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기다림


 기다림attente.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동안 별 대수롭지 않은 늦어짐(약속시간, 전화, 편지, 귀가 등)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뇌의 소용돌이.

 
     1. 나는 어떤 도착을, 귀가를 약속된 신호를 기다린다. 그것은 하찮은 것일 수도 있지만 아주 비장한 것일수도 있다. 쉰베르크의 <기다림 Erwartung>에서는 밤마다 한 여인이 숲속에서 그의 연인을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다만 한 통의 전화만을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일한 고뇌이다. 모든 것은 엄숙하다. 내게는 크기에 대한 감각이 없다.

 

     2. 여기 기다림의 한 무대 장식술이 있다. 나는 그것을 조직하고 조작한다. 시간을 쪼개어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흉내내며, 조그만 장례의 모든 효과를 유발하려 한다. 그것은 연극 각본처럼 무대에 올려질 수 있다.

무대는 어느 찻집 안. 우리는 만날 약속을 했고 그래서 난 기다린다. 서막에서 그 유일한 배우인 나는(그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는) 그 사람의 늦어짐을 확인하고 기록한다. 이 늦어짐은 아직은 수학적인, 계산할 수 있는 실체에 불과하다(나는 시계를 여러 번 들여다본다).

이 서막은 하나의 충동적인 생각으로 막을 내린다. 즉 나는 '걱정하기로' 결심하고 기다림의 고뇌를 터뜨린다. 그러면 제 1막이 시작된다. 그것은 일련의 가정으로 채워진다. 만날 시간이나 장소에 어떤 오해가 있었던게 아닐까? 나는 우리가 약속했던 순간의 모든 구체적인 사항들을 기억해내려고 애쓴다. 어떻게 해야 할까(처신의 고민)? 다른 찻집으로 가볼까? 전화를 해볼까? 하지만 만약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가 나타난다면? 내가 안보이면 가버릴지도 몰라 등등.

제 2막은 분노의 막이다. 나느 부재하는 그 사람을 향해 격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그래 그이/그녀는~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이/그녀에게 안 왔다고 나무랄 수 있게 그이/그녀가 지금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면!" 

3막에서의 나는 버려짐의 고뇌라는 아주 순수한 고뇌에 이른다 (또는 획득한다?). 하는 앚 짧은 순간에 부재에서 죽음으로 기울어진다. 그 사람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장례의 폭발. 내 마음은 창백하다. 이것이 바로 기다림의 연극이다. 이 연극은 그 사람의 도착으로 좀더 짧아질 수도 있다. 그가 만약 1막에서 도착한다면, 나는 그를 조용히 받아들일 것이고, 2막에서 도착한다면, "한바탕 언쟁이 벌어질 것이며," 3막에서 도착한다면 오히려 감사해 할 것이다.

마치 펠레아스가 지하동굴에서 나와 삶을 되찾았던 것 처럼, 나는 깊숙이 장미 내음을 들이마실 것이다.(기다림의 고뇌가 계속 격렬한 것 만은 아니다. 침울한 순간도 있다. 나는 기다리고 있고, 내 기다림을 둘러싼것은 모두 비현실적인 것으로 휩싸인 듯하다. 이 찻집에서 나는 들어오고, 수다떨고, 농담하고, 혹은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을 바라다본다. 그들, 그들은 기다리고 있지 않다)

     3. 기다림은 하나의 주문이다. 나는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화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렇듯 하찮은, 무한히 고백하기조차도 어려운 금지 사항들로 짜여 있다. 나는 방에서 나갈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전화를 걸 수도(통화중이 되어서는 안 되므로) 없다. 그래서 누군가 전화를 해오면 괴로워하고(똑같은 이유로 해서), 외출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그 자비로운 부름을, 어머니의 귀가를 놓칠까봐. 기다림 편에서 볼때 이런 모든 여흥에의 초대는 시간의 낭비요, 고뇌의 불순물이다. 왜냐하면 순수한 상태에서의 기다림의 고뇌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전화가 손에 닿는 의자에 앉아 있기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4.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현실적인 사람이 아니다. 젖먹이 아이에게서의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나는 내 필요와 능력에 따라 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또 만들어 낸다." 그 사람은 내가 기다리는 거기에서, 내가 이미 그를 만들어낸 바로 거기에서 온다. 그리하여 만약 그가 오지 않으면, 나는 그를 환각한다. 기다림은 정신착란이다.

전화가 또 울린다. 나는 전화가 울릴 때마다, 전화를 거는 사람이 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그는 내게 전화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서둘러 수화기를 든다. 조금만 노력을 해도 나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보는" 듯하고 그래서 대화를 시작하나 이내 나를 정신착란에서 깨어나게 한 그 훼방꾼에게 화를 내며 전화를 끊는다. 이렇듯 찻집을 들어서는 사람들도 그 윤곽이 조금이라도 비슷하기만 하면, 처음 순간에는 모두 그 사람으로 인지된다.

그리하여 사랑의 관계가 진정된 오랜 후에도,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환각하는 습관을 못 버린다. 때로 전화가 늦어지면 여전히 괴로워하고, 또 누가 전화를 하든간에 그 훼방꾼에게서 나는 내가 예전에 사랑햇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나는 절단된 다리에서 계속 아픔을 느끼는 불구자이다.
  

      5.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6. 중국의 선비가 한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서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세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 아홉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사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 로랑바르트의 '사랑의단상' 중 <그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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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는 변심한 애인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고, 사랑 불변의법칙을 들먹거리며 이영애를 나쁜년으로 몰아 세웠다.
예전 어느 광고에서 였던가.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라고 애인을 빼앗기고 눈물 빼고 있던 연적에게 도전적인 표정을 던지며 이렇게 쏘아 붙인 적도 있었다. 
사랑 이라고 하는 영원불변의 법칙에 과감한 도전장을 던진셈인데... 뭐, 그녀 들에게 있어 '사랑의 변함' 은 소멸적 의미가 아닌, 대상 이동일 뿐이라는 얘기인데... 
일리 있는 얘기 같다. 

가만 얘길 들어보면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사랑에 대해 순진한, 순정적 판타지 같게 있는 것 같다. 자기는 비록 다른 여자에게 떠나지만 한때 자신을 사랑했던 그녀는 절대!!! 자신의 사랑을 못잊고 영원히 아파하면 살아갈 것 이라는 환상 같은것 말이다. 진짜 순진한거지!! 

여자? 글쎄... 여자들은 현재 존재감에 훨씬 무게 중심을 두는 편이라 할 수 있지.
내가 가장 힘들고 아파했을 때, 같이 있어준 사람... 그 사람이 '사랑의 진실' 이란 얘기다.
그것이 권력이었든, 돈이었든... 가치의 이상이 었든.
 비교적 현실에 충실하는 편이라 할 수 있지.
그리고 대략 솔직한 편이다. 

그런 마음을 궂이 숨겨려 들지 않는다.
물론, 사람에 따라 많이 다르겠지만...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다는 그런 말이다.
그래선지 비교적 과거의 남자들 한테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편이다. 글구...남자들의 생쑈가 대충 읽힌다. 그래서 대충 속아주기도 한다.

뭐...과거에 내가 남자들한테 얼마나 인기녀 였는가... 자랑하는 공주병 환자들이나... 스토커 기질이 있는 녀가 아닌 이상.(혹시, 주변 여자중에...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못잊겠다고 자꾸 연락하는 여 들이 있다면... 의심해보길 바란다... 둘중 하나니까. 스토커 거나 공주병 환자거나)

로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이렇듯, 사소하지만 복잡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숨어 있는 사랑의 질량, 화학적 변화들에 대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기본 텍스트로 기술해 놓은 사랑학 개론이다.

그렇다고 퀸카, 킹카가 되는 법... 가장 빠른 시간에 퀸카, 킹카를 사로잡는 법 류 같은 너저분한 사랑 상담학 같은 부류의 책과 혼동해서는 진짜 곤란하다. 

'사랑의 단상'은 로랑 바르트는 쉽지만 어려운 사랑에 대해 짧지만 굵은 생각을 담아  그의 특유의 예민하고도 섬세한 언어로 쓰다듬어 주고 있다.
손끝이 닿을 때 느껴지는 짜릿함과 심장의 울림, 만남의 환희와 헤어짐의 뼈아픔, 그럼에도 여지없이 다시 빠져버리게 되는 '사랑' 은 아이를 낳는 고통과 망각... 그것과 유사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황무지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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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7-08-07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동안 옆에 끼고 있던 책. 반갑습니다. ^^

아름다운황무지 2007-08-27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랑 바르트의 글은 결코 쉽게 읽히는 편은 아니지만, 읽다보면 묘한 매력이 있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