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 정송희 지음 / 새만화책 / ★★★★

만화는 언제나 금방 읽힌다. 이 책을 읽는데 걸린 시간도 기껏해야 20여분 남짓. 하지만 책을 그냥 덮을 수는 없었다. 다시 한 번 정독. 다시 20여분이 흐른 후에, 역시나 남는 이 착잡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정송희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다. 표지에서 얼핏 느낄 수 있는 그림체 역시 내가 호감을 가질 타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집어들게 한 것은, 다름아닌 바로 그 착잡함이었다.

아마 "여성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책을 구성하는 3개의 막 제목은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가로막힘(Blocked)", "이야기하기(Telling)", "봄(Seeing)". 거칠게 정리하자면 "단절되고 억압된 현실과, 그것을 직시하는 깨달음, 그리고 발화를 통한 치유와 극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끝끝내 착잡함이 남는 까닭은, 치유와 극복의 과정에 비해 현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데, 표제작인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은 초등학교 때 여학생들의 가슴을 만지던 담임 선생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연인과의 관계 진전에 어려움을 겪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녀의 고백을 들은 남자친구는 "미안해"라며 그녀를 끌어안지만, 그건 "이해심 많고 공감해주는 남자친구"라는 판타지가 아니라 또 다른 회상 - 이번에는 가해 - 으로 연결된다. 그 역시 고등학생 때 자취방에 놀러온 옆집 어린 여자아이를 더듬던 전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상처, 그의 죄책감, 그리고 자신을 더듬던 남자를 기억하는 또 다른 그녀의 상처. 현실은 "미안해", "괜찮아" 식의 사죄와 용서의 맞물림으로 해소되기엔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너와 나 모두가 그 복잡한 얽힘 속의 한 부분 - 가해든 피해든 - 이라는 깨달음은 고통스럽다.

이 고통스러움은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불편함과 맞닿아 있다. 근엄한 척 하는 남자 지식인들의 속물스러움처럼, "그게 뭔지 몰랐어"의 남자들은 그저 "나쁜 놈" 하고 욕해버리고 말기엔 나와 너무 가까이 있다. 그 저열함과 그 가식과.. 그 부끄러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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