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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황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불안의 황홀 - 김도언 문학일기
김도언 지음 / 멜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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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는 왜 굳이 '문학일기'라는 타이들을 이 책에 붙인 것일까?  기존의 '일기'라는 명칭이 아닌 '문학일기', 분명 김도언 작가에게 왜 사나요? 라는 질문은 왜 소설을 쓰죠? 왜 문학을 하나요? 라는 질문과 동음이의어일 것이다. 미래부터 과거로 흐르는 그의 일기들은 삶과 문학이 따로 떨어진 지대가 아닌 교차되고 중첩된 특수한 영역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 특수한 영역이 바로 그의 '일상'이다. 특수하면서도 너무나 일상적인 그의 삶, 그가 전업작가이면서도 쉬지 않고 일을 하며 소설을 쓴다는 생활양식과 많이 닮아있다.   

특히 나의 시선을 끈 부분은 그의 지인들과의 만남에 관한 대목들이었다. 정말 일상적인 만남들이었지만 시인들의 일상을 엿보는 것 같아 나름 흥미진진했다. 그 시인들이 바로 내 옆에 있는 느낌이었달까?  아래층에 사는 시인과의 술자리, 그에 관한 묘사, 그리고 여러 인용된 시들과 그 시에 대한 작가의 느낌, 누군가의 가벼운 메모나, 일기를 읽는 듯이 재미가 있었다. 

또 다른 이야기들도 등장한다. 그의 문학론, 그의 세계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사유하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세계와 소통하는지 말이다. 

현실인식이 없는 예술은, 뱀이 없는 용처럼 황당무계할 가능성이 크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상상계가 만들어낸 용이라는 동물을 보고 감탄할 수 있는 것은 뱀이라는 누추한 현실의 동물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 p111  

작가가 좋아하는 단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물끄러미'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물끄러미'바라볼 때, 그대가 입을 열고 꽃은 몽우릴 터뜨린다. '물끄러미' 내다볼 때, 기다리던 편지가 오고 지하철의 막차가 들어온다. -p80 

정말 아름다운 문장이다. 그가 처음 '시'를 썼다는 걸 감안하면 이런 문장이 나올법 하다. 곳곳에 시적인 문장들이 많이 깔려 있어 나는 연필을 들고 밑줄을 치곤 했다.  

나는 내게 흘러들어오는 영감이나 이미지를 논리적으로 묘사하는 훈련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p77 

이 문장은 많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이런 고민은 누구나가 하는 고민이 아닌가 싶다. 산다는 것의 방식 또한 이런 논리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스스로에게 흡수되는 모든 상황들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객관성이 요구된다. 시나 소설 또한 감성적인 부분으로 치우칠 수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논리적인 훈련이 필요할 듯 싶다. 그래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글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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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문지 푸른 문학
김도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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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발자크나 스탕달의 시대에 다른 작가들이 과연 없었겠느냐고. 그 시대에도 많은 작가들이 글을 쓰고 있었다고. 다만 시간이 흘러 후세의 사람들에겐 발자크나 스탕달만 남아 있는 거라고.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오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얘기를 왜 하냐면 저 또한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사라지는 소설가 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비하도 아니고 현재를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글을 쓰는 한 저는 제게 주어진 모든 조건의 최전선에서 싸울 것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죠" 

 표절로 시작하여 소설가가 된 주인공이 있다. 어처구니 없게도 병상에 누워 죽음의 막바지에 다다른 선생님은 삼십 년이 지난 반성문을 요구한다. 그리고 소설가는 오래된 숙제를 하듯 반성문을 써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의 치부를 들추어내는 작업이었지만 그 작업이 길어질수록 스스로에 대한 변명으로 바뀌어진다.  더 우스운 사건은 마지막에야 드러난다. 소설가가 어린 시절 표절해 장원의 영광을 안았던 그 이야기의 작자마저 사실은 누군가의 글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나는 두 가지의 축에 대해 생각한다. 먼저 '예술가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성문을 요구하는 선생님은 예술가의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똑똑한 작가는 남의 글을 훔치고 천재적인 작가는 훔쳐 온 남의 글을 '자기화'시킨다는 비슷한 말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창작물은 '최초'의 것이 될 수는 없다. 모방과 모방이 뒤엉키며 조금 더 나은 새로움이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표절에 표절을 거듭하는 행태는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린 나이의 주인공은 이야기의 묘한 매력 때문에 이야기를 가져오게 되고 그 이야기에 이야기를 덧대어 아름다운 사건을 탄생시킨다. 그러다보니 그 이야기는 이제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제 '진실'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문학은 거짓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라고 주인공은 말한다.  

어린 나이의 주인공은 그런 체험을 하게 된다. 처음엔 남의 이야기를 가져왔지만 스스로 '정류장'의 소녀를 만나고 그 소녀가 사라진 뒤에 남겨진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그 소녀와의 만남은 미술실로 이어지며 스스로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주인공은 자신이 표절했다는 사실에 대해 무척이나 괴로워하며 절방에 들어가 선생님이 요구한 반성문을 작성하려고까지 한다. 성장의 켠켠마다 그는 그 진실의 무게를 짐으로 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죽음에 임박한 선생님에게 반성문을 써오라는 말을 듣게 되고 그는 과거의 사건들을 꺼내오며 반성문을 집필한다. 그것은 반성문을 가장한 소설이었고 한 생명을 위해 연재하는 단 하나의 소설이었다. 이보다 더 가치 있는 반성문, 가치 있는 소설이 있을까? 

이것은 예술가가 느끼는 이편과 저편의 자세에 대해 고민하며 써내려가는 이야기이면서 스스로를 옹호하는 변명문이고 그 변명으로 인해 자세가 흐트러질지도 모를 것 같아 내리는 채찍이다. 그 기본 자세에 대한 묻는 소설이다. 

누구나 이런 표절의 유혹은 있다. 하지만 모방이라는 것에서 또한 창조는 나온다. 그렇다하더라도 자신의 글을 쉽게 팔아먹는 '작가'는 되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발자크나 스탕달이 될 수는 없지만 발자크나 스탕달 만큼의 자존심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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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코브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 디 아더스 The Others 1
크리스토퍼 무어 지음, 공보경 옮김 / 푸른숲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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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등장인물이 참 많다. 하지만 우울한 마을의 일이니 대체적으로 우울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첫 장면에서부터 우울증을 앓아오던 여자의 죽음이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많이 등장하는 것은 등장인물 뿐만이 아니다. 장르의 혼합이라고 해야 할까? 딱히 어떤 장르나 구성에 소속되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또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작가 스스로가 어떠한 줄거리로 갈까 고민하며 써간듯 싶고, 또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작가의 욕심으로 이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를 넣고 싶어한 듯한 그런 이야기다. 바다괴물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깜놀 하고 말았다.  

단연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인물은 몰리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그야말로 미친여자이지만 시오에게 애틋한 연정을 품게하는 매력을 가진 여자다. 그리고 결국은 바다괴물과의 이상한 교감을 할 수 있는 여자가 바로 그녀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점에서 몰리에게 매력을 발견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그녀가 과거에 영화에 출연한 전력이 있다지만 그것만으로 현재 미치광이인 그녀에게서 어떤 매력을 감지한다는 것은 좀 지나친 감이 있지 않나 싶다. 굳이 찾자 한다면 그녀의 엉뚱함 이라고 해야 할까?;

이 소설에서 왜 갑자기 바다괴물이 등장한 것일까 그 부분에서 나는 의문을 품었다. 많은 인구가 우울증을 앓고 있고 그 우울증으로 인한 세로토닌 결핍이 바다괴물을 마을로 끌어들인다. 바다괴물은 세로토닌 결핍을 가진 인간을 먹이로 사냥한다.

세로토닌은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인데 흥분이나 격한 감정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게 한다. 충분히 분비되면 불안, 우울함이 사라지고 평온을 찾게 하지만  결핍되면  생활에 활력이 줄고 긴장감과 걱정, 불안 등이 더해진다. 괴물은 이런 인간들을 먹이로 사냥하면 지낸다. 하지만 몰리라는 온혈동물에게서 이상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처음 괴물은 암컷을 찾아 이 마을에 찾아들었지만 암컷이라 생각한 이상한 물체에게서 거부를 당한다. 하지만 바다로 다시 돌아간 후엔 사정이 달라진다. 결국은 이 바다괴물에게도 결말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내가 작가라면; 등장인물을 조금 줄이고 이야기가 분산되는 걸 막기 위해 사건들을 조금 줄일 것 같다. 바다괴물이 등장하려면 뭔가 조금 더 큰 복선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특이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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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가제 독고다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가미가제 독고다이 김별아 근대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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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 사실은 아니되 사실보다 더 진실에 근접한 이야기. 작가는 가미가제 특공대에 조선인이 일부 포함되었다는 역사적 근거로 이 소설을 탄생시켰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왠지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자국의 전쟁도 아닌, 나라를 빼앗긴 이민족의 젊은이들은  마지막 비행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감히 그 심정을 추측할 수가 없다. 식민지 시대를 겪지 않은 현세대의 젊은이들조차 그 시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일 것이다. 그러니 그 시대를 겪었던 우리의 선조들은 오죽 하겠는가 한일이라는 두 나라의 이름이 붙는 것만으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흥분과 긴장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것이 과거의 힘일 것이다.  

나 또한 그 시대를 귀동냥으로 얼추 들었을 뿐이다. 독립군들의 이야기, 징용으로 일본으로 끌려갔다던 할아버지 이야기. 어쩌면 이 소설은 그 시대의 장님인 현세대들에게 점자로 된 역사서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한다. 김별아의 선택은 참 탁월했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의 허구가 보여줄 수 있는 힘이다.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이야기. 김별아가 추구하고 노력한 이상이 조금은 이 소설에서 달성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대의 불량선인, 시대의 번외자, 시대의 방관자, 하경식, 이 소설의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그의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의 과거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렇다 이 소설은 뒤로 가는 구조다. 언제나 작금의 나를 반추하려면 그 이전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그는 뼈대있는 가문의 자식도 아니요, 갑부의 자식도 아닌, 가장 낮은 신분 중에서도 더 낮은 백정 집안의 자손이다. 또한 그의 할머니 올미는 겁간으로 몸을 망친 백정의 딸이다. 그녀가 아름다운 몸매와 얼굴로 뭇 젊은이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던 일은 물 건너가 버렸다. 몸을 망쳤으니 당연히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이 당연했을 테지만 용감하고 지혜로웠던 그녀는 소중한 목숨을 버리는 대신 새로운 삶을 택한다. 그것은 치욕스럽거나 간교해 보이기 보다는 그 시대를 뛰어넘으려는 대담한 용기였다. 물론 하경식의 할아버지 쇠날이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태어난 아이는 겁간으로 잉태된 아이였다. 비극은 언제나 인생의 양념처럼 어느 순간에나 약간은 버무려져 있기 마련이다. 그 겁간의 자식 또한 약간은 용감하고 약간은 간교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로지 그의 탓이라고 말하지는 말자. 그 시대에 대한 비극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오로지 더듬더듬 추측만 할뿐.  

전세대의 비극은 다시 다음의 세대로 유전된다. 명망있는 집안 출신인 어머니와 많은 돈을 벌어들인 아버지, 잘생기고 영특한 형, 하지만 이들의 보기좋은 조합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그것은 이 가족이 시대의 비극이 투영된 하나의 작은 조합였기 때문이다. 하경식은 시대를 방관하며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그 시대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시대가 하나의 하경식, 수많은 하경식을 만들어냈다. 그는 방관자로 외따로 떨어져 살아가고자 했지만 너무 거대한 시대적인 상황이 그에게 흡수되고 만 것이다. 희극과 무의미로 살아가는 젊은이의 뇌관은 '사랑'이라는 것으로 폭발을 하게 된다.  
 

너의 마차를 별에 걸어라 - 에머슨, 현실의 노예가 되지 말고 드높은 이상을 추구하라!  

가미가제 특공대가 되어 죽음에게 당도한 주인공에게 누군가는 말한다. 너의 마차를 저 별에 걸어라. 그리고 그 말은 어떤 주문처럼 그에게 다른 삶의 길을 안겨준다. 그렇다. 운명은 언제나 급박하게 돌아가고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순간에 작고 밝은 문을 한쪽으로 열어둔다. 운명이 언제나 우리에게 가혹하고 뼈아픈 식민지의 시대를 각인시켜 놓았더라도 우리가 스스로 깨어있으며 열린 사고로 살아가려 한다면 운명은 다른 문을 우리에게 열어 둘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파쇼들에게 아직도 식민 통치를 받고 있지 않은가 그 운명에 맞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마차를 별에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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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이슬람 정육점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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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누군지 아세요?" 

"코끼리." 

"어떤 코끼리요?" 

"분홍색 코끼리." 

"뭐 하고 있어요?" 

"지나가고 있어." 

맹랑한 녀석과 유정과 몸에 흉터가 많은 나와 독실한 무슬림이지만 돼지고기를 파는 하산 아저씨와 야모스 아저씨, 이따금 사랑스럽고 대부분 저주스러운 안나 아주머니 그리고 그 외의 이상야릇하고 매력적인 빈민들의 주거구역이 있다. 정신 나간 열쇠장이에게 제가 누군지 아세요?라고 친절하게 묻는다면  "분홍 코끼리 이야기"를 항상 꺼내주는 곳, 기실 그곳은 제각각의 인종과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 귀엽고 사랑스러운 분홍 코끼리들의 서식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유일하게 알아보는 자는 정신 나간 열쇠장이다. 그들은 다른 인종과 다른 상처 다른 연령대 다른 성별 을 가진 제각각의 사람들이지만 그 잡다하게 '섞여있음'으로 인해 더 큰 통일을 이룬다. 사실 처음부터 지극히 '순종'이었던 것이 존재 하기는 한단 말인가? 우리는 무수히 다른 피로 수혈된 극도의 잡종이지만 그 '잡종스러움'을 숨기고 살아간다. '순종'인 척, 순수한 피를 가지고 고결한 척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잡종의 피를 숨길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내가 '이방인'이 되 있을 때, 내가 타인과 지극히 다른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때는 '잡종'의 표식이 수면위로 떠오르며 종국에는 나의 이름표가 된다. 그곳에서 나는 홀로 잡종이 되고 비난의 화살은 나의 잡종스러움을 싸잡아 욕한다.  

"세상에 흉터 없는 사람은 없단다. 모든 상처는 아무리 치료를 잘해도 흉터가 남게 마련이다. 이 세상은 사람들로 이뤄진 가시덤불이라서 지상에 단 일 초를 머물더라도 상처 입지 않을 수가 없단다." 

이것은 하산 아저씨가 흉터를 해부하고 나서 내린 진리다. 이 소중한 메뉴얼은 몸에 흉터가 많은 주인공에 전달된다. 기실 흉터란 너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다독거림 같은 것이었다. 뚜렷하게 나타나는 상처가 아니더라도 사람으로 이뤄진 이 가시덤불을 헤쳐나간다면 누구나 너와 같은 상처를 가질 수 있다는 전언이다. 그 흉터를 보이는 곳에 갖고 있느냐 보이지 않는 곳에 가지고 있느냐가 차이일 뿐이다.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그가 자신의 전공을 과장했더라도 네게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했더라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거라. 그는 영혼이 상처받은 사람이란다. 차라리 팔이나 다리 하나쯤을 떼어주고 영혼을 지킬 수 있었다면 그 역시 기꺼이 그걸 선택했을 거란다. 우리가 믿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더 관대해도 좋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찼던 꼬마아이는 몸에 있는 흉터를 버리지 않고 그 흉터를 끌어안으며 세상을 껴안는 방법을 하산 아저씨로부터 배운다. 하산은 우리가 믿어야 할 사람이 비록 스스로를 과장되게 꾸미는 사람일지라도 상처받은 사람일지라도 그가 바로 우리가 믿어야 할 사람이라 말한다. 흉터를 가진 아이는 무수한 사람들의 얼굴을 모은다. 그리고 지나가는 코끼리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이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인 것 같느냐고. 하지만 그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 무수한 얼굴들을 그저 하나의 인간으로 보고 있기에 그가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 어떤 인종인지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나 있는 그의 대한 설명들이다. 이 설명들을 제거한 뒤 그를 본다면 지극히 순수해서 잡종적인, 상처받고 슬퍼하는 여린 영혼이 있을 뿐이다. 흉터의 아이는 수많은 잡종의 얼굴들을 통합하고 비로소 그곳에서 지극히 순수한 '순종'의 얼굴을 찾으며 성장한다. 

"신은 네 안에서 잔다. 신을 억지로 깨울 필요는 없단다. 눈이 부셔 스스로 일어나게 해야지" 

그런 통합의 순간, 안에서 자고 있던 신은 그 궁금한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스스로 일어난다. 신 또한 우리처럼 호기심이 많을 것이다. 늘 타인이 아니고서야 들킬 수 없는 엉덩이 같은 곳에 인생의 비밀을 감춰두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따금 사랑스럽고 대부분 저주스러운 안나 아주머니라는 문장에서부터 이 책에 대한 흥미가 생겨버렸다. 너무나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난무하고(하나 버릴 것 없는 캐릭들이다. 이 캐릭터 하나 하나로 또 다른 소설을 써도 좋을만큼)작가의 가벼운 터치가 마음에 들었다. 어찌보면 지극히 무겁고 침울해지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아이의 등장이나 정신나간 열쇠장이 아저씨등등의 캐릭터들로 이야기의 무거움이 많이 제거됐다. 자기연민에 충분히 빠질 수 있는 캐릭터들은 그런 위험요소에서 벗어나 작가가 내뱉는 유머속으로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극의 분위기를 활기차게 이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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