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마지막 여행
한스 위르겐 크뤼스만스키 지음, 김신비 옮김 / 말글빛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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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 모를 책이다. 책에서 좋았던 부분은 오직 들어가는 말에서의 아래의 문장들뿐이었다.

마르크스를 연구하는 사람과 그의 전기를 쓰는 작가의 대부분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보낸 마지막 몇 개월이 그의 업적을 이해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에게 낯선 곳에서의 경험은 본능적으로도, 또한 이념적으로도 너무나 새로운 것들이었다. 따라서 그 경험들은 더더욱 잘 정리되어야 한다.

그는 식민지 정치를 실제로 경험해 보았으며 외모도 바꿨다. 실제로 모든 것을 바꾸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몬테카를로에서 부르주아의 상징인 카지노에 빠지기도 했으며,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우유 섞인 브랜디를 마시면서 삼류 소설을 줄기차게 읽었다.”

 

나머지는 이상한 번역인지, 이상한 내용인지로 채워져 있다. 흥미를 잃고 대충대충 읽어서 전부를 짚어낼 순 없지만 특히 눈에 밟힌 것들을 말해보겠다.

 

25전기는 이미 넓은 구간도 소리 없이 수월하게 전송된다. 곳곳에 새로운 종류의 동력기, 발전기, 터빈이 있다. 이러한 장치들이 기계를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인다. , 호텔, 팬션 등에 전기가 흐른다. 무엇보다 전선 케이블은 대륙을 횡단하면서 가치 있는 정보들을 실어 나른다.”

마르크스가 증기 기관차 안에서 기술진보에 대한 사유를 하는 걸 표현한 문장들 중 하나인데, 그 내용이 책 안의 시간대인 1882년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에디슨이 뉴욕에서 처음 직류 공급 시스템을 선보인 게 1882년이고, 2차 산업혁명 또는 전기의 시대로 불리며 전기가 증기를 제치고 주요 에너지원이 되는 건 세기가 바뀌고 나서이다. 1882년에 전기는 아직 동력원이라기보다는 통신수단(전보)이었다.

 

35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지배계급과 상반된 계급을 가진 오래된 시민사회에 모든 것이 자유롭게 발전하는 연합이 결성된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연합하라!”

151계급과 계급 차이가 있던 구 시민사회는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인 일종의 연맹개념으로 바뀐다.”

똑같은 말을 다른 페이지에서 서로 다르게 번역한 것도 문제인데, 더 큰 문제는 번역의 질이다. 이는 정말 유명한 공산당 선언의 문장들인데, 박종철 출판사 판본과 비교해보자.

박종철출판사 번역 :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계급과 계급 대립이 있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자리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87지금 날씨가 덥긴 하지만 시로코(Scirocco, 독일 폭스바겐사의 소형 승용차)가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90마지막 며칠을 아프리카에서 보낼 때 시로코는 정말 열심히 달려 주었다. 하지만 돌풍과 모래바람, 그리고 지금은 예기치 않은 추위로 시로코가 고장 난 상태다.”

앞뒤 맥락없이 1882년에 폭스바겐 승용차를 들이 댄다. 폭스바겐이 생긴 건 1937년이다. 그리고 시로코는 사하라 사막에서 북아프리카와 남유럽으로 불어가는 세찬 열풍을 말한다. 발로 한 번역인지, 원 책의 문제인지 모르겠다.

 

105마르크스는 자신보다 4살 아래인 (아우구스트) 베벨을 특히 더 아꼈다.”

베벨은 1840년에 태어났고, 마르크스는 1818년생이다.

 

작은 판형에 재생용지로 책을 낸 게 이 책의 가장 훌륭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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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낭 브로델 - 지중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e시대의 절대사상 21
김응종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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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숨에 읽었다. 책 자체의 흡인력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굉장히 흥미로운 소재였다. ‘페르낭 브로델이라는 이름은 두 가지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 아날 학파 2세대로서 역사학의 교황으로 불린 위대한 역사학자. 다른 하나는 월러스틴 등의 세계체계론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던 사상가. 역사학자이자 거대담론의 사상가로서 브로델은 어쩌면 이 분야에서는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정거장일지도 모른다. 다만 브로델의 글을 직접 접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게 문제이다.

 

현재 국내에 그의 대표작이 둘 다 번역돼있지만, 물질문명과 자본주의6권이고,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4권이다. 이러니 자연히 쉬운 입문을 도와줄 수 있는 책을 찾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꾀의 결론은 현재까지도, 아쉽지만도 단연코 이 책인 것 같다. 아쉬운 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2006년 이후로 국내 역사학계에 의해 대중적인 브로델 연구서가 나오지 않고 있다. 브로델이 현재적 가치와 인기를 잃어서일까? 모를 일이지만, 세계체계론에 관한 책들이 간간히 나오고 있고, 이에 대해서 열정과 흥미를 느끼는 독자들이 작은 수로나마 있어 보이는 것에 비해 브로델에 대한 비교적 손쉬운 독서의 길이 매우 한정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책은 브로델의 두 주요 저서를 소개하며, 그의 주요 개념체계에 대해서 이해시켜준다. 지중해편에서는 구조-콩종튀르-사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편에서는 물질문명-시장경제-자본주의에 대해 설명한다. 브로델은 변하는 것들 중에서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주목하는데, 이를 장기지속이라는 맥락 속에서 구조물질문명으로 개념화한 것 같다. 물론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영원불멸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지속된다는 건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뜻이라는 듯 브로델의 장기지속은 긴 시간대 속에서 변하지 않으면서 변하는 존재이다.

 

브로델은 구조와 물질문명이라는 토대 바로 위에 콩종튀르와 시장경제의 개념을 짓는다. 이 구조물이 브로델의 독창성과 고유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 같다. 콩종튀르와 시장경제는 샌드위치 사이에 낀 햄 같은 것들인데, 햄을 감싸는 양 쪽의 빵이 헐거워진다면 바닥으로 흘러버리고 마듯이, 구조와 사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라는 양 극단이 그 중간과 사이의 의미를 규정해주는 것 같다.

 

구조가 장기간 지속되는 것에 비해 사건에 대해서는 브로델은 먼지와 같다고 했다. 움직이지 않는 책상 위에는 먼지만 잔뜩 내려앉아 있을 것이다. 책상 위의 먼지가 우리의 시야를 가릴 정도로 자욱해지기 위해서는 책상이 크게 흔들려야 한다. 이 흔들림이 바로 콩종튀르이다. 콩종튀르에 의해 구조는 좌우로 크게 흔들리고, 수많은 사건들을 역사에 풀어놓는다. 그러나 흔들림이 멈추고 나면 먼지는 다시 가라앉는다.

 

브로델이 이후의 자본주의 비판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는 자본주의 개념은 역시 장기지속과 반대되는 단기간의 변화를 특징으로 한다. 자본은 최대의 이윤을 쫓아 상업과 산업, 금융의 형태로 빠르게 변신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최대의 이윤을 보장하는 건 독점이며, 경쟁은 독점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의 본질은 독점과 다름 없다. 결국 자본의 변신이란 자신이 독점을 유지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고, 스스로 구조화해내는 공간 자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주 같은 쉬이 변하지 않는 물질문명과 이윤을 쫓아 빠르게 변신하는 자본주의 사이의 시장경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물질문명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상품과 노동의 교환의 영역이며, 자본에게는 이익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상품과 화폐와 부의 흐름이다. 자본은 시장경제 속의 부의 흐름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변형하며 자신을 살찌운다. 시장은 문명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도, 자본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서도 필요한 곳이며, 콩종튀르와 마찬가지로 시장경제의 흔들림은 자신에게 연결된 길고도 짧은 것들을 거센 역사의 풍랑으로 내몬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가장 놀라웠던 구절에 대해 말하겠다. 저자는 무려 들어가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페르낭 브로델의 이름이 (서울대학생을 위한 권장도서 100선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반가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반가웠던 이유는 역사가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고, 씁쓸했던 이유는 과연 이 역사사가 이렇게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위대한 역사가인가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브로델의 역사는 그의 신화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른바 브로델 거품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기회 나는대로 브로델의 한계에 대해서 언급하다. 브로델의 신화에 이끌려 책을 들었겠지만 그 신화를 내려놓으라고 말하다니... 정말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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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는 왜 불평등을 낳았나 -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자본주의의 진실
미즈노 가즈오 지음, 이용택 옮김 / 더난출판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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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상가들을 언급하며 나름대로 자기주장을 이끌어가지만, 떠오르는 말은 ˝주화입마˝와 ˝아무렇게나 논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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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기원 - 석기 시대로부터 알렉산더 대왕의 시대까지
아더 훼릴 지음, 이춘근 옮김 / 북앤피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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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로부터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까지 다루고 있는 전쟁의 기원은 도발적인 결론으로 끝을 낸다. 나폴레옹과 웰링턴이 겨룬 워털루 전투에서 만약 알렉산더가 프랑스군을 지휘했더라면 승리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알렉산더가 이끈 마케도니아군이 영국군과 겨뤘더라도 이겼을 것이라는 예상 못한 결론까지 이른다.

 

이는 흥미로운 논쟁거리이기도 하지만, 책의 핵심적인 주장을 함축한다. 알렉산더의 정복활동이 이뤄줬던 B.C.334~326년으로부터 워털루 전투가 치러진 1815년까지 전쟁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화약과 총포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쟁의 본질이라는 말은 애매하게 들릴 수 있겠다. 먼저 마케도니아군이 웰링턴의 영국군을 제압할 수 있다는 근거는 총과 대포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전장에 투사할 수 있는 중장거리 화력에 결정적인 차이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게 하나이다. 자동소총과 기관총이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기 이전까지는 투석기와 활, 돌팔매질도 1800년대의 총포에 뒤처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저자가 말하는 전쟁의 본질이란 이러한 무기체계의 느린 발전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건 무력을 조직하고 활용하는 전쟁의 기술이 알렉산더 대왕에게서 완성되었고, 대왕에게서 완성된 전쟁의 기술이 19세기의 전장에서까지도 승리를 향한 최상의 원칙으로 군림했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바로 통합군을 운용한 모루와 망치 전술이다. 마케도니아군에게서 적을 고착시키는 모루는 팔랑크스였고, 깨부수는 망치는 기병이었다. 모루와 망치의 형태는 전장마다 달라질 수 있지만 그 본질은 경보병, 중보병, 기병 등의 다양한 군종의 유기적인 운용이고, 각 군종에 적합한 역할을 부여하며, 적절한 순간에 필요한 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기적인 통합군의 탄생은 알렉산더의 천재성 덕분만은 아니다. 알렉산더에게서 완성되었지만 통합군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에서 굉장히 오랜 시간을 거치며 발전해온 군사적 전통의 산물이었다. 바로 이게 전쟁의 기원에 대한 책의 진정한 주제이다.

 

우리는 마케도니아군이 순전히 그리스 중장갑보병에게서 발전해온 것이라는 편견을 가질 수 있는데, 저자는 전쟁에 대한 선사시대의 흔적들로부터 이집트,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의 오랜 역사 속의 군대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이러한 편견을 논파한다. 전쟁기술 역시 어느 다른 사회제도와 문화처럼 여러 발생원들로부터 퍼져 나와 서로 섞이며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을 해온 것이다.

 

다만 전쟁기술은 전장에서의 그 우열의 결과가 너무나 명확하여 패배하면 죽음뿐- 가장 우수한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통합군의 전통은 그리스에서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의 알렉산더의 불패로 그 뛰어난 우수성을 증명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승리에 이르는 최상의 방법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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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본론 - 20대 딸에게 들려주는 경제이야기
야니스 바루파키스 지음, 정재윤 옮김 / 내인생의책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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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시리자의 전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라는 인상적인 저자가 쓴 작은 자본론이라는 제목만 읽고서는 당연히 그 유명한 자본론을 소개하고 안내하는 책이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제목과 어울리지 않았다. “자본론에 없는 내용들인데?”

 

원제를 찾아보니 Talking to My Daughter About the Economy : A Brief History of Capitalism이었다. 자본론이 자본주의에 대한 책이니 자본주의의 간결한 역사작은 자본론으로 고쳐 지은 게 크게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원제 그대로 썼다면 더 적합했을 것 같다. 자본론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해부하기 위한 두꺼운 현미경이라면 자본주의의 간결한 역사는 여러 풍경을 담고 있는 작은 사진집 같다. 시장 사회의 탄생으로부터 부채, 금융, 국가, 불황, 생태위기, 화폐 등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핵심이슈들을 그려내고 있다. 책의 각 장들은 문학에서 빌려온 비유와 쉬운 문체로 쓰여 있지만, 그 내용은 깊이 있는 논의와 이론들을 내포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핵심내용을 담고 있는 책의 구절들을 몇 가지 나누어서 보여주고 이와 관련한 논의를 풀어가겠다.

 

시장이 있는 사회와 시장 사회의 구분

 

시장 사회와 시장이 있는 사회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질문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1. 라틴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상인들은 왜 성공했을까? 또는 100년 뒤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은 극동아시아에서 왜 성공했을까?

2.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일본의 자동차 제조업체는 왜 성공했을까?

(중략) 더 간단히 말해 19세기 이전의 극동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 유럽 상인의 우월함을 설명하는 데는 경제적인 분석이 필요하지 않다. 당시에는 아직 시장의 논리로 움직이는 경제가 없었고, 그저 시장이 있는 경제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300년 전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순전히 시장 사회라는 것이 문제가 되고, 결과적으로 이 사회는 오로지 경제적 개념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p44~6

 

봉건 지주가 영지의 주민을 미련 없이 거리로 내몰고 그 자리를 양 떼로 채운 순간, 대영제국은 시장이 있는 사회에서 시장 사회로 변했다. ? 먼저, 예속 농민의 추방은 노동력을 상품으로 바꾸고 토지까지도 상품으로 바꾸었다.” -p49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다. 시장이 있다고 해서 그 사회가 시장 사회인 것은 아니다. 시장 사회로 규정하는 요인은 노동력과 토지의 상품화이다. 시장이 있을 뿐인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경제주체들은 아직 경제적 압력에 의해 생존이 결정되지 않는다. 즉 다른 이들보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농민도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소출만 올릴 수 있다면 계속 농민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토지와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들의 거래와 대부가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다른 이들만큼 수익을 낼 수 없는 기업가는 자신의 사업을 잃을 것이다. 또한 노동자는 고용주가 요구하는 기술과 근면을 보여주지 못하면 직장을 잃을 것이다. 이처럼 경제주체가 스스로를 유지하는데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경쟁에서 낙오되면 퇴출되는 사회가 바로 시장 사회(다른 말로 자본주의)이다. 그리고 시장이 있는 사회에서 시장 사회로의 이행은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 및 각각의 상품화가 결정적이었다.

 

이러한 설명은 사실 오랜 논쟁을 바탕으로 한다. 바로 2차례에 걸쳐 벌여졌던 자본주의 이행 논쟁인데, 저자의 주장은 2차 논쟁에서의 브레너 이론에 근거하는 것 같다. 1974년에 발표한 ()산업시대 유럽의 농업계급구조와 경제발전에서 로버트 브레너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과 관련한 인구 모델상업화 모델에 대해 강력한 논박을 전개했다. 사실 브레너는 인구 모델에 대한 공격에 더 많은 내용을 할애하지만, 우리의 관심에서는 상업화 모델에 대한 비판이 중요하다. ‘상업화 모델이란 시장 사회로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흔한 설명틀을 말하는데, 교역과 상업, 도시의 성장이 자본주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주장이다.

 

브레너가 보았을 때 이러한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유럽에서 일찍이 상업이 가장 발전했던 북부 이탈리아(베네치아와 피렌체, 제노바, 밀라노)와 네덜란드에서 시장 사회가 먼저 출현하지 못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이른바 대항해시대에서부터 18세기 초까지도 중국의 상업과 경제가 유럽보다도 우위에 있었다는 연구가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역들은 자본주의로의 도약에 스스로 이르지 못하고 멈추어버렸다. 대신에 네덜란드 모직물 산업의 원료(양털) 공급지에 불과했던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먼저 자신의 두 발로 일어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아이러니에 대해 브레너가 일깨워 준 게 바로 시장이 있는 사회시장 사회의 구분이다. 노동력과 토지가 상품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시장은 대부분의 생산자들에게는 이용 가능한 수단들 중의 하나 정도이며, 그들의 생존은 다른 사회적 맥락에 달려 있다. 그러나 시장 사회에서는 시장에서 나오는 경쟁압력에 적응하지 못하고서는 누구도 자신의 자리를 지켜낼 수 없다. 시장이 요구하는 최소의 생산성을 담보하지 못한 기업가는 파산하고 노동자는 실업으로 내몰린다. 성과가 낮은 생산자는 구축되고 우수한 생산자에게로 자원이 집중되며 생산단위는 대규모화되고 경제는 빠르게 발전한다.

 

이처럼 시장에 규율되는 사회로의 변화는 시장과 도시가 양적으로 팽창하는 단순한 과정의 결과로 나타난 적이 없다. 시장과 경쟁으로부터 농촌이 폐쇄적인 상태로 머무는 동안에는, 즉 과거로부터 쭉 이어저온 토지귀족과 농민 사이의 봉건적 사회관계와 관습이 토지를 배분하는 때에는 시장은 도시와 무역선만을 지배할 수 있을 뿐이었다. 대대로 농민은 가계의 토지를 경작하며 생산물로 영주와 가족을 부양하고, 얼마간의 잉여를 상인에게 팔았다. 상인에게 팔게 없어도 그는 계속 농민이었다. 영주에게 쫓겨나지 않는 한 말이다. 시장의 지배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농업계급구조가 전복되어야 했다. 농민들이 토지에서 대거 축출되고 소수의 차지농업가와 다수의 농업노동자로 분할되는 사회전복은 16세기 영국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졌다. 그리고 농촌에서 시작된 자본주의는 산업혁명으로 나아간다.

 

작은 자본론은 이러한 논의에 근거하고 있다. 이 점이 중요한 게 자본주의 이행에 대한 관점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시장의 지배가 역사를 통해 형성된 특수한 사회관계 및 계급구조를 필요로 하며, 그 과정이 얼마나 많은 민중의 희생과 피를 머금었다는 걸 인정하는지의 유무는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상이한 판단 사이를 가로지른다.

 

현대화폐이론

 

시장 사회에서 부채가 갖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부채는 현재의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미래를 가치를 동원한다. 말 그대로 마법이다.” -p76

 

많은 사람들이 은행가를 남아도는 돈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과 그 돈을 빌리려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중개인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p77

 

대신 은행가는 가치를 미래에서 가져와 현재로 건넨다. 왜냐고? 이미 존재하는 교환가치만으로는 시장 사회를 움직이게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 사회를 움직이려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가치, 즉 예금보다 훨씬 더 많은 투자액이 필요하다. (중략) 기업가는 [은행가가 현재로 건네준] 이 가치로 다시 생산을 시작하고 은행가에게 원금과 이자를 지불하는 식으로 은행가가 미래에서 훔친가치를 다시 미래로 돌려준다.” -p78

 

저자가 4장에서 부채와 은행에 대해 말하는 내용들은 언뜻 이상해 보일 수 있다. 아마도 현대화폐이론에 근거한 내용들 같다. 사실 이 서평을 쓰는 이도 현대화폐이론에 대해서 아는 게 별반 없어 이어지는 내용은 참고 정도만 하면 좋을 것 같다.

 

현대화폐이론은 최근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경제학 이론인데, 우리가 흔히 아는 경제학 상식, 즉 재정적자는 위험하다는 관념에 정면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화폐이론에 따르면 경제가 역동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정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지속적인 재정적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주류 경제학에서는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증가를 단죄하지 않는가? 남유럽 국가들의 외채위기도 무분별한 재정적자 때문에 벌어진 게 아닌가?

 

경제학 상식을 거스르는 현대화폐이론의 출발점은 중앙은행만이 발행하는 본원통화와 민간은행이 창조하는 신용화폐의 구분이다. 우리는 흔히 화폐를 중앙은행만이 발행하고,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만으로 거래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 화폐란 중앙은행에서 발행한 지폐로 한정되지 않는 훨씬 포괄적인 개념이다. 화폐는 크게 세 가지 기능으로 규정된다. 첫째, 가치 측정. 둘째, 가치 저장. 셋째, 지불수단.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화폐에는 숱한 종류가 있는데, 중앙은행권은 그 중의 하나이고, 지폐의 유통은 경제활동의 작은 일부만 차지한다.

 

그렇다면 경제활동의 대부분에서 실제로 쓰이는 화폐 형태는 무엇일까? 우리가 무엇으로 월급을 받고, 신용카드 대금을 결제하며, 대출을 갚는지 생각해보자. 바로 은행 또는 증권사 계좌의 예금 잔고이다. 일반인들이 아니어도 대다수 경제주체들은 예금의 이체로 대가를 지불하고 거래를 이어나간다.

 

이어서 고려할 점은 지불수단으로서 은행예금은 어떻게 창조되는 지이다. 은행예금의 창조에 대해서 교과서는 저축과 동일시한다. 가계와 기업이 저축한 만큼 예금이 만들어지고 은행은 이를 대출에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화폐이론에서는 이러한 설명이 현실을 오도한다고 말한다. 실제로는 저축과 예금, 대출의 차례가 아닌 반대의 과정 즉, 대출을 통해서 예금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어떻게 대출이 예금을 낳는다는 말인가?

 

은행 입장에서 대출은 채권(자산)이고, 반면에 고객 계좌의 예금은 고객이 인출을 요구하면 내주어야 할 부채이다. 그런데 고객이 대출금을 채권자인 은행에 개설한 계좌로 입금 받는다고 하자. 이러한 거래에 대해 은행에서는 회계 장부의 대변에 채권을, 차변에는 부채를 기록하는데, 이 과정에서 실물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게 핵심이다. 은행 전산 시스템에서 각각의 잔고를 변경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예금은 아무런 실체도 갖지 못하는 신기루에 불과한 건 아닌가?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신기루가 현실에서 실제적인 힘은 갖는다는 점이다. 대출을 받아 늘어난 예금 잔고로 대금 결제를 할 수도, 자산을 매입할 수도 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회계장부 상의 증액(즉 대출을 통한 예금 창조)이 동일 은행의 계좌간 이체에만 쓰인다면, 그 증액에는 한계가 없을 것이다. 은행은 전산 시스템 내의 숫자만 이리 저리 옮기면 된다. 그런데 어느 고객이 대출 받은 금액을 타 은행의 계좌로 이체하는 순간 은행이 고객에게 진 부채는 타 은행에게 지불해야 할 금액으로 바뀐다. 이때 은행 간의 자금 이체에 쓰이는 게 바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본원통화이다.

 

민간은행 간의 자금 이체는 민간은행이 중앙은행에 갖고 있는 계좌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중앙은행에 예치된 민간은행의 자금이 바로 지급준비금이다. 지급준비금이란 은행이 고객의 인출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상시적으로 보유해야 하는 현금을 의미한다. 이 준비금을 민간은행은 중앙은행 계좌의 예금 형태로 보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민간은행이 타 은행의 지불 요구에 대해 자금이 부족할 경우 다른 은행이나 중앙은행으로부터 빌려오는데, 이때 지불하는 이자율이 바로 중앙은행이 조절하는 기준금리의 표적이다. 중앙은행의 역할은 이 기준금리 내에서 민간은행에 지급준비금을 공급하거나 흡수하는 것이다.

 

중앙은행은 민간은행(그리고 정부)하고만 거래하는데 지급준비금을 공급하거나 흡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바로 국채이다. 중앙은행이 민간은행으로부터 국채를 사들이면 그 반대급부로 민간은행이 보유한 지급준비금이 늘어날 것이다. 반대로 국채를 민간은행에 파면 민간은행의 지급준비금은 줄어들 것이다.

 

이제까지 금융시스템을 간략히 묘사했는데, 이러한 설명틀을 통해 현대화폐이론이 강조하는 건 다음과 같다. 첫째, 국민경제에서 유통되는 통화의 대부분을 실제로 공급하는 건 민간은행이다. 민간은행은 가계와 기업에 예금 형태로 부채를 공급하고, 가계와 기업은 은행 예금으로 경제활동을 수행한다.

 

둘째, 주류경제학은 중앙은행이 민간은행의 지급준비율을 조절함으로써 부채 규모를 제약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지급준비금 수요가 증가함으로써 관련 금리가 치솟으면 기준금리라는 정책 목표와 금융안정을 위해 중앙은행은 자금을 내어놓지 않을 수 없다. 중앙은행의 주도성이란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다.

 

셋째, 민간은행이 대출을 늘리는 기준이란 경제성장과 고용안정, 금융안정, 복리증진 등의 국가적 목표와 거의 상관이 없고, 수익과 대출회수 가능성과 같은 영리적 목적이다. 영리추구에 매몰되어 대출이 대책 없이 과열되면 지나친 통화팽창으로 경기과열과 금융버블 등의 경제위기로 빠져들 것이다.

 

넷째, 민간은행이 통화를 공급함으로써 발생하는 이러한 부작용을 고려할 시 은행을 경유하지 않고 중앙정부가 재정적자를 통해 공공의 필요를 위해 직접 화폐를 공급하는 게 훨씬 낫다. 정부가 중앙은행에 지는 빚은 중앙은행도 결국 국가 기구의 일부라는 점에서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남유럽 외채 위기는 남유럽 국가들이 통화주권을 갖지 못하고, 유럽중앙은행이 독점 공급하는 유로화를 사용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지 재정적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작은 자본론마지막 장의 우리가 공공의 복지를 위해 집단적이고 정치적으로 화폐를 관리하지 않는다면, 힘 있는 자들은 화폐를 마구 낭비할 것이고, 위기를 확대하고 사회를 붕괴시키는 방식으로 화폐를 악용할 것이다”(218p)라는 저자의 주장은 현대화폐이론을 통해서만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노동가치론

 

기계식 시계나 컴퓨터를 보면 기계라는 것이 무척 복잡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기계에 사회나 시장 또는 시장 사회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는지는 발견할 수가 없다. 인간적인 요소가 없는 기계 장치 내부에서는 교환 가치라는 개념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p113

 

간단히 말해 교환 가치를 의미 있는 개념으로 만드는 교환 가치의 비밀은 인간이라는 요소다.” -p114

 

대기업이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고 인간의 노동력이 기계 장치처럼 기능하도록 더 잘 훈련시킬수록 우리 사회가 생산하는 제품의 가치는 더 많이 떨어지고, 기업의 이윤 또한 더욱더 적어진다.” -p118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건 마르크스의 그 유명한 노동가치론이다. 책에서 자본론과 가장 맞닿아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노동가치론은 현재 외면 받는 한 물간 이론 아닌가? 그 이유 중 하나가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명제가 우리가 자연히 갖게 되는 상식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현대 경제에서 노동은 다른 생산요소, 즉 자본재나 기술, 지식에 비해 중요성이 갈수록 감소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저자는 확고히 노동가치론을 고수한다.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단 말인가? 이해의 시작은 가치에 대한 상반된 의미를 사용가치교환가치로 구분하는 것이다. 노동이 중요성을 점점 잃어간다는 맥락에 해당하는 건 사용가치이다. 새로운 제품의 개발(사용가치의 질적 다양화)와 생산량의 증대(사용가치의 양적 증가)에 있어 노동의 역할은 확실히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새로운 설비와 기술을 접목하여 같은 노동이더라도 예전보다 훨씬 많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다면, 그 힘은 신규 투자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용가치는 상품이 우리에게 주는 유용성, 경제학에서 말하는 효용과 거의 같은 의미이다.

 

반면에 교환가치는 쉽게 말해 그 효용을 얻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하는 경제적 대가, 즉 가격이다. 우리는 대체로 이 가격이 효용에 비례한다고 생각하지만, 노동가치론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전혀 다른 원리로 움직이는 별개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두 영역 사이에는 어떤 비례적인 관계도 없다. 사용가치가 물리법칙과 우리의 감각, 욕구에 속한다면 교환가치는 지극히 사회적인 것이다.

 

사회적인 것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작은 자본론의 저자는 기계와 사회를 대비한다. 기계장치 내부에서 부분과 부분은 서로 다른 기능으로서 관계를 맺을 뿐이며 체계 속에서 자기 기능을 다하는데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반면에 시장 사회에서 분업은 시장과 가격을 매개한다. 아담 스미스의 세계에서 제빵사는 돈을 받고 팔기 위해 빵을 굽는다. 대가, 즉 교환가치의 획득이 없다면 전체를 위한 기능으로 역할 할 이유가 없다. 기계와 사회의 대비는 무엇을 사기 위해서는 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다. 여기에는 자연적인 이유가 없다. 대신에 인류의 사회 발전의 단계에서 비롯하는 이유들이 놓여있다.

 

교환가치가 발생하는 건 소유의 대상을 서로 맞바꿀 때이다. 내 것을 내어주기 위해서는 너의 것을 주어야 한다. 이는 절대적인 대명제이며, 모든 거래와 시장은 이 대명제를 전제한다. 반대로 동일한 소유권 내에서의 재화와 서비스의 교환은 어떤 교환가치도 낳지 않는다. 나의 오른손은 왼손에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에 해당하는 게 바로 기업 내에서의 자원흐름, 그리고 공공재의 공급 등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환가치가 노동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사실 노동가치론은 어느 역사적 시기, 사회조직마다 통용되는 경제법칙이 아니다. 노동가치론은 임금을 대가로 노동력을 사용하는 생산체계, 즉 자본주의 생산에서만 적용된다.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말은 교환가치의 크기는 노동시간에 비례한다는 의미도 갖는다. 노동의 길이는 자본주의 생산이 진행되는 시간과 규모를 그대로 반영한다. 노동자의 임금이 자본의 크기보다 아무리 작더라도 노동 없이는 생산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의 일정 시간 동안 원료와 연료가 사용되는 양과 가동되는 기계와 설비의 규모가 있을 텐데, 원료와 연료, 기계 및 설비 등등의 생산수단의 교환가치를 집계하여 일정 시간 동안의 노동력 가치와 비교한다면 양적 비율을 얻을 수 있다. 이 양적 비율과 한 단위의 노동력 가치, 그리고 총노동시간(인당 노동시간과 노동자 수의 곱)과 이윤율을 모두 곱해주면 생산물의 총교환가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항등식을 통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다. 노동력의 교환가치, 노동력과 생산수단 사이의 교환가치 비율이 일정하다면 노동시간이 줄어들수록 생산되는 가치도 줄어든다. 그리고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고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다면 상품 한 단위의 개별 교환가치는 작아질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변동을 추동하는 게 바로 기계화이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수록 노동시간(여기서 말하는 건 하루 동안의 법정 노동시간이 아니다)은 줄어들어 생산되는 총 교환가치도 줄어들고, 향상된 생산성에 따라 개별 교환가치도 작아진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노동력과 생산수단 사이의 교환가치 비율이 산업별, 기업별로 다르고, 이러한 차이가 평균이윤율을 향한 산업별 자본 이동을 낳아 노동시간에 따른 가치량 결정의 관계를 왜곡한다는 점에서 현실에서는 투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마치 비행하는 물체가 중력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또한 교환가치와 그 표현수단이랄 수 있는 화폐량 사이의 비율도 변화하기에 이른바 이윤율 저하의 법칙은 상당히 추상적인 수준에서 작동하는 셈이다.

 

이제까지 작은 자본론에 깔려 있는 브레너이론, 현대화폐이론, 노동력가치론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들 이론뿐만 아니라 여러 전문적인 논의들을 작은 자본론은 상당히 재치있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여기 이 글보다 작은 자본론이 더 쉽고 재밌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서평을 작성한 건 작은 자본론이 쉬운 문체 속에 오래되고 새로운 이론들의 정수를 담아내고 있음을 말하고 싶어서였다. 경제학이라는 미로를 탐사하고 싶다면 함께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책들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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