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 존 쿳시 지음 /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 

존 쿳시를 읽을 때면 난 김훈을 떠올린다. 담담하면서도 간결한 서술 방식도 그러하거니와, 굳이 수컷 냄새를 감추려 들지 않는 남성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은 두 작가를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다. 스타일만이 아니다. 두 작가의 작품 세계도 묘하게 닮아 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치안판사의 모습에 <칼의 노래>의 이순신의 모습이 겹치고, 이 작품 <추락>이 그리는 삶의 치욕(이 책의 원제목은 [Disgrace], "치욕"이다)은 <남한산성>의 그것과 닮았다. 전혀 다른 역사와 환경에 속한, 지구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두 나라에서 이렇게 닮은 꼴의 작가와 작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흥미롭다.

허나, 쿳시에게는 김훈의 세계가 지닌 단단함이 없다. 김훈의 단단함은 그가 지닌 자기 확신의 결과다. 제 몫의 밥벌이는 하고 살아왔다는 자긍심, 세상 모든 이해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묵묵히 노동하며 그 삶을 이어온 인간의 생(生)은 그의 세계가 지닌 최후의 긍정이다. 시련은 인물들의 현재를 허물지만, 생 자체에 대한 긍정은 그 해체의 끝에 굳건히 버티어 선 마지막 보루가 되어준다. 하지만 쿳시에게는 존재 자체가 긍정이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부서지고 부서지고 또 부서지지만 그 해체의 끝은 가늠하기 어렵다. 바닥을 모르는 추락. 그래서, 쿳시의 세계는 훨씬 위태롭고 또 불온하다.

쿳시의 이와 같은 태도는 시니시즘(Cynicism)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일부 사전에서는 시니시즘을 “견유주의[犬儒主義]”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한 학파인 견유학파(Cynics)를 지칭하는 것으로 현대의 시니시즘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현대의 시니시즘은 주로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자신이 속한 사회와 제도의(따라서, 그 사회의 한 구성원인 자신의) 도덕적, 사회적 가치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서구 문명의 오늘이 제국주의적 폭력과 수탈에 기반하고 있다는 인식이야말로 이들 시니시스트들의 가장 주된 문제의식 중 하나이다. 어떤 이슈에 대해 제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하더라도 스스로의 과거에 대한 인식과 통렬한 반성 없이는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지식인 계층에 속하는 쿳시가 이와 같은 시니시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인다. 17세기 보어인(네덜란드계 백인 이주민)의 정착 이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는 소수의 백인들이 다수의 흑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자행한 온갖 폭력들로 점철되어 왔다. 비록 쿳시 본인이 이러한 폭력의 직접적 가해자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 역시 백인 사회의 구성원으로 기득권을 향유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스스로의 도덕적 근거를 회의하게 만들기엔 충분하지 않았을까. 김훈과는 달리, 그저 살아있다는 것, 존재 자체는 그에게는 도저히 그 자체로 선(善)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좀 더 미묘하다. 1990년 악명 높은 인종분리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의 폐지와 함께 시작된 백인 지배의 종식은 넬슨 만델라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집권으로 일단 그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오랜 차별의 결과 형성된 흑백 사회 간의 적대감과 기득권의 불균형, 빈부격차는 여전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흑인들이 오랜 기간 지녀온 분노와 박탈감들이 정치적 자유의 획득과 함께 터져나오면서, 곳곳에서 백인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으로 분출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은 쿳시와 같은 백인 지식인들을 딜레마에 처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백인들이 지닌 기득권을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흑인들의 분노로부터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지켜야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야말로 이 작품 <추락>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문제의식이다. 주인공인 루리 교수와 그의 딸 루시는 일단의 흑인들에게 공격당하고, 루시는 그들에게 겁탈까지 당한다. 응당 어느 아버지든 그랬을 방식으로 루리 교수는 분노하고 범인들을 찾아내어 처벌하려고 하지만, 놀라운 것은 루시의 반응이었다. 그녀 역시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워 했다. 하지만, 분노하고 보복하는 대신 그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를 선택한다. 윤간의 결과 생겨난 아이를 낳기로 하고, 공격의 배후에 있었던게 아닐까 싶은 이웃 페트로스가 그녀를 첩으로 들여 보호하겠다고 하는 제안조차, 그녀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체념은 아니다. 그녀는 다시는, 그 누구도 자신의 몸에 손대는 것을 용납치 않겠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선택이 가진 불가피성을 옹호한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떠날 수 없다는 것 뿐이에요. 아버지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 그래요, 제가 가는 길은 잘못된 길일지 몰라요. 하지만 제가 지금 농장을 떠나면, 저는 패배한 것이 돼요. 그리고 그 패배감을 평생동안 간직하며 살아야 할 거에요.(p.242)

 

이것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들이 처한 현실이다. 이 땅에 터를 내리고 몇 세대를 이어온 그들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이 땅의 아들 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누려오던 기득권을 잃고, 심지어 흑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어 폭력에 노출되더라도, 그들 역시 떠날 곳 없이 이 땅에 묶여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루시는 그걸 잘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다. 굴종이라고?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프리카를 강제로 점령한 서구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점령을 벗어날 무렵, 보호를 명분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하위 파트너로 편입될 것을 요구하는 또 다른 서구인들이 나타났다. 아프리카인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이 땅을 떠날 수 없는 그들이 그 치욕을 받아들이면서 살아온 것, 그것이 아프리카의 역사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루리 교수는 이 아프리카의 역사 앞에 무엇을 해 왔던가?

시를 통해 정신의 쾌락을, 그리고 여자를 통해 육신의 쾌락을 누리며 기득권 속에 안락하게 살아가던 루리 교수가 추락한 곳은 바로 그 아프리카의 맨바닥이다. 그 추락의 과정은 한없이 나약하고 위선적인 지식인의 맨살을 드러낸다. 욕망조차 억제하지 못했으면서 사람들에게는 허세를 부리고, 정작 날것의 폭력 앞에서는 무력했으면서 경찰을 들먹이며 복수와 처벌에 목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이렇게 쿳시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도덕적 근거를 허물어 내린다. 명백한 불의 앞에서조차, 자신에겐 정의를 외칠 권리 따위는 없다는 듯이. 결국 루리 교수도 싸움을 포기하고 침묵한다. 대신, 스스로를 죄수로 삼아 오지의 동물보호센터에 자신을 유폐시킨 채, 치료가 불가능한 동물의 안락사를 돕고 그 시체를 처리하며 살아가기를 택한 것은 일종의 속죄의 의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이제 치욕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오욕의 역사 속 아프리카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제 자신의 차례가 다가왔다고 호들갑을 떨며 세상 뒤집어질 것처럼 분노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추락은 치욕이었지만, 치욕 이후의 삶은 그저 또 다른 삶인 까닭도 있다. 아무도 듣지 않을 오페라를 작곡하고, 개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지만, 거창한 의미에의 강박이 없다면 이를 굳이 "실패한" 삶이라 이름붙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저, 또 하나의 삶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ps. 노무현 전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 이 소설을 떠올렸다. 그도, 치욕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는 없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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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ㅊ 2011-11-20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들렀는데, 소설에 대한 평이 정말로 인상깊습니다. 스토리의 요체를 제대로 짚은 좋은 글인 듯합니다.

turnleft 2011-11-22 03:47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