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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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혼란스러운 작품이기는 했다. 그런데,감정의 혼란이라는 제목이 맞는 걸까, 이성의 혼란이 더 맞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굉장히 19세기적인 감성이기는 했다. 특히, 이성과 감정의 이분법이 너무 예리하다는 점에서. 츠바이크는 오히려 그 이분법으로 인간이 얼마나 고통받아야 하는지, 이를 어떻게 잘 통합하는 것이 인간으로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고 해석하고 싶다.

이 책의 초반에 갓 20세가 된 젊은이는 (불행히도) 지성과 정욕의 세계에 동시에 입문한다. 19세기 말 혹은 20세기 초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꿈틀거리는 거대한 육체로 묘사한 장면이 압권인건 지성을 상징하는 대학도 바로 그 꿈틀거리는 도시 안에 있다는 점 - 인간과 똑같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여자와 동침한 아들의 침대를 행여 손이라도 대면 더러워질까 장갑도 벗지않는 아버지를 묘사하는 부분이었다. 인간의 본성을 저렇게 압박하는 이분법의 칼날이 너무 예리하다는 생각에 섬뜩했고, 과연 이건 빅토리아 시대적인 인식과 감성이 맞거든.

롤란트의 멘토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던 영문학 교수를 포스트마던 시대에 그린다면, 반쪼가리 자작 정도로 묘사되겠지 싶지만, 이분법으로 자신의 지성과 자신의 정욕을 스스로 이분법의 칼로 매번 내리쳐야 하는 그 고통만 하겠나 싶기도 하다.

정욕이 죄인 시대에 동성애에 빠진 정욕은 정말로 감옥에 가야할 범죄이기도 했으니까. (오스카 와일드가 어떻게 비참하게 죽었는지 생각해보면 그 당시 정서도 이해가 가고, 젊고 예쁜 남자들이 계속 집에 드나들었다는 소문만 무성히 남은 롱펠로우도 이렇게 비참했겠구나 싶다.)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자신의 정욕을 나누어진 다른 세계 - 사창가와 하류 인생들이 헤매는 도시의 밑바닥을 기어가는 하이드처럼 때로 뗴어내어 배분하고 스스로를 증오해야 하는 삶이란 보기에 너무 아팠다.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19세기말보다 더 진일보한 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놀랍고도 슬픈 건 그 지점이다.
자기 분열의 균열, 그 영혼의 크레바스에서 터져나오는 위대한 조각들. 그 영문학 교수가 뿜어내는 열정들. 한 젊은이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대단한 열정과 영감이었다. 그런데, 그 열정과 그 영감은 바로 이원론의 칼로 스스로 그리고 사회가 베어 만든 균열에서 터져나온다고 하면 그런 역설의 미학은 또 없을테지만, 그게 또 진실이기도 하지.

롤란트는 지성은 교수에게, 감성과 정욕은 교수의 아내에게, 마찬가지로 이분해서 분배한다. 문학에서 경계까지 가는 인간은 기록자가 된다. 오래 살아남아 회고록을 쓰지. <어둠의 심장부>가 실체로 현현된 인간의 악에 스스로 먹혀 죽어가는 커츠를 보고 돌아온 말로우가 쓴 구술하는 회고담인 것처럼 말이지.

영문학 교수는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지. 자기 분열의 고통, 그 불꽃이 위대한 입자로 반짝일 때 그걸 글로 옮길 힘이 없어서. 그런데, 그거 아나? 셰익스피어도 동성애자였다는 설이 있는 것? 무수한 그의 시에서 칭송한 Dark Lady가 남자 파트너라는 설이 있으니까. 예술가는 그런 것 같다. 사회와 자신이 분열하는 지점에서 터져나오는 화산들 같다. 문제는 그렇게 터뜨려 어떤 이들은 위대한 예술가로 남지만, 많은 이들은 반짝였다가 그렇게 이름도 없이 사그라진다는 거지. 세익스피어도 어쩌면 그 위대한 불꽃의 동력은 스스로를 찢어발기는 자기 분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쏟아낼 수 있는 언어들이니까.

롤란트 같은 인간은 경계까지 가서 그걸 들여다 보고만 돌아오는 인간이다. 그래서 오래 살아 은퇴도 하고 기념문집도 받고 말이지. 그 교수의 삶은 겉보기엔 부도덕한 것 같지만, 자기 분열에 있어 그토록 충실했지. 사그라들지라도. 고통 한 알 한 알까지 진실했으니까. 롤란트는 어정쩡하게 맛만 보고 물러나 오래 산다 - 겉보기에는 선하게. 실제로는 비겁하게. ㅋㅋㅋ

츠바이크가 롤란트를 통해 미처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 지독한 지성과 정욕의 이분법, 그 칼날 아래 가장 뜨겁게 고통스러워하는 영혼과 만나 머리와 몸으로 나뉘어져 같이 한동안 고통스러워 했던 젊은이는...어떻게 그 이분법을 통합시켜 잘 늙어 회고담까지 쓰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 경험을 통해 지성도 인간, 정욕도 인간이라는 걸 껴안지 않으면, 잘 늙기 힘들었을텐데 말이지. 가끔 작가들이 나레이터로 택한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기만이라는 게 있는데, 롤란트의 경우, 기만인지, 기망인지...잘 모르겠다.

알겠는 건 한 가지이다. 지성과 정욕 혹은 이성과 감정이 통합되지 못해 빚어지는 극도의 혼란을, '감정'의 탓으로 돌려, 이 책의 이름이 '감정의 혼란'인 것, 그건 알겠다. 아니면, 츠바이크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일까? 이건 과연 감정만의 혼란이겠냐고?

세계의 혼란을 참을 수 없이 자신의 이성의 결정으로 죽음을 택한 작가는 과연 무엇을 의도했을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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