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간에는 바디우의 ‘사도 바울’을 읽었다. 화장실에서나 틈틈이 보려고 구매한 것이었는데, 읽으며 어찌나 지적 쇼크와 감동을 받았던지 잠까지 줄여가며 읽어버렸다.

그런데 ‘지적 쇼크’라는 표현은 사실 무척이나 과장된 것이다. 먼저 이해가 돼야 쇼크를 받던가 말든가 하지, 대충 글자들을 훑으며 중간중간 간혹 이해되는 구절들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끔 ‘어라, 이것 대단한데!’ 라는 생각도 하고, 이러면서 겨우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뿐이다.

그래도 다시 읽으며 중간중간 든 단상들을 꿰매어 정리해보면 어떤 진전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또 읽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중간에 포기했다. 바디우의 ‘진리’, ‘진리과정’, ‘사건’ 등의 개념을 대략이라도 파악하지 않고서는 더 읽어봐야 별로 나올 것도 없을 것 같아서였다. 바디우가 ‘사도 바울’에서 이 개념들에 대해 직접 서술해놓았으면 다른 책들을 참조해야 하는 수고는 안 들었을 것이라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일단 책장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곧장 떠올린 게 바디우의 ‘조건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 바울’ 마지막 페이지에 “이 책(‘조건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명료해서 ‘존재와 사건’을 위한 입문서로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광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전부터 ‘새물결’ 출판사의 ‘이행총서 시리즈’는 구입해두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터라 바로 구매리스트에 등록해 놓았다. 그러나 사고 싶은 물건을 곧바로 살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지 못한 터라 구매할 날만을 손꼽으며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제 문득 바디우의 ‘진리과정’이라는 개념을 혹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2’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사유 -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 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 문제이다.” -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2

여기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라는 유명한 말도 생각을 전개해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사유는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그 현실성과 힘을 증명할 수 있다. 그리고 실천을 통해서 그 현실성과 힘을 증명한 사유만이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의식 가운데서는 어떤 사유도 자신의 진리성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실천을 통한 사유의 진리성 증명을 ‘검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검증이란 실천의 의미를 단지 진리의 ‘보증자’로만 한정짓는 것이다. 즉 의식에서 생산된 어떤 사유의 잠재적인 진리성을 실제로 확인하는 것만이 실천의 역할은 아니다. 실천의 의미를 품질검사관이 확인도장을 찍는 절차 정도로 축소시키는, ‘검증’이라는 개념이 내포하는 관점은 실천이 또한 진리가 생산되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을 은폐한다. 실천은 단순히 공정을 마친 제품을 검사하는 절차가 아니다. 실천은 그 자체가 진리의 생산공정인 것이다.

이 말은 순수한 의식이 결코 진리의 생산 공간일 수 없다는 말이다. 실천 이전에 순수한 의식의 영역에서 진리를 생산하는 올바른 방법론이란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하다. 진리가 생산되는 곳은 의식과 물질이 상호교통하는 실천이라는 장소이다.

이 말의 의미는 사실 무척이나 까다롭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사유의 현실성을 믿고서 행동한다. 그러나 사유의 현실성은 오히려 실천이라는 계기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알고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행동하고서야 알게 된다. 어쩌면 모든 새로운 도전은 오인(자신이 진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착각)의 산물이다. 진리의 주체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자신의 실천으로써 스스로 증명해보여야 한다. 주체는 진리공정에 개입한다.

주체가 진리공정에 개입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흔한 주/객 인식론에서 주체에게 대상은 오로지 ‘소여’로만 관계한다. 주체는 관조할 뿐이다. 그러나 실천의 인식론에서 주체는 대상을 해체하고, 구성하며 대상에 자신을 기입한다.

여기에 죽어서야 헤어질 것 같은 뜨거운 연인이 있다. 그런데 사랑에 불타고 있는 남자의 친구가 이들의 사랑을 내기에 걸었다. 여자는 다른 남자의 유혹에 굴복할 것이며, 남자는 질투에 미쳐 여자를 파멸시키리라고. 내기를 건 친구는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여자를 유혹했고, 마침내 성공해내었다. 그리고 이를 슬그머니 남자에게 흘렸다. 그러자 남자는 친구의 예상대로 여자를 파멸시켜버렸다. 그들의 사랑은 ‘가짜’였던 것이다.

남자의 친구는 자신의 생각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해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친구의 유혹이 없었다면 연인은 자기들 사랑의 진정성을 자신들의 삶을 통해 온전히 증명해냈으리라는 것이다. 친구의 ‘진리’는 그의 개입을 통해 ‘진리’가 된 것이다.

나는 이 삼류소설같은 이야기가 모든 진리공정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진리가 증명되는 상황이란 주체의 개입을 통해서만 출현할 수 있다. 사유의 현실성과 힘의 증명은 주체적 개입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근거할 때 진리란 단순히 주체 너머의 대상 또는 물질의 의식에의 반영일 수 없다. 의식에 반영되는 대상, 물질이란 이미 주체가 기입된 것이고 실천의 산물인 것이다.

잠깐 다시 삼류소설로 돌아가면, 친구의 개입을 통해 생산된 진리란 다음같은 것이다. 하나, 연인의 불타는 사랑에 의해 은폐되어 있던 파멸의 잠재성. 둘, 파멸의 잠재성을 활성화해낸 개입의 유효성.

이제 비약의 비약을 거듭해, 나는 모든 진리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보고일 뿐이라고 말하겠다. 1)현상에 의해 은폐되어 있던 잠재된 힘. 그리고 2)잠재된 힘을 해방시킬 주체의 역능. 따라서 진리의 대상이란 ‘현상’이 아니라, 현상을 주조해내는 이면의 ‘힘’이다.

이런저런 별 쓸모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는데,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바디우의 ‘진리’, ‘진리과정’, ‘사건’ 등의 개념을 이런 생각에 비추어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 것인가라는 것이다.

진리가 실천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고, 주체의 개입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은 어떤 계기를 통해 진리를 생산하는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앞서 “인간은 알고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행동하고서야 알게 된다. 어쩌면 모든 새로운 도전은 오인(자신이 진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착각)의 산물이다”라고 말했다. 진리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오인 혹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에는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믿음의 대상이 ‘사건’이고, ‘사건’을 ‘믿음’으로써 진리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게 ‘사도 바울’의 내용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거의 알지도, 고민도 안 해본 이야기를 하려니 글이 자꾸 엉키고, 스스로도 창피한 마음이 들지만 좀 더 용기를 내서 더 써내려가도록 하겠다.

바울에게 사건은 ‘예수의 부활’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부활을 믿고, 이러한 믿음에 근거한 실천을 통해 부활이 의미하는 ‘힘’의 현실성을 증명해내었다. 즉 진리를 생산해내었다. 인간은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다는 진리를 말이다. 사건은 주체를 통해 보편화된다. 예수의 부활은 모든 인간의 부활로서 회귀한다. 진리란 보편화된 사건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먼저 믿음이 없다면 실천도 없었을 것이요, 그렇다면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는 순전히 우화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진리의 주체는 사건을 믿는 주체이기도 하다.

바울의 사건이 예수의 부활이었다면, 혁명가의 사건은 무엇일까? 난 혁명가에게 있어 사건은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혁명의 의미는 억압받는 민중이 스스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혁명가는 ‘민중의 자기발전’을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 근거해 역사에 개입해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개입으로써 역사는 해방된 사회를 향해 진군해간다는 진리를 증명해낸다.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질곡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라는 것, 사회주의의 필연성에 대한 사상은 사회주의 혁명가의 개입으로써만 진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난 바디우가 이러한 사상과 사회주의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이념을 우주에 대한 총체적 인식으로 파악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 인식을 이미 진리로 여긴다면 우리는 결코 ‘진리’를 즉 사회주의를 생산해낼 수가 없다. 이러한 철학적 태도 내에서 사회주의자는 대기주의로 빠지거나, 소련붕괴 같은 사건에 사상을 청산해버리거나, 무지자에 대한 지배를 재생산하게 된다.

사회주의자는 사상에 믿음으로서 관계해야만 진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은 실천하는 사회주의자를 정초하는 사건이다. 믿음의 대상이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믿음의 대상이 아닌, 이론적 판단의 소재로 전락시키는 순간 그는 결코 진정한 사회주의적 주체가 될 수 없다.

이제 정리와 한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로 글을 마치겠다.

“사회주의적 주체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믿는 주체이며, 주체적 개입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의 힘과 현실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자이다.”

91년 청산주의가 사회주의 진영을 휩쓸 시, 가장 똑똑했던 이데올로그들이 가장 먼저 청산하고 떠났다고 한다.
똑똑하고 잘난 것은 사회주의적 주체를 재생산하는데 있어 전혀 필요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스팅을 하기 이전에 내게 ‘사건’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문득 떠오른 게 ‘광주민중항쟁’이었다. 어린 마음에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알았을 때 흐르는 눈물과 손에 베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었는데, 슬픔과 분노 가운데서도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을 사수했던 최후의 투사들이었다. 난 그때 인간은 ‘자기’와 ‘이익’이 아닌 무언가를 위해 싸우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체험했다. 더욱이 그들은 너무나도 평범했던 사람들이었다.
5월의 광주를 생각하면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임) ‘사도 바울’은 또한 역사에서 간혹 나타나는 예측하지 못한 대중의 급진화에 대한 이해의 열쇠를 제공하는 것 같다. 집단적 ‘믿음’에 의한 집단적인 주체화. 그리고 역사적인 현상으로서 진리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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