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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질문하는 법 - 스스로 묻고 해결하는 사람으로 키우기 위하여 ㅣ 땅콩문고 시리즈
윌리엄 고드윈 지음, 박민정 옮김 / 유유 / 2020년 9월
평점 :
‘다섯 살에서 스물 살까지는 아주 정연하고 능동적이며 학습 준비를 위한 생각의 체계를 잡는 것이 배움의 진정한 목표라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아동교육에서 특정 교과나 지식을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 윌리엄 고드윈 지음, 박민정 옮김, 유유 출판사 <질문하는 법 : 스스로 묻고 해결하는 사람으로 키우기 위하여> 중에서, p.21.
다른 나라의 교육학자가 보더라도 한국은 교육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나라의 하나로 꼽힐 것 같다. 버락 오바마가 언급하기도 했고 특히 아시아 주변국가들이 종종 한국의 뛰어난 교육열을 배워야 한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더 자세히 한국을 들여다보면 더욱 놀랄지도 모른다. 교육을 향한 에너지는 하늘을 찌르는데 교육을 향한 가치의 방향은 아직까지도 20세기의 산업화 시대의 땅에 바짝 엎드린 채 공고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을 향한 에너지의 상한점과 가치와 방향의 하한점이라는 이러한 불균형성은 극과 극의 체험과도 같이 놀랍다. 언론의 자유지수가 최고점인데 반해 언론의 품질지수가 최저점이라는 것과 비견될지도 모르겠다. 이 불균형성을 해소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점을 먼저 돌아봐야 할까.
<프랑켄슈타인>을 저술한 메리 셸리의 아버지이기도 한 윌리엄 고드윈은 1797년에 교육에 관한 저술로 <질문하는 자 The Enquirer: Reflections on Education, Manners and Literature>을 저술했다. 이 책은 얼마전 유유 출판사에서 박민정 씨의 번역으로 <질문하는 법>으로 발간되었다. 이 책이 최초로 나왔던 19세기초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영국 산업혁명의 한 가운데 시절이라고 볼 수 있다. 증기기관을 기반으로 한 섬유산업 등의 기계화와 공장 등의 폭발적 증가는 당시의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것을 바꾸는 시기였다. 이로 인한 급격한 변화는 새로운 경제기회를 만들기도 했었을 것이나 대내적으로는 지주자본가와 노동자의 급격한 계급형성과 맞물려 여러 문제점들을 낳았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와 식민지개척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과학기술산업의 빛에 못지 않게 그늘도 컸다는 것은 정치경제적으로는 칼 맑스의 <자본론>에서 확인할 수도 있고 문학에서는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지금 봐도 심금을 울리는 내용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 윌리엄 고드윈의 <질문하는 법>이 주장하는 내용은 지금 봐도 주목할 만 하다. 더군다나 얼마전까지 산업화의 한 시기를 거쳐왔고 아직 그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문화가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한국의 환경에서 200년도 더 지난 그 시대와 다르다고 단정할 수 없는 공통점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고드윈은 이 책을 통해 어릴 때의 학습은 어떤 지식을 바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체계를 잡기 위한 것이 중요한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한 인간의 재능이 타고난다고 하더라도 다른 평범한 아이들이 주도적인 학습법을 익힐 수 있도록 장기간의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다양한 독서 취미와 고전을 통한 지식과 인격함양의 틀을 갖추고 이를 부모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내용도 빠트리지 않는다. 또한 고드윈이 보기에 이를 위해서는 어른 혹은 부모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교육비만 대주는 부모가 아니라 무엇을 하라고 강제하지 않고, 아이들은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교묘한 거짓말로 아이를 훈육하거나 달래지 않고 솔직함과 관심으로 지켜볼 것을 제시한다. 고드윈이 보기에 어린 시절의 자신을 포함해서 그 당시의 많은 아이들은 자기 주체권과 선택권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는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았을 아이들을 걱정하고 심려했다. 심지어 노예들은 자신들의 노동시간이 끝나면 자기만의 시간이라도 가지지만 아이들은 24시간 부모의 감시속에 산 것과 다르지 않다고 봤다. 이 점은 아침에 – 어쩌면 아버지보다 더 일찍 – 일어나서 학교에 등교하고 하교하자마자 여러 학원을 돌아다니고 귀가조차도 아버지보다 더 늦게 하는 강남교육특구(!)에 사는 현재 한국아이들의 현실과 비교했을 때 완전히 그때와 다르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200년전 영국의 그때와 지금의 한국의 공통점이라면 영국이 먼저 산업시대를 지나왔었고 한국은 그 이후를 빠르게 쫓아갔다는 점이고 차이점이라면 아직도 한국은 산업화시대의 관습을 놓치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에 대한 장기간의 고려없이,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자연과 함께 하며 생명과 사랑의 마음을 자연스레 배양할 시간없이, 가족의 유산을 공고히 하기 위해 혹은 부모의 선호직업을 강제하기 위해 주어진 대로 수동적으로 그야말로 잠자는 것 빼고는 집과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쳇바퀴같은 삶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고드윈이 21세기의 한국으로 내려왔다면 자신이 그 옛날에 주장했던 교육철학이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는 점에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한국의 지식암기 위주, 주입식 위주의 교육관습을 창의성과 주도적인 교육관습으로 바꾸기 위한 최선 중의 하나는 제일 위에 인용했던 고드윈의 글이 좋은 참조가 될 듯 하다. 아이가 스스로 선택권을 가질 수 있는 독립적인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생각의 체계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환경이 최선의 하나이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스스로 멀 좋아하는지 어디에 장점이 있는지도 제대로 모른채 많은 지식들을 강제적으로 기계적으로 배운 존재들은 일찍 천재소리는 들을지 모르나 일찍 시들어 버리는 범재의 운명에도 가까이 놓여 있다.
윌리엄 고드윈이 책의 제목을 <질문하는 법 The Enquirer:원제는 질문하는 자>로 잡은 것 자체도 훌륭한 것이지만 책의 첫 구절에서 ‘교육이 추구하는 진정한 목표가 행복’이라고 언급한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만한 이유가 된다. 또한 산업혁명 당시의 와중에 국가나 사회가 요구했던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을 설파했다는 점은 여전히 인상적인 점이다. 그가 토픽을 삼았던 생각하는 법, 미덕과 재능의 상관관계, 고전의 중요성, 어린 시절의 성격 형성등에 대한 언술은 지금 돌아보면 평이하거나 도덕교과서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분야도 그러하지만 교육은 특히 나무와 가지보다 숲을 바라보며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육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수많은 기술적이고 기능주의적인 면들의 유혹과 함정에 갇히지 말고 넓게 봐야 하는 지혜가 더 요구된다. 한국의 현재는 지식의 과잉과 지혜의 결여라는 불균형의 지점에 딱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고드윈이 두껍지 않은 분량의 책에서 제시한 토픽들이 교육의 개선을 위한 모든 것도 아니고 완전한 본질인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여전히 좋은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사실상 우리는 많은 지식을 담고 있어도 그 지식을 심신으로 체화시키거나 삶의 자세로 이전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고드윈이 제시한 토픽은 삶의 자세로 소화시켜도 좋을 덕목들에 해당하는 요소들에 들어간다.
고대시절부터 공부와 교육에 대해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은 여러 선각자들이 제시하곤 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부터 시작하여 몬테소리라든가 발도로프 교육법이라든가 존 듀이의 교육론 등과 함께 넓게는 칼 로저스의 인간중심 심리학을 포함한 가치들도 이 범주에 들 것이다. 문제는 이것들에 대해 적용을 했더라도 – 한국에서는 아직 본질적 적용조차도 드문 일이지만 - 근본철학에 대한 인식의 개선이 없이 피상적이거나 기능주의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는지 성찰해 볼 때이다. 아마도 가장 시급한 것, 중대한 것은 무엇인지 교육적 우선순위를 잡아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여러 깨어있는 시민들의 제안이 생겨나고 있고 좋은 제안들이 점점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산업화 세대의 잔영이 짙게 남은 기성세대들은 스스로가 이에 대해 먼저 성찰하고 배울 필요가 있다. 이런 의식들이 깨이고 깨어서 그 가치들이 더욱 모여 사회적 합의를 위한 공론의 장까지 펼쳐지기를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