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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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모든 것들의 이면의 모습은?



『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하면 떠오르는 건 독특한 형식으로 글을 쓰는 작가라는 것이었다. 처음 접했던『최순덕 성령충만기』역시 성경형식으로 형태를 취하며 서사가 이어가니 읽는 맛도 재밌는 소설이었다. 상상력과 재미, 독특한 형식으로 눈길을 사로잡지만 가벼운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그래서 한국소설에서는 드물게도 일본의 소설들처럼 가벼이 읽기에 좋다 느껴졌었다. 이상하게 그게 연달아 몇 편 이어지니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았는데, 문득 궁금해져서 들여다보니, 그런 호기심에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로 좋은 작품들이 한 곳에 실려 있었다. 



『행정동』


오재우는 졸업 후, 취직이 되지 않자 학연, 지연을 통해 단기알바식의 일을 얻어 하게 된다. 행정동에서 하는 업무란 수기로 작성된 학적부를 전산으로 일일이 옮겨 재기록하는 것이었다. 묘하게 공감가는 부분이 많은게, 경쟁자 한 명이라도 더 떨궈내서 정규직을 탈환해야 하는 요즘 현실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는데, 유머를 잃지 않았다는 게 구미가 당겼다. 이건 이기호만의 능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느 부분에서 느닷없이 터지는게 그게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다음이 궁금해지도록, 첫 시작점이 좋은 소설, 배치가 특히 좋았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매력적인,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말없이 묵묵히 일만 하던 삼촌에게 프라이드라는 차가 생기고 난 후의 스토리, 어느날 집앞에 세워진 삼촌의 프라이드 덕분에 나는 불편하지만 적응하며 그 낡은 차를 몰았고, 관심없게만 보았던 삼촌에 대해 하나 둘씩 알아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인물의 성격 궁합이라 해야 할까, 할머니와 나의 관계성도 재밌었다. 삼촌의 노트 속 주행거리 기록들에 대한 것도. 후진이 안 되는 차를 가진 삼촌의 이야기는 묘한 여운을 남기는, 그래서일까, 독자인 나 역시 삼촌은 이제 어디선가 정착해서 누군가와 잘 살고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


역시 현실이 드러나는 소설이다. 임용을 준비하는 주인공인 내가 심리적인 압박감을 해소하기 위한 상담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상담을 하면서 점점 자신의 가족에 대한 진실에 대해 가까워져 가는데, 화목해보였던, 안정적으로 느꼈던 관계의 이면을 하나씩 까발리며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이야기가 끝을 향해 갈수록 그래서 도대체 김박사는 누구인가, 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머릿 속의 또 다른 자아? 아님 통속적인 요소로써 불륜상대? 그래서 김박사는 누구인가? 우리는 보고 싶은 아름다운 것만 봐야 할까, 아님 추악한 그 이면도 다 까발려 봐야 할까. 삶을 직면하는 자세는 어떤 지점이 더 가까울 것인가. (맨 마지막 구절은 생각치도 못해 의외성을 가지지만, 궁금증이 완전히 해소되진 않았다. 의문에 의문을 더한 느낌?)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화자는 앞을 못보는 전도사이다. 가난하지만 신앙을 통해 극복해 나가려 애쓰는,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삶에 만족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도 중 한 명인 최 간호사는 그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은혜를 갚고자하는 마음이 큰 사람인데, 기증자가 나타났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 그는 보지 못한 자신의 아이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러나 기증자의 가족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고, 신이 자신을 시험에 빠지게 한 것처럼, 갈등하며 고민하다 발길을 돌린다. 이내 다시 돌아와 앉은 자리에 우연히 만난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화자는 지나온 세월에 말한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뱉은 침에 대해 감히 비난할 수 있을까. 독실한 신앙 뒤에 가려진 인간의 욕심을 애써 좋은 말로 포장해댄 것은 아니었을까. 



『탄원의 문장』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중간의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누군가를 잃었을 때의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화자인 나의 제자의 죽음으로 사건을 시작된다. 군기를 잡기 위한 구실로 술을 잔뜩 마시게 된 피해자 박수희의 마지막 한마디의 진실은 너무 늦게 밝혀진다. 아끼던 사람의 뒷모습은 추악했고, 찌질하기 그지 없다. 얼굴을 잘 모르는 제자의 죽음과 아끼는 제자의 억울함과 미래를 위해 탄원의 문장을 시작한 '나'. 문장은 누굴 향해 있었어야 했을까. "이~" 애정의 담긴 한마디가 아프게 다가왔다. 그 이면을 보지 못한 어리석음은 참혹한 결과만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이정(而丁)-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2 


이름때문에 잃은게 많다고 믿었던 사람 이야기이다. 개명을 하기 위해 착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아들에게 부탁을 한 게 어째서 불행을 초래한 계기가 되어버렸을까. 이름은 구별을 위함이 아니었나. 왜 이름 하나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했을까. 배신자의 참회를 위한 이름은 그 이름의 당사자가 원했던 바가 아니었는데. 이름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갈수록 이야기 속 현실이 고통스러운 사건들로 이어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람이 나무처럼 걸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화라지송침』


그들 안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염전 노예로 떠들썩했던 시기가 있었다. 피해자는 지나간 세월조차 보상 받지 못한 채, 가해자들은 가벼운 형량과 벌금으로 결말이 났었던. 이 사회가, 법은 허울에 불과하고 사회는 얼마나 썩어빠졌는지를 잘 보여준 일례였다. 이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조금은 다른 지점의 이야기였지만. 아내와 장인어른, 두 부녀를 살린 큰 할아버지. 그리고 종숙의 아들이 갑자기 아내와 내 앞에 나타나게 된다. 두루마리 휴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기종씨. 바깥일을 하는 아내에 대한 불만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와 기종씨를 한 달간 집에서 머무리게 했던 일들. 아내와 기종씨와 관계 사이의 금은 어떤 것이었나. 홀로 남겨진 기종씨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이용당했던 시간들. 해소되지 않는 부분들에 군데군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내 상황에서도 선의가 계속 이어졌을까 싶기도 했다.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


마지막에 실린 단편 소설인데, 이기호의 예전 소설들이 떠올려지는 작품이었다. 잘나가는 형에게 신세를 지는 못난 동생인 나는 형의 사각팬티를 반바지로 착각하여 입고 다닌다. 팬티 위에 팬티를 입은 꼴. 아직은 낯설은 동네에서 자신이 보고 믿는 그대로를 우기다가 벌어지는 오해와 해프닝들. 작품이 쓰인 시기를 보면 가장 먼저 쓴 소설이 아닐까 싶다. 사실 완전한 창작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여기 저기 단편이 실린 시기에 따르면 가장 최근에 쓴 소설은 아님에 분명하다. 가벼운 해프닝같은 소설이다. 


이기호의 최근 작품들을 찾아보고 놀라웠다. 예전엔 가벼이 읽는 소설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중심이 단단히 갖춰진, 밀도 있는 소설 속에 우리의 삶이 잘 녹아 들어있었고, 그의 특기인 유머 또한 과하거나 모자르지 않고 섞여 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매력적인 단편이 이렇게나 많이, 한 곳에 다 모여 있었다니. 지난 날의 짧은 식견을 반성하고 이기호의 다른 작품도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우리가 확고하게 믿고 있는 어떤 것들의 이면이 궁금하다면 끝과 시작, 위와 아래를 뒤집어볼 것. 그것이 내 소설의 기조가 되어버렸다"


작가의 한마디처럼 이 소설집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던 것들의 이면을 사정없이 까발려줬다. 그 결과는 참혹했지만, 우리의 생의 이면에는 이렇듯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한 아프고 고통스러운 진실이 숨겨져 있었음을 늘 유념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면을 볼 수 있는 눈을 기르고 싶다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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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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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기까지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의 이면』





소설은 작가인 화자가 '박부길'이라는 작가의 생애를 다루는 글을 의뢰받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뚜렷한 친분관계도 없을 뿐더러 한 작가의 생애를 훑는 과정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화자는 박부길의 글과 인터뷰, 그리고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씩 큰 줄기를 형성해나간다. 


박부길은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갇혀 있다 자살을 한 아버지와 한없는 죄스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어머니, 그리고 버림 받은 상처를 안은 채 유년기를 보냈고,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기로 다짐하고선 떠난다. 아버지에 이어 판사가 되어 집안을 일으켜주길 바라는 기대를 버리고서.

중화집 배달일부터 시작해서 신학공부를 시작하기까지는 운명적인 만남, 즉 사랑이 큰 계기가 되었다. 


어둠이 빛이 되는 동굴같은 안식처, 자취방에서 책속으로 침잠하는 생활을 이어가는 그에게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그의 삶에도 '사랑'이라는 것을 안착할 수 있게 한 대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교회 선생님이었던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조심스러운 관계가 이어져 갔으나, 늘 위태롭고 위험하게만 흘러가고 만다. 박부길의 여러 작품 속에서 자신의 생애의 대한 일면들을 가린 듯 보여줬는데 이를 통해 그의 생의 일종의 불행함과 사랑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서툰 모습들, 상대를 올곧게 바라보지 못한데서 비롯한 예측가능한 이별의 전조들. 이는 자신을 상처주는 것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저 깊은 상처를 입히고 만 것이다. 



**



읽는 이로 하여금 어느 부분에 중점을 두고 보느냐에 따라서 이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그리는 종교소설로 읽힐 수도 있으며, 사랑을 다루는 연애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

흐름에 따라 읽어나갔을 때는 실존적 성격의 질문이 주 화두가 되는 소설인가 싶었는데, 흘러가 다다른 것은 조금 다른 지점이었다. 이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까지의 여러 측면을 탐구한 소설처럼 느껴졌다. 박부길의 사랑의 실패로 끝나기 전에 그게 진정 사랑이었는가, 다시 묻고 싶을 만큼 처절하게 외로운 생에 안타까움이 더해지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데, 그건 모두 본인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용된 구절에서 에리히 프롬의 질문처럼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한 데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다. 이는 밀고 당기기 같은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상대를 대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박부길은 그의 외로운 생만큼 자신을 사랑할 줄 몰랐던 인물이다. 동경하고 섬기는 존재로서, 상대를 신격화한 채 주는 애정은 폭력과도 같았고, 이에 자신도 크게 아프게 한 결과에 이른다. 사랑은 저절로 하게 되는 것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비롯된다 하더라도 그에 맞는 자연스러움에 대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주는지 모르고 쏟는 애정은 일방적이며 폭력과도 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화자가 박부길의 작품과 생애를 차례대로 교차하며 서술하는데, 작품으로 인용된 글들 역시 모두 창작품일텐데 그것 역시 참으로 좋았다. 밀도 있는 문장과 서사에 박부길이라는 작가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이승우 작가는 신학도이기도 했기 때문에 종교적인 색채를 띄는 부분에서는 더 묵직하게 와닿았던 것 같다. 


작가의 처녀작이라고 설명된 이 작품은 몇 차례 개정판의 서문에서 고백했듯이, 그야말로 작가가 애착을 많이 갖는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당연히 성글게 느껴지는 부분도 군데군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에 이런 묵직하면서도 심도 있는 작품을 창작해내는 작가는 역시 천재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추천 도서임에는 분명하나 청소년 추천도서라기엔 너무 어렵지 않은가 싶다. 물리고 물리는 문장의 연속의 진입장벽은 꽤나 높았으나, 확 와닿는 구절도 군데군데 자주 드러나기 때문에, 비유도 그렇고. 처음에 잘 들어가지 못하면 갇히는 듯한 느낌이 들거나 중도 포기하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두고두고 읽고 싶고, 계속해서 만나보고 싶은 작가라는 것이다. 



**기억에 남는 구절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은 쉽게 운명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20쪽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24쪽 (소설 속 박부길의 글에서)

행복과 불행은 하나의 관념이다. 관념은 육체가 없는 것이다. 또는 육체와는 상관 없는 것이다. 행복은 불행의 관념이 부재한 관념이며, 불행은 행복의 관념이 부재한 관념이다. 25쪽

모든 금령이 신성한 것은, 그것들이 징벌의 공포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유발하지 않는 법은 신성으로부터 멀다. 신성은 어디 있는가. 두려움 속에 있다. 아니, 두려움에 대한 예감 속에 있다. 그런데 그것은 왜 두려운가. 금지된 것은 사람을 끈다. 그것이 이유이다. 35쪽

범죄는 달콤하다. 그 달콤함은 범죄 행위의 결과로서의 급부때문이 아니라, 금지된 법을 범하고 있다는 순간의 팽만한 긴장에서 오는 정신의 오락 때문이다. 36쪽

진실이 반드시 사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사실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내가 어떤 글을 읽다가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으며, 그 붉은 줄은 여태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조이스를 읽음으로써 비로소 세상이 악몽임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나는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그것은, 그를 알기 전부터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바동거리는 악몽에 다름 아님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 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에게서 내 말을 발견한 것이다. 156쪽

우리는 운명을 보여 줄 수 없다. 그러나 운명적인 것은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다. 운명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발음하는 그 자리에 있다. 운명으로 인식하는 자리에, 그 순간에 그 사람의 운명이 깃드는 것이다. 삶은 인식과 해석의 장인 까닭이다. 170쪽

나는 나 자신이면서 나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하나의 단순한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행동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나 또한 그 수많은 나 가운데 하나의 나에 불과할 뿐이다. 175쪽

이름을 쓰는 것이 인식의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은 최악이 방법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이지 인식하기 위해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구별을 통하지 않고는 인식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이름을 사용한다. 183쪽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소설 속에 형상화된, 또는 소설 속에서 독자가 발견해 낸 작가이지, 현실 속의 작가가 아니다. (…) 우리는 한 작가의 소설로부터 구성해 낸 한 인물의 초상과 그의 삶을 너무 편리하게 현실 속의 작가와 동일시해 버리곤 한다. 나쁜 버릇이다. (…) 아무리 진지한 독자도 이 버릇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213쪽

사랑도 배워야 하는가. (…) 인간은 삶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습득하려고 한다. (…) 그런데 왜 사랑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사랑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처럼 수월한 것은 없다거나 사랑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따위의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다.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에 대한 자신의 능력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을 유쾌한 감정 놀음이나 우연한 몰입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우지 않을 때, 종종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 한다. 288-289쪽

고통을 통해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를 껴안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 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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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일 또 만나
윌리엄 맥스웰 지음, 최용준 옮김 / 한겨레출판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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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책, 상실과 상실이 만나





『안녕, 내일 또 만나』






윌리엄 맥스웰은 뉴요커의 편집자로 일했고, 다수의 현대 영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뽑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중 단연 많이 언급되는 부분은 앨리스 먼로가 극찬에 극찬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작가이기도 하다. 한 작가에게 이토록 많은 영감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작가라니, 더없이 궁금해진다.


나는 『그들은 제비처럼 왔다』이라는 작품으로 처음 접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때도 큰 감명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화려한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고, 덥덤한 어투로 인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세공해놓는 성실함도 좋았고, 아름다운 비유 역시 좋았다. 큰 재미를 바라고 읽는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인물들과의 거리감이 멀지 않아 공감할 수 있었고, 나에게서 있었던 상실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작가 자신이 겪은 상실에 대한 경험은 몇번이고 그 내면 속에서 아물지 않는 기억으로 회상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실에 대한 경험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전에 읽었던 작품에서도 그랬고, 이번에 읽은『안녕, 내일 또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상실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학자같기도 하다. 상처를 감추기 위해 회피하는 게 아니라 끈질기게 직면하고 있다는 점은 꼭 배우고 싶은 지점이기도 하다.



**




이야기의 구성은 요근래 흔히들 말하는 막장의 불륜 스토리를 포함한, 한 마을에 이웃으로 살았던 두 소년의 상실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룬다. 병으로 어머니를 잃었고, 다리를 잃은 형과는 심적인 연결고리를 잃었고, 아버지의 재혼을 통해 그마저도 상실로 느낄 만큼 아직 다 자리지 않은 소년의 상처. 그리고 그 소년 옆에 늘 거부없이 함께해주던 소년의 상처 역시 가족으로 인한 것이었다. 불륜관계로 인한 부모님의 이혼, 그리고 다시 한번 잃게 된 아버지. 


상실을 겪었지만 이를 밖으로 내색하지 않은 채, 우정을 나누는 두 소년은 많은 시간이 지나 우연히 다시 재회한 학교 복도에서 스쳐간 눈빛 사이로 지난 시간들에 대한 인사를 나눈다. 각자의 마음 속으로.

내일 다시 만나기로, 그러나 인사만 남은 아쉬운 이별이 되지만. 


이 작품 역시 덤덤한 어조로 여러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윌리엄 맥스웰의 대표작같은 작품이라고 했을 때 조금의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내겐 맨 처음 접한『그들은 제비처럼 왔다』이 더 매력적이고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추천하는 명작이 나에게는 별로 맞지 않는 건가, 싶어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지 않은가. 어쩌면 더 큰 기대로 보았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여러 인물이 등장한 만큼 비중조절이 잘 안 된 걸로 느껴져서 그런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소년의 상실을 다루기 위해 가족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인 '나'의 가족을 다루는 것에 비해 클레터스의 가족을 다루는 부분이 피상적으로 느껴졌다.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땐 시큰둥한 기분만 남았는데, 후에 다시금 생각해볼 수록 여러 가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상실과 관계성, 내일이면 여느 날처럼 똑같이 만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 우정.


묘한 여운이 일어서, 다시금 책장을 열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여러 번 곱씹어 볼수록 매력적인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중심화두처럼 가족, 그리고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샐린저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신기하게도 윌리엄 맥스웰은 실제로 샐린저의 편집자이기도 했다. 샐린저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탈고한 후 바로 차를 몰고 맥스웰에게 찾아가 그의 집 현관에 앉아 함께 원고를 검토한 유명한 일화도 있다고 하니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고, 이는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견고한 성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여운이 있는 그런 작품들을 쓴 작가들이 이미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게.



**




누군가에게는 용기와 영감을 줄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한없는 신뢰감을 얻었던 편집자이자 작가였던 맥스웰의 작품은 이만하면 이미 검증된 게 아닌가 싶다. 그의 작품이라면 믿고 읽을 수 있는, 윌리엄 맥스웰은 그런 작가이다. 좋은 기회로 다른 작품도 더 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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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붉게 피던 집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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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실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아름답게만 기억하려고 하는게 아닐까,



『라일락 붉게 피던 집』





일명 장르문학이라 칭하는 미스터리 소설을 국내작품으로는 거의 찾아보지 않았었다. 문단의 순문학의 자리가 확고할 뿐더러 뭔가 등한시 되는 분위기도 한몫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시장 구조도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일본의 장르문학이 거의 장악하다시피 차지하고 있는 구조가 자리매김한 듯한 형태이기 때문이다(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그야말로 숨 쉬듯 써내려 가는 듯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이미 수십 권이 번역 출간됐으며, 영화로도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미미여사의 작품도 많이 번역되고 있고 그 외에 요즘엔 라이트 노벨(우리나라로 치면 웹소설에 해당하는)도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작년에 국내 장르문학계에 획기적인 바람과 같은, 예상치 못한 수확은 단연『미스테리아』의 창간이다. 추리소설 전문 잡지라니, 국내 훌륭한 추리문학이 모두 모였다면 충분히 찾아볼 만한 것 아닌가. 우연히 읽은 이 잡지의 편집장? 편집위원의 인터뷰 중 추천작을 몇 작품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선택한 작품이 바로『라일락 붉게 피던 집』이다.



**



주인공은 잘나가는 대중문화 평론가이자 인기강사인 수빈. 수빈은 한 신문사의 의뢰로 어린 시절을 주제로 한 칼럼을 쓰기 시작한다. 1980년대 세울의 한 다가구 주택. 여러 세대가 한 집에 살았던 그 시절, 가난하지만 정겨운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는 수빈과는 다르게 아름답게 포장된 기억 속엔 상처뿐인 진실이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라일락 나무 옆에 있던 집이라 라일락 하우스라 불리었던 집. 추억을 회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수빈의 유년시절의 이야기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불러 일으킨다. 각 세대의 구성원마다 생동감 있게 그려지고, 인물간의 관계가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 집에서 옆집 가족의 사정을 헤아려 아이의 끼니도 챙겨주기도 하고, 정을 나누며 살아간 그 시대에도 단절이란 게 존재했단 게 흥미로웠다.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못보는 진실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시각으로 봐온 기억이기에 가능했던 부분일 수도 있지만, 새삼 인간관계의 오묘함을 본 듯하다.


리얼리즘을 살린 서사에 구성도 짜임새 있어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쉬운 점 역시 있다.




이건 저자의 취약점인 것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기껏 공들여 만든 작품에 생뚱맞은 로맨스랄까? 멜로의 삼각관계는 공감도 안 되고 재미도 떨어진다. 주인공인 수빈이 과거를 되짚어 보며, 라일락 하우스 이웃들을 만나며 진실을 알아가는 모습은 좋은데, 여자로서 수빈은 좀 이상하게 보였다. 제대로 설명을 잘 못하겠지만 히스테릭한 여자의 일면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유일하게 걸리는 부분이었다. 어떤 부분에선 섬세하지 못한 인물로 그려지기도 했으니 그냥 그러려니 넘길 수도 있다. 


사회의 한 단면을 예리한 시선으로 보여주면서도 미스터리적 요소도 갖췄다는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작품을 기대해볼 만한 것 같다. 국내에도 훌륭한 사회파 미스터리가 많이 있기를 바란다. 어쩌면 내가 아직 찾아내지 못한 것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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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 죽은 자의 일기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9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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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악의란 대체 무엇인가,




『악의 - 죽은 자의 일기』





최고위층들만 사는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투신한 여성 시체와 가족 관계로 보이는 늙은 부인의 시체, 그리고 시장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청렴결백 이미지의 국회의원. 사건종결 지시에도 끝까지 진실을 쫓는 형사, 마치지 못한 복수의 끝은 어떻게 될 것인가...대략적인 줄거리가 될 것 같다.


투신한 여성은 이미 죽은 이인데, 그녀는 홀로 복수를 준비하며 그 궤적을 일기에 남겼고, 서사 중간 중간 힌트처럼 부분적인 발췌가 들어가 있다. 말 그대로 죽은 자의 일기인 셈이다.



빠른 장면 전환을 위한 묘사, 치고 빠지는 식의 서술은 몰입도를 높혀준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그것도 입체적으로 다루지 못해 단면만 보여주는 드라마의 서술방식. 술술 잘 읽히긴 한다.


하지만 인물을 그리는 방식 역시 단순하다고 해야 할지, 평이하다고 해야 할지. 가해자와 피해자의 양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소모된 스토리 구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끝부분은 묘하게 미적지근한 마무리를 남기고 끝나니 괜히 찝찝하기만 하다.


가면 뒤에 가린 진짜 얼굴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있어서도 상투적이다. 독자를 납득시키지 못한 채 한 줄 설명로 넘어가고, 악인이니까 그에 맞는 나쁜 짓을 해야 하니까, 당위성 따윈 없이 그저 그에 맞는 행적을 그리는데 그치고 만다. 꽤나 두꺼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치밀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리며 신속한 서사를 뒤쫓아가며 읽기 바쁘다. 


이 소설이 만약 사회의 어두운 한 단면,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진 정치쇼의 뒷면을 그리며 스릴러적 재미까지 더하려는 야망이 있었던 거라면 절대 성공한 작품은 못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스릴러와 사회비판적 시선 둘 중 하나만 선택해서 하나라도 깊게 파고들어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흔한 연속극, 아침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자극적인 스토리, 복수 동기 역시 너무 빈약하고 극대화시키며, 비극성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고, 그저 장면을 보여주기 식으로 이어붙인 게 안타깝다.


피해자의 악의와 가해자의 악의를 구분짓기 위함인가. 악의가 피어나는 지점을 그리고자 했던 걸까.


기대작이라는 평을 보고 읽게 된 것 같은데, 글쎄...다음은 찾아보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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