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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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기까지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의 이면』





소설은 작가인 화자가 '박부길'이라는 작가의 생애를 다루는 글을 의뢰받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뚜렷한 친분관계도 없을 뿐더러 한 작가의 생애를 훑는 과정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화자는 박부길의 글과 인터뷰, 그리고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씩 큰 줄기를 형성해나간다. 


박부길은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갇혀 있다 자살을 한 아버지와 한없는 죄스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어머니, 그리고 버림 받은 상처를 안은 채 유년기를 보냈고,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기로 다짐하고선 떠난다. 아버지에 이어 판사가 되어 집안을 일으켜주길 바라는 기대를 버리고서.

중화집 배달일부터 시작해서 신학공부를 시작하기까지는 운명적인 만남, 즉 사랑이 큰 계기가 되었다. 


어둠이 빛이 되는 동굴같은 안식처, 자취방에서 책속으로 침잠하는 생활을 이어가는 그에게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그의 삶에도 '사랑'이라는 것을 안착할 수 있게 한 대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교회 선생님이었던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조심스러운 관계가 이어져 갔으나, 늘 위태롭고 위험하게만 흘러가고 만다. 박부길의 여러 작품 속에서 자신의 생애의 대한 일면들을 가린 듯 보여줬는데 이를 통해 그의 생의 일종의 불행함과 사랑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서툰 모습들, 상대를 올곧게 바라보지 못한데서 비롯한 예측가능한 이별의 전조들. 이는 자신을 상처주는 것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저 깊은 상처를 입히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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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이로 하여금 어느 부분에 중점을 두고 보느냐에 따라서 이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그리는 종교소설로 읽힐 수도 있으며, 사랑을 다루는 연애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

흐름에 따라 읽어나갔을 때는 실존적 성격의 질문이 주 화두가 되는 소설인가 싶었는데, 흘러가 다다른 것은 조금 다른 지점이었다. 이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까지의 여러 측면을 탐구한 소설처럼 느껴졌다. 박부길의 사랑의 실패로 끝나기 전에 그게 진정 사랑이었는가, 다시 묻고 싶을 만큼 처절하게 외로운 생에 안타까움이 더해지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데, 그건 모두 본인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용된 구절에서 에리히 프롬의 질문처럼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한 데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다. 이는 밀고 당기기 같은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상대를 대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박부길은 그의 외로운 생만큼 자신을 사랑할 줄 몰랐던 인물이다. 동경하고 섬기는 존재로서, 상대를 신격화한 채 주는 애정은 폭력과도 같았고, 이에 자신도 크게 아프게 한 결과에 이른다. 사랑은 저절로 하게 되는 것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비롯된다 하더라도 그에 맞는 자연스러움에 대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주는지 모르고 쏟는 애정은 일방적이며 폭력과도 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화자가 박부길의 작품과 생애를 차례대로 교차하며 서술하는데, 작품으로 인용된 글들 역시 모두 창작품일텐데 그것 역시 참으로 좋았다. 밀도 있는 문장과 서사에 박부길이라는 작가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이승우 작가는 신학도이기도 했기 때문에 종교적인 색채를 띄는 부분에서는 더 묵직하게 와닿았던 것 같다. 


작가의 처녀작이라고 설명된 이 작품은 몇 차례 개정판의 서문에서 고백했듯이, 그야말로 작가가 애착을 많이 갖는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당연히 성글게 느껴지는 부분도 군데군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에 이런 묵직하면서도 심도 있는 작품을 창작해내는 작가는 역시 천재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추천 도서임에는 분명하나 청소년 추천도서라기엔 너무 어렵지 않은가 싶다. 물리고 물리는 문장의 연속의 진입장벽은 꽤나 높았으나, 확 와닿는 구절도 군데군데 자주 드러나기 때문에, 비유도 그렇고. 처음에 잘 들어가지 못하면 갇히는 듯한 느낌이 들거나 중도 포기하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두고두고 읽고 싶고, 계속해서 만나보고 싶은 작가라는 것이다. 



**기억에 남는 구절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은 쉽게 운명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20쪽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24쪽 (소설 속 박부길의 글에서)

행복과 불행은 하나의 관념이다. 관념은 육체가 없는 것이다. 또는 육체와는 상관 없는 것이다. 행복은 불행의 관념이 부재한 관념이며, 불행은 행복의 관념이 부재한 관념이다. 25쪽

모든 금령이 신성한 것은, 그것들이 징벌의 공포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유발하지 않는 법은 신성으로부터 멀다. 신성은 어디 있는가. 두려움 속에 있다. 아니, 두려움에 대한 예감 속에 있다. 그런데 그것은 왜 두려운가. 금지된 것은 사람을 끈다. 그것이 이유이다. 35쪽

범죄는 달콤하다. 그 달콤함은 범죄 행위의 결과로서의 급부때문이 아니라, 금지된 법을 범하고 있다는 순간의 팽만한 긴장에서 오는 정신의 오락 때문이다. 36쪽

진실이 반드시 사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사실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내가 어떤 글을 읽다가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으며, 그 붉은 줄은 여태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조이스를 읽음으로써 비로소 세상이 악몽임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나는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그것은, 그를 알기 전부터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바동거리는 악몽에 다름 아님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 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에게서 내 말을 발견한 것이다. 156쪽

우리는 운명을 보여 줄 수 없다. 그러나 운명적인 것은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다. 운명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발음하는 그 자리에 있다. 운명으로 인식하는 자리에, 그 순간에 그 사람의 운명이 깃드는 것이다. 삶은 인식과 해석의 장인 까닭이다. 170쪽

나는 나 자신이면서 나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하나의 단순한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행동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나 또한 그 수많은 나 가운데 하나의 나에 불과할 뿐이다. 175쪽

이름을 쓰는 것이 인식의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은 최악이 방법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이지 인식하기 위해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구별을 통하지 않고는 인식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이름을 사용한다. 183쪽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소설 속에 형상화된, 또는 소설 속에서 독자가 발견해 낸 작가이지, 현실 속의 작가가 아니다. (…) 우리는 한 작가의 소설로부터 구성해 낸 한 인물의 초상과 그의 삶을 너무 편리하게 현실 속의 작가와 동일시해 버리곤 한다. 나쁜 버릇이다. (…) 아무리 진지한 독자도 이 버릇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213쪽

사랑도 배워야 하는가. (…) 인간은 삶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습득하려고 한다. (…) 그런데 왜 사랑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사랑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처럼 수월한 것은 없다거나 사랑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따위의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다.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에 대한 자신의 능력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을 유쾌한 감정 놀음이나 우연한 몰입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우지 않을 때, 종종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 한다. 288-289쪽

고통을 통해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를 껴안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 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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