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의 강
- 은희경 외 지음 / 문학동네 / ★★★★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하얀 입김이 떠도니 이제 계절은 완연히 겨울로 향하고 있다. 제 잎을 떨궈내는 저 나무들처럼, 나도, 그리고 당신들도 또 한 겹의 나이테를 두를 시간이 다가온게다. 새해와 함께 시계 초침 넘어가듯 째깍 하고 나이가 드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나의 순환이 끝나는 겨울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하는 계절임에는 분명하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흥얼거리던 20대의 마지막 나날들이 엇그제 같은데, 이제 나도 어느새 서른 하고도 셋의 나이가 된다. 

되돌아보면, 서른이라는 나이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때는 오히려 20대의 중반이 아니었나 싶다. 정작 서른을 맞이하는 순간은 덤덤하게 지나갔고, 여전히 나는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살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막상 이 나이가 되니 서른이라는 나이를 두고 떨었던 지난날의 호들갑이 의아스러워 지기까지 한다. 서른이 되면 더 이상 열정 따위는 남아 있지 않을 줄 알았던가? 무릎까지 처지는 다크 서클이나 이마에 새겨진 주름, 살짝 벗겨진 머리, 불룩 나온 뱃살 등으로 상상되던 "중년"이 시작될 거라 믿었던가? (오, 이런. 뱃살은 나왔구나) 아니다. 사실 미래를 앞당겨 비관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하릴 없는 나날은 아니었다. 다만 그 때의 나는 그 빛나던 젊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청춘의 시간들을 "서른"이라는 나이를 거울 삼아 뽐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흘러, 이제 나는 정.말.로 삼십대가 되었다. 이십대 때 상상하던 것처럼 청춘이 끝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삶은 분명 그 때와는 다른 종류의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나도 변했고, 나를 둘러싼 환경도,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변했으니까. 익숙한 듯 하면서도 삶은 항상 그렇게 새로운 고민들을 던져준다. 그 고민들은 힘겨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행복한 고민들이다. 조금 건방진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고민들 앞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가 바로 나라는 존재, 나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믿기 때문이다. 다만, 눈 앞의 현실에 매몰되어 더 큰 것들을 놓치고 있는게 아닐까 두려움이 문득 찾아오곤 한다. 이럴 때가 바로 책을 집어 들 때다. 문학이란 자고로,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위한 간접 경험의 보고 아니겠는가.

<서른 살의 강> 이라는 단편집은 그렇게 내 손에 흘러 들어왔다. 작가들이 그리는, 조금은 극단적이겠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어떤 교훈 혹은 반면교사의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은희경, 김소진, 전경린, 성석제, 양순석, 이병천, 차현숙, 박상우, 윤효, 이 9명의 작가가 그리는 서른은, 불행히도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 아니, 내가 느낌 감정은 차라리 당혹스러움에 가깝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이토록 아팠던가? 나의 무던한 서른은 그저 유예된 이십대의 끝자락에 불과했던 걸까? 그도 아니면, 이건 그저 '소설' 속 이야기에 불과한건가.

공감하지 못하는 아픔은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잠시 옆으로 치워두면, 의외로 흥미로운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중 가장 눈여겨 볼만한 점은 그 아픔의 유형이 작가의 성별에 따라 어느 정도 구분된다는 점이다. 의도적인 편집인지 모르겠지만, 작품의 배치 순서도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글을 번갈아 보도록 되어 있어 양 성(性)의 차이는 더욱 도드라진다. 이렇게 보니, 서른의 아픔은 그저 개인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저마다의 사연 속에서는 자기만 아픈 것 같고 자기만 못난 것 같지만, 크게 보면 모두가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얼마만큼씩은 공유하고 있는 아픔인 셈이다. 직접적으로 공감하지는 못하더라도, 나 역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이 책에 담긴 남성 작가들의 글이 유독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들이 그리는 사랑이(남성 작가들의 주된 관심사는 "사랑"이다) 하나 같이 아프고 힘들어서가 아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서른의 사랑이 마냥 아름다울 수만은 없음을, “사랑한다”는 말만으로 행복해 지기에는 서로에게 얽힌 관계의 무게가 무겁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건 그 사랑에 대처하는 주인공들의 태도다. 사실 이들은 많이 아파하지도 않는다. 미처 아프기도 전에, 이들은 체념할 뿐이다. 그저 쓸쓸히, 사랑은 끝났다고 중얼거리듯 말이다.
 
오히려 여성 작가들의 주인공들은 더 많이 아파하면서도 오히려 희망적이다. 통념상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사랑"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고 하지만, 이들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다. (이게 꼭 삼십대여서인지는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이들을 아프게 하는 것은 아직 독립된 존재로 홀로 서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다. 이 아픔은 차라리 깨달음에 가깝다. "아버지" 혹은 "가정"에 예속된 존재였던 여성이 진정한 "나"를 찾기 시작했다는 뜻이니까. "당신을 사랑하지만, 나를 더 많이 사랑해" 라는 선언은 <섹스 앤 더 시티>의 사만다처럼 50이 되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진리는 아닌 셈이다.

모든 것을 이미 다 겪은 듯 체념하는 남성과, 아직도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여성. 30대를 바라보는 이 관점의 차이는 결국 삶의 자세의 차이로 이어진다. 그 누가 자신의 인생을 확신할 수 있겠냐마는, 적어도 아직은 되돌아보며 감상에 젖을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육체적으로는 정점을 지나 노쇠한다고 할 수 있는 나이지만, 인간이란 존재 자체는 시간의 켜가 쌓이는 만큼 계속 성장해 나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혹 나에게도 저런 아픔이 찾아오더라도, 그 아픔을 '나'라는 존재를 더욱 나아가게 하는 성장통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이 내 앞에 놓인 서른이라는 강을 건너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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