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간에는 바디우의 ‘사도 바울’을 읽었다. 화장실에서나 틈틈이 보려고 구매한 것이었는데, 읽으며 어찌나 지적 쇼크와 감동을 받았던지 잠까지 줄여가며 읽어버렸다.

그런데 ‘지적 쇼크’라는 표현은 사실 무척이나 과장된 것이다. 먼저 이해가 돼야 쇼크를 받던가 말든가 하지, 대충 글자들을 훑으며 중간중간 간혹 이해되는 구절들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끔 ‘어라, 이것 대단한데!’ 라는 생각도 하고, 이러면서 겨우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뿐이다.

그래도 다시 읽으며 중간중간 든 단상들을 꿰매어 정리해보면 어떤 진전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또 읽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중간에 포기했다. 바디우의 ‘진리’, ‘진리과정’, ‘사건’ 등의 개념을 대략이라도 파악하지 않고서는 더 읽어봐야 별로 나올 것도 없을 것 같아서였다. 바디우가 ‘사도 바울’에서 이 개념들에 대해 직접 서술해놓았으면 다른 책들을 참조해야 하는 수고는 안 들었을 것이라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일단 책장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곧장 떠올린 게 바디우의 ‘조건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 바울’ 마지막 페이지에 “이 책(‘조건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명료해서 ‘존재와 사건’을 위한 입문서로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광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전부터 ‘새물결’ 출판사의 ‘이행총서 시리즈’는 구입해두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터라 바로 구매리스트에 등록해 놓았다. 그러나 사고 싶은 물건을 곧바로 살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지 못한 터라 구매할 날만을 손꼽으며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제 문득 바디우의 ‘진리과정’이라는 개념을 혹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2’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사유 -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 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 문제이다.” -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2

여기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라는 유명한 말도 생각을 전개해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사유는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그 현실성과 힘을 증명할 수 있다. 그리고 실천을 통해서 그 현실성과 힘을 증명한 사유만이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의식 가운데서는 어떤 사유도 자신의 진리성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실천을 통한 사유의 진리성 증명을 ‘검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검증이란 실천의 의미를 단지 진리의 ‘보증자’로만 한정짓는 것이다. 즉 의식에서 생산된 어떤 사유의 잠재적인 진리성을 실제로 확인하는 것만이 실천의 역할은 아니다. 실천의 의미를 품질검사관이 확인도장을 찍는 절차 정도로 축소시키는, ‘검증’이라는 개념이 내포하는 관점은 실천이 또한 진리가 생산되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을 은폐한다. 실천은 단순히 공정을 마친 제품을 검사하는 절차가 아니다. 실천은 그 자체가 진리의 생산공정인 것이다.

이 말은 순수한 의식이 결코 진리의 생산 공간일 수 없다는 말이다. 실천 이전에 순수한 의식의 영역에서 진리를 생산하는 올바른 방법론이란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하다. 진리가 생산되는 곳은 의식과 물질이 상호교통하는 실천이라는 장소이다.

이 말의 의미는 사실 무척이나 까다롭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사유의 현실성을 믿고서 행동한다. 그러나 사유의 현실성은 오히려 실천이라는 계기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알고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행동하고서야 알게 된다. 어쩌면 모든 새로운 도전은 오인(자신이 진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착각)의 산물이다. 진리의 주체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자신의 실천으로써 스스로 증명해보여야 한다. 주체는 진리공정에 개입한다.

주체가 진리공정에 개입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흔한 주/객 인식론에서 주체에게 대상은 오로지 ‘소여’로만 관계한다. 주체는 관조할 뿐이다. 그러나 실천의 인식론에서 주체는 대상을 해체하고, 구성하며 대상에 자신을 기입한다.

여기에 죽어서야 헤어질 것 같은 뜨거운 연인이 있다. 그런데 사랑에 불타고 있는 남자의 친구가 이들의 사랑을 내기에 걸었다. 여자는 다른 남자의 유혹에 굴복할 것이며, 남자는 질투에 미쳐 여자를 파멸시키리라고. 내기를 건 친구는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여자를 유혹했고, 마침내 성공해내었다. 그리고 이를 슬그머니 남자에게 흘렸다. 그러자 남자는 친구의 예상대로 여자를 파멸시켜버렸다. 그들의 사랑은 ‘가짜’였던 것이다.

남자의 친구는 자신의 생각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해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친구의 유혹이 없었다면 연인은 자기들 사랑의 진정성을 자신들의 삶을 통해 온전히 증명해냈으리라는 것이다. 친구의 ‘진리’는 그의 개입을 통해 ‘진리’가 된 것이다.

나는 이 삼류소설같은 이야기가 모든 진리공정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진리가 증명되는 상황이란 주체의 개입을 통해서만 출현할 수 있다. 사유의 현실성과 힘의 증명은 주체적 개입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근거할 때 진리란 단순히 주체 너머의 대상 또는 물질의 의식에의 반영일 수 없다. 의식에 반영되는 대상, 물질이란 이미 주체가 기입된 것이고 실천의 산물인 것이다.

잠깐 다시 삼류소설로 돌아가면, 친구의 개입을 통해 생산된 진리란 다음같은 것이다. 하나, 연인의 불타는 사랑에 의해 은폐되어 있던 파멸의 잠재성. 둘, 파멸의 잠재성을 활성화해낸 개입의 유효성.

이제 비약의 비약을 거듭해, 나는 모든 진리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보고일 뿐이라고 말하겠다. 1)현상에 의해 은폐되어 있던 잠재된 힘. 그리고 2)잠재된 힘을 해방시킬 주체의 역능. 따라서 진리의 대상이란 ‘현상’이 아니라, 현상을 주조해내는 이면의 ‘힘’이다.

이런저런 별 쓸모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는데,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바디우의 ‘진리’, ‘진리과정’, ‘사건’ 등의 개념을 이런 생각에 비추어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 것인가라는 것이다.

진리가 실천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고, 주체의 개입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은 어떤 계기를 통해 진리를 생산하는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앞서 “인간은 알고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행동하고서야 알게 된다. 어쩌면 모든 새로운 도전은 오인(자신이 진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착각)의 산물이다”라고 말했다. 진리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오인 혹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에는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믿음의 대상이 ‘사건’이고, ‘사건’을 ‘믿음’으로써 진리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게 ‘사도 바울’의 내용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거의 알지도, 고민도 안 해본 이야기를 하려니 글이 자꾸 엉키고, 스스로도 창피한 마음이 들지만 좀 더 용기를 내서 더 써내려가도록 하겠다.

바울에게 사건은 ‘예수의 부활’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부활을 믿고, 이러한 믿음에 근거한 실천을 통해 부활이 의미하는 ‘힘’의 현실성을 증명해내었다. 즉 진리를 생산해내었다. 인간은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다는 진리를 말이다. 사건은 주체를 통해 보편화된다. 예수의 부활은 모든 인간의 부활로서 회귀한다. 진리란 보편화된 사건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먼저 믿음이 없다면 실천도 없었을 것이요, 그렇다면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는 순전히 우화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진리의 주체는 사건을 믿는 주체이기도 하다.

바울의 사건이 예수의 부활이었다면, 혁명가의 사건은 무엇일까? 난 혁명가에게 있어 사건은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혁명의 의미는 억압받는 민중이 스스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혁명가는 ‘민중의 자기발전’을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 근거해 역사에 개입해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개입으로써 역사는 해방된 사회를 향해 진군해간다는 진리를 증명해낸다.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질곡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라는 것, 사회주의의 필연성에 대한 사상은 사회주의 혁명가의 개입으로써만 진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난 바디우가 이러한 사상과 사회주의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이념을 우주에 대한 총체적 인식으로 파악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 인식을 이미 진리로 여긴다면 우리는 결코 ‘진리’를 즉 사회주의를 생산해낼 수가 없다. 이러한 철학적 태도 내에서 사회주의자는 대기주의로 빠지거나, 소련붕괴 같은 사건에 사상을 청산해버리거나, 무지자에 대한 지배를 재생산하게 된다.

사회주의자는 사상에 믿음으로서 관계해야만 진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은 실천하는 사회주의자를 정초하는 사건이다. 믿음의 대상이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믿음의 대상이 아닌, 이론적 판단의 소재로 전락시키는 순간 그는 결코 진정한 사회주의적 주체가 될 수 없다.

이제 정리와 한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로 글을 마치겠다.

“사회주의적 주체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믿는 주체이며, 주체적 개입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의 힘과 현실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자이다.”

91년 청산주의가 사회주의 진영을 휩쓸 시, 가장 똑똑했던 이데올로그들이 가장 먼저 청산하고 떠났다고 한다.
똑똑하고 잘난 것은 사회주의적 주체를 재생산하는데 있어 전혀 필요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스팅을 하기 이전에 내게 ‘사건’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문득 떠오른 게 ‘광주민중항쟁’이었다. 어린 마음에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알았을 때 흐르는 눈물과 손에 베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었는데, 슬픔과 분노 가운데서도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을 사수했던 최후의 투사들이었다. 난 그때 인간은 ‘자기’와 ‘이익’이 아닌 무언가를 위해 싸우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체험했다. 더욱이 그들은 너무나도 평범했던 사람들이었다.
5월의 광주를 생각하면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임) ‘사도 바울’은 또한 역사에서 간혹 나타나는 예측하지 못한 대중의 급진화에 대한 이해의 열쇠를 제공하는 것 같다. 집단적 ‘믿음’에 의한 집단적인 주체화. 그리고 역사적인 현상으로서 진리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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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쾃하라! 저항하라! 창작하라!


장면 #1

  2004년 7월, 철거가 예정된 청계천 삼일 아파트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스며들었다. 그들은 ‘풍찬 노숙’을 하던 이들이다. 개발에 맞서 벌였던 철거 싸움도 끝이 나고 거주민들의 이주도 끝나버린 텅 빈 건물, 청계천 삼일 아파트가 10여 명의 노숙자들에 의해서 스쾃되었다. 깨어진 창문은 수리되고 쓰레기가 가득 담긴 집들은 말끔하게 청소되었다. 배관 기술을 가진 이는 화장실과 욕실을 수리하고, 목수였던 이는 문짝을 다듬었다. 자신의 몸에 익은 기술로 자신이 살아갈 집을 청소하고 정돈하는 이들에게 ‘남의 건물에 무단으로 들어가면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나와 있는 형법 319조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자신들의 문제를 타인의 힘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지 않고, 스스로 현실의 벽을 넘어서는 그들에게 있어서, 법적인 테두리는 이미 의미가 없었다. (김강,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 269-70쪽)

장면 #2

  드디어 2004년 8월 15일 오후 4시, (1998년에 공사가 중단된 채 약 7년째 53%의 건설공정만을 마친 채 도시의 흉물로 목동 한복판에 서 있던) 예술인회관 건물에서 “시민에게 문화를! 예술가에게 창작실을!”이란 현수막이 내려짐과 동시에 성명서가 낭독되었다. 20여 명의 예술가들은 15일 새벽 예술인회관 옥상으로 진입했고, 같은 날 오전 예술인회관 밖에서는 페스티벌이 개최되고 있었다. 예술인회관 외부에서 콘서트와 ‘출입금지’ 리본을 자르는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페스티벌을 개최하던 예술가들이 회관의 입구 쪽으로 행진했다. 그들이 예술인회관 정문에 도착했을 때, 회관 내부에 있던 예술가들은 집단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같은 책, 251쪽)


스쾃은 불법행위에 불과한가?

  스쾃(SQUAT)이라는 말은 ‘무단점거’ 즉, ‘어떠한 허가도 권리도 없는 점유’를 의미한다. 앞의 장면들처럼 자기 소유가 아니지만 비어있는 토지나 건물에 들어가서 주거住居나 작업의 목적으로 그 공간을 사용하는 것이 스쾃이다. (장면 #2는 창작공간의 확보를 위한 ‘예술스쾃’의 한 사례인데, 예술스쾃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소개하겠다.) 과거에는 대도시 곳곳에 있었다가 지금은 사라진 판자촌이 한국에서의 스쾃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쾃은 부언할 필요도 없이 사적 소유권을 침해하는 불법행위이다.

  그런데 스쾃을 단순히 불법행위로, 따라서 법 집행의 강화로 소멸시켜야할 범죄행위로 볼 수 없는 것이, 스쾃은 한편으로는 근대화 나아가 자본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즉 스쾃은 개인의 일탈행위로 치부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현상이다. 스쾃을 사회적 해결을 요구하는 사회문제로서 인식하는 것은 스쾃을 이해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

  스쾃이 타인의 소유권을 침해하고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얻고자 하고 또는 지키고자 하는 것은 비와 추위를 피하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주거의 공간이다. 그리고 스쾃은 인간이 인간 이하의 삶으로 떨어지기 전에, 아니면 나락에서 올라오기 위해 인간다운 삶을 호소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즉 스쾃은 생존권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절박한 직접행동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스쾃의 존재 자체는 그 사회가 인간다운 삶의 최소조건인 주거의 권리를 안정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에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스쾃은 기본적으로 도시에서의 주거공간 부족 또는 주거공간에 대한 접근성 악화로 인해 발생하는 도시현상이다. 도시의 정상적인 발전을 상회하는 급속한 도시인구 증가로 인한 주택부족이나 주거비용 상승은 종종 도심 곳곳이나 주변부에서의 대규모 스쾃을 야기한다. 주거공간에서 배제된 극한 상황에 직면하여 비어있는 사유지, 공유지를 점거해 살 집을 스스로 짓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스쾃은 유럽과 한국에서의 급격한 산업화 시기에 발견되며, 또한 현재의 제3세계 도시들에서 매일 관찰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현재 제3세계 도시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농촌의 붕괴와 이에 따른 대규모 이농, 그러나 이를 흡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일자리, 주택, 공공시설의 문제로 극심한 성장통을 앓고 있다(마이크 데이비스, 『슬럼, 지구를 뒤덮다』 참고)

  그런데 한국의 판자촌이 경제발전에 따라 점차 사라져갔듯이, 스쾃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빈터에 스스로 집을 짓는 방식의 스쾃은 여전히 비닐하우스 집이라는 모습으로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빈 건물의 점유와 같은 방식 등의 스쾃에 대한 유인도 여전히 강하게 존재한다. 이는 단적으로 노숙인 문제에서 드러나듯이, 주거권조차 박탈당하는 최악의 도시빈곤이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 항시적인 요소로 남아있다는 점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도시빈곤의 극단적인 모습들(가령 노숙)을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확대시키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할수록 도시로 경제적 기능 및 인구가 더욱 집중된다. 여기에 투기적 수요가 겹쳐 부동산이 지속적으로 상승한다. 그리고 부동산 상승은 대개 소득 증가를 앞지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도시빈민은 주거비용 상승에 갈수록 취약해진다. 이어서 경기침체로 인한 소득붕괴가 겹치면, 도시빈민은 주거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길거리로 내몰리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한국에서는 IMF위기 때 벌어졌으며, 현재 미국에서는 ‘서브프라임 난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택담보대출을 갚지 못해 거리로 내쫓기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부동산 상승과 함께 재개발사업 역시 도시빈곤을 악화시키는 주범이다. 재개발지역으로 대개 선정되는 낙후지역들은 보통 저소득 세입자들의 주거기능을 한다. 낙후돼 있는 만큼 임차료가 낮아, 저소득 계층이 도심에서 살아갈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역들이 점차 상업용이나 고급 주거용으로 개발되면서 저소득 계층이 도시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갈 공간들이 사려져가는 것이다.

  다음으로 무제한적인 공간소유로 인한 사용되지 않는 공간의 증가 문제가 있는데, 개인이나 기업 또는 자치단체, 정부가 직접 사용하려는 목적이 아닌 이윤추구, 투기의 목적이나 비합리적 정책의 결과로 토지, 건물들을 소유함으로써 이런 공간들이 장기간 사용되지 않은 채 방치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개인이나 회사가 당장 수익의 발생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이후의 개발이익을 노리고서 장기간 소유하는 부동산이나, 자치단체, 정부가 어떤 정책적 목적으로 매입했다가 집행이 취소되거나 미뤄지면서 사용되지 않는 공간들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러한 공간들은 소유주에 의해서 사용되지는 않지만 배타적인 소유권으로 인해, 누구도 사용할 수 없는 공간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만큼 도시 빈곤층을 포함한 시민 전체를 위한 공간들은 축소돼 간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길 위에서 사는 시대’, ‘노숙자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사용되지 않는 공간은 오히려 늘어만 가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스쾃이 사회적으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득 증가를 상회하는 부동산 상승과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없는 재개발사업 그리고 무제한적인 소유로 인한 공간낭비 등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내재적 경향으로서 공간소유의 불평등과 극단적인 도신빈곤을 만들어내는 원인-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이러한 힘들은 더욱 강력해지는 것 같다. 지금도 수천의 노숙인들이 서울거리에서 고통받고 있다.


스쾃 - 자본주의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무단점유를 의미하는 스쾃은 사적 소유권을 침해하는 불법행위이다. 그러나 스쾃은 공간소유의 구조적인 불평등과 불안정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질곡 가운데서 주거공간의 상실이라는 극단적인 도시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 유지와 생존권적 차원에서 제기하는 직접행동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불법으로 치부할 수 없는, 사회적 해결을 요구하는 사회문제이다. 사회적인 조건들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중의 하나인 주거권을 위협한다면, 주거권을 지키기 위한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는 정당하다.

  그리고 스쾃은 생존권적 요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자본주의에 대한 주체적이고, 도발적인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즉 스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의 불법적인 방식을 통한 쟁취를 통해, 주거의 권리조차 안정적으로 보장해주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심각성에 대한 폭로를 수행하며, 또한 물건에 대한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로서의 사적 소유권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사적 소유권에 대하여 스쾃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소유권은 언제나 주거권 또는 사회적 필요에 대해서 우선하는가?
  둘째, 소유권은 사용되지 않는 공간에 대한 사용의 권리를 배제하는가?

  소유권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쾃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운영원리를 건드는 것이다. 그리고 스쾃은 만약 주거권을 포함한 인간의 기본권과 소유권이 서로 배치된다면, 소유권이 제한되어야 한다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소유주가 정당한 사용계획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당장 그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사용이 허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스쾃은 소유주와 무단점유자 간의 법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공간과 권리의 분배에 대한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그리고 스쾃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양에 대한 사회적 의지를 재는 바로미터가 된다.

  이와 관련된 프랑스 사회의 경험은 의미심장하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대량의 파괴로, 전후 프랑스 사회는 심각한 주거지 부족문제를 겪어야 했다. 당시 프랑스 전체 인구의 28%에 해당하는 4백만 명의 사람들이 거주할 공간이 없었다는 유엔 조사는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수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극한 상황은 대규모 스쾃운동을 낳았고, 또한 후일 더욱 중요해지는 법령을 낳았는데, 바로 45년의 ‘주거문제의 해결을 위한 임시 특별 법령’이다. 이 특별법의 주된 내용은 프랑스 전역의 빈 건물에 대해서 일정 정도의 조사 기간을 거친 후 정부의 권한으로 징발해 주거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주거권의 보장을 위해 소유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으로서, 이후 스쾃운동에 합법적인 성격을 부여하려는 활동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재해석된다.

  40, 50년대 이후에도 프랑스 스쾃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주거의 불안정성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하며, 주거권의 보장을 위해 “할 수만 있다면 합법으로, 해야만 한다면 불법이라도” 계속 투쟁해왔다. 그리고 드디어 1995년에 ‘드라공가의 승리’를 쟁취한다. 95년의 대선을 1년 앞둔 시점에서, 여러 사회단체들이 파리 드라공가의 빈 건물을 점거하여 주거문제의 급진적인 해결을 요구했는데, 이에 당시 파리시장이었던 자크 시락(이듬해 대통령으로 당선됨)이 45년의 징발에 대한 특별법을 현실에 적용시킬 것을 결정한 것이다. 이로써 프랑스 사회는 주거 불안정성에 대한 최소의 사회적 안전장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스쾃운동이 프랑스 사회에 던진 소유권의 절대성을 향한 문제제기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합리적인 연대의 응답이었던 것이다(프랑스 스쾃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 1장을, 한국에서의 스쾃운동에 대해서는 같은 책 5장 참고).


예술스쾃 -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주체적인 물음

  앞서 소개한 ‘장면 #2’는 한국의 스쾃 예술모임인 ‘오아시스 프로젝트’(이하 오하시스)가 2004년 8월 15일 목동 예술인회관을 스쾃한 사건의 한 장면이다. 오아시스는 2004년 3월에 발족했고, 첫 프로젝트로 부실한 문화행정으로 인해 7년간이나 방치되어 있던 예술인회관을 스쾃하여,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스쾃이 논의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어서 오아시스는 2005년에는 홍대거리에서의 ‘예술포장마차’와 마로니에 공원 주변의 문예진흥원 소유의 한 건물을 스쾃한 ‘오아시스 동숭동 프로젝트-720’을 기획하여, 스쾃을 통한 일상공간의 복합예술공간으로의 탈바꿈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 그리고 오아시스는 2007년 스페인 아르코 아트 페어에 초청되어 마드리드에 오아시스의 예술공간을 설치하고, ‘예술스쾃 국제연대’(A.S.I.L)를 제안해 세계의 스쾃예술가들과의 교류와 연대를 강화하는 활동들을 펼쳤다(오아시스 대한 더 많은 내용은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 5장을 참고).

  스쾃이 주거공간을 상실한 도시빈민에 의한, 생존권적 요구이자 자본주의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라면, 예술스쾃은 창작활동만으로는 생존을 이어갈 수 없는 예술가들에 의한, 비어있는 공간의 창작공간으로의 사용에 대한 요구이자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주체적인 물음과 태도이다.

  그런데 도시빈민들의 생존을 위한 스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식의 폭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 사회에서도, 예술가들에 의한 스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예술스쾃이 1981년의 ‘아르 크로쉬’라고 이름 붙은 스쾃을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먼저 고급스럽고 엘리트적인 것으로 알아왔던 예술가들이 도시빈민들처럼 스쾃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실상 최저생계비보조금(수입이 아예 없거나, 너무 적은 사람 등을 위해 국가에서 최저생계비를 제공하는 프랑스의 제도)으로 연명해왔던 것이다. 창작활동만으로 자신의 창작실과 생계를 유지하는 예술가들은 예술시장에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졌거나, 제도권에 안착한 소수의 사람들에 불과하다. 그렇지 못한 다수의 예술가들은 창작공간의 부재와 생계로 인해 창작활동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항상 처해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창작활동의 계속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정적으로 창작할 공간이 필요하고, 이런 필요성을 절감한 예술가들은 비어 있는 공간을 창작을 위한 사용의 권리를 요구하며 스쾃한 것이다.

  예술스쾃에 있어 무엇보다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이 예술가들의 창작할 권리를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이다. 주거권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중의 하나라는 데에는 거의 이견이 없다. 그러나 스쾃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창작을 위한 공간사용의 권리를 스스로 정초해야 했다. 그리고 스쾃예술가들이 창작권의 정당성을 정초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 그리고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주체적으로 물음을 던져왔고, 자신과 예술의 정체성을 새롭게 재구성해왔다.

  스쾃예술가들에 있어 창작활동과 예술의 전제는 무엇보다 자율이다. 자율은 생명 그 자체이다. 자율이 없는 창작과 예술은 죽은 것에 불과하다. 자율에 의한 창작과 예술만이 생명을 갖으며, 그래서 생성할 수 있다. 그리고 생성하는 예술만이 예술의 전위적인 사회적 기능 즉, 낡고 병든 것을 혁파하고 새롭고 대안적인 사유와 감성을 창조해내는 역할을 온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예술가의 자율성이란 시장과 자본, 제도에 의해서 이미 포획되어 있는 기만적인 허상에 불과하다. 예술가들은 팔리기 위한 예술, 스폰서를 만족시키기 위한 예술, 제도에 의해 이미 틀지어진 예술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스쾃예술가들은 스쾃을 통해 시장과 자본, 제도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그래서 예술가의 진정한 자율을 정초할 수 있는 공간을 점유할 수 있다고 본다. 스쾃은 자본주의의 그 지배하는 힘이 무력화되는 공간이다. 따라서 스쾃예술가들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의 전위적 기능은 스쾃이라는 형태를 통해서만 보존되고 발휘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스쾃예술은 반자본주의적이고 대안적인 생활방식의 구성에 기여함으로써 역시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스쾃은 예술가를 위한 자율적인 공간일 뿐만 아니라 누구나 일상에서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열려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스쾃예술가들은 예술스쾃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략적으로 스쾃에서의 자신들의 창작활동과 그 성과들을 지역사회에 개방하고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해왔다. 예술은 누구든지 참여하고 향유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 가운데서 예술공간과 일상공간, 그리고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예술을 규정해온 통념 즉, 고급스럽고 엘리트적인 면모들은 예술스쾃의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해체된다.

  파리시에 위치한 스쾃 ‘알터나시옹’은 스쾃예술가들이 2000년 3월에 한 은행 소유의 빈 건물을 점거해 만든 것이며, 2005년 9월 철거에 의해 막이 내렸다. ‘알터나시옹’의 예술가들은 예술 장르들 간의 상호교류와 경험을 일상적 삶 속에서 나누며, 모든 이들이 예술과 문화에 친숙히 접근하는 것을 발전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찾아오는 미술가와 음악가, 연극가, 무용가들에게 창작하고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을 무료로 제공했으며, 대부분의 전시와 공연 역시 무료로 개방했다. 또한 도서관, 채식주의 식당, 지역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연극 교실, 요가 교실 등 사회문화시설을 함께 운영했다. 이러한 노력들로 ‘알터나시옹’은 시민들의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했으며, 시민들에게 사랑받았다(다양한 예술스쾃의 사례들은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 3장 참고).

  스쾃예술가들이 요구하는 비어있는 공간의 창작활동을 위한 사용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동의는 스쾃예술가 자신들의 능동적인 활동에 의해 달려 있을 것이다. 스쾃예술이 전위적 역할을 온전히 실천하고, 일상으로의 침투를 통해 시민들의 예술문화생활을 풍요롭게 한다면 스쾃은 정당한 사회적 실체로서 인정받을 것이다.


운동으로서의 스쾃

  이미 살펴보았듯이 스쾃은 무엇보다 기본적인 권리의 쟁취를 위한 직접행동이다. (창작활동의 지속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창작공간의 요구 역시 기본권적 요구로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다운 삶의 안정적인 보장에 계속 실패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스쾃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폭로이며, 이를 스스로 극복하고자 하는 투쟁이다. 또한 스쾃은 사회적 필요에 따른 소유권의 제한을 급진적인 방식으로 제기한다는 점에서 반자본주의적이며,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성격 때문에 스쾃은 소유주와 무단점유자 간의 법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공간과 권리의 분배에 대한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따라서 스쾃에는 새로운 대안사회의 운영원리에 대한 맹아적인 논의가 이미 기입돼있다. 공간과 공간에 대한 권리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의 논의는 앞으로의 사회는 어떠해야 한다는 논의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스쾃운동은 앞으로도 사적 소유권의 절대성을 향한 문제제기와 공간과 권리의 분배에 대한 급진적인 요구를 특징으로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될 것이다.

  이에 더하여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의 저자는 스쾃운동의 잠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규격화된 삶이 ‘상품’으로 등장하는 시대에, 스쾃은 규격의 틀을 흔들리게 하며, 위엄있는 삶의 태도를 회복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빈민, 여성, 가족, 인종, 노동, 생태, 자율, 이주노동, 노숙인, 예술, 문화 등 모든 종류의 운동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 것 또한 스쾃이다. 안주하지 않는 삶, 움직이는 삶, 인간전형을 끊임없이 재창초하는 것, 저항의 양식을 새로이 창안하는 것, 예술가의 정체성을 언제나 재구성하는 것 모두가 스쾃에 포함된다. 삶의 전 과정에서, 예술의 전 과정에서 ‘창작’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정체성의 다른 표현이라고 전제할 때, 삶과 예술은 스쾃이라는 실험실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 실험의 과정에서 파생되는 모든 종류의 생산은 주류적 가치에 대항하며, 새로운 문화를 출현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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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김수행.신정완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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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 포기되지 않는 이상
서평 :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노동자의 성경이라는 『자본론』의 국내번역자이자 손꼽히는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김수행 교수가 2007년 2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임을 한다.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김수행 · 신정완 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는 김수행 교수가 정년퇴임을 맞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책이다. 김수행 교수를 포함하여 신정완 교수, 정성진 교수 등 총 16명의 글들을 모았다. 집필자들을 대표해서 신정완 교수는 책의 의의를 아래와 같이 밝힌다.

 “김수행 교수님의 정년퇴임을 더 뜻있게 맞기 위해 교수님의 제자와 후배들이 힘을 합해 정년기념책자를 발간하게 되었다. 5년 전 교수님께서 회갑을 맞으셨을 때에도 제자와 후배들이 함께 『현대 마르크스경제학의 쟁점들』을 발간한 경험이 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교수님께서는 논문집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대중적 책자를 발간하고 책의 주제는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로 정하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주셨다.”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의례 있는 한 대학교수의 정년기념책으로 여기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에 관심있거나 공부하는 사람들치고 김수행 교수가 쓰거나 번역한 책들을 안 읽어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만큼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와 보급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김수행 교수이다. 그리고 최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자는 부쩍 그 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해 진지하게 모색하는 책들은 비례해서 나오지 않고 있는 환경에서, 여러 좌파 학자들이 참여한 책의 출간은 반가운 것이다.
 책은 총 4부 1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사회주의 이론’에서는 사회주의/공산주의 문제와 관련된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 논의들을 살펴보고, 2부 ‘사회주의의 역사와 현실’에서는 역사적 사회주의의 경험(소련,중국,북한,유고)을 비판적으로 점검해본다. 3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제’에서는 독일과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운동의 이념과 실천을 살펴보고, 4부 ‘새로운 사회를 위한 초석들’에서는 부문별로 대안사회의 지향가치와 제도 틀 등을 탐색한다. 크게 보면 이론, 역사, 대안의 순서로 책의 구성이 짜였다고 할 수 있다.


잘 씹히는 소화 잘 되는 책, 그러나 더해져야 할 점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대중적 책자’를 발간하고자 했다는 기획의도는 성공한 것 같다. 이론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사회주의 용어에 조금은 친숙한 사람이나, 다양한 경제체제에 관심을 가져왔던 사람들이라면 읽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요컨대, 관심의 문제이다). 또한 대안사회를 큰 줄기로 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하나의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다. 게다가 각 부문의 전문연구자들에 의해 쓰인 글들을 말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아쉬운 점들 가운데 하나는 사회주의의 역사와 현실을 다룬 장들이 다소 불만족스럽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들 중에 중요한 하나는 사회주의 체제들이 자본과 계급사회로부터의 인간해방의 이상을 (명목상일지라도) 내세웠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인간해방의 이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이러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의 원인들은 무엇이었는지, 이로부터 어떤 교훈을 이끌어내야 하는지를 궁금해 한다. 그런데 역사적 사회주의를 다루고 있는 장들의 관심은 상당히 협소하다. 서술이 현실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의 자원배분의 효율성, 성장, 경제적 유인구조 등의 양적, 구조적 측면에만 한정돼 있다. 그래서 그 경제체제 아래에서 노동했던 사람들의 ‘실존’은 느낄 수 없다. 사람들의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외된 노동’과 어떻게 같고 달랐을까? 체제는 사람들에게 어떤 욕구를 심어주고, 어떤 충족수단을 얼마나 제공했을까? 사람들은 체제에 어떻게 실망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물음들에는 메아리치지 않는다. 물론 이 책이 경제학자들에 의해, 대안적 경제체제를 모색하기 위해 쓰인 책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불만은 괜한 트집잡기인 것 같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이상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정교한 경제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모든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을 보장하는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경제체제의 메커니즘에만 골몰해 (결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 사람과 경제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심(체제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있는가?)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신고전파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는 변별선이기도 하다.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의 분발이 요구된다.
 다음 아쉬운 점은 책을 다 읽고도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은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유를 탐색해본다면 하나는 대안사회 상의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점, 다른 하나는 같은 책에서조차 다양한 조류의 대안들이 충돌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첫 번째와 관련해서는 책 자체의 한계라기보다는 현실 사회주의 붕괴로 위축된 대안사회의 모색이 이제야 다시 기지개를 피기 시작한 정세의 한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대중운동이 발전하고, 대안세계의 모색이 대중운동과 상호교통하는 과정에서 극복될 것이다. 새로운 사회의 상이 모호한 두 번째 이유는 오히려 책의 장점이 될 수도 있는 요소이다. 책에는 대략 사민주의 경향(스웨덴 모델), 시장사회주의 경향, 사회주의 계획경제 경향 등의 대안들이 (조용하게) 경합하고 있다. 다양한 대안사회의 상들을 비교 검토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집필자의 말을 인용하면,

 “필자들은 글의 내용에 관련하여 전적인 자유재량권을 가지고 집필에 임했다. 필자마다 이념적 입장이나 학문적 관심사에서 작지 않은 편차가 있었기에 사전 협의를 통해 각 장의 내용을 조율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또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는 이 책의 주제에 비추어볼 때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시장사회주의인가? 사회주의 계획경제인가?

 특히 시장사회주의론과 사회주의 계획경제론 사이의 이론적 경쟁이 눈에 띄는데,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줄지는 독자들이 해야 할 판단일 것이다. 시장사회주의론은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사회주의의 자명한 요소라고 보는 전통적인 사회주의 계획경제론을 비판한다. 중앙집중적 계획은 경제의 복잡다양성이 증가할수록 효율적인 자원배분을 심각하게 왜곡시킬 수밖에 없고, 효율적인 자원배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장이 필수적이라고 시장사회주의론은 바라본다. 따라서 시장사회주의론은 국유화나 계획경제가 사회주의적 요소라고 파악하지도 않으며, 대신 시장(즉 분권적 의사결정)과 사회형평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형태를 모색한다. 소련식 계획경제의 몰락은 시장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근거로 활용되곤 한다.
 반면에 사회주의 계획경제론은 시장과 사회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 한다. 시장이 강요하는 무정부적인 경쟁은 경제단위로 하여금 투입/산출의 효율성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게 해, 결국은 축적을 위한 생산 즉 자본주의로 회귀시킬 것이다. 따라서 시장을 지양하기 위한 생산수단 소유의 집중, 이에 조응하는 계획경제는 사회주의의 불변요소라고 주장한다. 또 생산의 의식적인 통제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소련경제의 몰락이라는 조건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론은 소련의 교훈을 반영해 스스로를 보완해가고 있다. 이러한 보완의 노력 중의 하나로 참여계획경제론이 있다. 소련경제는 비민주적인 명령경제 부류였다고 비판하는 참여계획경제론자들은 ‘참여’를 지렛대로 삼아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계획을 활성화하려 한다. 그래서 보다 더 많은 사회구성원의 참여를 끌어내며 효율성을 유지할 아이디어들을 다양하게 내놓고 있다.


반자본주의의 파토스는 꺼지지 않는다

 어쩌면 글을 읽다 사회주의라는 단어에 눈을 뗀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사실 동구권 붕괴 이후에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은 없다는 생각은 너무나 널리 퍼져 있다. 새로운 사회, 사회주의에 대한 모색은 쓸모없어 보인다. 새로운 사회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가?
 이에 대한 질문에 선뜻 답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렇지만 대신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다.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의 몸짓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은 없다고 하지만, 이것을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 지지의 표현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불만을 표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주의는 불만족, 불안정, 고스트레스 사회이다.
 우리는 도처에서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과 끊임없이 접촉하며 살아간다. 매일 새로워지는 상품들의 목록, 모든 공간과 시간을 점거하고 있는 상품들의 광고. 자본주의 사회는 거대한 상품진열장이다. 자본은 사람들에게 새롭고, 더 많은 욕망을 심어준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은 자신이 토해내는 상품들을 화폐뭉치로 바꿔내지 못하고 파산한다. 자본은 상품과 함께 (상품에 대한) 욕망도 생산하는 것이다. 반면에 자본은 욕망을 충족시킬 수단을 뺏어간다. 경쟁력강화라는 명목으로 임금을 억제하고, 구조조정을 통해 일자리를 줄인다. 그 결과는 곧 다수대중의 상대적 결핍이다. 힘껏 욕망을 부풀리고서는 터트린다. 그리고 남는 것은 쭈글쭈글해진 불만스런 마음이다. 욕망의 과잉과 충족수단 과소의 자본주의적 비대칭은 불만족을 일반화한다.
 또한 자본주의는 불안정을 일반화한다. 언제든 가능한 기업의 파산과 주기적인 경기변동이 강요하는 실업의 위협, 그리고 자기 일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의 압박 앞에서 우리는 항시적인 불안정을 느낀다.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는 불안정 고용형태인 비정규직이 느낄 위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가며 산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이지 않을 수가 없다. 회사, 공장에 있는 동안 자본의 통제에 군말없이 따라야 한다. 진정 화나게 하는 일, 자존심을 상처입히는 일, 불공정한 일 등에 일일이 인간적인 반응을 보였다가는 사표를 써야 한다. 자본은 자율적인 인간을 원하지 않는다. 자본의 목적에 제 삶을 동일시하는 타율성을 요구한다. 인류가 쌓아올린 위대한 문화적 성취들에 무관심한 워커홀릭의 전성시대이다. 이뿐인가. 보다 비싼 값으로 흥정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자기계발 경쟁은 캠퍼스를 사막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전반적인 불만족, 불안정, 고스트레스 상태는 자연스럽게 반자본주의의 파토스를 만들어낸다. 반자본주의의 파토스는 자본주의의 산물이자 떼어낼 수 없는 샴쌍둥이이다(불만족, 불안정, 고스트레스를 낳는 고욕구 저소득, 실업, 경쟁, 자본의 통제 등은 자본주의의 불변조건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사회에 대한 고민과 요구는 이러한 반자본주의의 파토스를 양분으로 삼아 자라난다. 자본주의가 계속되는 한 대안사회에 대한 모색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대안은 없다는 유령이 지나가고 다시 변혁과 대안을 요구하는 운동들이 분출하고 있다. 다시 대안사회가 모색되고 있다. 그리고 대안사회를 모색하는 가운데서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영감을 주고 있다(『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역시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주는 영감에 크게 기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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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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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지구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스스로를 ‘국제 사회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생태주의자’라고 밝히는 마이크 데이비스 교수는 <슬럼, 지구를 뒤덮다>(이하 <슬럼>)에서 지구는 “PLANET OF SLUMS” 라고 한다. 생명의 근거인 푸른 바다와 숲도 아니고, 문명의 상징인 마천루도 아닌, 슬럼이 지구를 대표한다니 꽤 불길하게 들린다. “한 사람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은 그가 사는 주택의 위상에 따라 형성되는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하는데, 혹 여러분이 슬럼을 범죄와 타락의 온상이 아닌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삶의 터전으로 바라본다면, <슬럼>은 편안한 책이 아닐 것이다. 책 어디를 펴 보아도 “여기가 지옥이다. 견디어라”를 말해주는 통계와 묘사를 확인할 수 있다. 가히 신자유주의 시대 세계 도시 빈곤화의 참담한 실상에 대한 최상의 고발서 중 하나랄 수 있다. 그런데 혹 좋은 취지의 책이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통계와 구체적인 묘사가 연상되어 지루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슬럼>은 250여 페이지라는 많지 않은 분량으로, 세계 도시빈곤에 대한 다각도의 접근 및 그 원인 분석 등의 각각 고유한 8개 주제들을 독자에게 구체적으로 전달하려는 의도로서만 자료들을 제시함으로써 필요한 만큼의 말만 하는, 마치 유능한 탐정이 쓴 사건보고서 같은 책이다. 그리고 탐정이 범인을 찾아내듯이, 데이비스 교수는 세계 도시 빈곤을 토해내는 괴물로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고발한다. 우리는 이로써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범죄 목록에 세계 도시 빈곤을 추가할 조서를 얻게 된 셈이다. 이것으로 자본주의를 단죄할지 말지는 우리의 몫이다.


지구를 뒤덮는 슬럼 : 전지구적 프롤레타리아화의 짝패

 그럼 <슬럼>의 주요내용 중 몇 가지를 대강 살펴보자.
 먼저 저자는 서두에서 전지구적 도시화의 물결 및 1980년대부터의 새로운 도시화 형태를 밝히고 있다. 현재 인류는 최초로 도시인구가 농촌인구보다 많은 진정한 전지구적 도시화에 들어서고 있으며, 그 동력은 대부분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개발도상국 도시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의 제3세계 도시화는 공업성장에 따른 농촌 잉여노동력 흡수라는 기존 패턴과는 다르게 전반적인 도시경제 침체 및 쇠퇴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역설적인 현상은 농촌경제 붕괴에 따른 급격한 프롤레타리아화(무산자화) 때문이다. 그리고 제3세계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는 한국의 97년 IMF구조조정 같은, 채무위기를 틈탄 국제금융기구의 시장개방 요구와 구조조정 프로그램 강요의 결과였다. 시장개방으로 거침없이 치고 들어오는 선진 기업농과의 경쟁에서 보조금 축소폐지로 무장해제당한 제3세계 소농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생존수단(토지)을 박탈당하고, 이제는 농산물이 아닌 노동력을 팔기 위해 도시로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경제의 침체와 대규모 농촌->도시 이주의 결합은 거대규모의 도시빈곤으로 이어졌다. 일자리는 없는데 잉여노동력은 넘치는 조건에서 당연하게도 실업과 빈곤은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영구적인 특징이 되었다. 그리고 사회적 부로부터의 항상적인 배제에 결박되어 있는 도시 빈민의 주거형태는 슬럼이 될 수밖에 없다(사실 슬럼이라는 단어 자체가 빈민층의 거주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또한 최악의 주거환경이라는 부가적인 의미도 갖는다). 그런데 슬럼의 인구는 얼마나 될까? 슬럼에 대해 매우 제한적인 기준을 갖고 있는 UN 연구자들조차도 전세계 슬럼의 인구를 10억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 낮추어 잡아도 세계 인구의 1/6 정도(!)인 것이다.

 슬럼은 기본적으로 인구과밀, 열악한 비공식 주택, 안전한 식수와 위생설비의 부재, 주택보유의 불안정 등의 특징을 갖는다. 뉴욕, 서울 같은 선진국형 도시에서는 상류층, 중산층이 교외로 주거지를 옮기는 도심공동화가 진행됨에 따라 도심 주변에 슬럼이 형성되었다가 재개발로 다시 사라지는 패턴을 보였다면, 현재 제3세계의 슬럼화는 도시 주변부의 팽창, 거대화라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남아있는 유일한 재산인 자기 몸과 가족을 이끌고 도시에 당도한 농촌이주자들이 애초에 공식적인 주택을 구입하거나 빌릴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도시 외곽의 미개발된 공유지나 사유지, 버려진 땅을 무단 점유해서 스스로 집을 짓는다. 이 때문에 제3세계 도시의 슬럼확장은 곧 도시확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로, 수도, 전기 같은 공공설비는 애초에 있지도 않는 미개발지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슬럼주민들은 기본적인 공공서비스를 거의 누릴 수 없는 조건에서 엄청난 인구과밀이 초래하는 물부족, 오물 쓰레기의 집적, 오염, 소음, 사생활 노출 등의 비인간적 환경을 견뎌내야 한다. 이로 인한 잦은 병치레, 유아의 때이른 죽음, 전염병의 창궐, 대형화재 등은 슬럼주민의 일상사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위험은 주거의 불안정한 법적 지위에서 온다. 무단 점유라는 원죄가 슬럼주민을 언제든 내쫓길 수 있는 상태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지주들과 개발업자들은 미개발지가 택지로 바뀌는 마술적 효과를 노리고서 처음에는 무단 점유를 용인했다가 추수의 계절이 다가오면 인정사정없이 슬럼을 소탕한다. 이렇게 쫓겨난 주민들은 점점 더 습지, 범람지대, 화산 기슭, 불안정한 경사면, 쓰레기장, 화학폐기물 처리장, 철도변, 사막 가장자리 등의 대형재난의 위험과 상존해야 하는 곳에 새 둥지를 틀어야 한다. 사례를 하나 들어본다면, 카라카스(베네수엘라의 수도)의 불안정한 경사면에 위치에 있던 슬럼에 1999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가 닥쳐 약 3만 2,000명이 사망하고, 14만명이 집을 잃었던 대참사가 있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처럼 비참한 도시의 빈곤화, 슬럼화가 전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3세계 국가들은 도시 빈곤의 새로운 급증에 직면해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만약 이들이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민중의 국가라면 먼저는 서둘러 슬럼지구에 공공시설을 구축하고, 다음으로는 공공주택을 제공하여 주택문제를 해결하고, 근본적으로는 도시빈곤의 해결을 위해 일자리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3세계 국가들은 정확히 이에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 IMF, 세계은행 같은 국제금융기구가 제시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정부지출, 공공부문을 획기적으로 줄인 것이다. 덕분에 공공부문의 축소로 일자리는 더욱 줄어 공무원들이 도시빈민의 대열에 새로이 동참하게 되었고, 공공주택사업이나 빈민을 위한 인프라 구축은 오직 추억으로만 말해지고 있다. 더욱이 국가와 상류층이 야합하여 그나마 벌어지는 공공사업은 상류층의 편익을 위한 도시환경 재구성에 집중되고 있다. 즉 고위공무원, 군장성, 전문직,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쇼핑엔터테인먼트 시설, 슬럼을 우회하여 도심과 교외 주택단지를 연결하는 도로 등의 건설과 도시미화 사업, 재개발을 위한 슬럼 소탕 등이 빈민을 위한 인프라 구축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국가의 배신과 짝패를 이루는 것이 제3세계 탈식민 엘리트의 배신이다. 제3세계 엘리트는 더럽고 위험한 슬럼을 피해서 사설경비에 의해 지켜지는 폐쇄형 주택단지와 뉴욕과 파리를 본뜬 쇼핑엔터테인먼트 시설을 오가며 과시적 소비와 향락을 누리고 있다. 이들에게 도시는 ‘멋진 신세계’이다. 그러나 슬럼주민들은 이들이 버리는 찌꺼기로 자신들의 밥상을 차려야 한다.


제3세계 도시빈곤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슬럼>의 주요내용 몇 가지를 대강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1980년대 이후의 제3세계 도시빈곤이 기존 제3세계 빈곤의 주요형태였던 저개발의 빈곤(농촌빈곤)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난한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저개발의 빈곤은 낮은 농업생산력과 인구증가 및 자연재해에의 취약성 등을 특징으로 하며, 따라서 전-자본주의적 빈곤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3세계 빈곤의 새 주요형태로서 도시빈곤은 일단 도시를 무대로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실업과 불평등의 빈곤이라는 점 때문에 자본주의적 빈곤이다. 저개발의 빈곤, 소농의 빈곤이 낮은 농업생산성 때문이었더라면, 도시빈곤은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못하는 상태, 즉 실업에 기인한다. 그리고 불평등의 빈곤이란 폐쇄형 고급 주택단지와 슬럼의 확연한 대비가 보여주듯이, 불평등한 부의 분배와 이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 도시빈곤에 수반된다는 것이다. 실업과 상대적 박탈감이 낳는 빈곤의 고통은 자본주의의 고유한 현상이다.

 이러한 제3세계 저개발 빈곤의 자본주의적 빈곤으로의 전환과 제3세계의 전지구적 자본주의로의 편입은 동전의 양면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채무위기를 틈탄 IMF와 세계은행의 시장개방 강요로 제3세계는 세계시장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편입은 생계형 농업을 경영하며 잉여농산물을 인근 도시에 팔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제3세계 소농들을 전지구적 농업생산의 잉여 농업노동력으로 탈바꿈시켜 버렸다. 이제 제3세계 도시주민들은 인근 농촌의 것이 아닌 선진 기업농의 과잉생산된 농산물을 소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제3세계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광범위한 프롤레타리아화가 발생했고, 이들 잉여노동력들은 도시로의 엑서더스를 감행했다.

 그러나 도시경제는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지 못했다. 국가주도 수입대체공업화 프로젝트가 채무위기로 중단되면서, 도시경제는 이미 성장을 멈춘 상태였다. 새로운 성장 프로젝트로 국제금융기구는 외국인투자에 대한 규제를 풀고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하여,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라고 했다. 그러나 초국적 자본은 투자지역을 선별했고, 이로부터 배제된 지역은 낙후된 지역으로 고착되었다. 그리고 제3세계 경제엘리트는 세계화를 제1세계의 수익성 높은 자산을 더 많이 획득하는 기회로 여길 뿐이었다. 더 이상 제3세계에는 누구도 투자하지 않는다. 상품과 자본의 장벽없는 자유로운 이동이 이뤄지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자본축적은 보다 많은 수익을 보장하는 곳에서만 이뤄질 뿐이다. 이제 실업은 더 이상 국민경제 차원에서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세계 어디든 투자할 수 있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한 나라의 프롤레타리아는 전지구적인 산업예비군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이 때문에 제3세계 도시 실업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일부인 것이다.

 이처럼 제3세계 도시빈곤은 자본주의적 빈곤이며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따라서 제3세계 도시빈민의 가난을 끝장내기 위한 싸움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투쟁일 수밖에 없다. <슬럼>의 저자 또한 “인간 연대의 미래는 도시 빈민이 전지구적 자본주의 내에서의 최악의 주변성을 전투적으로 거부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밝힌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도시 빈민에게서 전복적 역량을 기대해도 좋은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데이비스 교수는 <슬럼>의 속편에서 답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금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슬럼 기반 투쟁의 역사와 미래”에 관한 책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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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마르크스 How To Read 시리즈
피터 오스본 지음, 조원광 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짜증 유발 마르크스주의자들 

 지금 이 글을 읽기 시작한 여러분들은 마르크스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가? 아마도 무관심한 대다수와 이보다는 적은 수의 불편해하는 이들, 그리고 호감을 보이는 소수가 이 글을 읽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관심이 없고 불편해하는 독자들은 읽지 않고 지나쳤다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가 인기없고 볼품없는 아이템으로 전락한 것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진보라는 가치를 고민하는 학생, 지식인들도 최장집 교수의 민주주의론이나 홍세하 교수로 인해 유명해진 똘레랑스, 반핵평화, NGO 등을 선호한다. 그리고 하버마스,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의 현대사상가들이 마르크스를 대신한다.

 대화와 관용, 합리적 절차, 비폭력 평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치장한 세련되고 현대적인 ‘진보’에 반해 마르크스주의는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가령 편협, 교조, 반사회성, 거리를 혼잡케하는 집회, 무엇보다 실패한 사회주의-와 맞닿아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이들이 마르크스를 멀리한다. 또한 마르크스가 유발하는 불편 혹은 짜증은 이른바 운동권 특유의 계몽적, 실천적 성격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너는 잘못된 허위의식에 빠져 있어”, “특권을 버리고 실천과 활동에 나서야 해”라는 ‘나’의 과거로부터 계속된 의식과 일상을 깨버리라는 요구만큼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은 없다.

 이러한 규범적, 일방적 성격은 마르크스주의가 가치중립성이라는 학문의 절대조건과 가치의 상대성이라는 현대의 도덕률을 위반하고 있는 증거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주의는 객관성을 상실한 비-학문이자 낡은 도덕이다. 마르크스가 휴머니스트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는 노동자의 불쌍한 처지를 동정한 나머지 균형을 잃고 자본주의가 갖는 역동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는 이를 부당한 판결이라고 항변한다. 여기까지 읽었으니 인내심을 내서 항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잠시 샛길로 빠져보자 

 우리는 흔히 세계 그 자체를 순수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것이 착각인 까닭은 우리가 보고 만지는 경험은 모두 감각기관에 의해 매개되기 때문이다. 인식된 사물과 사물 그 자체가 일치한다고 누구도 보증하지 못한다. 감각기관을 초월해서 사물을 직접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나아가 인간의 경험은 동물과는 달리 감각기관과 더불어 언어에 의해서도 중계된다. 우리가 다리가 서너 개 달린 평평한 판자를 탁자라고 인지하는 것은 이런 모습을 한 사물들을 탁자라고 지시하는 언어적 질서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을 탁자라고 여기는 이상, 우리는 직접 그것에 앉기보다는 무언가를 올려놓는 용도로 사용한다.

 한편 언어는 단순히 대상과 음성 사이의 지시관계가 아니다. 언어에는 가치와 규범, 세계관이 기입돼 있다. 가령 광인이라는 말은 특정한 문화적 실천을 보편적 기준으로 전제하고 이를 정상이라는 말로 버무리면서, 보편적 기준에서 벗어나있는 이들에 대한 배타성과 공격성을 함축한다.

 다소 엉뚱하게도 우리의 경험이 감각기관, 언어, 세계관 등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언급한 것은 인식에서의 주체의 ‘능동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실체를 바라보기에 앞서 실체를 바라보는 방법을 먼저 배운다. 또한 우리는 실체를 충분히 알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이전에 먼저 판단한다. 이런 측면에서 실체를 바라보는 방법과 판단은 선험적(경험 이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선험적 인식방법과 판단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 아닌 역사적 생산물이다. 다만 누구나 특정 방향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자연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인류가 자연력 앞에서 스스로를 지켜내기에도 벅차던 시대에 자연은 공포와 외경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공포와 외경이 자연현상은 신적 권능의 산물이라는 자연에 대한 앎을 결정했다. 인류가 점차 자연력을 자신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조절할 수 있게 됨으로써만 비로소 자연은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세계를 보기 이전에 보는 방법을 먼저 배우고, 이런저런 보는 방법에는 세계에 대한 어떤 판단들이 전제되어 있다. 사실과 가치는 엄격히 분리되지 않는다. 가치는 사실을 구성한다. 가치중립적이라는 선언은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일반적인 사회적 가치를 전제한다는 말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한 시대의 지배적인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라고 했다. 일반적인 사회적 가치라는 가면을 벗겨내면 그 곳에는 기득권을 쥐고 있는 이들의 꿈틀대는 욕망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른바 상식과 통념을 거부하고, 세계를 다른 방법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기득권을 쥐고 있는 자들의 욕망에 의해 고통받는 이들의 절규에서부터 출발하자고 한다. 


왜 오늘날 여전히 마르크스인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비인간적 삶으로 인해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절규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절규를 낳는 힘들을 분석한다. 마르크스의 분석이 과학적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출발점으로서의 절규가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의 외침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로 배따신 이들과는 반대로 절규에 이른 자들은 변화를 요구한다. 자신들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사회를 개조하고자 한다. 자연이 인간의 목적에 조응하는 변형의 대상이 됨으로써 그 내적구조가 밝혀졌듯이, 사회 변혁을 통해서만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설 때만이 사회구조를 낱낱이 밝혀낼 수 있다. 이는 가치에서 중립적일 때만이 객관적일 수 있다는 통념과는 달리 사회과학은 노동자계급의 당파성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모순적으로 보이는 입장이다. 그러나 모순은 오히려 이른바 주류적 시각에 있다.

 주류적 시각의 모순은 존재하는 것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태도이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취급을 받는 것은 바로 노동자들의 억압과 고통이다. 가령 주류 경제학은 임금을 노동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의 균형에 의해 결정되는, 동등한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의 자유로운 계약의 결과로 바라본다. 그리고 노동조합과 파업은 노동의 공급을 통제하여 노동시장에서의 균형가격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아내려는, 시장을 교란하는 집단이기주의적 행태이다. 이러한 관점대로라면 동일노동을 하고도 기존 임금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이나 최저생계비도 안되는 임금도 조화로운 시장의 결과이다. 구조조정으로 심각한 생활수준의 하락을 막아보고자 하는 노동자의 파업이나 노동자 집회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는 인간적인 삶에 대한 진실한 외침도 집단이기주의적 행태에 불과하다. 이외에 주류적 시각이 결코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살아있는 노동자가 자본의 이윤창출 시스템 속에서 죽어있는 부품이 되어야만 하는 극심한 소외. 그리고 이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까지 끊는 자본에 의한 ‘타살’이다.

 마르크스는 그저 이처럼 생생한 현실로부터 시작하자고 할 뿐이다. 존재하는 불의를 인정하자고 한다. 그리고 노동자의 절규가 단지 사회 하층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절규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즉 노동자의 절규를 낳는 자본의 파괴적 힘은 사회 전체로 구석구석 퍼져나가 인간과 자연에 질곡을 가한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화폐에의 극심한 의존으로 몰고 가 맹목적인 화폐추구와 무한경쟁에 우리를 결박한다. 인간적 가치에 대한 인간 고유의 욕구는 마모되고 소진되어, 종국에는 자본의 이윤에 대한 비합리적 충동이 우리의 영혼을 대신한다. 자연과의 조화마저 산산조각낸다. 이러한 인간적, 생태적 가치에 대한 위협으로서 자본주의는 우리 모두의 해방을 위한 극복의 대상인 것이다.

 노동자의 절규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자본주의가 여전히-어느 때보다도- 인간과 자연에 질곡을 가하는 오늘날,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던, 따라서 지배계급의 욕망에 의해 구조화된 이데올로기를 들춰내어 그 내적구조를 생생하게 밝혀낼 수 있었던 마르크스의 가치는 그의 시대보다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더욱 읽혀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마르크스로 가는 뛰어난 징검다리 책이 있다. 바로 <HOW TO READ 마르크스>(피터 오스본, 웅진지식하우스)이다(독자들은 이 글의 형식이 서평임에도 이제야 책이 소개된 것을 너그럽게 용서하시라). 


<HOW TO READ 마르크스>는 왜 읽을만 한가? 

 마르크스에 관한 숱한 입문서 중에서 이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약 200여 쪽)의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두 가지이다.

 먼저는 책의 형식이다. 이 책은 <HOW TO READ 시리즈>의 하나인데, 사상가의 간단한 이력이나 대표작을 요약하여 알려주는 대개의 안내서들이 갖는 ‘원서의 깊이와 풍부함을 전달하지 못하는 간편한 요약’의 한계를 횡단하기 위해, 이 시리즈는 “독자들이 뛰어난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위대한 작가, 사상가들의 저술 자체를 직접 만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로 사용한 말들에 독자를 데려가고, 또한 이런 말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보여준다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책의 구성을 보면, 마르크스가 창안한-혹은 새롭게 변형한- 핵심 개념을 잘 담고 있는 저작의 문구를 앞에 배치하고 뒤따르는 저자의 해설을 한 묶음으로 한 10개의 챕터가 있다. 즉 열개의 마르크스의 개념들을 설명하는 셈인데, 상품 물신주의, 실천, 생산양식, 소외, 공산주의, 자본, 본원적 축적 등이다.1)

 개념은 현상을 파악하는 인식 도구로써, 한 사상의 요체랄 수 있다. 개념은 마치 프리즘과 같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수많은 색으로 분절되듯이, 개념들을 통과한 뭇 현상은 이면에서 현상을 주조해내는 힘, 규정력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관한 직접적인 설명보다는 그가 무엇으로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설명했는지를 앎으로써, 우리는 마르크스를 따라 스스로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체험을 즐길 수 있다. 가령, 소외라는 개념을 통해서 자본주의 하에서의 인간성의 왜곡을 사고할 수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노동을 통해 자기를 스스로 산출해낸다는 점에 있다. 즉 자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고 스스로를 결정하고 변형해가는 것이 인간 본질이다. 그리고 노동은 그 성질상 사회적이기-개별적으로 노동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분업이라는 틀 내에서의 노동이기- 때문에 인간 또한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이 말은 인간이 스스로를 산출해낸다고 해서, 개체가 자유롭게 그러한다는 것이 아니라, 집합적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의 소외는 인간에게서 집합적 자기 창조력을 앗아갔다. 노동이 오로지 자본의 이윤증식에만 종속됨으로써 인간 또한 맹목적으로 화폐를 추구하는 경제적 인간화되었다. 이제는 이러한 인간상이 마치 태곳적부터 이어져온 본성인양 여겨진다. 획일화된 대중소비문화로 인해 문화창조의 기반이 되는 자율성과 다양성이 압살당하면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단조로운 미래를 예고한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는 노동의 소외가 지양되는 공산주의 사회를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로 그린다. 그리고 노동의 소외는 자본이 아닌 노동자가 사회적 필요의 충족을 위해 스스로 생산을 구상하고 조직함으로써 지양되며, 이러한 노동자의 직접통제는 개인의 자유로운 발달과 인간의 자기 창조력을 재생해 낼 것이다. 

 <HOW TO READ 마르크스>의 두 번째 장점은 저자인 피터 오스본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마르크스에 관한 해석으로서의 독해, 즉 정통주의(orthodoxy)에 대항하는 독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피터 오스본이 비판하는 정통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에서 정당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만들어진 교육 체계로 코드화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의미한다.

 사실 정통주의에 대한 비판은 구소련 몰락 이후 스탈린주의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꾸준히 계속되어온 온 작업 중의 하나라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제대로 된 정통주의 비판이 무엇인지, 즉 기존의 스탈린주의 비판이 명목상이었지 여전히 스탈린주의에 부분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철학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피터 오스본은 런던 미들섹스대학교 현대유럽철학과 교수이며 잡지 <래디컬 필로소피>의 편집자이기도 한데, 자신이 분명 뛰어난 철학자임을 이 책에서 정통주의에 대한 근본적 전복을 통해 보여준다.

 가령 이 책의 3장에서는 마르크스의 생산력 개념에 관한 정통주의의 모순을 뛰어넘을 수 있는 해석을 제공한다. 정통주의는 생산력 발전을 단순히 물질적 생산능력의 확대로 바라보아, 사회혁명의 시기로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생산관계로 인한 물질적 생산능력의 정체로 여겼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언제고 생산력의 정체로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지만, 역사는 반대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보여주었다. 한편 피터 오스본은 생산력의 발전을 동시에 새로운 욕구가 창출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해석에 근거하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물질적 생산능력과 사회적 욕구가 확대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생산관계의 질곡으로 인해 노동자계급의 욕구 충족의 가능성은 줄어드는 시기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매해 계속되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양극화와 빈곤은 확대되어가는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다. 

 <HOW TO READ 마르크스>에 피터 오스본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관한 최초 · 최고의 비판적 분석가라고 한다. 어떻게 해서 최초가 최고가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한 이들은 이 책을 펼쳐라!

1) 역자인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 조원광은 communism을 공산주의로 번역하기보다 원어 그대로 사용하는데, 이는 이들 연구집단이 소련 등의 역사적 공산주의와 대립하는 독자적인 코뮤니즘 개념을 내세우는데 그 이유가 있다. 이 글의 필자는 일반적 관례에 따라 공산주의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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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히끄 2007-08-09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 책이 출판계의 재벌인 웅진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역시 웅진이 만들면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