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 (무선)
이브 헤롤드 지음, 강병철 옮김 / 꿈꿀자유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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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성을 지킬 수 있을까요? 기적같은 기술의 혜택을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세상에서 살게 될까요? 우리 후손들은 기술에 의해 해방된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요? 아니면 결국 우리를 더 건강하고, 더 똑똑하고, 더 젊고, 더 오래 살게 해주는 기계와 장치들에 봉사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까요?’

- 이브 헤롤드 지음, 강병철 옮김, 꿈꿀자유 출간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 : 트랜스휴머니즘의 현재와 미래 Beyond Human>중에서, p.22.

때로는 대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경우가 많다. 왜 아니겠는가. 세상과 삶은 계속 변하고 있고 우주는 팽창하고 있으며 지금처럼 질병과 기후재난이 겹쳐지는 시기에는 더욱 앞일을 예측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오늘을 사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절대적 해답을 얻음으로써 두려움에서 벗어나 지극히 안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함이 아니라, 절대적 해답을 찾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근접하는 해결점을 모색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의 의식을 그만큼 진화시키고 문명개선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브 헤롤드의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에 대한 간략소감을 말하자면 위와 같은 질문과 화두를 던지는 저자의 넓은 안목과 통찰이 인상적이다. 위에 인용한 구절들은 인간의 심신능력이 정상보다 모자라든 그렇지 않든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트랜스휴먼의 시대로 접어든 시대에 저자가 던지는 일반적이지만 근본적이고 근본적이지만 일상적으로 다가올 질문의 제기이기도 하고 현실과 미래이기도 하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세기가 지날수록 늘어난 것에는 의료기술에 힘있은 바 클 것이다. 한때 60세 이상만 살아도 장수한다고 인식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쉽게 100세 시대를 입버릇처럼 혹은 쉽게 이룰 희망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노년이 될수록 온갖 만성질환을 지닌 채 100세 이상을 살고 싶은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현대의료기술은 장수시대에 걸맞게 신체부위의 각종 질환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고 연명하는 것을 뛰어넘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치료’까지는 ‘휴먼’의 영역이었을 테지만 정상신체 혹은 평균을 뛰어넘는 ‘인간강화’와 100세를 넘어 200세, 300세를 바라보는 ‘트랜스휴먼’의 시대가 이미 시작되고 있으며 그것의 실제적 구현이 수십년내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측은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브 헤롤드는 이 책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인공장기, 나노기술, 생명공학 등에 의한 신체향상과 수명연장을 위한 의료기술의 현황을 살펴보고 이에 따르는 온갖 사회적, 윤리적, 법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문제까지 살펴보고 있다. 인공지능과 4차산업혁명 등등으로 불리우는 여러 희망찬 미래를 노래하는 책들은 많지만 저자는 넓은 시선에서 기술(Technology)과 동등할 정도의 분량으로 윤리(Ethics)를 얘기한다.

첫째 예로 든 것이 30살로 보이지만 250세로 여전히 살고 있는, 미래의 빅터 이야기이다. 빅터는 60대에 심장병을 심하게 앓았지만 인공심장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당뇨병에도 걸렸지만 인공췌장을 통해 완치되었다. 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지만 인공 팔을 부착함으로써 이전보다 더 센 팔을 지니게 되었다. 한쪽 눈의 콘택트렌즈를 통해 주변 환경의 정보를 전송받는다. 뇌 속에 신경을 이식받아 이 기술을 통해 기억을 확장하고 지식을 무선으로 다운로드받는다. 이미 250세이지만 빅터는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수십억개의 나노로봇이 몸속 구석구석을 다니며 질병이나 노화로 손상된 세포를 수리하고, DNA 복제오류를 복구하며, 암세포는 눈에 띄는 즉시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빅터는 젊었던 시절 아내였던 일레인과 함께 인공적인 생의학기술을 거부하고 살만큼 살다가 자연스럽게 죽기를 바랬다. 그러나 60대의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인해 위기를 겪은 즈음에 둘째 손주가 곧 태어난다는 소식을 듣고는 손주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인공심장을 이식받는다. 그러면서 하나가 풀리면 다른 것이 풀리듯이 오래되고 고장난 장기(?)들을 하나씩 교체하면서 그는 또다른 삶을 얻기 시작한다.

이런 상상 속의 예를 들면서 저자는 수명이 장기화되어 이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고 삶을 마감하고 싶다고 할 때 그 수명을 결정하는 주체 혹은 합의의 절차가 어때야 하는지를 묻는다. 트랜스휴먼의 존재가 그만 살고 싶다는 것은 인공장기를 비활성화시킨다는 것(지금도 비슷한 사례가 많지만)을 의미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는 살인과도 같은 것이므로 의료진들이 앞장서서 그 일을 할리는 만무하다. 완전한 트랜스휴먼의 시대에는 죽는 일 자체가 엄청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한 일반적인 절차의 흐름도는 있지만 이를 환자, 가족, 의료진들이 모두 합의할 거라는 보장도 없다. 책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이미 미래가 아닌 현실에서 안락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1990년대 미국의 테리 스키아보(Terri Schiavo)가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영양공급튜브를 공급하느냐 마느냐 즉, 그를 더 살리느냐 마느냐를 두고 가족, 병원, 사회, 사법부 등 국가 전체가 관심을 가지면서 떠들썩한 과정을 겪은 바 있다.

그때에 비해 시간도 많이 지났고 인공지능 기술(AI Technology)은 사방에서 들리지만 인공지능 윤리학(AI Ethics)는 뒤따라가기 바쁘다. 생명공학 기술(Bio Technology)은 질주하고 있지만 생명공학 윤리(Bio Ethics)는 사회적 합의는 커녕 의제조차 세우지 못한 지경이다. 물론 이는 환경과 문화에 더해 국가마다 다를 것이다. 저자는 트랜스휴먼 테크놀로지(Transhuman Technology)에 걸맞는 트랜스휴먼 윤리(Transhuman Ethics)에 대한 전반적인 의제와 합의를 이룰 제안을 하고 있다.

트랜스휴먼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이들은 생명보수주의(Body-Conservatism)라고 불리우는, 종교영역과 전통윤리에 강하게 머물러 있는 이들일 것이다. 이 근거의 논리는 자연적으로 부여받은 신체의 능력을 인공적으로 바꾸는 것은 자연의 섭리, 신의 뜻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의 능력에 도전한다는, 아주 예전부터 있어온 과학기술 발전에 반감을 보이는 경향과도 공유한다. 그러나 이는 체내에 직접 인공장기를 이식하지 않았을 뿐 이전부터 있어온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해 수명이 연장되어 온 인간의 노력이 인공적인 발전과 다르지 않다는 현실적인 점에서 모순된 의견일 것이다. 현재 인공장기의 발전은 체외에서 부품의 역할을 하며 점차 체내이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데 이는 비유하자면 안경이 콘택트렌즈로 신체와 점점 더 가까워지거나 일체가 되는 발전의 단계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설령 인공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 하더라도 그것을 명확히 구분할 단계는 넘어 섰다. 발전은 막을 수 없다. 오히려 이 발전이 어떻게 인간적으로 쓰일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더 생산적인 시대이다.

한때 케이블채널에서 방영하던 <렛미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사고 혹은 선천적 장애로 얼굴이나 신체 등이 기형에 가까워서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는데 의료기술의 힘입어 일상생활이 가능함은 물론 어떤 점에서는 미인이라고 할 정도로 새로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보자면 치료는 신체를 평균으로 잡아주는 것이지만 인간강화는 성형과도 관련이 깊다. 사고로 다친 코를 고치는 것은 ‘치료’이지만 멀쩡한 코를 세우는 것은 일종의 ‘인간강화’이다. 미국의 메이저리그 야구에서는 한때 최고의 홈런타자라고 불리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배리 본즈 선수가 금지복용 약물로 근육강화를 한 점을 들어 그 명성이 추락한 적 있다. 그를 포함한 적지 않은 선수들이 약물을 복용하지 않고도 충분히 명성을 떨칠 수 있었음에도 더 나아지고 싶은 욕망은 끝이 없다. 어느 조건에서 어떤 규칙을 지켜야 하는 지는 트랜스휴먼의 시대의 윤리학을 새로 정립하는 것과도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브 헤롤드는 ‘치료’에서 ‘인간강화’로 가는 단계가 많은 이들에게 의혹과 논란을 줄 것이라는 점을 언급한다. 이를테면 시력이 나빠진 이에게 2.0 이내의 정상시력으로 치료하는 것을 넘어 ‘600만불의 사나이’처럼 5.0 심지어는 10.0의 시력을 부여한다면 어떻겠는가. 혹은 쇠퇴해진 청력을 회복해주는 수준을 넘어 ‘소머즈’처럼 초능력에 가까운 청력을 부여한다면 어떻겠는가. 대부분의 이들은 의료기술이 정상 혹은 평균보다 못한 심신의 능력을 정상에 가깝게 치료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을 넘어서는 것에서는 찬반이 갈리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성급한 찬반의 진영에 서기 보다는 인간의 정상 혹은 평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신체적 인간으로서의 정의(definition), 혹은 인간성(Humanity)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를 성찰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엔나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마크 코켈버그(Mark Coeckelbergh)는 2019년 12월 한국 고등과학원에서 열린 <휴머니즘을 넘어서 Beyond Humanism>라는 주제의 국제학술대회에서 <AI 윤리학 Ethics of AI>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한 바 있다. 그는 AI 테크놀로지 적용 범주를 산업(Industry), 금융(Finance), 보건의료(Health Care), 교통(Transport), 군사 프로그램(Military application), 일(Work), 가정(Home)으로 분류한 바 있다. 이 범주에는 각각 윤리적(Ethical), 법적(Legal), 사회적(Social) 문제들이 따라가고 그에 대한 의제와 절차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범주들의 영역이 다른 것들과도 상호충돌하거나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이는 이브 헤롤드가 제시한 트랜스휴먼의 윤리제기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브 헤롤드는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에서 각 장에서 인공장기, 군사문제, 뇌연구, 장수분야, 로봇 등 분야별로 트랜스휴먼의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과 그로 발생할 윤리적, 법적, 사회적 문제들을 같이 이야기했는데 마지막 9장에서는 이에 대한 종합적 정리를 시도한다. 이 책의 9장은 이브 헤롤드가 다른 학자들에게서 보기 힘든 통찰력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챕터이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트랜스휴먼의 발전을 막아서는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고 얘기한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트랜스휴먼의 기술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그렇다고 그 기술이 그대로 흘러가도록 놔두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각 장별로 이의 발전으로 인해 제기될 의문과 질문들을 반복적이라고 할 정도로 언급하는 이유는 이에 대한 사회적 공론을 더 본격화하자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기술은 분과과학에서 시작해서 융합과 통섭이 점점 중요해지는 사회로 가고 있지만 이에 따른 윤리조차도 그러하다. 모든 윤리적, 사회적, 법적, 철학적 의제의 검토는 한 테이블 위에서 올려놓고 진화시킬수록 트랜스휴먼이 지닌 양날의 칼은 선한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점은 기술과 성장에 치중한 서구문명에 비해 조화와 질서의 아름다움을 모색했던 동양문명이 오히려 이 시대에 중요한 조언자가 될 수 있다. 융합은 과학과 철학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양과 동양사이에도 이루어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약으로 시작한 의료기술은 장기를 열고 고치고 꿰매는 것을 넘어 기존의 장기를 대체하는 외부의 임시장치를 만들고 이제는 인공장기를 내부에 이식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0.001밀리미터의 나노급 소재가 몸속으로 들어가 외부와의 통신을 통해 건강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시대를 그리고 있다. 모든 장기와 신체를 인공으로 대체가능해진 후에는 최후의 보루라고 할만한 뇌연구에서 마인드 업로딩(Mind Uploading)이라고 하는, 자신의 모든 경험과 기억들을 서버에 올리고 자신을 대체할 로봇으로 전송하는, 공상과학영화에서 보았던 소재들이 아직은 머나먼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언젠가는 비슷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옛날 네안데르탈인이 군림하던 먹이사슬의 최상위 자리가 어느날 호모 사피엔스로 바뀐 것처럼 자연은 훨씬 더 업그레이드된 호모 사피엔스의 다음 인류를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시대가 더 빨리 올지는 아직 모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근본적인 성찰을 할 시점이 된 듯하다. 영혼이라고 불리우든 혹은 정신이라고 불리우든 양심의 중요성을 믿는 존재들에게는 신체가 인간의 존엄성을 담는 나만의 그릇이다. 그릇은 그릇일 뿐이므로 더 좋은 그릇을 형성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즉 그 그릇외에 다른 아무 것이 없다고 하는 이들이나 그릇을 넘는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이들에게도 인간성이라는 존엄성은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존엄성은 콘크리트처럼 변하지 않거나 절대적으로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고 자연과 함께 공동창조하는 주체이다. 그러므로 휴먼을 담는 그릇이 향상되고 진화할수록 존엄성의 중심은 잃지 말고 더 단단해져야 할 뿐만이 아니라 더 커져야 한다. 그리고 그 존엄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이는 고대 이래로 플라톤과 데카르트와 니체와 화이트헤드가 지속적으로 탐구했던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양심의 중심을 잃어버린 존재에게 느닷없이 주어진 절대반지는 타인과 세상은 물론 자기자신마저 죽이는 흉악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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