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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1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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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노엄 촘스키

낭독

- 독재적인 기구들은 이겨낼수 있는 보편적 전략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참여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대개 이렇게 반문하며 자기변명으로 삼습니다. 먼저 참여하십시요. 그럼 당신이 해결 할수 잇는 문제들이 줄지어 불거질테니까요.

하지만 무작정 단추를 누른다고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계발은 필요하지만 주변사람들의 이해력과 인간관계를 계발시켜는 헌신적이고 집중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지원단체와 대안적 기구들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때 변화가 서서히 나타날 것입니다.

 

- 세계화는 두가지 중요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첫번째는 제3세계 모델을 산업국가까지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제3세계의 특징은 이원화된 사회입니다. 즉 거의 절대적인 특권을 누리는 부자들, 그리고 빈곤과 절망에 신음하는 무력한 다수입니다.

신자유주의는 무엇입니까? 메시아가 오고나면 대단한것이 마법처럼 굴러 떨어질 것이란 장미빛 환상을 심어주면서 자원을 부자들과 외국투자자들에게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 빚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중략-  어떤 식으로 계산하든지 간에 빚의 액수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닙니다. 그러 문제가 무엇이 겠습니까? 그 빚으로 무엇을 했냐는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진 빚이 건설 목적에 사용되었다면, 다시 말해서 투자나 인프라 구축에 사용되엇더라면 우리는 지금 보다 훨씬 여유롭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빚은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들어 주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즉, 소비(엄청난 수입에 따른 무역적자를 메워야 했습니다), 금융조작과 투기에 사용되었습니다.

- 하지만 비폭력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폭력보다 비폭력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이떤조건에서나, 그리고 언제나 그럴까요? 비폭력이 절대적인 원칙일 수 있을까요? 

 

- 한편 다른형태로 자행되는 억압을 극복해 낼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삶에서 계급차별보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이 더 나쁠 수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이동을 저임금으로 노동시키는 것 보다 아동을 때리고 학대하는 것이 더 나쁩니다. 따라서 억압시스템의 근원에 대해 이야기 할때 단순히 고통의 크기로 설명해서는 안됩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문제입니다. 누구나 고통을 극복하고 싶어합니다.

*****

 

 언젠가 제3세계 아동노동 착취 문제를 이야기 하면서 당장 그 아동들이 일자리를 잃으면 온가족이 굶게 되는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놓고 심각하게 논쟁을 펼친적이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아동노동 착취는 근절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혹, 우리가 세운 원칙이란것이 얼마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가, 혹 이런 원칙이 사회적 시스템이 비교적 안전하다는  ...(어쩌면, 그렇게 알고 있는)소위 서구 중심적 관점으로 만 문제 해결을 찾고 있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지금도 아동노동착취는 없어져야 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습니다만... 마지막 촘스키의 말처럼 '고통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문제이며... 누구나 고통을 극복하고 싶어한다는" 부분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름다운 황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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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해진 세계, 가난해진 사람들
다니엘 코엔 지음, 주명철 옮김 / 시유시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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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부유해진 세계, 가난한 사람들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유례없는 풍요를 구가하게 된 세계. 그러나 3차 산업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정보기술의 놀라운 발전과 넘쳐나는 부의 한복판에서 현대사회는 어이없게도 더욱 심화되어가는 빈곤과 불평등 현상으로 신음하고 있다.

세계화를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비인간성이 이같은 결과를 초래하는 주범이다. 그들은 세계무역이 비민주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오로지 이윤의 극대화만을 위해서 이루어진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세계화에 씌워진 이같은 혐의가 잘못된 것이라면? 비인간적인 세계를 야기하는 원인이 다른 데 있다면?

이 책은 인류의 공동 번영과 장밋빛 미래를 상징하던 세계화가 곳곳에서 드러내는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20대 80의 사회', 즉 세계 인구의 20퍼센트만 잘사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은 이제 현실로 나타나고 있으며, 특정한 소수들이 부를 독점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하는 '오-링' 이론을 제시한다.

'오-링'은 둥근 고리처럼 생긴 접합부의 이름이다. 우주선 챌린저 호가 폭발한 것은 이 부분이 제 구실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사소한 원인이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다는 의미이다.

다니엘 코엔은 내부요인을 바로잡지 않고 외부요인만을 문제삼는 이러한 관점이 어리석은 보호무역주의의 등장을 자극하고 있다며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혁신의 열매를 탐내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체계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나라는 세계의 움직임으로부터 소외될 것이며 결국은 더욱 빠르게 발전하는 새로운 기술의 혜택을 누릴 수도 없다. 세계화는 오늘날 결코 피할 수 없는 모험이다.

****

부유해진 세계, 가난한 사람들이란 책을 최근에 힘들게 읽었습니다.  무슨, 계주를 하듯, 몇번이나 덮었다 다시 읽다를 번복하면서... 이렇게 힘들게 책을 읽어본게... 밀란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후 첨 인것 같습니다. <참을 수...>를 왜 끝까지 읽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이곳에 촘촘히 정리해 보리라.

 요즘엔 나름대로... <불평등과 평화>란 주제를 가지고 책을 읽자고 결심한 가운데 선발된 도서중 하나인데... 경제학에 대해 워낙 깊이가 없는지라...어느 정도의 식견을 갖추었을때, 읽기가 가능한 내용이더군요. 케인지 이론...(언듯 생각나는 경제학 용어)등등. 제가 왜 이책을 읽기로 결심 했는가 싶게 말이지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평등 지향 사회를 공격하고 있는가... 세계화 정책은 진정 사회복지 시스템의 완전 몰락을 의미하는가...그나마 가난한 이들을 대변해 주었던 복지 정책들이 대책없이 약화 축소 되고 있다면, 이에 대한 대안은 있기나 한것인가... 등등에 대한 궁금증에 대해 도움을 얻고자 덥석 잡아들은 책이었는데, 읽기 쉽지 않네요.

 현재 이 책에 대한 내 이해의 정도를 아주 단순히 정리해 말하자면, 광풍 처럼 몰아 닥친 신자유주식 세계화  바람은 전유럽과 미국 등 소위 잘 나가는 서구 복지 시스템을 완전히 전복시키고, 근대 이후 그네들이 자랑해 마지 않던 합리적 시스템에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것 같습니다. 

사실 면면을 살펴보면 그 위기감이란것이 단순한 엄살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세계 많은 사람들이 언제 끝날지 모를 장기 실업과 가난의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지요. 

이책을 읽다 보니 신자유주의 지지 학자들과 관료들은 그들 장기 실업의 원인 제공을 위기 이전 그네들 정책에 일방적 수혜, 수혈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 중남미와 성공적 경제 성장을 이뤄왔던 아시아 (지들이 도와줘서 다 잘된거란 논리가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엔 외국인 노동자들과 이민자들에게까지 그 불똥이 튀고 말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동안 세경 한푼 못받고 죽어라 머슴 살아줬더니.... 주인집 자식들이 하나둘씩  재산  말아 먹고 가세가 기우니까... 머슴이 너무 많이 먹는다고 내쫓는 격, 아닙니까? 음... 머슴에 비유한게 좀 그런가요? 글쎄요. 저는 우리의 처지가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어쨌든, 복지 사회 국가의 봄바람을 제대로 맞아 보지도 못하고...폐기 처분 선언 부터 받아 버린 우리 같은 불안정한 복지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여간 억울한게 아닙니다.  < 아름다운황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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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309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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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안의 말>

어떤이는 말을 부리고 어떤이는 말과 놀고 어떤이는 말을 지어 아프고 어떤 이는 말과 더불어 평화스럽다. 말은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고 말은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가곤 했다. 더운말 차가운 말, 꿈과 불과 어둠과 전쟁의 말.

나는 나늘 부리고 간 말들이 이를테면 2003년 가을 어느날, 경찰이 되어 어린딸아이와 늙은 어미를 먹이기 위해 검문소 앞에 줄을 서 있다. 폭탄테러를 당해서 죽은 한 이라크인을 위해 있었으면 했다. 말로 평화를 이루지 못한 좌절의 경험이 이 현대사에는 얼마든지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거대정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여, 말이 그대를 불러 평화하기를, 그리고 그 평화 앞에서 사람이라는 인종이 제 종을 얼마든지 언제든지 살해 할 수 있는 종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라는 종은 '살기/살아남기' 의 당위를 자연 앞에서 상실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란 이런 비관적인 세계 전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 그 희망을 그대에게 보낸다. 한 도시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한 세상을 그곳에서 살고 그리고 사라진다는, 혹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이롱 위레의 인식이 비극적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적인 그리고 자연적인 비극이다. 그러므로 그 비극은 비극적이지 않다.

부기 : 어떤 의미에서는 뒤로 가는 실험을 하는 것이 앞으로 가는 실험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을 수도 있다. 뒤로 가나 앞으로 가나 우리들 모두는 둥근 공처럼 생긴 별에 산다. 만난다, 어디에선가


  *******

 
그녀의 시집이 아주 오랜만에 나왔다.

얼마전 그녀는 수필집도 냈다. 그녀는 지금 언어에...모국어에 굶주려 있다보다. 이렇게 허덕증이 나도록 모국어를 토해 내는 걸 보면... 

독일에서의 오랜 유학생활 때문인지 그녀의 글속에는 "한국적인의 삶" 보다 존재로서의 "아시안적인 삶"이 훨씬 많이 느껴진다.

이번에 나온 시집<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과 수필집<모래도시를 찾아서>를 사면서, 그녀의 시를 처음 만나게 해주었던 한 친구에게도 같이 선물을 했다.(그 친구는 무척 감격해 했다. 친구란 얼마나 소박한 존재인가...이렇게 작고 사소한 것에 감동한다)

어쩌면, 인연은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한 친구를 통해 처음 허수경의 시어들과 만나게 되었고, 허수경의 새로운 시어들을 만날때 마다 한 친구를 연상하게 된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소박한 인연이다.

가을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지금부터 아시안의 감수성이 깊게 배어있는 허수경의 시집을 느껴보련다. <아름다운황무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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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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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기다림attente.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동안 별 대수롭지 않은 늦어짐(약속시간, 전화, 편지, 귀가 등)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뇌의 소용돌이.

 
     1. 나는 어떤 도착을, 귀가를 약속된 신호를 기다린다. 그것은 하찮은 것일 수도 있지만 아주 비장한 것일수도 있다. 쉰베르크의 <기다림 Erwartung>에서는 밤마다 한 여인이 숲속에서 그의 연인을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다만 한 통의 전화만을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일한 고뇌이다. 모든 것은 엄숙하다. 내게는 크기에 대한 감각이 없다.

 

     2. 여기 기다림의 한 무대 장식술이 있다. 나는 그것을 조직하고 조작한다. 시간을 쪼개어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흉내내며, 조그만 장례의 모든 효과를 유발하려 한다. 그것은 연극 각본처럼 무대에 올려질 수 있다.

무대는 어느 찻집 안. 우리는 만날 약속을 했고 그래서 난 기다린다. 서막에서 그 유일한 배우인 나는(그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는) 그 사람의 늦어짐을 확인하고 기록한다. 이 늦어짐은 아직은 수학적인, 계산할 수 있는 실체에 불과하다(나는 시계를 여러 번 들여다본다).

이 서막은 하나의 충동적인 생각으로 막을 내린다. 즉 나는 '걱정하기로' 결심하고 기다림의 고뇌를 터뜨린다. 그러면 제 1막이 시작된다. 그것은 일련의 가정으로 채워진다. 만날 시간이나 장소에 어떤 오해가 있었던게 아닐까? 나는 우리가 약속했던 순간의 모든 구체적인 사항들을 기억해내려고 애쓴다. 어떻게 해야 할까(처신의 고민)? 다른 찻집으로 가볼까? 전화를 해볼까? 하지만 만약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가 나타난다면? 내가 안보이면 가버릴지도 몰라 등등.

제 2막은 분노의 막이다. 나느 부재하는 그 사람을 향해 격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그래 그이/그녀는~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이/그녀에게 안 왔다고 나무랄 수 있게 그이/그녀가 지금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면!" 

3막에서의 나는 버려짐의 고뇌라는 아주 순수한 고뇌에 이른다 (또는 획득한다?). 하는 앚 짧은 순간에 부재에서 죽음으로 기울어진다. 그 사람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장례의 폭발. 내 마음은 창백하다. 이것이 바로 기다림의 연극이다. 이 연극은 그 사람의 도착으로 좀더 짧아질 수도 있다. 그가 만약 1막에서 도착한다면, 나는 그를 조용히 받아들일 것이고, 2막에서 도착한다면, "한바탕 언쟁이 벌어질 것이며," 3막에서 도착한다면 오히려 감사해 할 것이다.

마치 펠레아스가 지하동굴에서 나와 삶을 되찾았던 것 처럼, 나는 깊숙이 장미 내음을 들이마실 것이다.(기다림의 고뇌가 계속 격렬한 것 만은 아니다. 침울한 순간도 있다. 나는 기다리고 있고, 내 기다림을 둘러싼것은 모두 비현실적인 것으로 휩싸인 듯하다. 이 찻집에서 나는 들어오고, 수다떨고, 농담하고, 혹은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을 바라다본다. 그들, 그들은 기다리고 있지 않다)

     3. 기다림은 하나의 주문이다. 나는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화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렇듯 하찮은, 무한히 고백하기조차도 어려운 금지 사항들로 짜여 있다. 나는 방에서 나갈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전화를 걸 수도(통화중이 되어서는 안 되므로) 없다. 그래서 누군가 전화를 해오면 괴로워하고(똑같은 이유로 해서), 외출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그 자비로운 부름을, 어머니의 귀가를 놓칠까봐. 기다림 편에서 볼때 이런 모든 여흥에의 초대는 시간의 낭비요, 고뇌의 불순물이다. 왜냐하면 순수한 상태에서의 기다림의 고뇌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전화가 손에 닿는 의자에 앉아 있기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4.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현실적인 사람이 아니다. 젖먹이 아이에게서의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나는 내 필요와 능력에 따라 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또 만들어 낸다." 그 사람은 내가 기다리는 거기에서, 내가 이미 그를 만들어낸 바로 거기에서 온다. 그리하여 만약 그가 오지 않으면, 나는 그를 환각한다. 기다림은 정신착란이다.

전화가 또 울린다. 나는 전화가 울릴 때마다, 전화를 거는 사람이 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그는 내게 전화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서둘러 수화기를 든다. 조금만 노력을 해도 나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보는" 듯하고 그래서 대화를 시작하나 이내 나를 정신착란에서 깨어나게 한 그 훼방꾼에게 화를 내며 전화를 끊는다. 이렇듯 찻집을 들어서는 사람들도 그 윤곽이 조금이라도 비슷하기만 하면, 처음 순간에는 모두 그 사람으로 인지된다.

그리하여 사랑의 관계가 진정된 오랜 후에도,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환각하는 습관을 못 버린다. 때로 전화가 늦어지면 여전히 괴로워하고, 또 누가 전화를 하든간에 그 훼방꾼에게서 나는 내가 예전에 사랑햇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나는 절단된 다리에서 계속 아픔을 느끼는 불구자이다.
  

      5.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6. 중국의 선비가 한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서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세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 아홉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사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 로랑바르트의 '사랑의단상' 중 <그림움>-

****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는 변심한 애인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고, 사랑 불변의법칙을 들먹거리며 이영애를 나쁜년으로 몰아 세웠다.
예전 어느 광고에서 였던가.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라고 애인을 빼앗기고 눈물 빼고 있던 연적에게 도전적인 표정을 던지며 이렇게 쏘아 붙인 적도 있었다. 
사랑 이라고 하는 영원불변의 법칙에 과감한 도전장을 던진셈인데... 뭐, 그녀 들에게 있어 '사랑의 변함' 은 소멸적 의미가 아닌, 대상 이동일 뿐이라는 얘기인데... 
일리 있는 얘기 같다. 

가만 얘길 들어보면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사랑에 대해 순진한, 순정적 판타지 같게 있는 것 같다. 자기는 비록 다른 여자에게 떠나지만 한때 자신을 사랑했던 그녀는 절대!!! 자신의 사랑을 못잊고 영원히 아파하면 살아갈 것 이라는 환상 같은것 말이다. 진짜 순진한거지!! 

여자? 글쎄... 여자들은 현재 존재감에 훨씬 무게 중심을 두는 편이라 할 수 있지.
내가 가장 힘들고 아파했을 때, 같이 있어준 사람... 그 사람이 '사랑의 진실' 이란 얘기다.
그것이 권력이었든, 돈이었든... 가치의 이상이 었든.
 비교적 현실에 충실하는 편이라 할 수 있지.
그리고 대략 솔직한 편이다. 

그런 마음을 궂이 숨겨려 들지 않는다.
물론, 사람에 따라 많이 다르겠지만...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다는 그런 말이다.
그래선지 비교적 과거의 남자들 한테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편이다. 글구...남자들의 생쑈가 대충 읽힌다. 그래서 대충 속아주기도 한다.

뭐...과거에 내가 남자들한테 얼마나 인기녀 였는가... 자랑하는 공주병 환자들이나... 스토커 기질이 있는 녀가 아닌 이상.(혹시, 주변 여자중에...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못잊겠다고 자꾸 연락하는 여 들이 있다면... 의심해보길 바란다... 둘중 하나니까. 스토커 거나 공주병 환자거나)

로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이렇듯, 사소하지만 복잡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숨어 있는 사랑의 질량, 화학적 변화들에 대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기본 텍스트로 기술해 놓은 사랑학 개론이다.

그렇다고 퀸카, 킹카가 되는 법... 가장 빠른 시간에 퀸카, 킹카를 사로잡는 법 류 같은 너저분한 사랑 상담학 같은 부류의 책과 혼동해서는 진짜 곤란하다. 

'사랑의 단상'은 로랑 바르트는 쉽지만 어려운 사랑에 대해 짧지만 굵은 생각을 담아  그의 특유의 예민하고도 섬세한 언어로 쓰다듬어 주고 있다.
손끝이 닿을 때 느껴지는 짜릿함과 심장의 울림, 만남의 환희와 헤어짐의 뼈아픔, 그럼에도 여지없이 다시 빠져버리게 되는 '사랑' 은 아이를 낳는 고통과 망각... 그것과 유사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황무지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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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7-08-07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동안 옆에 끼고 있던 책. 반갑습니다. ^^

아름다운황무지 2007-08-27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랑 바르트의 글은 결코 쉽게 읽히는 편은 아니지만, 읽다보면 묘한 매력이 있는것 같습니다.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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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불 앞에서 오랫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타오르는 모닥불은 붉은빛을 흔들며 둘의 그림자를 하나의 기둥으로 바위에 드리웠다.
시간의 흐름을 알리는 것은 에니스의 주머니에 있는 회중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와 숯으로
변해가는 장작의 탁탁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모닥불 위에서 아른대는 아지랑이 사이로 별이 반짝였다. 에니스의 숨결이 느리고 고요하게
와 닿았다.
 
------
 
     그 나른한 포옹은 떨어져 있는 그들의 고된 삶에서 유일하게 솔직하고 즐거운 행복의 순간으로 그의 기억속에 굳어졌다. 그 무엇도 에니스가 그때 자신이 안고 있는 사람이 잭이라는 사실을 보고 싶지도 느끼고 싶지도 않아서 마주보고 안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은 더 얻을 수 없을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그대로 두라, 그대로 두라.
 
옷장이라고 해봤자 얕게 움푹 들어간 곳에 나무 막대를 가로로 걸고서 크레톤 커튼을 매달아 방으로부터 분리해둔 것뿐이었다. 옷장 안에는 주름 잡아 다림질하여 철사 옷걸이에 말끔히 걸어둔 청바지 두벌이 있었고, 바닥에는 에니스도 기억하고 있는 닳아빠진 부츠가 있었다.

윗쪽 끝으로 벽에 조금 들어간 틈이 있어 비밀스러운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여기, 셔츠 한장이 못에 길게 걸려 있었다. 그는 셔츠를 못에서 내렸다. 브로크백 시절 잭의 낡은 셔츠였다.

중략 -----

      셔츠가 어쩐지 묵직했다. 그때 에니스는 잭의 셔츠 안에 셔츠가 하나 더 있음을 알았다. 잭의 소매안에 조심스레 끼워져 있던 또 다른 소매는 에니스의 체크무늬 셔츠였다. 오래전에 빌어먹을 어느 세탁소에서 잃어버렸겠거니 생각했던, 주머니는 뜯겨져 나가고 단추는 떨어진 더러운 셔츠, 잭의 셔츠와 그가 몰래 가져가 여기 그 셔츠 안에 숨겨둔 에니스의 셔츠가 두겹의 피부처럼 한 쌍으로, 한셔츠가 다른 셔츠속에 안긴채 둘이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옷에 얼굴을 누르고 입과 코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연기와 산 깨꽃과 잭의 땀냄새를 기대했으나, 잔존하는 냄새는 더 이상 없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그 기억, 이제 손에 들고 있는 것 말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마음속의 브로그백 산뿐이었다.

- 애니푸르의 소설 "브로크백 마운틴"중에서 -

****

그녀의 소설적 배경이 되고 있는 곳은... 시골이다. 미국의 시골...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작가를 궂이 찾으라한다면 아마 공선옥 같은 이가 어딘가 비슷할 꼴을 하고 있지 않을까? 굳이 아니라면 할 수 없고.

사실을 말하자면, 애니푸르의 이번 단편집에서 유일하게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은  "브로크백 마운틴" 뿐이었다.

영상을 통해 먼저 받은 이미지의 조작 같은 것이 작용한 측면도 있었겠지만 잘 짜여진 털 스웨터처럼 촘촘하게 묘사해 놓은 브로크백 마운틴은 잭에 대한 에니스의 그리움을 충분히... 넘치도록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소설속 주인공들 대부분이 미국 남자들이고, 마초적인 카우보이라 그런지 책 내용안으로 들어서는게 쉽지 않다.

작가가 여성이라고 반드시 주인공이 여성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가끔 남성작가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울때 불편하게 읽힐때가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여성작가가 묘사하는 남자중인공에 대해 남자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 좀 궁금하기도 하다. 어쩌면 나처럼 좀 복잡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브로크백 마운틴" 단편안에 들어 있는 배경은 시골이고, 주인공들은 카우보이 이거나 말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 (가끔 트럭 운전사-이것도 말의 일종이겠지!)이거나 마초들이다.  그리고 그는 물론 그의가족, 이웃들은 하나같이 되는 일이 없는 변변치 않고 별것 아닌 남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특히, "어느가족의 이력서"의 주인공 '리랜드 리'의 일생은 그런 피곤하고 지긋지긋한 삶의 결정체 같은 느낌이랄까. 

이렇듯, 미국 밖의 미국은 뉴욕처럼 화려하거나, 총처럼 무섭거나, 미대륙 같이 거대하거나, 부쉬처럼 허풍쟁이거나...그런데 이 소설속 처럼 미국 속의 미국은 외로워 미치거나, 공허하게 날리는 사막의 모래 바람 같거나, 겁에 질려 있거나, 하다. 
애니푸르는 애초에 아메리카 드림 같은것은 꿈도 꾸지 말라고 쐬기를 박아 놓고 있는것 같다.<아름다운황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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