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뗏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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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 

티벳의 독립운동과 중국 정부의 유혈진압으로 한참 국제사회가 시끄럽다. 중국의 향상된 정치/경제적 지위 앞에 국제사회가 슬그머니 침묵하는가 싶더니, 다행히 올림픽 개막식 불참이나 성화 봉송 거부 등의 형태로 항의를 표하려는 움직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얼마 전 유럽의회가 소속 국가들의 개막식 불참을 검토할 것을 결의했다고 한다. 확실히 유럽연합이라는 정치체는 이럴 때 은근 장점이 있다. 국가 대 국가로 항의를 할 때 발생할 외교적 마찰을 유럽연합이라는 대표성을 통함으로써 피해 가고 있으니까. (아, 이건 국가건 개인이건 마찬가지 같다. 행패부리는 동네 깡패한테 혼자서는 차마 맞짱 못 뜨는 대신, 동네 사람들이 단체로 항의하면 되는 것과 비슷하달까?) 프랑스가 티벳 유혈진압을 비판하자 까르프 불매운동으로 대응하던 위대한 중국 인민들께서도 유럽연합이라는 거대 블럭 앞에서는 마땅한 대응책을 못 찾고 계신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자잘한 장점으로 유럽연합의 의의를 축소해서는 안될 일이다. 저마다의 이익을 쫓는 분리주의가 횡행하는 시대에, 서로 다른 정치체제와 경제 수준, 문화의 경계를 넘어 통합을 이뤄낸 유럽연합의 존재는 차라리 경탄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통합이 무조건 좋고 분리주의가 무작정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통합이냐 분리냐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판단도 담보해 주지 않는다. 강요된 통합이 초래하는 억압과 폭력은 제국주의의 전 역사를 통해 이미 증명된 바 있으며, 그 중 한 제국이 붕괴하면서 촉발된 동유럽권의 내전과 인종학살은 방향성을 상실한 분리주의가 가져오는 맹목과 증오의 폐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유럽연합의 역사가 존경스러운 것은 단순히 통합을 이루었다는 외면적 결과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 체제 사이에서 누구에게도 일방적이지 않은 공존의 조건을 창출해 냈다는, 그리고 내고 있다는데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도 당위로서의 통합이 아닌 그 과정과 방식의 총체로서의 통합이다. 가깝게는 남북한의 통일이나, 더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생각해보면, 이 공존의 지혜는 더욱 절실하다. 굳이 유럽연합과 같은 단일 공동체로의 통합은 아니더라도, 상호 신뢰 하에 공존할 수 있는 관계 구축은 한반도를 둘러싼 평화 체제 정착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니까. 하지만, 오늘날 남북간의 반목과 한중일 간의 상호 견제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그만한 수준의 신뢰를 쌓아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뢰는 커녕 불신과 증오만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상황에서,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 소설 <돌뗏목>이 발표된 1986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연합(EU)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에 가입했다. 때문에, 두 나라가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가 통째로 유럽에서 떨어져나가 대서양을 떠돈다는 소설의 설정은 그저 상상력의 산물로만 보이지 않는다. 지리적 조건은 유럽공동체의 필요조건이다. 그리고 (상상으로나마) 이 필요조건을 제거했을 때 남는 것이 바로, 통합을 위한 충분조건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될 것이다. 어쩌면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는 유럽인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유럽 대륙이라는 지리적 조건을 제외하고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공동체로 여길 것인가?

작가의 반응은 일단 부정적이다. 이베리아 반도가 떨어져 나갔을 때 겉으로는 걱정을 하지만 다소 안도하는 듯한 유럽 각국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도 그렇고, 그런 유럽 주류 사회의 반응에 반발해 "우리도 이베리아인이다" 이라며 시위를 펼치는 유럽의 젊은이들을 묘사하면서도 작가는 유럽의 젊은이들이 진짜 이베리아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스스로한테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 씨니컬하게 읊조린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국가(스페인, 포르투갈)들이 하나의 유럽으로 묶일 때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일종의 거부감 같은 것들이 형성되고 표출되었던게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어쩌랴. 반도가 속수무책으로 대서양을 향해 흘러가듯, 유럽의 통합도 이미 현재진행형이 된 것을.

자, 여기부터 작가는 빙 둘러가기 시작한다. 사실, 반도가 떠내려가기 시작하면서 보이는 여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이 소설에서는 간주곡 정도일 뿐이다. 소설은 온전히, 반도의 분리와 동시에 기이한 경험을 하기 시작한 다섯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되다. 그렇다고 이들이 반도의 운명을 책임지는 영웅들인 것은 아니다. 개인은 그저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벅찬 개인들일 뿐. 이들의 기이한 체험은 이들이 반도의 운명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 관계는 명확하지 않고 사실 중요하지도 않다. 이 체험은 그저 다섯 인물들이 한데 모이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유럽의 통합이 어떤 식으로든 유럽 곳곳에 사는 평범한 개인들을 "유럽인" 이라는 보다 긴밀한 관계 속에 묶이게 했듯이 말이다.

이제 중요한건 신기한 체험 그 자체가 아니라, 이들 다섯이 함께 이베리아 반도를 여행하며 겪는 여정이다. 서로 연인이 된 두 쌍의 남녀와 한 노인이 늙은 말 한 마리가 끄는 짐마차를 타고 이베리아 반도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떠날 때, 이들은 작은 운명 공동체를 구성할 수 밖에 없다. 마차를 준비하고, 여비를 충당하기 위해 도시에서 옷가지를 사서 시골에 가서 팔고, 돌아가며 마차를 끌고, 잠자리를 준비하는 데는, 저마다의 삶의 이력과 경험이 각자의 몫을 한다. 가난한 농사꾼의 경험이 없이는, 책상머리에서 셈을 하던 샐러리맨의 능력 없이는, 나이 든 이의 현명한 조언이 없이는 이 공동체가 원활히 움직이는건 불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나이도 성별도 문화도 국적도 언어도 넘어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관계맺음 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삶의 연대를 보여주는게 아닐까.

허나, 이 공동체의 결속도 완벽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연인이 아니라 혼자라는 이유 때문에 항상 남들에게 더 많은 것을 양보하며 홀로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노인, 페드로 오르셰의 존재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부지불식간에 승인하고 있는 불평등을 드러낸다. 물론 이 현명한 노인은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준 늙은 개와 산책을 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랠 뿐이다. 정작 공동체의 균열을 가져오는건 가진 쪽이다. 오르셰의 외로움을 눈치챈 여인들이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노인을 위로하자, 연인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침해받았다고 느낀 남자들이 불만을 터뜨린 것. 개인적인 "관계"의 차원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는 행동이지만, 결국 이 공동체의 해체를 먼저 주장한 것이 기득권을 "침해받은" 쪽이라는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하지만, 이 배타적 관계에의 욕구를 그저 버려야 할 기득권으로 몰아가는것 또한 부당하다. 타자와 구분되는 "우리"를 규정하고자 하는건 자기 정체성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문제는 그 "우리"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가이다. 대서양을 오르내리던 반도가 바다 한가운데 어느 지점에서 멈추자,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주인공 두 여인을 포함한 반도의 많은 여인들이 일제히 아이를 갖는다. 이 새로운 세대의 탄생 앞에서, 남자들은 여전히 같은 문제로 골머리를 썪고 있다. 도대체 저 아이는 자기 아이일까, 아니면 페드로의 아이일까. 혈통을 명확히 하고픈 이 욕구는 현실에서는 민족 혹은 민족국가라는 범주로 확장 가능하다. 유럽의 새로운 세대를 어떤 정체성을 갖도록 키울 것인가. 그들은 저마다 포르투갈인, 프랑스인, 이태리인, 독일인으로 남을까, 아니면 하나의 "유럽인"이 될 것인가.

유럽이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분리되어 있었던 과거가 무의미해 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민족국가의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은 더더욱 성급하다. 민족 혹은 민족국가라는 범주가 갖는 강력한 구심력은 그것이 무의미하다 강변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허나 이 구심력이 유럽인들을 서로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원심력으로 작용할 가능성 또한 분명히 상존한다. 소설의 남자들이 느낀 원심력 말이다. 이 구심력과 원심력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오늘날 유럽인들이 고민해야 할 숙제 아닐까. 어쩌면, 남자들의 의문에 대한 여인들의 이 간결한 대답은 그 출발점을 말해주는지도 모르겠다.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한건 우리 아이들이라는 거야"

이제 여행은 끝을 향해 나아간다. 반도는 바다 한 가운데 멈춰 섰고, 우리의 주인공들도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반도가 움직이면서부터 땅의 진동을 느껴왔던 페드로 오르셰에게 그 진동은 여전히 계속된다. 감각으로 느끼지 않을 뿐이지, 실은 페드로만 그런게 아니다. 사람들 모두가 이제 섬나라가 되고 동서남북이 뒤바뀌어 버린 이 땅에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해야 한다. 삶을 뒤흔드는 변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며, 삶의 한 조건이 된 것이다. 유럽의 통합 역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유럽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도 결코 변화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설 속 여정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듯, 통합 이후의 과정들이 오히려 통합의 조건들을 지속적으로 시험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힘, 그리고 통합을 지속시키는 힘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주인공들의 공동체를 이끌었던 원칙들은 그 힘의 출발점이다. 서로의 삶에 대한 이해와 존중, 배려와 협업의 정신 말이다. 이건 체제나 이념, 경제 수준 따위로 사람을 재단해선 불가능하다. 이주노동자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바라보고, 일본인이라면 무조건 적대시하고, 북한 사람들을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으로 생각하면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모든 조건을 떠나서 우리는 평등한 인간이라는 인식, 그래서 이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라는 연대의식에서 우리는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역시 저 막막한 대양을 홀로 떠도는 돌뗏목과 다를 바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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