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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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지구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스스로를 ‘국제 사회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생태주의자’라고 밝히는 마이크 데이비스 교수는 <슬럼, 지구를 뒤덮다>(이하 <슬럼>)에서 지구는 “PLANET OF SLUMS” 라고 한다. 생명의 근거인 푸른 바다와 숲도 아니고, 문명의 상징인 마천루도 아닌, 슬럼이 지구를 대표한다니 꽤 불길하게 들린다. “한 사람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은 그가 사는 주택의 위상에 따라 형성되는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하는데, 혹 여러분이 슬럼을 범죄와 타락의 온상이 아닌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삶의 터전으로 바라본다면, <슬럼>은 편안한 책이 아닐 것이다. 책 어디를 펴 보아도 “여기가 지옥이다. 견디어라”를 말해주는 통계와 묘사를 확인할 수 있다. 가히 신자유주의 시대 세계 도시 빈곤화의 참담한 실상에 대한 최상의 고발서 중 하나랄 수 있다. 그런데 혹 좋은 취지의 책이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통계와 구체적인 묘사가 연상되어 지루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슬럼>은 250여 페이지라는 많지 않은 분량으로, 세계 도시빈곤에 대한 다각도의 접근 및 그 원인 분석 등의 각각 고유한 8개 주제들을 독자에게 구체적으로 전달하려는 의도로서만 자료들을 제시함으로써 필요한 만큼의 말만 하는, 마치 유능한 탐정이 쓴 사건보고서 같은 책이다. 그리고 탐정이 범인을 찾아내듯이, 데이비스 교수는 세계 도시 빈곤을 토해내는 괴물로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고발한다. 우리는 이로써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범죄 목록에 세계 도시 빈곤을 추가할 조서를 얻게 된 셈이다. 이것으로 자본주의를 단죄할지 말지는 우리의 몫이다.


지구를 뒤덮는 슬럼 : 전지구적 프롤레타리아화의 짝패

 그럼 <슬럼>의 주요내용 중 몇 가지를 대강 살펴보자.
 먼저 저자는 서두에서 전지구적 도시화의 물결 및 1980년대부터의 새로운 도시화 형태를 밝히고 있다. 현재 인류는 최초로 도시인구가 농촌인구보다 많은 진정한 전지구적 도시화에 들어서고 있으며, 그 동력은 대부분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개발도상국 도시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의 제3세계 도시화는 공업성장에 따른 농촌 잉여노동력 흡수라는 기존 패턴과는 다르게 전반적인 도시경제 침체 및 쇠퇴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역설적인 현상은 농촌경제 붕괴에 따른 급격한 프롤레타리아화(무산자화) 때문이다. 그리고 제3세계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는 한국의 97년 IMF구조조정 같은, 채무위기를 틈탄 국제금융기구의 시장개방 요구와 구조조정 프로그램 강요의 결과였다. 시장개방으로 거침없이 치고 들어오는 선진 기업농과의 경쟁에서 보조금 축소폐지로 무장해제당한 제3세계 소농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생존수단(토지)을 박탈당하고, 이제는 농산물이 아닌 노동력을 팔기 위해 도시로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경제의 침체와 대규모 농촌->도시 이주의 결합은 거대규모의 도시빈곤으로 이어졌다. 일자리는 없는데 잉여노동력은 넘치는 조건에서 당연하게도 실업과 빈곤은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영구적인 특징이 되었다. 그리고 사회적 부로부터의 항상적인 배제에 결박되어 있는 도시 빈민의 주거형태는 슬럼이 될 수밖에 없다(사실 슬럼이라는 단어 자체가 빈민층의 거주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또한 최악의 주거환경이라는 부가적인 의미도 갖는다). 그런데 슬럼의 인구는 얼마나 될까? 슬럼에 대해 매우 제한적인 기준을 갖고 있는 UN 연구자들조차도 전세계 슬럼의 인구를 10억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 낮추어 잡아도 세계 인구의 1/6 정도(!)인 것이다.

 슬럼은 기본적으로 인구과밀, 열악한 비공식 주택, 안전한 식수와 위생설비의 부재, 주택보유의 불안정 등의 특징을 갖는다. 뉴욕, 서울 같은 선진국형 도시에서는 상류층, 중산층이 교외로 주거지를 옮기는 도심공동화가 진행됨에 따라 도심 주변에 슬럼이 형성되었다가 재개발로 다시 사라지는 패턴을 보였다면, 현재 제3세계의 슬럼화는 도시 주변부의 팽창, 거대화라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남아있는 유일한 재산인 자기 몸과 가족을 이끌고 도시에 당도한 농촌이주자들이 애초에 공식적인 주택을 구입하거나 빌릴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도시 외곽의 미개발된 공유지나 사유지, 버려진 땅을 무단 점유해서 스스로 집을 짓는다. 이 때문에 제3세계 도시의 슬럼확장은 곧 도시확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로, 수도, 전기 같은 공공설비는 애초에 있지도 않는 미개발지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슬럼주민들은 기본적인 공공서비스를 거의 누릴 수 없는 조건에서 엄청난 인구과밀이 초래하는 물부족, 오물 쓰레기의 집적, 오염, 소음, 사생활 노출 등의 비인간적 환경을 견뎌내야 한다. 이로 인한 잦은 병치레, 유아의 때이른 죽음, 전염병의 창궐, 대형화재 등은 슬럼주민의 일상사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위험은 주거의 불안정한 법적 지위에서 온다. 무단 점유라는 원죄가 슬럼주민을 언제든 내쫓길 수 있는 상태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지주들과 개발업자들은 미개발지가 택지로 바뀌는 마술적 효과를 노리고서 처음에는 무단 점유를 용인했다가 추수의 계절이 다가오면 인정사정없이 슬럼을 소탕한다. 이렇게 쫓겨난 주민들은 점점 더 습지, 범람지대, 화산 기슭, 불안정한 경사면, 쓰레기장, 화학폐기물 처리장, 철도변, 사막 가장자리 등의 대형재난의 위험과 상존해야 하는 곳에 새 둥지를 틀어야 한다. 사례를 하나 들어본다면, 카라카스(베네수엘라의 수도)의 불안정한 경사면에 위치에 있던 슬럼에 1999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가 닥쳐 약 3만 2,000명이 사망하고, 14만명이 집을 잃었던 대참사가 있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처럼 비참한 도시의 빈곤화, 슬럼화가 전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3세계 국가들은 도시 빈곤의 새로운 급증에 직면해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만약 이들이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민중의 국가라면 먼저는 서둘러 슬럼지구에 공공시설을 구축하고, 다음으로는 공공주택을 제공하여 주택문제를 해결하고, 근본적으로는 도시빈곤의 해결을 위해 일자리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3세계 국가들은 정확히 이에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 IMF, 세계은행 같은 국제금융기구가 제시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정부지출, 공공부문을 획기적으로 줄인 것이다. 덕분에 공공부문의 축소로 일자리는 더욱 줄어 공무원들이 도시빈민의 대열에 새로이 동참하게 되었고, 공공주택사업이나 빈민을 위한 인프라 구축은 오직 추억으로만 말해지고 있다. 더욱이 국가와 상류층이 야합하여 그나마 벌어지는 공공사업은 상류층의 편익을 위한 도시환경 재구성에 집중되고 있다. 즉 고위공무원, 군장성, 전문직,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쇼핑엔터테인먼트 시설, 슬럼을 우회하여 도심과 교외 주택단지를 연결하는 도로 등의 건설과 도시미화 사업, 재개발을 위한 슬럼 소탕 등이 빈민을 위한 인프라 구축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국가의 배신과 짝패를 이루는 것이 제3세계 탈식민 엘리트의 배신이다. 제3세계 엘리트는 더럽고 위험한 슬럼을 피해서 사설경비에 의해 지켜지는 폐쇄형 주택단지와 뉴욕과 파리를 본뜬 쇼핑엔터테인먼트 시설을 오가며 과시적 소비와 향락을 누리고 있다. 이들에게 도시는 ‘멋진 신세계’이다. 그러나 슬럼주민들은 이들이 버리는 찌꺼기로 자신들의 밥상을 차려야 한다.


제3세계 도시빈곤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슬럼>의 주요내용 몇 가지를 대강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1980년대 이후의 제3세계 도시빈곤이 기존 제3세계 빈곤의 주요형태였던 저개발의 빈곤(농촌빈곤)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난한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저개발의 빈곤은 낮은 농업생산력과 인구증가 및 자연재해에의 취약성 등을 특징으로 하며, 따라서 전-자본주의적 빈곤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3세계 빈곤의 새 주요형태로서 도시빈곤은 일단 도시를 무대로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실업과 불평등의 빈곤이라는 점 때문에 자본주의적 빈곤이다. 저개발의 빈곤, 소농의 빈곤이 낮은 농업생산성 때문이었더라면, 도시빈곤은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못하는 상태, 즉 실업에 기인한다. 그리고 불평등의 빈곤이란 폐쇄형 고급 주택단지와 슬럼의 확연한 대비가 보여주듯이, 불평등한 부의 분배와 이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 도시빈곤에 수반된다는 것이다. 실업과 상대적 박탈감이 낳는 빈곤의 고통은 자본주의의 고유한 현상이다.

 이러한 제3세계 저개발 빈곤의 자본주의적 빈곤으로의 전환과 제3세계의 전지구적 자본주의로의 편입은 동전의 양면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채무위기를 틈탄 IMF와 세계은행의 시장개방 강요로 제3세계는 세계시장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편입은 생계형 농업을 경영하며 잉여농산물을 인근 도시에 팔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제3세계 소농들을 전지구적 농업생산의 잉여 농업노동력으로 탈바꿈시켜 버렸다. 이제 제3세계 도시주민들은 인근 농촌의 것이 아닌 선진 기업농의 과잉생산된 농산물을 소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제3세계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광범위한 프롤레타리아화가 발생했고, 이들 잉여노동력들은 도시로의 엑서더스를 감행했다.

 그러나 도시경제는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지 못했다. 국가주도 수입대체공업화 프로젝트가 채무위기로 중단되면서, 도시경제는 이미 성장을 멈춘 상태였다. 새로운 성장 프로젝트로 국제금융기구는 외국인투자에 대한 규제를 풀고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하여,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라고 했다. 그러나 초국적 자본은 투자지역을 선별했고, 이로부터 배제된 지역은 낙후된 지역으로 고착되었다. 그리고 제3세계 경제엘리트는 세계화를 제1세계의 수익성 높은 자산을 더 많이 획득하는 기회로 여길 뿐이었다. 더 이상 제3세계에는 누구도 투자하지 않는다. 상품과 자본의 장벽없는 자유로운 이동이 이뤄지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자본축적은 보다 많은 수익을 보장하는 곳에서만 이뤄질 뿐이다. 이제 실업은 더 이상 국민경제 차원에서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세계 어디든 투자할 수 있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한 나라의 프롤레타리아는 전지구적인 산업예비군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이 때문에 제3세계 도시 실업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일부인 것이다.

 이처럼 제3세계 도시빈곤은 자본주의적 빈곤이며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따라서 제3세계 도시빈민의 가난을 끝장내기 위한 싸움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투쟁일 수밖에 없다. <슬럼>의 저자 또한 “인간 연대의 미래는 도시 빈민이 전지구적 자본주의 내에서의 최악의 주변성을 전투적으로 거부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밝힌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도시 빈민에게서 전복적 역량을 기대해도 좋은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데이비스 교수는 <슬럼>의 속편에서 답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금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슬럼 기반 투쟁의 역사와 미래”에 관한 책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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