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정윤수의 BOOL...ing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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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치며 읽었던 칼럼들 - 정운영


혼자서 밥을 먹는 시간이 많아졌다. 점심은 매일같이 혼자서 먹는다. 황지우는 시 ‘거룩한 식사’에서 혼자서 밥 먹는 사람에 대한 깊은 애환이 그린 바 있는데, 사실 여럿이 시끌벅적하게 먹을 때보다 혼자서 먹을 때가 평온할 때가 더 많다. 허튼 말들 주고 받지 않아도 되고 바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들린 식당에서는 천, 천, 히 밥을 먹을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신문을 읽게 된다. 시내의 여러 식당들에서는 내가 집에는 구독하는 신문을 비치해 놓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개의 식당들은 스포츠신문을 덤으로 끼워주는 큰 신문사의 신문을 보는 수가 많은데, 이러나 저러나 신문 읽는 맛이 예전 만 못한 게 사실이다. 보도 기사의 차이를 거의 느낄 수가 없음은 물론 그 많은 광고 지면들을 넘기느라 팔이 아플 때도 있다.

무엇보다 시들해진 것은 ‘칼럼’이다. 여러 신문에서는 자사의 논설위원이나 기자들의 기명 칼럼을 매일같이 싣고 있고 따로 ‘오피니언’ 꼭지를 마련하여 외부 사람들의 칼럼도 게재하고 있는데, 한번 내놨다가 다시 올려놓은 듯한 반찬들처럼, ‘그 밥에 그 나물’인 얘기들이고, 그나마도 우격다짐에 거친 문장들이 많다. 

추측컨대 아마도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좌우를 막론하고 여러 신문사의 '칼럼'은 그 자체로 각 신문사의 색깔과 관점과 품위와 깊이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지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지금은 인터넷이 열려 그 대세에 밀리고 있고, 신문사의 논조들도 저마다 확연해지고, 일부 거대 신문사는 매일같이 신문을 선전의 장으로 삼는 바람에 '칼럼'처럼 다소 여유있는 공간도 전투적인 글들로 가득 채우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사정들이 수준 높은 칼럼의 실종으로 굳어졌을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강호의 문장가들이 더 이상 이런 저런 신문에 기고하지  않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운영의 칼럼집.

이런 날이면 그 옛날, 신문이 그야말로 ‘정론직필’의 황금 시대를 구가했을 무렵의 칼럼들이 생각난다. 논조의 정치성이나 좌우의 경향성을 다 떠나서 선우휘, 김중배, 최일남, 임재경 등의 우람한 글들, 아 그리고 무엇보다 정운영의 격조 있는 문장이 생각나는 것이다. 요즘에는 집에서 읽는 <경향신문>의 김우창 칼럼과 식당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일보>의 고종석 칼럼이 있어 그 글들을 따로 갈무리해보는 즐거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물론 정운영을 신문 ‘칼럼니스트’로만 떠올리는 것은 그의 여러 지적 작업에 대하여 소홀한 기억이다. 1944년 3월 18일 충남 온양에서 태어나는 그는 대구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쳤고, 가세가 기울어 온양으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나왔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으나 ‘범생’이라기 보다는 역전에서도 이름깨나 날렸다고 한다.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 때만 해도 고급 공무원으로 출세하는 것을 꿈꿨으나 같은 과의 선배 신영복에 의하여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학교를 마친 후 잠시 <중앙일보> 기자 생활을 하다가 가톨릭 쪽의 후의에 힘입어 벨기에 루뱅 대학교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이후의 과정은 많이 알려진 일이다. 귀국 이후 한신대학교 경상학부 교수로 임용되어 김수행, 윤소영, 이영훈, 강남훈 등과 이른바 ‘한신학파’의 주장으로 활동하였으나 1986년에 해직되었고 <한겨레신문> 비상임 논설 위원을 지냈으며 이 또한 신문사 내부의 ‘미묘한 관계’들에 의해 중도에 그만 뒀으며 1999년에 경기대 경제학과 부교수로 임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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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에 그는 문화방송 <100분 토론>의 첫 번째 진행자가 되어, 중후한 목소리로 의견과 토론의 격조있는 흐름이 이뤄지는 진경을 보여주었다. 2000년에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되었으며, 이 무렵의 칼럼이 평소 그의 지론과 모순되지 않느냐는 비판도 받았다. 또 이 선택에 대하여 많은 실망감이 표출되기도 했었다.  

그는 이미 1983년에 위암 수술을 한차례 받은 바 있고 1987년에는 기흉으로 입원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과정의 끝에 신장 질환을 이기지 못하고, 2005년의 오늘, 9월 24일에 세상을 떴다. 그러니까 오늘이 그의 ‘3주기’가 되는 날이다.

좀 더 정색을 하고 기억을 하거나 언급을 하자면, 여전히 풀지 못한 미묘한 문제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특히 새로운 세기에 그가 <중앙일보>의 논설위원이 되고, 더러 몇 편의 칼럼에서 어느 한 쪽의 실망을 불러일으킨 예가 없지 않으며 뜻밖에도 밋밋했던 <중국경제산책> 같은 책이 그의 어떤 아름다운 성과에 흠결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언급도 있을 수 있다. <중앙일보>라는 대자본 언론사에서 마르크스주의 논설위원이 운신할 폭이 그리 넓지 않다는 점, 혹은 누군가에 대하여 ‘맛이 갔다’는 투로 말하는 것이 대단히 조심스러운 언명임을 따로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고 정운영 교수의 저서들.

그럴수록 그가 남긴 글들, 그러니까 <한겨레신문>의 ‘전망대’ 칼럼 같은 글에 대한 기억은 오히려 생생해진다. 밑줄 치며 읽고 싶은 칼럼이란 그리 많지 않다. 정운영은 그런 글을 썼다. 단지 문장만 그럴싸하거나 동서양의 훈화를 빌려다가 적당히 양념 쳐서 버무리거나 되도 않은 주장임에도 원고 매수 채우기 위해 고깃쌈에 된장 바르듯이 미사려구나 따와서 울긋불긋하게 써대는 이 세상의 수많은 칼럼이며 사설이며 논설이며 오피니언 따위를 보라. 정운영은 그렇지 않았다.

동업자이자 한 때 그의 후배로 일했던 고종석은 “그의 글의 메시지가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흐릿하게 퇴색한다 할지라도, 그의 문장은 한국어가 살아있는 한 또렷이 남을 것이다. 그의 소문난 퇴고벽, 교정벽이 사실이라면, 문장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정운영이 진정 바라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꿈을 이뤘다.”고 쓴 바 있다.

물론 고종석은 “그의 칼럼은 의견의 전시장인 것 이상으로 지식의 전시장, 취향의 전시장”이었고 이 점이 “그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정운영 칼럼의 장점이었고, 그 휘황함으로 더러 논지를 흩뜨려버리기도 하는 단점이기도” 했으나 “한국 저널리즘 100년의 축복일 뿐만 아니라, 신문학 100년의 축복이기도 하다"고 썼다. 이제 그런 칼럼을 우리는 몇 년 째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방송 토론에서도 진정한 품위를 보여줬던 정운영 교수.

이 블로그의 성격과 관련해서는 그의 유지에 따라 소장 도서 1만 5천여 권이 서울대에 기증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훈담이야 더러 들리는 소식이지만, 따로 보관하기로 한 5천여 권과 함께 무려 2만여 권에 이르는 서권을 읽고 모으는 바람에 평생 전세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김수행 교수는 몇 년 전의 추도사에서 이렇게 회고한 적 있다. “내가 1977년 가족을 모두 데리고 루벵의 당신 집을 방문했지요. 나도 당신도 모두 박사논문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당신 집의 책꽂이를 보고는 놀랐소이다. 나는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에 관해 논문을 쓰고 있었고 당신은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이 최근 100년의 미국 역사에서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실증분석하고 있었소. 마르크스 공황이론의 핵심이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이기 때문에 당신과 나는 사실상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요. 그날 나는 당신이 모아놓은 책이며 논문들을 보면서 정말 탄복했소.”


 
깊고 넓게 세상을 통찰했던 르네상스인 정운영 교수.

그것이 학문하는 자의 기본 자세임을 두말 할 것도 없으므로 다른 훈화 하나를 더 얹어야겠다. 소설가 조정래는 이런 훈담을 들려준다. “4년 전쯤에 정형과 유럽여행 갔다 서점에 들렀는데 체 게바라 관련 책이 54종이 있었다. 아무리 관심이 있는 사람도 대여섯 권 사고 말 텐데 정형은 신용카드로 54권 모두 샀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일시적으로 신용불량자가 돼 있었다.”

요즘의 신문 칼럼들이 갈수록 앙상해지고, 좌우를 막론하고 ‘논객’ 운운하며 정말로 안경 벗어나고 한 판 벌일 것처럼 신경질적인 언사를 남발하는 경우를 볼 때마다 정운영의 ‘격조’는 새삼 더 귀해진다. 격조라는 말에 따옴표 ‘ ’를 붙인 것은 오해를 막기 위해서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격조’는 동서양의 훈담을 늘어놓으면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관습의 언어를 지칭하는 게 아니다. 좀 더 나은 세계를 포기할 수 없음에서 비롯되는 견실한 성찰, 비판받는 상대방조차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논리, 그것을 감싸안는 품격있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터졌다 하면 1면에서 ‘오피니언’ 섹션에 이르기까지 일사불란한 글을 도배하고 마는 오늘의 언론 환경에서는 더 이상 밑줄을 그으며 읽을 만한 칼럼이 나오지 않을 듯하여 기억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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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정운영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그 형형한 눈빛과 카리스마 넘치는 강의에 홀딱 반했던 기억이 있다.(헛, 쓰고 보니 진짜 나 남자한테 더 잘 반하는 것 같다 =_=) 어느날 갑자기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옮기셨다는 소식에 다소 황당하기도 했지만, 몇 년이 지나 불현듯 전해진 부음에는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오늘(24일)이 그 분이 가신지 3년이 되는 날이라고 한다. 정말, 위의 글을 쓴 지은이가 말하는 것처럼, 그 분의 품위 있는, 하지만 가차 없던 글들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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