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책으로 - 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
매리언 울프 지음, 전병근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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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책읽는 뇌>를 읽고 읽는 것이 좋다. 책 내용은 만만치 않다. 전공분야가 리터러시이고, 리딩과 뇌에 대해 읽어서 알고 있는데도 그렇다. 번역은 책 읽는 뇌 쪽이 더 낫다 - 언어학 전공자 번역이 이해도가 높아 훨 나은듯. Biliterate brain을 양손잡이 뇌라 번역한 것도 마음에 안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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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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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혼란스러운 작품이기는 했다. 그런데,감정의 혼란이라는 제목이 맞는 걸까, 이성의 혼란이 더 맞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굉장히 19세기적인 감성이기는 했다. 특히, 이성과 감정의 이분법이 너무 예리하다는 점에서. 츠바이크는 오히려 그 이분법으로 인간이 얼마나 고통받아야 하는지, 이를 어떻게 잘 통합하는 것이 인간으로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고 해석하고 싶다.

이 책의 초반에 갓 20세가 된 젊은이는 (불행히도) 지성과 정욕의 세계에 동시에 입문한다. 19세기 말 혹은 20세기 초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꿈틀거리는 거대한 육체로 묘사한 장면이 압권인건 지성을 상징하는 대학도 바로 그 꿈틀거리는 도시 안에 있다는 점 - 인간과 똑같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여자와 동침한 아들의 침대를 행여 손이라도 대면 더러워질까 장갑도 벗지않는 아버지를 묘사하는 부분이었다. 인간의 본성을 저렇게 압박하는 이분법의 칼날이 너무 예리하다는 생각에 섬뜩했고, 과연 이건 빅토리아 시대적인 인식과 감성이 맞거든.

롤란트의 멘토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던 영문학 교수를 포스트마던 시대에 그린다면, 반쪼가리 자작 정도로 묘사되겠지 싶지만, 이분법으로 자신의 지성과 자신의 정욕을 스스로 이분법의 칼로 매번 내리쳐야 하는 그 고통만 하겠나 싶기도 하다.

정욕이 죄인 시대에 동성애에 빠진 정욕은 정말로 감옥에 가야할 범죄이기도 했으니까. (오스카 와일드가 어떻게 비참하게 죽었는지 생각해보면 그 당시 정서도 이해가 가고, 젊고 예쁜 남자들이 계속 집에 드나들었다는 소문만 무성히 남은 롱펠로우도 이렇게 비참했겠구나 싶다.)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자신의 정욕을 나누어진 다른 세계 - 사창가와 하류 인생들이 헤매는 도시의 밑바닥을 기어가는 하이드처럼 때로 뗴어내어 배분하고 스스로를 증오해야 하는 삶이란 보기에 너무 아팠다.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19세기말보다 더 진일보한 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놀랍고도 슬픈 건 그 지점이다.
자기 분열의 균열, 그 영혼의 크레바스에서 터져나오는 위대한 조각들. 그 영문학 교수가 뿜어내는 열정들. 한 젊은이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대단한 열정과 영감이었다. 그런데, 그 열정과 그 영감은 바로 이원론의 칼로 스스로 그리고 사회가 베어 만든 균열에서 터져나온다고 하면 그런 역설의 미학은 또 없을테지만, 그게 또 진실이기도 하지.

롤란트는 지성은 교수에게, 감성과 정욕은 교수의 아내에게, 마찬가지로 이분해서 분배한다. 문학에서 경계까지 가는 인간은 기록자가 된다. 오래 살아남아 회고록을 쓰지. <어둠의 심장부>가 실체로 현현된 인간의 악에 스스로 먹혀 죽어가는 커츠를 보고 돌아온 말로우가 쓴 구술하는 회고담인 것처럼 말이지.

영문학 교수는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지. 자기 분열의 고통, 그 불꽃이 위대한 입자로 반짝일 때 그걸 글로 옮길 힘이 없어서. 그런데, 그거 아나? 셰익스피어도 동성애자였다는 설이 있는 것? 무수한 그의 시에서 칭송한 Dark Lady가 남자 파트너라는 설이 있으니까. 예술가는 그런 것 같다. 사회와 자신이 분열하는 지점에서 터져나오는 화산들 같다. 문제는 그렇게 터뜨려 어떤 이들은 위대한 예술가로 남지만, 많은 이들은 반짝였다가 그렇게 이름도 없이 사그라진다는 거지. 세익스피어도 어쩌면 그 위대한 불꽃의 동력은 스스로를 찢어발기는 자기 분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쏟아낼 수 있는 언어들이니까.

롤란트 같은 인간은 경계까지 가서 그걸 들여다 보고만 돌아오는 인간이다. 그래서 오래 살아 은퇴도 하고 기념문집도 받고 말이지. 그 교수의 삶은 겉보기엔 부도덕한 것 같지만, 자기 분열에 있어 그토록 충실했지. 사그라들지라도. 고통 한 알 한 알까지 진실했으니까. 롤란트는 어정쩡하게 맛만 보고 물러나 오래 산다 - 겉보기에는 선하게. 실제로는 비겁하게. ㅋㅋㅋ

츠바이크가 롤란트를 통해 미처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 지독한 지성과 정욕의 이분법, 그 칼날 아래 가장 뜨겁게 고통스러워하는 영혼과 만나 머리와 몸으로 나뉘어져 같이 한동안 고통스러워 했던 젊은이는...어떻게 그 이분법을 통합시켜 잘 늙어 회고담까지 쓰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 경험을 통해 지성도 인간, 정욕도 인간이라는 걸 껴안지 않으면, 잘 늙기 힘들었을텐데 말이지. 가끔 작가들이 나레이터로 택한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기만이라는 게 있는데, 롤란트의 경우, 기만인지, 기망인지...잘 모르겠다.

알겠는 건 한 가지이다. 지성과 정욕 혹은 이성과 감정이 통합되지 못해 빚어지는 극도의 혼란을, '감정'의 탓으로 돌려, 이 책의 이름이 '감정의 혼란'인 것, 그건 알겠다. 아니면, 츠바이크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일까? 이건 과연 감정만의 혼란이겠냐고?

세계의 혼란을 참을 수 없이 자신의 이성의 결정으로 죽음을 택한 작가는 과연 무엇을 의도했을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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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찮은 여자들 - 세상의 룰을 깬 여성 29인의 인생수업
캐런 카보 지음, 박다솜 옮김 / 모멘토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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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다 라임즈 외엔 모두 백인 여성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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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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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을 처음 배운 순간을 기억한다. 초등2학년 미술 시간, 소풍을 다녀온 후 소풍 장소로 줄지어 가는 아이들을 그렸었다. 선을 나란히 두개 그려 길을 만들고 짝을 지어 줄지어 가고 있는 아이들을 그렸었다. 내가 그린 걸 보더니 담임 선생님이 길을 나란히 평행으로 그리면 안된다면서 점점 좁아지다가 두 선이 만나 소실되는 삼각형으로 길을 고쳐주었다. "길은 나란해요!"라고 우기는 내게 '실제로는 나란하지만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라고 답했다. 하교길에 나는 여우 고개 위에 서서 우리 집까지 가는 길을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길은 두 개의 선이 나란한테, 내 눈에 점점 좁아지다 지평선 끝에서 두 선이 만나고 있었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미술사에 원근법이 발명된 순간이 있다는 건 안다. 기둥들이 줄줄이 늘어선 회랑을 원근법으로 그린 작품이 아마 원근법을 깨달은 화가가 그린 작품으로 안다. 그렇게 원근법이 발명(?)되었고, 측면의 얼굴에 눈은 정면을 보는 기괴한 평면의 이미지로 수천 년 세월을 뛰어넘는 이집트 벽화나 중요한 것은 크게 그리고 보던 중세 시대 그림에서 서양 미술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건 얼추 들어서 안다.

그리고 나서는 선과 색에 대한 논란이 이어진 것 같다.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은 선과 색, 형태와 내용에 대한 탐구를 치열하게 다루고 있다. 포스트 마던의 아이로 자란 내게,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대상에 닿을 수 없다고 말하는 포스트 마던 시대의 담론이 당연한지라, 닿을 수 없는 대상에 닿으려고 하는 프렌호퍼의 시도가 왜 무위로 끝났는지는 알 것도 같다. 다만, 프렌호퍼라는 화가를 통한 발자크의 치열한 사유가 있었기에, 대상의 본질에 닿을 수 없다는 진술로 인간들의 인식이 수렴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은 한다.

글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선'에 대한 고찰이었다. 자연에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화가가 선을 그리는 순간 대상을 배경에서 떼어내게 된다는 진술은, 재현(representation)이 가진 딜레마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 같다.

'재현(representation)'에 관한 진술 중 가장 가슴이 뛰는 진술은 사실 성경 창세기에 나온다. 거기서 복수형의 하나님은 그렇게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자'라고. (복수형의 하나님이라는 이슈, 단수형의 하나님이라는 이슈 역시 매혹적이나 그건 주제와 무관하므로 패스.) 저 형상이라는 단어가 image이다. 즉 인간은 신의 재현품, 복제품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본질에 닿으려는 시도를 한다는 거라고 '어숙룩하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재현된 자신들의 현실을 또 재현해 내려는 시도 역시 끝도 없이 한다.

프렌호퍼가 실패한 지점에서, 문학도였던 나는 사실 희희낙낙했었다. 20대 시절에 인간의 인지의 한계상 인간은 본질에 결코 닿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본질에 대한 지향을 포기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에 시달렸고, 그때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구닥다리, 문학에서 구원을 찾았다. 본질에 가장 에둘러서 가는 것이, 가장 지름길로 가는 것이라 내 마음대로 결론내려 버렸다. 즉, 비유와 상징을 통해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시도들 중 가장 적확하게 대상의 본질에 가서 닿는 방법인데?라고 생각해 버렸다. 가장 먼 길을 택하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래서, 가장 오래된 것(stories)에서 상징과 비유를 건져내는 것이, 본질을 파악하는 (영어로 쓴다면 본질을 움켜쥔다는 동사를 쓰겠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나는 믿는다. 물론, 콘래드가 <라군>에서 말했듯 망망대해에서 진리의 입자(particles)를 건지는 일이지만 말이다.

허나 상징과 비유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걸 사람과 사람 사이로 가져와 전달하는 방법은 자크 리베트가 90년대 초반에 시도한 방법이 맞다. 걸작은 과정 중에 있다고 설득하는 것. 즉, the best is in the making 이라고 주장해 버리는 거다. 그렇다면, 그리는 주체와 그려지는 대상은 영원히 그 인터페이스 안에서 완성이 된다. 심지어 그리는 주체의 '주체성'까지 이 과정 중에서 전도되는 것 - 그려지는 대상이 자신의 주체성을 나타낼 때 대상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포착한다고 말하는 것, 까지 외려 자크 리베트는 궁구해냈다. 그렇기 때문에 과정인 걸작은 과정에 참여한 자들의 기억 속에만 살아있게 두고, 결과물은 영원히 봉인해버릴 수 밖에 없다. 이건 지극히 90년대다운 결론이다.

그 이전 시대인 발자크는 대상의 본질에 가서 닿을 수 없어서 결국 대상을 그리는 주체가 대상으로 가는 길과 주체인 자신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결론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바벨탑으로 상징되는 완전한 언어를 통한 본질에의 지향은 원래 그렇게 무너질 수 밖에 없으니까.

결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한 구절로 맺는다. "Accordingly, the poet should prefer probable impossibilities to improbable possibilities. (따라서 시인은 개연성있는 불가능성을 개연성 없는 가능성보다 선호해야 한다.)” 즉, 예술가는 그럴 듯하나 불가능한 일을 하는 자들이란 뜻이다. 대상의 본질에 가 닿는 건 불가능하다고 애초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고 있었다 - 그냥 그럴 듯한 것, 그게 재현의 최대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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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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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쓰고 싶다. 아니 쓸 수 있다. 그러나 읽는 이들을 한껏 불편하게 만들고 그 난무할 욕을 감당하겠냐고 출판사 관계자들이 물었다. 아니, 난 감당할 멘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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