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워크
E. F. 슈마허 지음, 박혜영 옮김 / 느린걸음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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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사회 노동소외의 극복을 위하여

 

 

굿 워크는 말 그대로 좋은 노동, 그리고 중간기술과 영적 가치에 관한 책이다. 저자인 슈마허는 산업사회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인 석유의 대량소비에 의존하는 현대 산업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그 끝이 멀지 않았다. 또한 산업사회는 노동과 삶의 질을 극적으로 저하시켰다. 이런 병적인 산업사회의 한가운데에는 거대기술이 존재한다. 거대기술은 중앙집중적인 권위와 자원 소비의 토대이며, 인간을 기계 부속품처럼 전락시키며 노동자에게서 창의와 자유를 앗아간다. 때문에 무엇보다도 거대기술이 극복돼야 한다. 그래서 슈마허가 제안하는 게 바로 중간기술이다. 중간기술은 자본집약과 노동집약의 사이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것이다. 중간기술을 통해 많은 자본이 없어도 각 지역의 특성과 필요에 적합한 재화를 지역에서 집적 생산할 수 있다. 거대기술이 대량소비와 환경파괴, 실업, 위계제의 토대라면, 중간기술은 한 곳으로 집중된 생산능력을 해체하여 자연과의 조화, 충분한 일자리, 작업장 민주주의의 토대가 돼줄 것이다. 끊임없이 이윤과 성장만을 쫓는 현대 산업사회와는 전혀 다른 지반 위에서 인류는 다시 노동의 진정한 의미와 삶의 가치를 일깨워야 할 것이다. 우리 삶의 진정한 목적은 물질적 풍요가 아닌 스스로를 완성해가는 데에 있으므로.

 

저자의 주장, 생각에 전폭 동의할 수 있는 책은 매우 드물다. 때문에 당연한 걸 굳이 여기서 내 생각과의 차이점을 밝히거나 저자를 비판하거나 하는 건 필요해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굿 워크는 슈마허의 대중강연집이라 논리나 구성이 엄밀하지는 않다. 대신 눈앞에서 이야기하는 듯 쉽고 친절하게 자신을 생각을 들려준다. 여기에 쌍심지 켜고 달려드는 건 속 좁아 보인다.

 

글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존경하는 사상가 두 명이 겹쳐 보였다. 슈마허는 노동의 세 가지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는 인간 삶에 꼭 필요하고 유용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선한 청지기처럼 신이 주신 재능을 잘 발휘하여 타고난 각자의 재능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협력하기 위해서입니다.”

 

슈마허는 책 중간에 노동과 삶의 의미와 가치에 무관심한 유물론을 비판하는데, 번역자가 물질주의를 유물론으로 잘못 번역한 것인지, 슈마허가 물질주의와 같은 의미로 유물론이란 말을 사용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철학의 한 조류로서 유물론은 상식적인 의미의 물질주의와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가장 악명 높은 유물론자인 마르크스가 청년 시절에 쓴 글에서 노동에 관해 피력한 입장과 슈마허가 말한 노동의 목적이 대동소이하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유적 본질의 실현으로 보았다. 여기서 유적 본질이란 다른 동물종과 구분되는 인간종에 고유한 특성으로서, 다른 동물들이 본능에 의해 자연과 관계를 맺는 데 반해, 인간은 구상하고 상상하며 이를 자연을 통해 실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생존의 수단이면서 자기실현의 수단이기도 한데, 마르크스는 더 나아가 인간이 노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노동과정에서의 사회적 관계 즉, 생산관계를 사회와 역사의 진정의 토대로 보았고,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재화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도 생산한다고 말하였다. 마르크스의 노동관과 슈마허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소외와 이의 극복에 대해 마르크스는 생산관계의 변혁과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역할을 강조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고 중간기술에 대한 슈마허의 강조가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성취한 중앙집중화된 생산력을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통해 인수만 한다면 노동소외가 극복될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다. 실제로 이렇게 생각한 혁명가들도 없었을 것이다. 생산과정에 대한 민주적인 노동자통제가 최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은 폭넓은 분권화를 요구하며, 높은 수준의 분권화는 슈마허가 말하는 중간기술 같은 새로운 물질적 토대를 전제한다고 보인다.

 

마르크스 말고 또 생각난 사상가는 에리히 프롬이다. 슈마허가 책의 후반부에 이를수록 강조하는 영적 가치에 대한 주장이 프롬의 사상과 닮아보여서였다. 옮긴이 글을 보니 슈마허가 말년에 이르러 가톨릭 사상가들을 받아들여 무신론에서 돌아섰다던데, 에리히 프롬도 에크하르트 같은 가톨릭 사상가들을 자주 인용했다. 그래서 슈마허가 말하는 복음서나 영적 가치가 신비주의적이거나 노인의 약해진 소리 같은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프롬은 사회분석과 정신분석을 결합시켰던 초, 중기를 지나 후기에 이르면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자질 향상에 천착하는데, 여기서 종교의 근본을 새롭게 해석한다. 인류 역사에서 예수, 석가모니 등의 가르침들은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불안에 대한 진보적 해법으로서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가르침이 가리키는 것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참된 고양과 자유이며, 이런 맥락에서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신론과 인간해방을 목표하는 유물론은 서로 조우할 수 있다고 프롬은 말했다. 슈마허도 이런 맥락에서 영적 가치의 추구를 말한 것이라 읽었다. 반면에 오늘날 세속적인 종교의 대개 모습은 물질주의의 다른 판본과 다를 바 없다.

 

몇 시간 정도면 쉬이 읽을 분량의 책인데 읽는 내내 노동의 소외와 이의 극복, 그 방법, 참된 가치 등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슈마허는 생각에 이어 행동하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사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동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각자의 마음속에서 확신과 결심, 남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쌓아가는 일입니다. 문제를 이해한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압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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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와 민중권력

 

 

한 혁명가의 죽음

 

지난 35, 우고 차베스가 암투병 끝에 서거했다. 그를 설명하는 최선의 말은 아마 차베스 본인이 한 말일 것이다. “가난을 끝장내는 유일한 방법은 빈민에게 권력을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빈민에게 권력을 주기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고, 모든 가난한 자들 즉, 베네수엘라 민중은 여기에 21세기 유일한 혁명으로 응답해왔다. “민중권력을 창조하라!” 이 선언이 바로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혁명의 정신이다.

 

정치무대에서 차베스가 처음 등장한 해는 `92년이다. 육군 중령이었던 차베스는 부패정권을 쓰러트리기 위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그럼에도 이때, 당장의 패배를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미래의 승리를 기약하는 당당한 모습을 통해서 당시 암담한 현실을 버텨내던 민중 사이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이에 힘입어 `98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었고, 이후 14년간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볼리바리안 혁명을 강력한 카리스마로 이끌어왔다. 이제 차베스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겠다. 대신 그가 마지막까지 헌신했던 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볼리바리안 혁명 속에서 차베스의 고결한 이상과 강한 의지는 계속 살아갈 것이다.

 

반신자유주의 개혁

 

지구 반대편 남미대륙에 위치한 이 나라의 현재 국호는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공화국이다. 차베스가 집권 후 곧바로 추진한 헌법 개정이 `99년 국민투표에서 통과됨으로써 국호가 바뀌었다. 새로운 헌법은 볼리바리안 헌법으로 불리며,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서 볼리바리안의 의미는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인 시몬 볼리바르를 뜻한다. 볼리바르는 1810,20년대에 스페인에 맞서 식민지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였다. 차베스가 볼리바르를 호명하며 불러내고자 했던 건 지배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정신이었다. 과거의 지배자가 스페인이었다면, 오늘날 남미대륙을 도탄으로 빠뜨리고 있는 건 미국이 전 세계에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이다.

 

베네수엘라에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건 경제파탄과 `89년의 IMF협상을 통해서였다. 당시의 페레스 정권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재정긴축과 사회보장 축소, 민영화, 시장 자유화 등을 합의해주었다. 이를 발표한 지 11일 만에 수도 카라카스에서 대중교통비가 두 배가 오른 것에 분노한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수천 명이 희생당했다. 이후 차베스가 집권하기까지 십여 년 동안 빈곤율이 64.2%까지 증가하고, 석유회사를 비롯한 기간산업이 민영화돼 물가가 치솟았다. 반면에 소수가 독차지한 부는 이를 틈타 더욱 커졌다.

 

신자유주의는 가뜩이나 불평등한 사회를 더 비참한 곳으로 전락시켰고, 구조적 모순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깊어진 것이 볼리바리안 혁명의 배경이다. 새 헌법을 제정한 이후 `01년에 차베스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경제와 사회의 복구를 목표로 49개 개혁법안을 통과시킨다. 이중 탄화수소법은 석유산업의 민영화를 중단시키고 국영화와 석유이익의 국민경제 환원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토지법은 개인 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정부가 사유의 미경작지와 휴경지, 도시 유휴지를 징발해 농민과 도시빈민에게 분배하려는 조치다. 또 협동조합법은 민중의 자조 노력에 협동조합이라는 공식지위를 부여해 정부의 지원을 보장해준다.

 

그런데 기존의 기득권세력은 개혁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고 군대와 경찰, 관료, 자본가, 언론, 어용노조가 총집결해 `02년에 군사쿠데타와 경제파업을 연달아 일으키며 차베스 정권을 전복시키려했다. 위기의 순간에 차베스를 구한 건 정치권력도 군대도 아니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민중이 새 헌법과 개혁을 수호했다. 그리고 이 순간 진정한 혁명이 시작된다.

 

민중권력으로의 급진화

 

볼리바리안 혁명의 특징은 위로부터의 개혁이 기득권층의 반발에 부딪쳐 위기에 처하자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급진전됐다는 점이다. 민중은 반혁명세력으로부터 차베스와 헌법, 개혁을 수호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과 미래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를 조직했고, 나아가 엘리트들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다. 차베스는 현명하게도 반혁명세력과 타협하지도, 민중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제한하지도 않았고, 민중의 요구에 발맞추어 함께 전진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역할을 계획하고 관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하게 분출하는 요구들을 지원하고 조정하는 것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이는 반혁명 시도에 언제든지 동참할 수 있는 국가관료와 변화할 뜻이 없는 관료기구에게 혁명을 맡길 수 없다는, 시행착오로 얻은 교훈이기도 했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관료주의를 민중의 자치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분명해졌다.

 

민중권력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02년 겨울에 자본가들이 직장폐쇄를 단행하고 물자를 파괴하며 경제파업을 벌이자,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스스로 생산을 재개시켰다. 차베스는 이런 공장들을 국가가 인수하도록 해 노동자 투쟁을 지원해주었고, 국유기업에는 자주관리와 공동경영을 도입했다. 베네수엘라에서 기업과 경제의 사회화는 계속되고 있으며, 노동자들은 무력한 피고용인에서 일터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한편, 비교적 소규모 단위에서 일반적인 협동조합은 백만 명이 넘는 농민과 노동자를 포함하고 있다. 협동조합의 성장은 구성원들 사이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의 성숙과 민중이 스스로 경제활동을 조직하는 역량의 진전을 반영한다.

 

노동자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베네수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06년부터 조직된 공동체평의회이다. 공동체평의회는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수백가구로 이루어지며, 해당 지역주민의 요구를 반영한 정책을 수립하고 국가재정을 배분받아 집행까지 한다. 한마디로 동네 자치이고, 국가의 의사결정과 기능이 수 만개의 공동체평의회로 이전돼 국민 모두가 의원과 공무원이 되는, 차원이 다른 참여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이다. 물론 아직까지 공동체평의회가 기존의 국가를 대체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베네수엘라 민중이 전인미답의 한 발을 내딛은 건 틀림없다.

 

이중권력의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에서는 특이하게도 지배계급의 재산, 관료기구 같은 구체제가 온존하면서도 민중권력이 등장해 활력을 키워왔다. 그동안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고 불평등도 완화돼왔다.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으로 민중의 삶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여기에는 차베스의 지렛대로서의 역할이 무척이나 컸다. 이런 맥락에서 차베스는 민중에게 새로운 사회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차베스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새로운 사회로 가는 문이 잠겼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문 밖으로 걸어 나와 더 전진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이들이 제2, 3의 문들을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국가에 모순적인 두 힘이 나란히 존재하는 이중권력의 상황이 언제까지고 평화롭게 계속될 수는 없다. 그동안 민중권력이라는 새로운 사회의 씨앗과 함께 낡은 사회와의 갈등과 투쟁의 여지도 더불어 커온 셈이고, 구체제는 파괴될지언정 스스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볼리바리안 혁명과 베네수엘라 민중의 승리를 응원한다.

 

더 읽을거리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베네수엘라, 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다

사회주의는 가능하다 -베네수엘라 현장 활동가들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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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란 무엇인가
바츨라프 스밀 지음, 윤순진 옮김 / 삼천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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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용하는 건 거대한 에너지 흐름의 극히 일부라는 게 가장 기억에 남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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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란 무엇인가
바츨라프 스밀 지음, 윤순진 옮김 / 삼천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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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의 모든 것, 모든 것으로서 에너지

[서평]에너지란 무엇인가

 

 

어느 나라 이름인지도 짐작인 안 가는 바츨라프 스밀이라는 사람이 쓴 <에너지란 무엇인가>를 읽게 된 첫 번째 이유는, 물론 검색으로 가장 먼저 찾은 책이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내 의문에 가장 부합하는 제목을 가진 책을 딱히 피할 도리는 없었다.

 

최근의 관심사가 바로 에너지인데,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생태위기에 대해 부쩍 관심이 일었고, 겨울철 에너지 빈곤 이슈를 가까이 접하면서 특히 에너지 위기와 대안에 관한 관심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런데 호기심은 많고 아는 건 없으니,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듯 에너지의 말뜻부터 알아보기 위해 <에너지란 무엇인가>를 사서 출퇴근길에 틈틈이 읽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 읽고 나도 머릿속에 들어간 건 별로 없는 듯하다. 책이 모자라서라기보다는 내가 모자라서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책에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먼저는 에너지에 대한 모든 것이라고 할 방대한 내용들을 너무 짤막짤막하게들 다룬 것 같다. 그러니 아는 게 없는 독자 입장에서는 무엇을 말하든 수긍하거나 더 알아보기 위해 다른 책을 뒤져봐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다음의 문장이 그렇다.

 

결과적으로, 미래 에너지 공급의 가장 합리적인 전략은 전환 효율의 향상과 전체적인 에너지 수요의 비율(증가율?) 감소를 결합시키고, 혁신적인 원자로(핵융합?)를 개발하는 동안 원자력을 선택지로 열어 두며 비화석연료원의 기여를 경제적으로 실현 가능하고 환경적으로 수용 가능할 정도로 빨리 증가시키는 것이다.” (가로 안은 문맥 상 의미... 번역이 매끄러운 편이 아니다.)

 

말인즉, 화석연료에서 비화석연료로 에너지 생산 기반을 이행시키는 동안 원자력 발전을 상당 부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는 이 주장을 논박하는 데 책 여러 권을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위의 주장과는 다르게 원자력을 일시적이라도 화석연료 감축의 대체수단으로 고려하지 않는 실제 계획도 세워졌다. 독일은 새로운 에너지 콘센트에서 전체 전력 소비량 중 재생에너지 비율을 2020년까지 35%, 2050년까지 85%로 늘리고, 대신 원자력은 2030년까지 17% 정도를 유지하다 2050년이면 완전 폐쇄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와는 반대로 이명박 정부는 2030년까지 원자력 발전비중을 40%대로 늘리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바츨라프 스밀이 제안하는 길을 걷는 셈인데, 저자가 이와 관련한 몇 페이지의 짧은 글 가운데서 내세우는 핵심 근거는 다음과 같다.

 

에너지 불평등이 존재하고 사회하층이나 발전이 필요한 국가에서의 수요 증가 등으로 에너지 총소비량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화석에너지의 가격 상승과 기후문제로 인해 대체에너지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것이다.

현재 기술수준에서 풍력이나 태양을 이용한 신재생에너지 공급은 날씨로 인한 변동성으로 기저발전에는 부적합한 면이 있는 등 화석에너지를 충분히 대체할 수는 없다.

근래 원자력의 안전성이 많이 제고됐다.

결론적으로, 대중이 수용만 한다면 원자력은 대체 가능한 유력한 에너지이다.

 

그런데 에 대해서 탈핵 환경단체들은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기술적 개량으로도 근본적인 위험성을 줄일 수 없다는 게 바로 원자력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 관련해서는 두 세대 안에 신재생에너지로 화석에너지를 대체하겠다는 독일의 에너지계획이 반박하고 있다. 한편, 과 관련해서는 현재의 에너지 불평등, 에너지 빈곤이나 저발전의 문제를 에너지 총투입을 계속 증가시켜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불평등한 사회구조 가운데서 에너지 투입 증가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뿐이다. 반대로 평등한 사회는 에너지 불평등의 해결과 에너지 소비 감소를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원자력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섣부르게 주장할 수는 없다. 이는 번역자도 후기에서 역시 지적하는 책의 문제이다.

 

책의 가장 앞장에 쓰인 저자의 이력이라면 보다 전문적인 견지에서 자기 주장을 풀어나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쉽게도 책에서 이를 기대할 수는 없다. 교양서적이라는 책의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런데 방대한 내용을 통째로 다룬 게 장점도 있다. 에너지의 수많은 다양한 형태들을 조금씩이더라도 한 책에서 보고 배울 있다는 건 좋은 점이다. 특히 지구에서부터 인류의 역사, 현대문명, 일상생활로 옮겨가며 각 차원에 해당하는 에너지 형태와 전환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서술구조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고도의 추상적 개념인 에너지에 대해 핵심적인 뭔가를 알려주는 듯하다. 그래서 에너지란 무엇일까?

 

책을 읽고 나서 나름대로 내린 답은, “에너지란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 에너지는 만물에 편재하고 만물을 생성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우리는 만물 속의 거대한 에너지 흐름 속에 살고 있는 셈이고, 이 에너지 흐름을 우리에게 유용하게 전환시킬 줄 아는 게 바로 문명이다. 그리고 에너지 전환에 대한 지식과 기술의 축적이 문명의 단계를 나눈다.

 

현재 중요한 건 우리 화석연료 문명이 지속가능하지 않고 길어봐야 두 세대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그 끝을 가까이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생태적으로 올바르고 합리적인 대안을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책은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한다. 저자가 믿어 의심치 않는 과학과 기술이 마법이지는 않는데 말이다. 설령 과학과 기술에 마법같은 힘이 생기더라도, 누가 지팡이를 휘두르는지가 결정적이지 않을까? 사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집단이 통제되지 않는 지식으로 환경과 지구, 미래를 망치는 과학소설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서사이다. 문제는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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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의 역습 - 무일푼 하류인생의 통쾌한 반란!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최규석 삽화 / 이루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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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의 역습& 끼가 있는 반란

 

 

1.

  스스로는 읽지 않았을 책인데 읽게 되었다. 역시 첫 느낌은 실망스러웠다. 1장에 가난뱅이 생활 기술이라고 몇 가지 써났던데, 형편없는 자취생활을 해본 적이 있어, “이게 뭐시라고...” 생각하며 시큰둥하게 읽어 내려갔다. 나도 길바닥에서 자봤단 말이야!

 

  책을 읽기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이 책이 그저 그런 탈노동운동적 저항담론중의 하나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가난뱅이의 역습이 출간된 2009년에 누군가 쓴 소개글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이 비호감을 형성했다. 책을 끝까지 읽어 보니, 그 소개글이 딱히 잘못 전달한 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읽고 나서 비호감이 호감으로 바뀌었다. 2장 이후부터 저자인 마쓰모토 하지메가 본격적으로 말하는 연대반란이 틀린 말이 아니고, 유쾌해 보이고, 무엇보다 끼가 넘쳐 보여, 내가 하고 싶은 운동과는 차이는 있지만 감탄했다.

 

 

2.

  “말하자면정사원으로 일하면서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집도 사고해서 이제는 우등반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자네! 우쭐거릴 일이 아닐세! 안된 애기지만, 자네도 이미 각 잡힌 가난뱅이란 말씀이야. 진짜 우등반이란 말이지, 잠깐 일을 쉬거나 몇 년쯤 아무것도 안 해도 저절로 돈이 굴러 들어오는 시스템을 만들어놓은 놈들이라구. 이런 놈들은 무지무지 노력하고 무지무지 재수가 좋아야 해. 그리고 남을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릴 용기가 있어야 한단 말이지.” (11p)

 

  마쓰모토에게 부자란 저절로 돈이 굴러 들어오는 시스템을 만들어놓은 놈이고, 가난뱅이란 그 나머지이다. 가난뱅이도 다 같은 가난뱅이는 아니다. 스스로를 우등반이라고 착각하며 시스템의 부품으로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다. 물론 마쓰모토는 강제노동 수용소를 탈출해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며 사는 가난뱅이가 되자고 한다. 다만 문제는 시스템 밖에서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다.

 

 

3.

  1장에서는 다소 궁상스럽게 보이는, 이끼고 살아가는 노하우들을 적어 놓았는데, 정말 들어줄만한 건 2장부터이다. 마쓰모토가 제안하는 자활의 방법들을 압축해보면 자율협력정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먼저는 부자들이 만들어놓은 시스템 밖에서 살아가야 하니, 무에서 유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것을 자기 힘으로 고민하고 결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이 말이 농촌에서의 자급자족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요는 기업과 정부가 구축해놓은 타율적 영역을 벗어나 물자가 보다 자유로운 원칙에 따라 흐를 수 있도록, 자율적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마쓰모토가 생각해낸 건 재활용 가게였다.

 

  “신품은 돈이 남아서 쩔쩔매는 부자들이나 사라고 해. 그런 놈은 헤헤 속아서 정신없이 새것을 사고 헌것을 버리니까, 우리는 그런 바가지 씌우는 경제 시스템에서 밀려난 것, 즉 중고품을 모아서 가난뱅이의 재산으로 돌고 돌게 하면 된다구.” (75p)

 

  물자가 돌고 돌기 시작하면 경제문제들이 해결되기도 하지만, 또한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들, 지역 주민들과 관계를 트고 맺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 끈끈한 협력도 가능해진다. 서로 부족한 게 보이면 채워주고, 서로 의지하고, 함께 일들을 벌이기도 한다.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공동체가 형성되면 그만큼 자율의 공간도 넓어진다. 그러면서 자율의 가치는 이제 공동체 자치와 참여로 확장된다. 2장이 끝날 때까지, 마쓰모토는 재활용 가게를 시작한 것에서부터 지역 사회의 일원이 되고, 함께 축제를 벌이고, 공방이나 인쇄소, 극장 같은 공동체 공간도 멋대로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신나게 떠든다.

 

 

4.

  하지만, 자율과 협력, 공동체 자치가 방해받지 않고 지낼 수만은 없다. 기업과 정부는 자신들의 질서를 구석구석에까지 구축해놓고, 가난뱅이들이 조용히 따라와 주기를 바란다. 숨 막혀 싫다는 불온한 기운이 아마추어의 반란’(마쓰모토의 재활용 가게) 같은 곳에서 거리로 뿜어져 나온다 싶으면 바로 경찰이 가로막는다. 그렇지만 여기에 지고 있을 수만은 없다. 마쓰모토는 자신이 일으킨 갖가지 반란들을 들려준다. 드디어 가난뱅이의 반란이다!

 

  이쯤에서 감탄한 건 데모의 컨셉이다. 비장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재미와 난장이다. ,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마쓰모토가 메시지 없이 난리만 피우는 건 결코 아니다. 메시지는 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메시지라도 새로운 감성을 입히지 않으면 요즘 가난뱅이들에게는 전달되지 않는다. 꼭 필요한 건 새로운 감성을 자극하고 그들의 눈과 귀가 데모대를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판을 벌이는 것이다. 마쓰모토가 벌인 난장을 읽고 있으니, 이 사람은 정말 끼가 넘친다고 생각했다. 이런 난장이라면 나도 맘껏 즐길 수 있겠다~

 

 

5.

  한국에도 마쓰모토 같은 가난뱅이가 천명, 만명은 있으면 좋겠다. 거리에 나가면 데모인지, 축제인지 같은 것들이 매일 벌어질 것이다. 또 동네마다 주민들이 고민을 나누고, 서로를 채워주고, 함께 결정해가는 공동체가 자라날 것이다. 아마도 현재 한국 사회에 가장 부족한 게 이런 것들이 아닐까? 아마도 현재 한국 운동권에 가장 부족한 게 가 아닐까? , 우리도 이제 끼가 있는 반란을 저질러보자. 자율과 협력, 공동체, 자치의 가치들을 앞세우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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