 대표하여 용서를 할 수는 없었겠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이들은 모두 유대인으로서 고통을 받았을 뿐 아니라 누구든 그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용서, 참회, 속죄, 처벌, 복수, 보상, 화해… 이 글을 읽으면서 다시금 생각해보는 말들이었다. 진정한 참회와 속죄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법률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지며, 과거의 잘못이 누구에 의해서건 다시금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용서는 무엇이고 왜 하는 걸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여 생을 통해 크건 작건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으며, 타인의 잘못에 대해 원망과 미움을 갖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서로간의 상처를 보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바로 “용서”라는 것이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는 것이 과거의 일을 잊어버리거나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홀로코스트와는 다른 성격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우리가 일본인들에게 당했던 강제 징용과 위안부라 불리는 성노예 문제들이 떠올랐다. 베트남 전 중에 우리 군인들이 저질렀던 잔혹했던 양민 학살들도 떠올랐다. 또한 홀로코스트를 당했던 유대인들이 세운 국가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가하고 있는 폭력들도 떠올리게 됐다. 이런 사실들은 우리는 언제나 피해자이거나 언제나 가해자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고 언제든 그 위치가 뒤바뀔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보다는 분명하게 잘못을 인식하고 이러한 과오가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있을 때에만 용서도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용서에 대해서 나 스스로의 자세를 분명하게 갖지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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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심포지엄 3. 모든 용서는 추하다 - 티타나]

제대로 지켜지기만 한다면 모세의 율법만으로도 세상은 훨씬 나아질 수 있다. 모세 후 1500년, 예수의 시대엔 율법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않았다. 공정한 법집행은 사라졌고 부자를 우대하고 약자를 천시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만 잘 지켜졌어도 유대 땅에 예수가 올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 받은 것의 열배로 갚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아무 댓가 없이 사면하는 것 또한 정당하지 못하다. 신의 의지는 공정함에 있다. 세상이 이처럼 엉망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용서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남발되어서 사실상 거의 모든 용서가 추하기 때문이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 적절한 용서, 정당한 복수, 신적인 사랑, 공정한 정의 모두 아름답다. 싸구려 용서, 폭력적인 복수, 맹목적인 사랑, 불의한 사법 모두 추하다. 세상이 엉망인 것은 추한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용서 중 얼마 정도가 아름다운가? 당신의 세상은 너무 아름답고, 깨끗하고, 황홀한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법이나 사회적인 평가나 다른 어떤 것도 공정하지 않다. 문제는 이것이다. ‘용서도 복수도 법도 부자(강자)에게 관대하고 빈자(약자)에게 냉엄하다.’ 과유불급이라 했다. 그 무엇이라도 사랑이나 정의마저도 지나쳐서 좋을 게 없다. 용서도 지나치면 좋을 게 없다. 이렇게 질문할 수 있겠다. ‘오늘날 우리 사회엔 용서가 부족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마치 그것은 ‘우리 사회엔 영양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영양은 과잉상태다. 다만 좋지 않은 것을 너무 먹는 게 탈이다. 또한 정말 영양이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분배되지 않는 것이 탈이다. 마치 콜라와 과자, 튀김과 밀가루로 칼로리를 두 세배 채우는 것과 같다. 또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과 비만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공존하는 세계를 보자. 우리 사회에 용서가 적다고? 천만에. 용서도 넘쳐난다. 최소한 부족하지는 않다. 문제는 그 용서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용서가 필요한 곳에는 닿지 않는다. 부자에게 편중된 용서를 보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게 주어진 사면의 크기를 보자. 밀수업자 이병철, 폭력배 수준의 숱한 재벌 2세들, 조중동과 검사 의사들에게 베풀어지는 호의를 보자. 가진 자의 리그에서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용서와 면죄를 보라. 정작 용서가 필요한 ‘배고파서 빵 하나 훔친 사람’에게는 징역 몇 년을 선고한다. 만약 어느날 어떤 신적인 존재가 나타나 공정하게 용서를 집행한다면 현재 우리의 용서는 1%도 남지 않을 것이다. 현재 대다수의 용서는 남발이다. 그래서 모든 용서는 추하다고 한 것이다. 김대중이 전두환을 용서한 것은 개인적이어야 했다. 자기 다리를 절게 한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나는 감동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직함을 가지고 독재자를 용서한 것은 명백하게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국민 다수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법도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대통령은 공정해야 할 책임이 있다. 국민과 법을 무시하고 행동한다면 독재자와 다를 바 없다. 당시엔 여러 의미를 두고 그런 행위를 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김대중은 죽었고 전두환은 살았으며 그에게 죽은 국민도 산 국민도 전두환의 존재로 고통당하고 있다. 신원식 전직 장군 현직 국회의원을 보면 답이 나온다. 전두환이 제대로 정의의 심판을 받았으면 그런 적폐가 감히 입을 열어 법무장관을 음해하는 음모를 꾸미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통은 김대중이 아닌 살아남은 국민의 몫이다. 용서한 자만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떴을 뿐이다. 남아 있는 아직 전두환을 용서하지 못한 국민은 어쩌란 말인가. 모든 용서가 아름다운가를 철학적으로 논하기 전에, 과연 아름다운 용서가 실제로 몇 퍼센트나 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용서냐 복수냐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공정하게 집행되느냐다.

용서는 유전자 단위부터 존재하며 국가와 인류를 넘어서도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논하는 용서는 인간(유전자, 분자, 세포도 단체, 국가, 인류, 신도 아닌)간에 한정하고 집중해야 마땅하다. 비유하자면, 내가 세포인데 옆에 암세포가 있다. 내 양분을 빼앗아 가고 조직을 위협한다. 나라는 세포는 그 암세포을 용서해야 하는가? 나는 용서하더라도 ‘개체 인간’은 백혈구를 보내든 항암치료를 하든 할 수 있다. 차원이 다를 때 용서는 무의미하다. 개인은 암세포를 용서해야 하는가? (요즘말로 인류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용서해야 하는가??) 똑같은 논의를 세포-개인 대신 인간-국가에 적용해보자. 개인(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세포(인간)가 있을 때 그것을 처단하는 것이 용서로 접근할 문제인가. 접근한다고 해도 우선시해야 할 것은 생존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막아내는 게 모든 존재의 최우선 과제다. 내가 죽는데 암세포를 용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서 코스프래 해주는 것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모든 용서를 제거하는 편이 싸구려 용서를 장려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무죄추정에 따라 판결이 나오기 전엔 범죄자라고 하지 않는다. 법의 부드러운 면이다. 용서의 강한 면은 유죄추정이다. 국가 차원에서는 참회와 개선이 충분하지 않은 자를 용서해서는 안된다. 개인이 행하는 용서와 상위 차원인 국가의 용서-사면은 달라야 한다. 신은 인간을 용서하지 않는다. 용서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입장에서 홀로코스트는 비극이지만 신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개미 군체를 파괴하는 인간은 개미에게 사죄해야 하는가. 암으로 위를 잘라내버리는 인간은 위에게 사죄해야하는가 아니면 고통을 준 위암세포를 용서해야 하는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용서는 사람 사이의 영역일 뿐이다. 다른 차원간의 용서 문제는 실제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고, 학문적인 접근을 한다고 해도 ‘동일 차원’의 용서 문제와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예수는 몇 번이나 용서했는가. 용서를 ’말했는가’가 아니다. 나는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유사 용서’의 사례까지 포함시킨다고 해도 성경 전체에서 3회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용서를 이야기한 것은 30번 정도 된다. 예수는 말로 가르치기 위해서만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본을 보이기 위해서도 이 땅에 왔다. 용서에 대한 예수의 모범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의 말 뿐 아니라 실제 행동에도 주목해야 한다. 물론 그 세 번의 본은 놀라운 것이고 철학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깊은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예수가 분노하며 복수한 경우는 그보다 훨씬 많다. 예수는 바라새인들을 용서했는가. 그들에게 분노한 것은 몇 번이고 거짓으로 선동하는 그들에게 말로 되갚은(복수한) 것은 또 몇 번인가. 마음 속으로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행동으로는 극도로 신중하게 용서하는 것이 예수의 본보기가 아닐까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용서를 쉽게 정의내리고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하기 보다는 우리의 무지(총체적인 무지와 용서가 무엇인가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고 조심스럽게 최소한만 용서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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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심포지엄 4. 용서는 어떻게 가능한가 - 율리시즈]

2차대전 당시에 죽어가던 젊은 나치장교를 병상에서 만난 시몬 비젠탈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인생의 화두처럼 다가옵니다. 유대인인 비젠탈이 수용소에 잡혀 있는 상태인 데다가 본인조차 언제 죽을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한 나치장교의 유대인 학살을 저지른 일에 용서를 비는 대목에서 독자들은 충격과 분노, 슬픔, 연민 등의 여러 감정이 교차되었으리라 봅니다. 정작 비젠탈은 이 상황을 차분하게 지켜본 것 같습니다. 그의 놀라울 정도의 침착함은 다 죽어가는 이 젊은 나치장교를 만나기 전에 이미 수많은 차별과 혐오와 죽음을 수없이 지켜봤더라도 놀라운 데가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하의 대접을 숱하게 받으면서도 인간다운 모습을 잃지 않은채 나치장교의 고백을 거의 듣고는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이 용서와 비용서의 결정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후세에게 던져준 그의 질문이겠지요.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과연 내가 비젠탈이라면 나치장교를 용서했을까요? 아니 그런 권리조차 나에게 있는 것일까요?

정의의 입장에서 볼 때 나치장교에 대한 용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가 교전중에 적군을 죽인것도 아닌 민간인들을 한 건물에 몰아넣어서 폭파시키고 불태운 사건은 그가 주동자가 아니라 여러 독일군들의 지휘체계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그 학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심판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더 명확해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뒤늦게 용서를 빌어도 이미 그들은 세상을 떠난 뒤였고 용서를 빌 대상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하늘에 가서 그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겠지요.

내가 비젠탈이었다 하더라도 나치장교를 용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그 극한 상황에서도 비젠탈이 병실에서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거의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준 자세가 인간적으로 보여준 최선의 하나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뒤에 21세기가 지나가고 있는 여기에서 우리는 비젠탈이 제기한 질문을 듣고 2부 심포지엄에서 제시된 여러 인사들의 의견을 들은 후 자신의 생각을 차분히 정리할 여지라도 지니지만 2차대전 당시로 돌아가 내가 비젠탈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어림짐작조차 쉽지 않은 극한 상황의 하나에 놓여졌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어두운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 성찰과 행동을 멈출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비젠탈이 당시에 보여준 최선의 인간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당시의 비젠탈로 돌아간다면 실제로는 어떻게 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으로는 나치장교의 손을 잡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용서를 받아주는 것이 온당하면서도 최선이라고 느낍니다. 이는 젊은 나치장교가 죽음을 앞두고 할 수 있는 육신 최후의 고백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한때 가톨릭교도였던 그가 신부를 불러 고백성사를 올렸는 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지 않았거나 다른 상황이라면 그가 용서를 빌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용서를 비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일이고 용서를 받아주는 것조차 가장 인간적인 일이라고 믿습니다. 용서를 비는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용서를 받아주는 권리도 누구에게나 있다고 믿습니다. 이는 상대방의 미래를 위해서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도 숭고한 가치입니다. 또한 역사를 통해 반복되는 전쟁과 학살의 이야기를 멈추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2차대전 당시에 유대인들이 나치독일에 의해 자행된 차별과 학살의 역사는 너무나 끔찍한 것이어서 지금 이 시대에도 자주 그 어둠의 역사가 다시 이야기되고는 합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특정한 종족의 대규모 인원을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방법으로 제거하고 학살하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이 소중한 가치에서 이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지요. 이는 당시의 독일인들에게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여러 나라들을 포함해서 더 나아가서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 역사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는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사건의 하나입니다. 그 학살의 대규모성과 계획성, 조직성에 있어서 전례를 찾기가 쉽지 않은 사건이지요. 그러나 이 홀로코스트가 유일한 사건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홀로코스트 이전에도 또한 그 이후에도 많은 학살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유럽에서 비롯된 노예제도에 미명하에 많은 노예들이 죽음을 당했고 미국 초기의 건국과정에서 주도자들이 북미에 정착하면서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한 역사가 있습니다. 소비에트연방 당시 스탈린 공산지도부는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을 동토로 유배시키거나 처형했습니다. 2차대전 이후로도 캄보디아에서는 킬링필드의 비극이, 르완다에서는 내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유럽에서 있었던 보스니아 내전과 학살의 경우도 어두운 역사의 기록입니다. 한국에서도 제주4.3과 광주5.18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학살을 넘어서 있는 전쟁 그 자체입니다. 1차대전으로 2,800만명이, 2차대전으로 7,000만명에 가까운 군인과 민간인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쟁이든 비인간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학살이든 투쟁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멈추기 쉽지 않다는 일입니다.

이를 조금이라도 낮추거나 저지하기 위해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는 것이고 지구촌 모두가 형제자매라는 의식이 더 구체화되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로마서(12:19)에서는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원수갚은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라고 얘기하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마태복음(18:21)에서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일곱 번 용서해주면 되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일반인은 물론이고 신자들이 종종 듣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막상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압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인간적인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 지향성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제 문명의 미래를 위해서 나는 제일 먼저 유대인들이 개인이든 단체이든 앞장서서 분노와 투쟁의 관습을 접고 화해와 용서의 삶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이집트로부터 유대민족을 살려내기 위해 애쓴 이후로도 많은 이들이 개인적이든 민족적이든 생사의 기로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이전의 그 고초에 대해 다른나라 사람들이 일일이 다 헤아릴 수는 없는 일일 겁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은 다른 민족들도 많은 외침과 학살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도 그 예외가 아닙니다. 지금의 상황을 냉정히 바라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살고 있고 미국,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적지 않은 권세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 권세가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에서 타민족들과 여전히 분쟁을 일삼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숱한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로 인한 앙갚음이라는 면에서는 일면 이해되는 면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헤게모니를 쥔 이들은 바로 당신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이 투쟁의 연속에 앞장선다는 것은 역사의 장에 더욱더 어두운 기록을 더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헤게모니를 쥔 이들이 화해와 용서의 길로 들어설 때 지구촌의 미래는 현실적인 희망을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 위해서 스스로를 먼저 용서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출발이라고 믿습니다. 투쟁의 시대에서 조화의 시대로 가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약자의 용서가 약하고 강자의 용서가 강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용서는 아름다우니까요.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는 바꿀 수 있는 곳에서 먼저 바꿀 때에 진정한 역사가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지탄을 받는 존재가 용서를 구하는 범위와 대상을 찾는 것도, 그 용서를 받아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용서를 받아줌으로써 할 일을 하고 타인들이 받아줄 수 있는 용서와 하늘이 작용하는 섭리와 용서는 그것의 뜻대로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용서는 내 마음을 닫아두고 용서는 마음을 열어줍니다. 비용서의 마음은 내 마음을 닫아둠으로써 타인과의 분리감을 형성하고 넓게는 사회, 종족, 국가가 분리되고 투쟁하는데 큰 원인이 됩니다. 나 스스로의 심신에게 해로운 분리감을 계속 지니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자주 극적인 체험을 하곤 하지만 이해한 순간 바로 자유로와지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도 이로운 일입니다. 

정의의 심판은 그 역할을 맡은 사회와 역사와 섭리에 맡겨도 될 겁니다. 모든 존재는 선이든 악이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한 대로 돌려받을 것입니다. 섭리의 무지로 인한 나 자신의 의식은 내가 주체가 되어 종종 정의의 심판관이 되려 하지만 이는 내 역할의 오용이거나 과용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섭리의 베일을 한두개씩 벗겨나가고 이해하는 일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과정이겠지만 그 이해의 정도와 상관없이 섭리의 가장 큰 뜻은 사랑과 용서라는 바탕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입장이라도 나와 다른 입장이기에 오히려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 함께 이 세상에서 좀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겠지요. 복수는 복수를 낳고 투쟁은 투쟁을 낳지만 용서는 용서를 낳고 화해는 화해를 낳고 평화는 평화를 낳습니다. 복수와 투쟁을 낳는 곳에 복수와 투쟁을 보태지 말고 용서와 화해를 낳는 곳에 용서와 화해를 더 보탬으로써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좀 더 넓히는 주류의 시대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21세기의 끝자락에 가서도 지금처럼 중동과 아프리카 등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역사의 어두운 반복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크나큰 댓가를 계속 치뤄야 할지도 모릅니다.

용서는 정신적인 활동으로써 내 자신에 대한 용서로부터 시작할 때 힘을 발휘합니다. 그럼으로써 더 나은 내 자신이 될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용서는 외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을 투자하지 않는 활동임에도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주변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보복과 비용서는 분노와 투쟁을 낳습니다. 그것들의 연속이 이제까지의 역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화해와 용서는 조화와 평화를 낳습니다. 그것들의 연속이 앞으로의 주류 역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앞당기는 것은 나 자신의 주체성을 비하하지 말고 신성함을 되살리며 의식적으로 더 나은 내가 되겠다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용서가 용서를 비는 대상에게나 용서를 수용하는 내 자신에게나 궁극의 해결점은 아닙니다. 용서를 빌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다시 새로운 것을 배우고 깨달아야 할 많은 사회적, 법적, 문명적 과정이라는 시간을 거쳐야 할 겁니다. 그러나 용서는 누구의 강요도 요구받지 않은 채 나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정신적인 활동으로써 평화의 시대가 주류로 잡기 위한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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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 (무선)
이브 헤롤드 지음, 강병철 옮김 / 꿈꿀자유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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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성을 지킬 수 있을까요? 기적같은 기술의 혜택을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세상에서 살게 될까요? 우리 후손들은 기술에 의해 해방된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요? 아니면 결국 우리를 더 건강하고, 더 똑똑하고, 더 젊고, 더 오래 살게 해주는 기계와 장치들에 봉사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까요?’

- 이브 헤롤드 지음, 강병철 옮김, 꿈꿀자유 출간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 : 트랜스휴머니즘의 현재와 미래 Beyond Human>중에서, p.22.

때로는 대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경우가 많다. 왜 아니겠는가. 세상과 삶은 계속 변하고 있고 우주는 팽창하고 있으며 지금처럼 질병과 기후재난이 겹쳐지는 시기에는 더욱 앞일을 예측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오늘을 사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절대적 해답을 얻음으로써 두려움에서 벗어나 지극히 안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함이 아니라, 절대적 해답을 찾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근접하는 해결점을 모색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의 의식을 그만큼 진화시키고 문명개선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브 헤롤드의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에 대한 간략소감을 말하자면 위와 같은 질문과 화두를 던지는 저자의 넓은 안목과 통찰이 인상적이다. 위에 인용한 구절들은 인간의 심신능력이 정상보다 모자라든 그렇지 않든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트랜스휴먼의 시대로 접어든 시대에 저자가 던지는 일반적이지만 근본적이고 근본적이지만 일상적으로 다가올 질문의 제기이기도 하고 현실과 미래이기도 하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세기가 지날수록 늘어난 것에는 의료기술에 힘있은 바 클 것이다. 한때 60세 이상만 살아도 장수한다고 인식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쉽게 100세 시대를 입버릇처럼 혹은 쉽게 이룰 희망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노년이 될수록 온갖 만성질환을 지닌 채 100세 이상을 살고 싶은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현대의료기술은 장수시대에 걸맞게 신체부위의 각종 질환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고 연명하는 것을 뛰어넘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치료’까지는 ‘휴먼’의 영역이었을 테지만 정상신체 혹은 평균을 뛰어넘는 ‘인간강화’와 100세를 넘어 200세, 300세를 바라보는 ‘트랜스휴먼’의 시대가 이미 시작되고 있으며 그것의 실제적 구현이 수십년내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측은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브 헤롤드는 이 책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인공장기, 나노기술, 생명공학 등에 의한 신체향상과 수명연장을 위한 의료기술의 현황을 살펴보고 이에 따르는 온갖 사회적, 윤리적, 법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문제까지 살펴보고 있다. 인공지능과 4차산업혁명 등등으로 불리우는 여러 희망찬 미래를 노래하는 책들은 많지만 저자는 넓은 시선에서 기술(Technology)과 동등할 정도의 분량으로 윤리(Ethics)를 얘기한다.

첫째 예로 든 것이 30살로 보이지만 250세로 여전히 살고 있는, 미래의 빅터 이야기이다. 빅터는 60대에 심장병을 심하게 앓았지만 인공심장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당뇨병에도 걸렸지만 인공췌장을 통해 완치되었다. 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지만 인공 팔을 부착함으로써 이전보다 더 센 팔을 지니게 되었다. 한쪽 눈의 콘택트렌즈를 통해 주변 환경의 정보를 전송받는다. 뇌 속에 신경을 이식받아 이 기술을 통해 기억을 확장하고 지식을 무선으로 다운로드받는다. 이미 250세이지만 빅터는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수십억개의 나노로봇이 몸속 구석구석을 다니며 질병이나 노화로 손상된 세포를 수리하고, DNA 복제오류를 복구하며, 암세포는 눈에 띄는 즉시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빅터는 젊었던 시절 아내였던 일레인과 함께 인공적인 생의학기술을 거부하고 살만큼 살다가 자연스럽게 죽기를 바랬다. 그러나 60대의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인해 위기를 겪은 즈음에 둘째 손주가 곧 태어난다는 소식을 듣고는 손주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인공심장을 이식받는다. 그러면서 하나가 풀리면 다른 것이 풀리듯이 오래되고 고장난 장기(?)들을 하나씩 교체하면서 그는 또다른 삶을 얻기 시작한다.

이런 상상 속의 예를 들면서 저자는 수명이 장기화되어 이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고 삶을 마감하고 싶다고 할 때 그 수명을 결정하는 주체 혹은 합의의 절차가 어때야 하는지를 묻는다. 트랜스휴먼의 존재가 그만 살고 싶다는 것은 인공장기를 비활성화시킨다는 것(지금도 비슷한 사례가 많지만)을 의미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는 살인과도 같은 것이므로 의료진들이 앞장서서 그 일을 할리는 만무하다. 완전한 트랜스휴먼의 시대에는 죽는 일 자체가 엄청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한 일반적인 절차의 흐름도는 있지만 이를 환자, 가족, 의료진들이 모두 합의할 거라는 보장도 없다. 책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이미 미래가 아닌 현실에서 안락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1990년대 미국의 테리 스키아보(Terri Schiavo)가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영양공급튜브를 공급하느냐 마느냐 즉, 그를 더 살리느냐 마느냐를 두고 가족, 병원, 사회, 사법부 등 국가 전체가 관심을 가지면서 떠들썩한 과정을 겪은 바 있다.

그때에 비해 시간도 많이 지났고 인공지능 기술(AI Technology)은 사방에서 들리지만 인공지능 윤리학(AI Ethics)는 뒤따라가기 바쁘다. 생명공학 기술(Bio Technology)은 질주하고 있지만 생명공학 윤리(Bio Ethics)는 사회적 합의는 커녕 의제조차 세우지 못한 지경이다. 물론 이는 환경과 문화에 더해 국가마다 다를 것이다. 저자는 트랜스휴먼 테크놀로지(Transhuman Technology)에 걸맞는 트랜스휴먼 윤리(Transhuman Ethics)에 대한 전반적인 의제와 합의를 이룰 제안을 하고 있다.

트랜스휴먼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이들은 생명보수주의(Body-Conservatism)라고 불리우는, 종교영역과 전통윤리에 강하게 머물러 있는 이들일 것이다. 이 근거의 논리는 자연적으로 부여받은 신체의 능력을 인공적으로 바꾸는 것은 자연의 섭리, 신의 뜻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의 능력에 도전한다는, 아주 예전부터 있어온 과학기술 발전에 반감을 보이는 경향과도 공유한다. 그러나 이는 체내에 직접 인공장기를 이식하지 않았을 뿐 이전부터 있어온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해 수명이 연장되어 온 인간의 노력이 인공적인 발전과 다르지 않다는 현실적인 점에서 모순된 의견일 것이다. 현재 인공장기의 발전은 체외에서 부품의 역할을 하며 점차 체내이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데 이는 비유하자면 안경이 콘택트렌즈로 신체와 점점 더 가까워지거나 일체가 되는 발전의 단계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설령 인공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 하더라도 그것을 명확히 구분할 단계는 넘어 섰다. 발전은 막을 수 없다. 오히려 이 발전이 어떻게 인간적으로 쓰일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더 생산적인 시대이다.

한때 케이블채널에서 방영하던 <렛미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사고 혹은 선천적 장애로 얼굴이나 신체 등이 기형에 가까워서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는데 의료기술의 힘입어 일상생활이 가능함은 물론 어떤 점에서는 미인이라고 할 정도로 새로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보자면 치료는 신체를 평균으로 잡아주는 것이지만 인간강화는 성형과도 관련이 깊다. 사고로 다친 코를 고치는 것은 ‘치료’이지만 멀쩡한 코를 세우는 것은 일종의 ‘인간강화’이다. 미국의 메이저리그 야구에서는 한때 최고의 홈런타자라고 불리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배리 본즈 선수가 금지복용 약물로 근육강화를 한 점을 들어 그 명성이 추락한 적 있다. 그를 포함한 적지 않은 선수들이 약물을 복용하지 않고도 충분히 명성을 떨칠 수 있었음에도 더 나아지고 싶은 욕망은 끝이 없다. 어느 조건에서 어떤 규칙을 지켜야 하는 지는 트랜스휴먼의 시대의 윤리학을 새로 정립하는 것과도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브 헤롤드는 ‘치료’에서 ‘인간강화’로 가는 단계가 많은 이들에게 의혹과 논란을 줄 것이라는 점을 언급한다. 이를테면 시력이 나빠진 이에게 2.0 이내의 정상시력으로 치료하는 것을 넘어 ‘600만불의 사나이’처럼 5.0 심지어는 10.0의 시력을 부여한다면 어떻겠는가. 혹은 쇠퇴해진 청력을 회복해주는 수준을 넘어 ‘소머즈’처럼 초능력에 가까운 청력을 부여한다면 어떻겠는가. 대부분의 이들은 의료기술이 정상 혹은 평균보다 못한 심신의 능력을 정상에 가깝게 치료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을 넘어서는 것에서는 찬반이 갈리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성급한 찬반의 진영에 서기 보다는 인간의 정상 혹은 평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신체적 인간으로서의 정의(definition), 혹은 인간성(Humanity)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를 성찰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엔나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마크 코켈버그(Mark Coeckelbergh)는 2019년 12월 한국 고등과학원에서 열린 <휴머니즘을 넘어서 Beyond Humanism>라는 주제의 국제학술대회에서 <AI 윤리학 Ethics of AI>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한 바 있다. 그는 AI 테크놀로지 적용 범주를 산업(Industry), 금융(Finance), 보건의료(Health Care), 교통(Transport), 군사 프로그램(Military application), 일(Work), 가정(Home)으로 분류한 바 있다. 이 범주에는 각각 윤리적(Ethical), 법적(Legal), 사회적(Social) 문제들이 따라가고 그에 대한 의제와 절차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범주들의 영역이 다른 것들과도 상호충돌하거나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이는 이브 헤롤드가 제시한 트랜스휴먼의 윤리제기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브 헤롤드는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에서 각 장에서 인공장기, 군사문제, 뇌연구, 장수분야, 로봇 등 분야별로 트랜스휴먼의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과 그로 발생할 윤리적, 법적, 사회적 문제들을 같이 이야기했는데 마지막 9장에서는 이에 대한 종합적 정리를 시도한다. 이 책의 9장은 이브 헤롤드가 다른 학자들에게서 보기 힘든 통찰력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챕터이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트랜스휴먼의 발전을 막아서는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고 얘기한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트랜스휴먼의 기술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그렇다고 그 기술이 그대로 흘러가도록 놔두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각 장별로 이의 발전으로 인해 제기될 의문과 질문들을 반복적이라고 할 정도로 언급하는 이유는 이에 대한 사회적 공론을 더 본격화하자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기술은 분과과학에서 시작해서 융합과 통섭이 점점 중요해지는 사회로 가고 있지만 이에 따른 윤리조차도 그러하다. 모든 윤리적, 사회적, 법적, 철학적 의제의 검토는 한 테이블 위에서 올려놓고 진화시킬수록 트랜스휴먼이 지닌 양날의 칼은 선한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점은 기술과 성장에 치중한 서구문명에 비해 조화와 질서의 아름다움을 모색했던 동양문명이 오히려 이 시대에 중요한 조언자가 될 수 있다. 융합은 과학과 철학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양과 동양사이에도 이루어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약으로 시작한 의료기술은 장기를 열고 고치고 꿰매는 것을 넘어 기존의 장기를 대체하는 외부의 임시장치를 만들고 이제는 인공장기를 내부에 이식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0.001밀리미터의 나노급 소재가 몸속으로 들어가 외부와의 통신을 통해 건강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시대를 그리고 있다. 모든 장기와 신체를 인공으로 대체가능해진 후에는 최후의 보루라고 할만한 뇌연구에서 마인드 업로딩(Mind Uploading)이라고 하는, 자신의 모든 경험과 기억들을 서버에 올리고 자신을 대체할 로봇으로 전송하는, 공상과학영화에서 보았던 소재들이 아직은 머나먼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언젠가는 비슷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옛날 네안데르탈인이 군림하던 먹이사슬의 최상위 자리가 어느날 호모 사피엔스로 바뀐 것처럼 자연은 훨씬 더 업그레이드된 호모 사피엔스의 다음 인류를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시대가 더 빨리 올지는 아직 모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근본적인 성찰을 할 시점이 된 듯하다. 영혼이라고 불리우든 혹은 정신이라고 불리우든 양심의 중요성을 믿는 존재들에게는 신체가 인간의 존엄성을 담는 나만의 그릇이다. 그릇은 그릇일 뿐이므로 더 좋은 그릇을 형성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즉 그 그릇외에 다른 아무 것이 없다고 하는 이들이나 그릇을 넘는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이들에게도 인간성이라는 존엄성은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존엄성은 콘크리트처럼 변하지 않거나 절대적으로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고 자연과 함께 공동창조하는 주체이다. 그러므로 휴먼을 담는 그릇이 향상되고 진화할수록 존엄성의 중심은 잃지 말고 더 단단해져야 할 뿐만이 아니라 더 커져야 한다. 그리고 그 존엄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이는 고대 이래로 플라톤과 데카르트와 니체와 화이트헤드가 지속적으로 탐구했던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양심의 중심을 잃어버린 존재에게 느닷없이 주어진 절대반지는 타인과 세상은 물론 자기자신마저 죽이는 흉악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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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호프 자런 지음, 김은령 옮김 / 김영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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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이지 않는 신은 경배하고 눈에 보이는 자연은 학살해버린다. 우리가 학살하는 자연이 사실은 우리가 경배하는 보이지 않는 신인 것을 모르고.’

- 호프 자런 지음, 김은령 옮김, 김영사 출판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The Story of More : How We got to Climate Change and Where to Go from Here> 중에서 에필로그.

전작인 <랩 걸>을 통해서 지구와 자연의 생태계에 대한 관찰과 애정의 깊은 안목을 보여줬던 호프 자런이 기후변화를 본격적인 주제로 삼아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를 통해서 인간으로 인한 지구변화와 이로 인해 위기에 처한 인간의 삶을 살피고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실천방안을 모색한다.

호프 자런은 크게 생명, 식량, 에너지, 지구라는 범주와 부록으로 실천방안을 제시하는데 이는 포괄적이고도 근본적인 시선이기도 하다. 그녀가 지닌 강점이기도 하겠지만 이 책에서 드러나는 장점은 관찰과 통찰을 바탕으로 한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전개이다.

자런은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의 생태계가 어떤 변화와 현실에 마주하고 있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보태어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석유, 석탄, 천연가스를 비롯한 화석연료의 현황과 원자력에너지와 풍력과 태양열 등의 재생에너지 등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고 어떻게 흘러가는 지를 설명한다. 또한 곡식을 기르고 가축을 키우고 물고기를 잡는 것이 대량 도축시설과 양식으로 변하면서 먹이사슬의 생태계를 어떻게 변질시키는 지를 조용히 고발한다. 현대 기술산업문명을 돌아가기 위해 쓰이는 에너지가 지구의 선진국이라고 불리우는 특정 지역과 거대도시에 얼마나 집중되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들의 시스템이 지구에게는 이산화탄소로 대표되는 온실가스의 증가로 인해 빙하가 녹아내리고 바다수위가 높아지며 온갖 천재지변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인류가 수십년이내라도 버틸 수 없음을 경고한다.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자런은 부록에서 나의 가치관을 살피고 정보를 모으고 실천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투자할 수 있는 분야를 찾고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설파한다.

자런의 강점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생명, 식량, 에너지, 지구에 대한 포괄적인 탐구와 이를 통찰하며 우리가 각자 있는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개선법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이는 기능주의적인 면에 집중하느라 지구와 생태계라는 전체 그림을 미처 못 보거나 기술적으로 치우쳐 일반 시민들이 이해하고 접근하게 어렵게 만드는 적지 않은 자료들 사이에서 빛을 발한다. 그녀는 특정 계층의, 특정 지식인들을 위한 것이 아닌 지구의 시민들이라면 모두가 정독만 하면 이해할 수준의 내용으로, 그렇지만 뚜렷한 근거와 과학적 합리성으로 독자를 이끌어 간다. 이 책의 어떤 정보는 누구에겐 너무나 기본적인 내용일 테지만 누구에겐 새로운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들의 기본성은 근본성과 연결되고 다양성의 전개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쉬움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자런이 다루는 책의 범주는 포괄적이되 시민과 소비자의 주관으로 본 시선에 가깝다. 즉 지금의 지구생태계를 이렇게 만든 주요원인이자 주범으로 봐도 손색없을 산업기술계를 활용한 거대기업과 국가 혹은 정치계의 연합이라는 구도를 빼놓고 지구생태위기를 논하기는 힘들다. 정치라는 권력과 경제라는 욕망의 무한질주로 인한 과정과 결과가 현 지구의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프 자런은 자연스럽고 솔직하며 자신의 주된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얘기를 전개하는 모범의 지식활동가이다. ‘시민과 소비자’의 시선에서 보는 방안과 개선과는 별개로 ‘권력자와 생산자’의 시선에서 보는, 말하자면 정치경제학적 시선의 관찰과 개선은 또다른 지식인과 실천가의 몫일 것이다.

정치라는 권력과 경제라는 욕망은 아무리 선의의 모토로 출발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행될수록 실패하지 않는 한 확장의 성질을 쉽게 멈추지 않는다. 가진 자가 앞장 서서 개선을 위한 실천을 하면 더 없이 효과가 크겠지만 그것을 도덕적 당위로만 호소하는 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적어도 호프 자런이 이 책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최소한 이해하고 이 책을 넘어서는 정보를 자신에게 맞게 더 탐색하고 실천방안을 찾는 현명한 시민, 생태계를 생각하는 가치있는 소비자가 점점 증가한다면 이 수요를 공급하는 권력과 생산자는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치 소비의 확대는 생산자를 변화시키거나 생산자를 바꿀 수 있다. 공정무역 시장은 가치있는 소비자와 생산자가 만나는 바람직한 한 예이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재생용품 하나를 고르더라도 그 제품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가 만들었는지를 알면 알수록 기업과 생산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기후생태계의 커다란 위기 앞에서 현명한 시민이 할 수 있는 것들은 자신의 분수에 어울리게(!) 크고 작은 것은 있을 지언정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호프 자런은 일찍이 레이첼 카슨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조화로운 세상에서 지속가능한 삶을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리기 위해서 무엇을 알아야 할지 그리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제대로 알려주는 이 시대의 계몽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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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철학 - 모든 위대한 가르침의 핵심
올더스 헉슬리 지음, 조옥경 옮김, 오강남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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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멋진 신세계]를 읽으며 올더스 헉슬리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강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이번에 그의 필생의 역작이라고 불러도 좋을 [영원의 철학]을 구해보게 되었다. 이 책의 원저는 ‘The Perennial Philosophy’인데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은 1945년이다. 이 책은 크게 두가지 면에서 놀라움을 주는데 그것은 참나를 찾고자 하는, 즉 영성의 본질을 직접 추구하는 동서양 현인들에게서 혹은 경전에서 기독교냐 아니냐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지혜의 글들을 모아놓았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70년이 지나가는 이제서야 뒤늦게 한국어판이 나왔다는 점이다.


비단 기존 종교내에서뿐만이 아니라 신앙이나 수행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혹은 삶의 본질, 나의 본성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영성은 핵심적인 단어이자 공부의 주제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그 영성의 본질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지식이나 현학적 자료로만 이야기하는 이들에게서 글을 가져오지 않고 성인들의 경전이나 직접 수행 등을 통해 영성의 핵심을 근원적으로 접근하는 이들에게서 글을 가져온다. 참나를 걷는 이들의 방법과 가치는 지역과 역사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것의 핵심은 놀라울 정도로 공통점을 보여준다.


올더스 헉슬리는 [영원의 철학]을 통해서 서구의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등을 포함)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에서 이들 종교의 가르침이 사제나 신앙인들을 통해서 그 영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수되어 온 도그마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다. 또한 한 종교만이 한 사회에서 지배적인 가치가 되었을 때, 특히 그것을 타지에 폭력적으로 적용했을 경우의 ‘신학적 제국주의’를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누구보다 서구에서의 제도종교에 대한 역사적 진행으로 발생하는 매너리즘과 위험한 도그마에 대한 각성의 자료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동양은 특히 한국은 기존의 유불선에 기독교가 유입되며 다양한 형태로 번창하고 있는 상태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이 책은 낯설기 보다는 영성을 어떤 식으로든 본질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공감을 많이 가져올 것 같다.


올더스 헉슬리는 [영원의 철학]을 통한 지혜로운 구절의 출처가 종교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는다. 또한 기독교냐 불교냐 무교를 따지지도 않는다. 다만 그 구절들이 현학적 지식의 나열이나 주변만 도는 것이 아니라 핵심에 접근했는지 혹은 영성의 본질에 합일했는지만 중점을 둔다. 이런 책은 이런 길을 본격적으로 걷는 이들에게 굳이 필요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이 현상들의 너머 핵심이 무엇인지를 다양한 현인들과 경전들의 구절을 통해서 접근해 갈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믿음이 허례허식과 도그마의 굴레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보게 해준다. 더하여 스스로 신앙이나 종교가 없어도 양심의 본성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내면의 빛을 좀더 쉽게 접근하는 이정표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영원의 철학]은 자신이 현재 서 있는 내면적 위치(!)의 가늠자로 삼기에 충분하다.


이 우주에 진리-그것이 과학을 통해서 접근하든 종교를 통해서 접근하든 아니면 직접 체험을 통해서 접근하든-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어디에는 적용이 되고 어디에는 안 되겠는가? 그러나 그 진리의 아름다움은 외형적으로는 백합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장미로 나타나기도 한다. 문제는 그 아름다움 이면의 본질을 헤아려보는 지혜의 눈을 뜨는 것이다. 이 지혜의 눈을 뜨는 시도를 게을리하게 되면 본질과 작용의 우선순위가 정리되지 않고 핵심적 주제와 주변적 언술들이 뒤섞여버리는 지식의 잡화상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시대는 많은 부분에서 그렇지만 지식에서도 풍요속의 빈곤 속에 있다. 거대한 서점과 도서관들, 인터넷의 자료들속에서 어떤 것이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진리로 가는 것일까. 기본적인 자세중의 하나는 지극히 상식적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내안의 양심(혹은 영성)의 가치를 믿고 그 선택을 존중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는 임마누엘 칸트가 얘기했던 것처럼 밤하늘의 빛나는 별(외부적 진리근거)을 보는 동시에 내면의 도덕률(내부적 진리근거,양심)을 견지하면서 자신의 참나를 추구한다면 약간은 돌아가거나 시간은 걸릴지언정 결국 그는 가는 길로, 가야만 하는 길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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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광물로 죽어서 식물이 되었네.

식물로 죽어서 동물로 태어났고,

동물로 죽어서 인간으로 태어났네.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죽어서 더 나빠진 때가 있었던가?

한번 더 인간으로 죽어서 축복받은 천사로 높이 솟으리.

그러나 천사조차도 지나가야만 하리라.

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사라지기에.

천사의 영혼조차 희생했을 때,한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 되리니.

오, 내가 존재하지 않기를! 

비존재로 선언하나니,

"그분에게로 우리는 돌아가리라"


- 잘랄루딘 루미 /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 p.357 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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