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김수행.신정완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새로운 사회, 포기되지 않는 이상
서평 :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노동자의 성경이라는 『자본론』의 국내번역자이자 손꼽히는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김수행 교수가 2007년 2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임을 한다.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김수행 · 신정완 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는 김수행 교수가 정년퇴임을 맞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책이다. 김수행 교수를 포함하여 신정완 교수, 정성진 교수 등 총 16명의 글들을 모았다. 집필자들을 대표해서 신정완 교수는 책의 의의를 아래와 같이 밝힌다.

 “김수행 교수님의 정년퇴임을 더 뜻있게 맞기 위해 교수님의 제자와 후배들이 힘을 합해 정년기념책자를 발간하게 되었다. 5년 전 교수님께서 회갑을 맞으셨을 때에도 제자와 후배들이 함께 『현대 마르크스경제학의 쟁점들』을 발간한 경험이 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교수님께서는 논문집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대중적 책자를 발간하고 책의 주제는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로 정하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주셨다.”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의례 있는 한 대학교수의 정년기념책으로 여기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에 관심있거나 공부하는 사람들치고 김수행 교수가 쓰거나 번역한 책들을 안 읽어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만큼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와 보급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김수행 교수이다. 그리고 최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자는 부쩍 그 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해 진지하게 모색하는 책들은 비례해서 나오지 않고 있는 환경에서, 여러 좌파 학자들이 참여한 책의 출간은 반가운 것이다.
 책은 총 4부 1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사회주의 이론’에서는 사회주의/공산주의 문제와 관련된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 논의들을 살펴보고, 2부 ‘사회주의의 역사와 현실’에서는 역사적 사회주의의 경험(소련,중국,북한,유고)을 비판적으로 점검해본다. 3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제’에서는 독일과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운동의 이념과 실천을 살펴보고, 4부 ‘새로운 사회를 위한 초석들’에서는 부문별로 대안사회의 지향가치와 제도 틀 등을 탐색한다. 크게 보면 이론, 역사, 대안의 순서로 책의 구성이 짜였다고 할 수 있다.


잘 씹히는 소화 잘 되는 책, 그러나 더해져야 할 점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대중적 책자’를 발간하고자 했다는 기획의도는 성공한 것 같다. 이론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사회주의 용어에 조금은 친숙한 사람이나, 다양한 경제체제에 관심을 가져왔던 사람들이라면 읽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요컨대, 관심의 문제이다). 또한 대안사회를 큰 줄기로 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하나의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다. 게다가 각 부문의 전문연구자들에 의해 쓰인 글들을 말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아쉬운 점들 가운데 하나는 사회주의의 역사와 현실을 다룬 장들이 다소 불만족스럽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들 중에 중요한 하나는 사회주의 체제들이 자본과 계급사회로부터의 인간해방의 이상을 (명목상일지라도) 내세웠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인간해방의 이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이러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의 원인들은 무엇이었는지, 이로부터 어떤 교훈을 이끌어내야 하는지를 궁금해 한다. 그런데 역사적 사회주의를 다루고 있는 장들의 관심은 상당히 협소하다. 서술이 현실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의 자원배분의 효율성, 성장, 경제적 유인구조 등의 양적, 구조적 측면에만 한정돼 있다. 그래서 그 경제체제 아래에서 노동했던 사람들의 ‘실존’은 느낄 수 없다. 사람들의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외된 노동’과 어떻게 같고 달랐을까? 체제는 사람들에게 어떤 욕구를 심어주고, 어떤 충족수단을 얼마나 제공했을까? 사람들은 체제에 어떻게 실망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물음들에는 메아리치지 않는다. 물론 이 책이 경제학자들에 의해, 대안적 경제체제를 모색하기 위해 쓰인 책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불만은 괜한 트집잡기인 것 같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이상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정교한 경제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모든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을 보장하는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경제체제의 메커니즘에만 골몰해 (결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 사람과 경제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심(체제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있는가?)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신고전파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는 변별선이기도 하다.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의 분발이 요구된다.
 다음 아쉬운 점은 책을 다 읽고도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은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유를 탐색해본다면 하나는 대안사회 상의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점, 다른 하나는 같은 책에서조차 다양한 조류의 대안들이 충돌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첫 번째와 관련해서는 책 자체의 한계라기보다는 현실 사회주의 붕괴로 위축된 대안사회의 모색이 이제야 다시 기지개를 피기 시작한 정세의 한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대중운동이 발전하고, 대안세계의 모색이 대중운동과 상호교통하는 과정에서 극복될 것이다. 새로운 사회의 상이 모호한 두 번째 이유는 오히려 책의 장점이 될 수도 있는 요소이다. 책에는 대략 사민주의 경향(스웨덴 모델), 시장사회주의 경향, 사회주의 계획경제 경향 등의 대안들이 (조용하게) 경합하고 있다. 다양한 대안사회의 상들을 비교 검토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집필자의 말을 인용하면,

 “필자들은 글의 내용에 관련하여 전적인 자유재량권을 가지고 집필에 임했다. 필자마다 이념적 입장이나 학문적 관심사에서 작지 않은 편차가 있었기에 사전 협의를 통해 각 장의 내용을 조율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또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는 이 책의 주제에 비추어볼 때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시장사회주의인가? 사회주의 계획경제인가?

 특히 시장사회주의론과 사회주의 계획경제론 사이의 이론적 경쟁이 눈에 띄는데,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줄지는 독자들이 해야 할 판단일 것이다. 시장사회주의론은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사회주의의 자명한 요소라고 보는 전통적인 사회주의 계획경제론을 비판한다. 중앙집중적 계획은 경제의 복잡다양성이 증가할수록 효율적인 자원배분을 심각하게 왜곡시킬 수밖에 없고, 효율적인 자원배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장이 필수적이라고 시장사회주의론은 바라본다. 따라서 시장사회주의론은 국유화나 계획경제가 사회주의적 요소라고 파악하지도 않으며, 대신 시장(즉 분권적 의사결정)과 사회형평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형태를 모색한다. 소련식 계획경제의 몰락은 시장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근거로 활용되곤 한다.
 반면에 사회주의 계획경제론은 시장과 사회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 한다. 시장이 강요하는 무정부적인 경쟁은 경제단위로 하여금 투입/산출의 효율성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게 해, 결국은 축적을 위한 생산 즉 자본주의로 회귀시킬 것이다. 따라서 시장을 지양하기 위한 생산수단 소유의 집중, 이에 조응하는 계획경제는 사회주의의 불변요소라고 주장한다. 또 생산의 의식적인 통제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소련경제의 몰락이라는 조건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론은 소련의 교훈을 반영해 스스로를 보완해가고 있다. 이러한 보완의 노력 중의 하나로 참여계획경제론이 있다. 소련경제는 비민주적인 명령경제 부류였다고 비판하는 참여계획경제론자들은 ‘참여’를 지렛대로 삼아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계획을 활성화하려 한다. 그래서 보다 더 많은 사회구성원의 참여를 끌어내며 효율성을 유지할 아이디어들을 다양하게 내놓고 있다.


반자본주의의 파토스는 꺼지지 않는다

 어쩌면 글을 읽다 사회주의라는 단어에 눈을 뗀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사실 동구권 붕괴 이후에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은 없다는 생각은 너무나 널리 퍼져 있다. 새로운 사회, 사회주의에 대한 모색은 쓸모없어 보인다. 새로운 사회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가?
 이에 대한 질문에 선뜻 답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렇지만 대신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다.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의 몸짓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은 없다고 하지만, 이것을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 지지의 표현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불만을 표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주의는 불만족, 불안정, 고스트레스 사회이다.
 우리는 도처에서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과 끊임없이 접촉하며 살아간다. 매일 새로워지는 상품들의 목록, 모든 공간과 시간을 점거하고 있는 상품들의 광고. 자본주의 사회는 거대한 상품진열장이다. 자본은 사람들에게 새롭고, 더 많은 욕망을 심어준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은 자신이 토해내는 상품들을 화폐뭉치로 바꿔내지 못하고 파산한다. 자본은 상품과 함께 (상품에 대한) 욕망도 생산하는 것이다. 반면에 자본은 욕망을 충족시킬 수단을 뺏어간다. 경쟁력강화라는 명목으로 임금을 억제하고, 구조조정을 통해 일자리를 줄인다. 그 결과는 곧 다수대중의 상대적 결핍이다. 힘껏 욕망을 부풀리고서는 터트린다. 그리고 남는 것은 쭈글쭈글해진 불만스런 마음이다. 욕망의 과잉과 충족수단 과소의 자본주의적 비대칭은 불만족을 일반화한다.
 또한 자본주의는 불안정을 일반화한다. 언제든 가능한 기업의 파산과 주기적인 경기변동이 강요하는 실업의 위협, 그리고 자기 일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의 압박 앞에서 우리는 항시적인 불안정을 느낀다.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는 불안정 고용형태인 비정규직이 느낄 위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가며 산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이지 않을 수가 없다. 회사, 공장에 있는 동안 자본의 통제에 군말없이 따라야 한다. 진정 화나게 하는 일, 자존심을 상처입히는 일, 불공정한 일 등에 일일이 인간적인 반응을 보였다가는 사표를 써야 한다. 자본은 자율적인 인간을 원하지 않는다. 자본의 목적에 제 삶을 동일시하는 타율성을 요구한다. 인류가 쌓아올린 위대한 문화적 성취들에 무관심한 워커홀릭의 전성시대이다. 이뿐인가. 보다 비싼 값으로 흥정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자기계발 경쟁은 캠퍼스를 사막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전반적인 불만족, 불안정, 고스트레스 상태는 자연스럽게 반자본주의의 파토스를 만들어낸다. 반자본주의의 파토스는 자본주의의 산물이자 떼어낼 수 없는 샴쌍둥이이다(불만족, 불안정, 고스트레스를 낳는 고욕구 저소득, 실업, 경쟁, 자본의 통제 등은 자본주의의 불변조건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사회에 대한 고민과 요구는 이러한 반자본주의의 파토스를 양분으로 삼아 자라난다. 자본주의가 계속되는 한 대안사회에 대한 모색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대안은 없다는 유령이 지나가고 다시 변혁과 대안을 요구하는 운동들이 분출하고 있다. 다시 대안사회가 모색되고 있다. 그리고 대안사회를 모색하는 가운데서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영감을 주고 있다(『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역시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주는 영감에 크게 기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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