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슈나이더는 『죽음을 그리다(Morts imaginaire)』 마지막 장에서 나보꼬프의 죽음을 다루면서, 당시에는 이런저런 입소문과 나보꼬프 자신이 편지에서 언급한 것으로만 그 존재가 알려져 있던, 나보꼬프의 미완성 유작 '로라'1)의 실체를 보지 못함을 못내 아쉬워한다.
그는 ‘로라’의 내용과 ‘로라’에 대한 나보꼬프의 당시 심정을 나름대로 상상해보는데, 그의 상상은 그 작품의 실체를 볼 수 있게 된 현재의 나보꼬프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오답에 가깝다. 하지만 나보꼬프의 미완성 유작과 죽음에 대한 그의 ‘오답’은 나보꼬프를 읽는 행위에 대한 ‘정답에 가까운 진실’의 어느 한 축을 정확히 건드린다.
그가 책 전체에서 작가들의 글과 말, 전설이 된 소문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가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사랑을 바탕으로 ‘상상’해내는 작가들의 죽음에 대한 ‘정답이 아닌 해답’들이, 호사가적인 에피소드나 역사적 사실의 차원을 초월한 어떤 ‘진실’을 끊임없이 환기하고 증언하듯이.

슈나이더의 지적대로 나보꼬프에게 죽음 테마에 대한 집착은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웠다. 나보꼬프의 최초 영어 소설 『세바스찬 나잇의 참인생』부터 나보꼬프의 마지막 장편소설 『Look at the Harlequins!』까지 그의 거의 모든 소설은 이미 죽은 이들의 사자후, 죽어가는 이들의 유언장, 타인의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고투, 예정되고 선고된 죽음을 이해하고 초월하기 위한 투쟁, 타인의 삶과 죽음을 자신의 버전으로 기록하기 위한 술책 등으로 읽을 수 있다. 그의 주인공들은 사형수거나, 자살 직전의 광인이거나, 이미 시체이거나, 작가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실어증 혹은 치매에 걸려 마지막 글을 쓰고 있는 작가이거나, 혹은 결국 자살로 생을 마치는 소인이다.
그러나 나보꼬프에게 죽음은 삶이 그런 것처럼 완벽한 진실만을 말하지 않으며, 죽었다는 사실만으로 진실의 무게가 획득되지도 않는다.
“암시, 주저함, 시작, 삭제. 그 어느 죽음도 특별한 것은 없다. 모든 건 그저 사본, 번역본, 가필에 지나지 않는 존재다.”(슈나이더, 321쪽)
슈나이더의 표현대로 나보꼬프의 소설에서 죽은 자와 산 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이거나, 이름을 잃어버린 같은 사람”일 뿐이고, 삶의 기록은 죽음의 기록으로 어느 순간 전환되고, 죽음은 언제나 극중극 속의 가짜(pseudo) 죽음, 무대 위의 죽음, 광대극의 크랜베리 쥬스처럼, 장난처럼, 유희처럼 재현되고 반복된다.
(나보꼬프가 공공연히 혐오를 표했던) 프로이트라면 아마, 나보꼬프가 소설을 통해, 마치 부조리 희극 같은 사건이었던 자기 아버지의 죽음1)을 반복 재현(working through)하고, 자신의 다가올 죽음을 끊임없이 미리 시연했다고 해석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프로이트적인 해석은 오히려 ‘죽음’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다. 나보꼬프의 작품을 관통하는 아킬레스건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사태를 읽는 행위, 언어 행위의 사태와 겹쳐놓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읽는 행위는 의사(pseudo)죽음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동안 삶은 죽고 우리는 가죽음 상태에, 일종의 코마 상태에 놓인다. 우리가 읽은 페이지는 한순간 빛이 비춰졌다 영원히 명멸해버리는 삶-죽음 사태의 끝없는 반복이다. 우리는 고인이 된 작가들이 남긴 사자후를 읽고, 아무 것도 들으려 하지 않는 그 유령들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살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토로를 종종 하는데, 사실 더 정확한 표현은 '죽음과도 같은 삶을 피하기 위해 읽는다'이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 역시 죽음[과도 같은 고통]임은 작가가 아니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다. [나는 이따위로 날로 먹는 글을 쓰면서도 “차라리 죽고 싶다”란 생각을 벌써 여러 번 했다. 입 안팎을 맴도는 생각나지 않는 표현, 단어의 맛은 죽음의 맛과 흡사할 것이다.]
슈나이더는 나보꼬프를 읽는 독서 행위에 수반되는 쾌감과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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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꼬프 작품을 읽는 행위에 수반되는 쾌감과 고통/불안, 죄의식의 실체가 무엇인지, 늘 궁금했던 내게 Eric Naiman의 Nabokov, Perversely (Ithaca and London; Cornell UP, 2010)은 거의 완벽한 진단서를 제공해주었다. 이런 정신분석학적 해석이라면 나보꼬프도 차마 대놓고 욕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만의 섬세하고 복잡한 논지 중 일부를 거칠게 가져오자면) 그는 나보꼬프를 읽을 때 독자가 경험하는 그런 독특한 쾌감/고통의 독서 과정을 일종의 perverse로 설명하며, 이 perverse야 말로 예술 향유와 소비의 기본적 양태라는 지극히 프로이트적인 논지를 거듭 환기하며, 나보꼬프는 독자에게 뭘 읽고 있느냐가 아닌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읽는 행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작가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텍스트 앞에서 단순히 '좋은 독자'가 되는 게 다가 아님을 자꾸 깨닫게 되고, 좋은 독자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나보꼬프가 사랑받기 원했던 바로 그 방식대로 그를 사랑하는가, 나이만은 그 방식이 과연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동시에, 바로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야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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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엇인지 너무도 절절히 잘 아는 나보꼬프의 독자[내가 보기엔 그는 나보꼬필리아 수준이다]이기에, 나보꼬프가 부유한 나라[스위스]에서 사고사로 죽은 게 아니라, “책 때문에 죽었기를 정말 바란다”고 썼을 것이다. 그가 『사형장으로의 초대』의 주인공 친친나트의 마지막 소원인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을 끝내는 것”이 나보꼬프의 마지막 소원이었을거라고 믿는 이유는, 쓰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말, 말, 말”일 뿐이라 믿는 지독한 ‘독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죽는 것은 생각보다 일찍 책을 읽지 못하게 되는 일”(338)이고 문학은 ‘살아 돌아온 것’(340)임에 다름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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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의 방에 있는 의자 위에 놓인 포장된 원고더미, 사후의 수기를 담고 있는 흰 나무로 된 커다란 상자, 라신의 검은 사장, 발터 벤야민이 비공개 걸작을 숨겨놓은 작은 가죽 가방, 하드커버 표지에 숫자가 뚜렷이 적혀 있고 펜으로 연도가 적혀 있는 두꺼운 공책들이 가득한 디노 부자티의 가방(방에 있었다), 나보코프의 행방을 알 수 없는 미완성 소설, 푸슈킨의 책상 위에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시, 윗도리 속에 꿰매져 있던 파스칼의 자필 수기 (에필로그, 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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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탐구로 시작한 그의 책이 결국 글, 독서, 책, 문학, 그가 죽은 뒤에 남겨질 책들[“난 책을 바라볼 때면 책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 아니라 내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괴로워할 존재처럼 느껴진다.”(349)]에 대한 명상으로 끝나는 것, 그리고 그 탐구와 명상의 마지막 대상이 나보꼬프의 죽음과 그의 미완성 유작이었던 것은 내게는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ps. 미셸 슈나이더가 2009년 ‘로라’의 공개된 실체를 보고, 읽고 어떻게 자신의 ‘오답’을 보완[정정이 아니라]할 지 무척 궁금해진다.

1) 슈나이더 책의 한국어 번역자는 이 저작의 제목을 “괴짜 로라 :죽음은 유희다”라고 옮기고 있는데, 그야말로 괴이한 제목이다. 슈나이더의 원본에는 이 제목이 불어로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이 작품은 2009년 나보꼬프의 아들 드미뜨리에 의해 그 원본이 공개되고, The Original of Laura—Dying Is Fu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2) 그의 아버지는 단상 위에서 연설중인 자신의 정적으로 오인받아 암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